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금리 장기화에 대출·회사채 상환
9월 기업대출 11.3조 급증…이자도 못내는 기업 40%
[헤럴드경제=문혜현 기자] 기업들이 밀린 빚을 갚기 위해 예금을 줄줄이 해지하면서, 잔액 10억원이 넘는 예금이 10년 만에 감소했다.
기업들은 최근 회사채 금리 상승에 따라 은행으로부터 자금을 빌려왔는데, 이젠 기업대출 금리마저 올라 늘어난 이자를 감당하기 어려워진 것이다. 올해 들어 9월 말까지 기업대출 잔액은 1238조2442억에 육박한 상태다.
대기업 정기예금 해지에 10억 예금 ‘쑥’ 빠져
1일 한국은행에 따르면 지난 6월 말 기준 은행의 저축성예금(정기예금·정기적금·기업자유예금·저축예금) 중 잔액이 10억원을 초과한 계좌의 총 예금은 772조4270억원이었다.
이는 지난해 말(796조3480억원) 보다 3.0%(23조9210억원) 줄어든 수준이다. 10억원 초과 고액 예금 잔액은 2018년 상반기 500조원, 2019년 하반기 600조원, 2021년 상반기 700조원을 돌파하며 증가세를 보였지만, 올해 들어 감소했다.
고액 예금 잔액이 뒷걸음질 친 것은 2013년 6월 말 379조5800억원에서 같은해 12월 말 362조8260억원으로 줄어든 이후 약 10년 만이다. 전년 대비 증가율로 보면 2021년 말 13.8%에서 지난해 말 3.5%로 대폭 축소됐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정기예금 잔액 감소가 전체 잔액 감소에 영향을 미쳤다. 지난 6월 말 기준 10억원 초과 정기예금 잔액은 538조816억원으로 지난해 말보다 25조7300억원(4.6%) 줄었다.
같은 기간 10억원 초과 기업자유예금 잔액은 219조8900억원에서 222조5850억원으로 늘고, 저축예금 잔액은 11조5250억원에서 10조5380억원으로 감소했다.
기업자유예금은 법인이 일시 여유자금을 은행에 예치하는 상품이고, 저축예금은 입출금이 자유로운 결제성 예금을 말한다.
은행 관계자는 “고금리가 지속되면서 기업들이 기존에 유지해오던 정기예금 만기 도래 시 재가입 없이 해지해 차입금을 상환한 사례가 상당수 있었다”고 말했다.
다른 관계자도 “기업들이 정기예금에서 자금을 인출해 여신 상환이나 회사채 상환 용도로 사용하고 있다”며 “대출 금리를 감당할 수 없어 디레버리징(부채 축소)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일각에선 고액 정기예금 대부분을 차지하는 삼성그룹과 현대차그룹의 고액 예금 계수가 감소한 영향이 큰 것으로 보인다는 분석도 나온다.
삼성전자가 지난 2월 삼성디스플레이로부터 20조원을 차입하면서 삼성디스플레이의 기존 예금이 전 금융기관에서 감소한 것으로 알려졌다. 또 현대차는 미국 금리 상승 영향으로 수출입 거래 시 이자율에 해당하는 환가료가 오르면서 수출 신용장 매입 거래가 줄어든 것으로 전해졌다. 이후 외화를 원화로 환전해 정기예금에 가입했는데, 이 잔액이 감소했다는 설명이다.
9월 기업대출 증가율 11.3조…금리 5.27% 달해
최근 기업대출은 회사채 금리 상승과 가계대출 억제에 따른 은행의 공격적인 영업으로 급증하고 있다. 한은에 따르면 예금은행의 9월 말 기준 기업대출 잔액은 1238조2442억원으로 한 달 만에 11조3000억원이나 불어났다.
이는 지난해 10월(13조7000억원) 이후 11개월 만에 가장 큰 증가폭이자, 9월 기준으로는 한은이 통계를 작성하기 시작한 2009년 이래 사상 최대치다.
대기업은 제조업을 중심으로 자금수요 증가세가 이어져 대출 증가 규모가 8월 2조9000억원에서 9월 4조9000억원으로 2조원 가량 늘었다. 개인사업자를 포함한 중소기업 대출 규모도 같은 기간 5조2000억원에서 6조4000억원으로 뛰었다.
윤옥자 한은 시장총괄팀 차장은 이와 관련해 “일부 시중은행들이 10월에도 기업 대출 영업에 적극 나서고 있고 중소기업 대출 같은 경우 자금 수요도 꾸준히 발생하고 있어 기업대출 증가세는 지속될 것 같다”고 말했다.
문제는 고금리 장기화 가능성에 채권시장이 출렁이면서 은행 대출 금리도 덩달아 오르고 있다는 점이다.
한은에 따르면 9월 중 신규취급액 기준 기업대출금리는 5.27%로, 8월 보다 0.06%포인트 커졌다. 잔액기준으로도 5.28%로 전월보다 0.01%포인트 소폭 올랐다.
이에 따라 벌어들인 돈으로 이자마저 내지 못하는 기업은 더 늘어날 것으로 예상된다. 한은에 따르면 지난해 비금융 영리 법인기업 중 이자보상비율이 100% 미만인 기업 비중은 42.3%로, 2009년 관련 통계 작성 이후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다. 이자보상배율은 영업이익을 금융비용(이자비용)으로 나눈 것으로, 이자보상배율이 100%이면 영업이익으로 이자를 내고 나면 남는 돈이 없다는 뜻이다.
전체 기업의 여유도 줄었다. 지난해 말 기준 비금융 영리 법인 기업 전체의 이자보상비율은 348.6%로 전년(487.9%) 대비 139.3%포인트 크게 하락했다. 이자를 내고 남는 돈이 대폭 줄어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