<동행하는 작품>
알렉세예브나 소피아 황녀
이반 4세와 그의 아들
볼가강의 배 끄는 인부들
편집자주
페르메이르의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를 본 뒤 관련 책과 영화를 모두 찾아봤습니다. 잘 그린 건 알겠는데 이 그림이 왜 유명한지 궁금했습니다. 그림 한 장에 얽힌 이야기가 그렇게 많은지 몰랐습니다. 즐거웠습니다. 세상을 보는 눈이 조금은 달라졌다는 느낌도 받았습니다. 이 경험을 나누고자 글을 씁니다. 미술사에서 가장 논란이 된 작품, 그래서 가장 혁신적인 작품, 결국에는 가장 유명해진 작품들을 함께 살펴봅니다. 기사는 역사적 사실 기반에 일부 상상력을 더한 스토리텔링 방식으로 쓰였습니다.
갇힌 황녀
[헤럴드경제=이원율 기자]나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1689년, 루스 차르국(옛 러시아 제국) 모스크바의 노보데비치 수도원. 황녀 알렉세예브나 소피아(Alekseevna Sophia·1657~1704)가 되뇌었다. 밤새 쥐어뜯은 머리에는 딱지가 쌓였다. 꽉 깨문 입술에선 피고름이 맺혔다. 나는 포기하지 않아. 절대 포기하지 않아. 소피아는 허공에 대고 계속 중얼거렸다. 그녀는 갇혀있었다. 죽어야만 자유가 될 수 있는 유폐(幽閉)의 형벌을 받고 있었다. 사실상 사회적 사형 선고였다. 하지만 그녀는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다. 누군가 자기를 구출할 것으로 믿었다. 그렇게만 되면 옛 위세를 되찾을 수 있다고 확신했다. 그녀가 하릴없이 창문 너머를 보는 이유였다. 잠긴 문 앞을 한참 동안 서성이는 까닭이었다. 그런 꿈조차 품지 않으면, 그녀의 삶은 너무나 비참해질 터였다.
'내 이복동생 표트르 1세(Pyotr I·1672~1725)여. 내가 아무리 그랬다고 한들, 감히 너의 섭정(攝政·군주가 직접 통치할 수 없을 때 군주를 대신해 나라를 다스리는 행위)을 맡았던 누이를 이따위로 대하느냐.'
밤잠을 설칠 때면 이런 호통이 담긴 긴 편지를 썼다. 내가 또 한 번 이곳에서 탈출하는 그날, 기필코 네놈의 목을…. 그녀는 살벌한 문장을 이어갔다. 그러다가도 화가 용암처럼 밀려올 때면 주먹으로 책상을 쾅 쳤다. 그래도 분함이 사무치면 그냥 눈을 푹 감았다. 조국의 지도자로 올랐던 옛 영광을 곱씹었다. 영원할 수도 있었던 그 시절을 뒤늦게 음미했다. 소피아가 계획한 첫 번째와 두 번째 반란은 모두 실패했다. 그녀는 이게 다 그 꼬마 녀석, 표트르 1세에게 방심해서 진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제대로 맞붙기만 했다면 둘의 운명은 충분히 뒤바뀔 수 있었다고 생각했다. 소피아는 냉기 가득한 침대에 누웠다. 천장을 멍하니 쳐다봤다. 아직도 혼잣말은 멈추지 않았다. 한 번만, 딱 한 번만 더 내게 기회를. 그녀는 똑같은 말만 반복했다.
일리야 레핀(Ilya Repin·1844~1930)이 그린 '알렉세예브나 소피아 황녀' 속 위험한 눈빛의 소피아를 보면, 복수심에 타오른 그녀가 이런 나날을 보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소피아는 들끓는 화를 감추려고 하지 않는다. 증오에 찬 두 눈은 화염처럼 이글거린다. 걸어 잠근 팔짱에선 어디 끝까지 가보자는 식의 집념이 느껴진다. 날카로운 눈, 우람한 몸집 등 장군의 풍채를 갖춘 그녀는 앙갚음의 화신처럼 보인다. 다만, 그녀의 산발이 된 머리와 빛바랜 드레스에서는 숨길 수 없는 긴장감과 초조함도 느껴진다. 공간은 좁아 보인다. 곰팡이 같은 검은 때도 곳곳에 묻어있다. 한때 천하를 호령했던 황녀는 왜 이런 비참한 나날을 보내는가. 소피아의 영광과 몰락은 블록버스터 영화보다 극적이었다.
