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행하는 작품>
가셰 박사의 초상
편집자주
페르메이르의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를 본 뒤 관련 책과 영화를 모두 찾아봤습니다. 잘 그린 건 알겠는데 이 그림이 왜 유명한지 궁금했습니다. 그림 한 장에 얽힌 이야기가 그렇게 많은지 몰랐습니다. 즐거웠습니다. 세상을 보는 눈이 조금은 달라졌다는 느낌도 받았습니다. 이 경험을 나누고자 글을 씁니다. 미술사에서 가장 논란이 된 작품, 그래서 가장 혁신적인 작품, 결국에는 가장 유명해진 작품들을 함께 살펴봅니다. 기사는 역사적 사실 기반에 일부 상상력을 더한 스토리텔링 방식으로 쓰였습니다.
‘가셰 박사’의 실종
[헤럴드경제=이원율 기자]"7500만 달러!"
1990년 5월 15일, 오후 7시 45분. 한 남성의 목소리가 미국 뉴욕 크리스티 경매장에서 울려퍼졌다. "누가 저렇게나 값을 올려?" 사람들이 수군댔다. 아무도 예상 못한 충격적인 규모의 돈이었다. "셋, 둘, 하나…. 경매 번호 21번, 빈센트 반 고흐의 '가셰 박사의 초상'은 7500만 달러로 낙찰됐습니다." 망치 소리가 울리자 객석에선 탄성과 탄식이 함께 터져나왔다. 경매가 시작되고 5분 만에 벌어진 일이었다. 일본 기업 다이쇼와제지(현 일본제지)의 명예회장 사이토 료헤이는 그렇게 반 고흐의 그림을 손에 쥐었다. 10% 수수료를 더하면 료헤이가 내야 할 돈은 8250만 달러(당시 약 900억원)였다. 당시 미술품 경매 사상 최고가였다. 그간 반 고흐의 그림 중 가장 비싸게 팔린 건 붓꽃(5300만 달러)이었는데, 이 작품과도 3000만 달러 가까이 차이를 낸 값이었다. 그날 경매장이 발칵 뒤집힌 이유였다.
다음 달 가셰 박사의 초상은 도쿄 긴자의 고바야시 화랑으로 왔다.
료헤이는 먼 길을 건너온 이 그림을 쓱 살펴봤다. 그게 다였다. 그는 이를 곧 화랑의 비밀 창고에 넣었다. 빛의 양과 습도를 조절하는 장치, 삼엄한 보안 체계를 갖춘 곳이었다. 1년에 한 번, 직원들이 상태를 점검할 때 말곤 인기척을 느낄 수 없는 공간이었다. 가셰 박사의 초상은 모습을 감췄다. 그림을 팔아달라, 그게 싫다면 보여주기라도 해달라는 모든 요구는 묵살됐다. 그림을 가둬놓은 료헤이는 3년 뒤 재차 세간의 이목을 끌었다. 일본 사업계의 거부 중 거부로 꼽힌 료헤이는 정치인에게 거액 뇌물을 준 죄로 징역 3년, 집행유예 5년 형을 선고받았다. 일본의 거품경제(Economic bubble) 붕괴와 함께 그의 여러 사업도 위기를 맞았다. 1996년, 료헤이는 재기하지 못한 채 여든 살 나이로 결국 사망했다. 미술계는 독보적인 '큰 손'이었던 그의 부고에 애도를 표했다. 이와 함께 약간의 기대도 품었다. 료헤이가 묶어둔 가셰 박사의 초상이 다시 경매장에 풀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런 일은 없었다.
1999년, 반 고흐 특별전을 준비하던 미국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은 작정하고 가셰 박사의 초상을 추적했다. 세계 5대 미술관 중 한 곳인 이 미술관마저 끝내 소재를 알아내지 못했다. 기를 쓰고 찾았는데도 없다면, 설마 정말…? 미술계는 죽기 전 료헤이가 남긴 말을 다시 떠올려야 했다. 차마 생각하기 싫은 최악의 시나리오도 생각해야 했다. 지난 1991년 료헤이가 유언처럼 남겼다는 경악스러운 말, 그것은 "내가 죽거든 반 고흐의 그림을 관에 넣고 화장해달라"는 것이었다.
료헤이가 가셰 박사의 초상에 이렇게까지 광적으로 집착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런가 하면, 미술계는 이 그림이 어떤 가치를 갖기에 이렇게까지 다시 보고 싶어 하는 걸까. 답을 알기 위해선 반 고흐의 말년을 돌아봐야 한다.
반 고흐 사색의 결정체
"빈센트? 어이, 빈센트!"
"…네?"