야망의 여인
시간을 7년가량 거슬러 1682년.
차르 알렉세이 미하일로비치(Alexei Mikhailovich·1629~1676)에게 권력을 물려받은 아들 표도르 3세(Fyodor III·1661~1682)는 고작 스물한 살 나이로 죽었다. 자식도 없었다. 그러니 다음 차르는 표도르 3세의 동생 몫이었다. 바로 밑 동생은 이반 5세(Ivan V·1666~1696)였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지도자가 되기에는 그의 몸이 너무 허약했다. 자연스럽게 이반 5세의 동생 표트르 1세에게 시선이 쏠렸다. 총명한 표트르 1세는 훌륭한 재목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도 걸리는 게 있었다. 그는 겨우 열 살이었다. 차르로 군림하기에는 어려도 너무 어렸다. 그러나 더 이상 후보도 없었다. 결국 열 살짜리 표트르 1세를 차르로 하되, 그가 성인이 되는 동안 섭정을 두기로 황족들 사이 뜻이 모였다.
그렇다면 한시적이지만 차르의 권한을 휘두를 수 있는 섭정은 누가 할 것인가.
이 또한 결정하기가 쉽지 않았다. 앞서 차르 알렉세이 미하일로비치는 생전에 두 번의 결혼을 했다. 그는 첫 번째 황후와 함께 직전 차르였던 표도르 3세와 허약한 이반 5세, 야망녀 소피아를 낳았다. 이어 두 번째 황후에게서 표트르 1세를 얻었다. 즉, 죽은 표도르 3세와 그의 왕좌를 물려받을 표트르 1세는 배다른 형제였다. 이게 문제였다. 첫 번째 황후의 밀로슬라브스키 가문은 "우리가 직전 차르 표도르 3세의 뜻을 이어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두 번째 황후의 나리쉬킨 가문은 "우리가 새로운 차르 표트르 1세의 시작을 함께하는 게 이치에 맞다!"고 받아쳤다. 귀족 회의는 표트르 1세를 앞세운 나리쉬킨 가문의 손을 들어줬다. 하지만 밀로슬라브스키 가문은 이에 승복하지 않았다. 특히 밀로슬라브스키 가문의 실세, 소피아는 죽어도 받아들일 수 없다며 맞섰다. 독을 품은 소피아가 찾아간 곳이 있었다. 그녀의 생각은 발칙했고, 움직임은 은밀했다.
당시 루스 차르국은 국가 심장부인 모스크바에 일종의 상비군을 두고 있었다.
일명 스트렐치(Streltsy)였다. 22개 연대, 약 2만3000명 규모까지 커졌던 이 군대는 명분만 있다면 언제든 도심 한복판에서 무기를 꺼내 들 수 있는 조직이었다. 소피아는 스트렐치 기지에 직접 방문했다. 소피아는 자신이 속한 밀로슬라브스키 가문과 어린 차르 표트르 1세를 미는 나리쉬킨 가문 사이 정쟁을 끝낼 방법은 하나뿐이라고 생각했다. 그것은 진짜 총칼이었다.
"…사실 나리쉬킨 가문이 자식 없는 표도르 3세를 독살했어. 그래서 고작 스물한 살의 어린 나이에 죽은 거야."
스트렐치 지휘관을 만난 소피아는 대뜸 거짓말을 했다. "그 말을 어떻게 믿습니까." "믿고 안 믿고는 자네들 마음대로 해. 다만, 그런 나리쉬킨 가문이 섭정을 쥐면 이 부대를 가만두지 않을걸? 명색이 차르를 지켜야 할 부대인데, 차르가 왜 죽었는지조차 모르고 있으니." 소피아는 이런 식으로 스트렐치에 공포를 심었다. 가짜 소문을 계속 퍼뜨렸다. 결국 스트렐치가 총칼을 쥐었다. 주입된 불안에 절여진 이들은 기어코 크렘린궁을 쳤다. 나리쉬킨 가문의 수장 이반 나리쉬킨을 죽여버렸다. 그를 따른 사람들도 죽이거나 내쫓았다. 그런 광기의 현장 한가운데, 소피아가 개선장군처럼 등장했다. 그녀는 크렘린궁의 여러 장식품을 판 돈을 한가득 쥐고 있었다. 이를 스트렐치에 뿌렸다. 그렇게 그들의 마음을 얻었다. 스트렐치를 등에 업은 소피아는 고대하던 섭정권을 쥘 수 있었다.
위험한 상상
차르의 권한을 쥔 소피아는 나름대로는 머리를 굴려가며 국정에 임했다.
그녀는 전쟁 준비에 박차를 가했다. 어수선한 내부가 결집할 수 있도록 외부에 적을 만드는 전략이었다. 그러나 무리한 행보에 역풍이 일었다. 그녀는 징집에 지나치게 집착했다. 군 창고를 채워야 한다며 특별세도 도입했다. 그녀는 사람들의 원성에 개의치 않았다. 제대로 한 건만 하면 잠잠해질 것이라고 확신했다. 폴란드와의 협상 후 키이우를 얻은 건 큰 성과였다. 하지만 그 이상 영광은 없었다. 외려 반대였다. 소피아는 나름의 명분을 갖고 1687년, 1689년 두 차례에 걸쳐 크리미아(Crimean) 원정에 나섰지만, 받아든 결과는 처참했다. 수만명이 죽고, 이보다 더 많은 이가 붙잡히고, 이보다 훨씬 많은 군 장비를 잃었다.
소피아는 분했다.
실패한 권력자가 흔히 그러하듯, 그녀 또한 한 번만 더 기회가 있다면 모두 만회할 수 있으리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다 보란 듯 성공하면 혹시 아는가. 그 꼬마 녀석 대신 진짜 차르로 추대받을 수 있을지. 문제는 시간이었다. 표트르 1세는 벌써 열일곱 성인이었다. …대업을 완수해야 할 내가 고작 전쟁놀이나 할 줄 아는 녀석에게 나라를 넘겨야 한다? 소피아는 거듭 자문했다. 그런데 잠깐. 어쨌건 지금은 내가 사실상 차르잖아? 소피아는 차츰 위험한 상상을 했다. 창백한 그녀의 얼굴에 혈색이 돌기 시작했다.
‘전쟁놀이’ 꼬마가 아니었다
한편 소피아에게 섭정을 맡긴 뒤 사실상 쫓겨난 표트르 1세는 그간 어떻게 지냈을까.
표트르 1세는 모스크바 근방 프레오브라젠스코예의 시골까지 밀려났다. 사실상 귀양과 다를 바 없었다. 그런 표트르 1세의 낙은 전쟁놀이였다. 표트르 1세는 주변 귀족들의 자제를 모아 소년병 연대를 꾸렸다. 차르가 직접 나섰기 때문일까. 어느새 규모는 수백명에 이를 만큼 커졌다. 놀이는 차츰 훈련으로 바뀌었다. 언젠가부터는 자연스럽게 실제 포와 군마까지 다뤘다. 소피아는 표트르 1세를 병정놀이에나 몰두하는 어린애로 봤지만, 사실 그는 군 통수권자로 더할 나위 없는 경험을 하고 있었다. 소피아는 소년병 연대를 마구간 지기들이라고 조롱했지만, 실제로는 이들 모두 젊은 차르에게만 충성하는 믿음직한 친위대로 크고 있었다.
소피아에게 보복할 날을 꿈꾼 표트르 1세는 성인이 되는 순간만 기다렸다.
그 해가 1689년, 소피아가 두 차례에 걸친 크리미아 원정을 실패로 끝낸 시기였다. 표트르 1세는 소피아가 통치권을 순순히 주지 않을 것을 알고 있었다. 소피아의 들끓는 야망을 누구보다 잘 인지하고 있었다. 표트르 1세는 재빨리 군대를 꾸렸다. 손발 맞는 소년병 연대를 앞세웠다. 숨죽여 살던 표트르 1세 지지파 귀족과 외국 용병단도 합세했다. 진짜 차르의 다듬어진 병력 앞에 소피아의 스트렐치는 추풍낙엽처럼 무너졌다. 그간 따습고 배부른 세월을 누린 스트렐치는 구식 조직이 돼 있었다. 소피아의 야심은 허망한 백일몽이었다. 권력 싸움에서 패한 소피아는 노보데비치 수도원으로 끌려갔다. 그녀의 세상은 섭정권을 휘둘렀던 7년 천하로 끝나는 듯했다.
그런데, 역시나 소피아도 보통은 아니었다.
9년이 흐른 1698년, 소피아는 다시 반란을 일으켰다. 당시 표트르 1세는 영국과 프랑스 등 서유럽에 큰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낙후된 조국에 이들의 문물을 들여 개화를 해볼 요량이었다. 표트르 1세는 범국가적 서유럽 사절단을 꾸렸고, 그 또한 일원이 돼 유학길에 올랐다.
소피아는 차르가 자리를 비운 이때를 노렸다.
서유럽에 홀린 표트르 1세가 나라를 통째로 팔아먹으려고 한다는 식의 명분을 짰다. 더는 잃을 게 없다고 생각한 스트렐치가 다시 옆에 섰다. 하지만 소피아의 반란은 이번에도 허무하리만큼 쉽게 막혔다. 재빨리 귀국한 표트르 1세의 정예군 앞에서 소피아의 구식 군대는 또 무너졌다. 소피아는 다시 노보데비치 수도원에 갇혔다. 감시가 더 엄격해졌다. 이제 그녀는 부활절 예배를 제외하면 수도원 수녀들조차도 만나지 못했다.
신화처럼 쓰인 기록에 따르면, 2차 반란을 막은 표트르 1세는 죄질이 무거운 백여명의 가담자를 속옷 차림으로 줄 세웠다.
그러고는 직접 도끼를 들고 하나하나 목을 쳤다. 소피아의 최측근 세 명은 그녀가 갇힌 수도원 정원에서 처형했다. 나아가 잘린 목을 소피아의 방 창가에 걸도록 지시했다. 표트르 1세가 이번 일에 대해 얼마나 분노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소피아는 여전히 패기를 꺾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에게 다시 기회가 올 일은 없었다. 1704년, 소피아는 15년의 유폐 생활 끝에 비참하게 눈을 감았다.
서글픈 그녀만의 세상
레핀은 두 번의 반란을 모두 실패한 소피아를 상처 입은 암호랑이처럼 그렸다.
여전히 야성을 잃지 않은 그녀는 세 번째 반란의 기회를 포기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그렇기에 여전히 섭정으로의 위엄, 황녀로서의 존엄을 놓지 않고 있다. 잠자코 있어봤자 기다리고 있는 건 처참한 말로뿐이라는 걸 그녀 또한 알고 있었으리라.
하지만 그림 안팎에 있는 모든 이는 소피아가 헛된 희망을 품고 있다는 걸 알고 있다.
그림 속 소피아를 피해 멀리 떨어진 몸종은 이미 그녀를 미친 사람처럼 보고 있다. 죽은 채 창밖에 매달린 소피아의 최측근 또한 이제는 죽음 말고는 답이 없다는 걸 알려주는 듯하다. 오직 소피아만이 자기 미래를 모른다. 그렇기에 이 그림은 강렬하면서도 서글프게 다가온다.
울림 주는 화가
러시아에서 출생한 레핀은 실제 역사의 한 장면을 밀도 높게 그리기로 정평이 난 화가였다.
레핀은 1844년 당시 러시아 영향권에 속한 추구예프에서 태어났다. 군인 집안에서 자란 그는 의외로 그림에 재능을 보였다. 1863년,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이주한 레핀은 이듬해부터 그곳에 있는 미술 아카데미에 다녔다. 거기서 평생의 스승 이반 크람스코이(Ivan Kramskoy·1837~1887)를 만났다. "그림에는 메시지가 있어야 해. 그저 화사하기만한 그림으로는 부족해." 레핀은 크람스코이의 이 가르침을 깊이 간직했다. 1871년, 졸업 작품전에서 금상을 탄 레핀은 6년간 해외 유학을 갈 수 있었다. 그가 짐을 푼 곳은 프랑스 파리였다. 때마침 화려한 인상주의의 꽃이 몽마르트 언덕에서 피어나고 있었다. 레핀도 처음에는 이 흐름에 섞이려고 해봤다. 하지만 스승 크람스코이의 가르침 탓인지, 끝내 큰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1876년, 그는 유학 기간을 다 채우지 않고 돌연 귀국했다.
예쁜 그림만 의미 있는가.
크람스코이의 뜻처럼 예쁘지는 않지만 보면 잊을 수 없는 그림, 화려하지는 않지만 울림을 주는 그림도 의미가 있다. 서유럽을 돌고 온 레핀의 결론이었다. 돌아온 레핀은 역사를 소재로 붓을 쥐었다. 과거의 가장 충격적인 순간을 골라 꾸밈없이 그렸다. 그렇게 해 먼저 보는 이의 뇌리에 박히게 하고, 나아가 인간과 삶에 대한 사색에 잠기게끔 이끌었다. '알렉세예브나 소피아 황녀'도 그런 마음으로 그린 것이었다. 과거를 잊지 못한 그녀는 여전히 위엄 있게 서 있지만, 그런 모습이 외려 그녀를 더 초라하게 만든다. 레핀의 노골적 묘사는 보는 이들 중 일부가 졸도할 만큼 깊은 인상을 줬다. 이와 함께 권력의 무상함을 되짚도록 유도했다.
‘러시아 3대 예술가’로 군림
레핀은 비슷한 의도로 '이반 4세와 그의 아들(1581년 11월 16일)'도 그렸다.
소피아와 표트르 1세가 맞붙기 한 세기 전 루스 차르국의 군주 이반 4세(Ivan IV·1530~1584)는 절대 왕정의 기반을 닦은 지도자였다. 번개처럼 빛나는 군주, 벼락처럼 두려운 군주라는 뜻에서 뇌제(雷帝)로도 불렸다. 그런데, 힘에 도취한 이반 4세는 차츰 폭군의 면을 보이기 시작했다. 차곡차곡 쌓이던 그의 광기는 자기 아들 앞에서 폭발했다. 사소한 다툼은 감정싸움으로 비화했고, 결국 쇠지팡이로 아들의 관자놀이를 내리쳤다. 맹세컨대 그럴 생각까지는 없었다. 하지만 픽 쓰러진 아들은 경기를 일으키다가 그대로 죽고 말았다. 정사(正史) 아닌 소문에 가까운 설이지만, 그 시절 상당수 사람은 이를 실화처럼 믿었다. 레핀의 그림 속 이반 4세는 뇌제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공포에 질려있다. 튀어나올 듯 커진 동공, 피가 콸콸 쏟아지는 상처를 틀어막고 있는 손에서 느껴지는 건 슬픔과 후회뿐이다. 그러나 이미 늦었다. 제아무리 절대 권력의 군주라고 해도, 제아무리 찰나의 광기에 씌었다고 해도 저지른 일은 돌이킬 수 없다. 레핀의 극적인 표현은 그 간단한 인간의 한계를 다시 떠올리게끔 한다.
레핀은 19세기 러시아 제국을 살아가는 민중의 현실을 그리는 일에도 손을 뻗었다.
그의 그림 '볼가강의 배 끄는 인부들'은 당시 러시아 민중들의 사회상이 담긴 대표적 작품으로 꼽힌다. 인부들이 볼가강에 뜬 배를 뭍으로 끌고 가고 있다. 가난과 질병 등 저마다의 비극을 안고 있는 듯한 이들은 억지로 나아가고 있다. 푼 돈을 벌기 위해 움직이는 이들의 모습에서 체념과 무기력함이 느껴진다. 반복되는 혁명과 전쟁에서 겨우 살아가는 평민의 삶을 거침없이 표현한 것이었다.
레핀은 이처럼 깊이 있는 그림으로 황족과 서민 모두에게 사랑을 받았다.
그는 1894년부터 1907년까지 상트페테르부르크 미술 아카데미 교수로 교편을 잡았다. 그 사이 러시아 국가 의회 100주년을 기념한 대형 작품을 의뢰받아 마지막 대작 '1901년 5월 7일 국가 의회 100주년 기념회의'를 선보였다. 레핀은 생의 말년을 핀란드 쿠오칼라에서 보냈다. 그는 오른손 관절에 문제가 생긴 후부터 활발한 활동을 멈췄다. 레핀은 1930년, 그곳에서 조용히 생을 마감했다. 86살 나이였다. "러시아 역사에서 예술가를 딱 세 명 꼽는다면 문학은 톨스토이, 음악은 차이콥스키, 미술에서는 레핀이다." 러시아 대문호 안톤 체호프의 평이었다. 당시 그의 이 말에 그 누구도 토를 달지 못했다.
〈참고자료〉
일리야 레핀, 천 개의 얼굴 천 개의 영혼, 일리야 레핀, I. A. 브로드스키, 써네스트
표트르 대제, 제임스 크라크라프트, 살림
표트르 대제, 린지 휴스, 모노그래프
눈과 피의 나라 러시아 미술, 이주헌, 학고재
Ilya Repin and the World of Russian Art, Valkenier, Elizabeth , Nutt, Tim , Bale, Chris, Columbia University 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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