1890년 6월, 프랑스 파리 근교인 오베르 쉬르 우아즈. 반 고흐가 눈의 초점을 찾았다. "몸이 좋지 않은가? 붓질을 하다 말고 한참을 가만히 있어서 불러봤소." "잠깐 딴생각을 했어요." "혹시나 어지럽거나 하면 감추지 말고 말해야 하오." "정말 괜찮습니다." 반 고흐는 그의 주치의 폴 가셰의 말에 연신 고개를 저었다. "계속 그릴게요. 그대로 자연스럽게 있어주세요." 그는 다시 붓끝을 캔버스에 댔다. 샛노란 햇살이 창문을 타고 쏟아지는 날이었다. 가만히 있어도 들꽃 향을 맡을 수 있는 시골 동네였다. 조용하고 평화로운 이날, 반 고흐는 가셰의 모습을 화폭에 담고 있었다.
사실 반 고흐는 가셰를 처음 볼 때부터 그의 그림을 그리고 싶었다.
반 고흐는 가셰가 어쩌면 자기보다 더 불안정한 사람이라는 걸 바로 눈치챌 수 있었다. 그렇기에 다른 사람보다 더 친근했고, 화가로서 특별한 호의를 베풀고 싶었다. 일종의 동지 의식이었다. 서른일곱 살의 반 고흐는 외롭고, 괴롭고, 지쳐있었다. 1년 반 전, 폴 고갱과 싸우다 자기 한쪽 귀를 자르는 등 끝내 광기를 폭발시킨 후부터 계속 이랬다. 반 고흐는 사고를 친 직후 스스로 생 레미 정신병원에 입원했다. 안정을 찾기 위해 나름 노력했다. 가슴이 터질 듯 답답할 때는 가장 좋아하는 붓질에 온 힘을 쏟았다. 요양하면서도 '삼나무가 있는 밀밭', '별이 빛나는 밤' 등 대작을 쏟아낼 만큼 생의 의지가 강했다. 그러나 1년이 넘도록 발작은 멈추지 않았다. 이대로는 영영 내면의 소용돌이를 잠재울 수 없을 것 같았다.
반 고흐는 고민 끝에 카미유 피사로를 찾았다.
그 시절 인상주의 화가들의 대부였던 그에게 조언을 구했다. 짐승처럼 우는 반 고흐에게 피사로가 소개한 사람이 가셰였다. "오베르로 가보시오. 괴짜 귀스타브 쿠르베부터 독불장군 폴 세잔 등 여러 예술가를 도운 의사가 살고 있소." 절박한 그에게 이 말은 마지막 동아줄이었다. 오베르로 간 반 고흐는 가셰의 어두침침한 집 앞에 설 때부터 기시감을 느낄 수 있었다. 그를 보자 그 감정은 더 진해졌다. 밝은 척하는 표정, 들뜬 듯 크게 움직이는 몸동작, 과장된 웃음소리…. 누군가는 그런 가셰를 쾌활한 사람으로 볼 것이었다. 하지만 반 고흐는 알 수 있었다. 이 사람도 태생적인 슬픔을 안고 있다는 걸. "나는 형제 같은 진정한 친구를 찾았어. 우리는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서로 너무 닮았어." 이쯤 반 고흐는 여동생 빌헬미나에게 이런 편지를 썼다. 가셰 또한 반 고흐를 각별히 여겼다. 가셰는 반 고흐를 단순한 환자처럼 대하지 않았다. 그가 찾아오면 하던 일도 제쳐놓고 두 팔 벌려 환영했다. 반 고흐는 자신의 광기를 피하지 않는 가셰에게 보답하고 싶었다. 그래서 초상화를 제의한 것이었다.
가셰는 얼굴을 손에 괸 채 생각에 잠겨 있었다.
자기만의 세상에 빠진 가셰에게서 더는 가식을 느낄 수 없었다. 두 눈은 공허했고, 표정은 침울했다. 탁자 위에는 꽃 디기탈리스가 놓여 있었다. 정신병 치료용으로 쓰인 약재였다. 노란색 표지의 책 두 권은 프랑스의 형제 소설가 에드몽·쥘 공쿠르가 쓴 '제르미니 라세르퇴'와 '마네트 살로몽'이었다. 두 책의 주제는 정신 질환과 예술이었다. '가셰 박사도 많은 상실과 이별을 겪어왔군. 이 사람 또한 외롭고, 괴롭고, 지쳐있어.' 반 고흐는 가셰를 그리면서 생각했다. 차츰 자기 얼굴이 가셰의 얼굴 위에 떠다녔다. 어느 순간부터는 가셰가 아닌 자화상을 그리는 듯한 느낌도 들었다. '보면 볼수록 나와 닮았어.' 점점 더 선을 긋기가 어려워졌다. 색을 칠하기도 망설여졌다.
"…이봐, 빈센트! 정말 괜찮은 게 맞는가?"
가셰가 반 고흐를 다시 불렀다. 독백에 빠진 반 고흐는 또 한참 동안 굳어있었다. "오늘은 그만하고 둘 다 쉬어야겠어." 가셰가 자리를 툭툭 털며 일어섰다. 반 고흐만큼 가셰도 기진맥진하고 있었다. 반 고흐는 원래 몇 시간 만에 그림 한 점을 그릴 수 있었다. 그런 반 고흐가 가셰 박사의 초상을 그릴 때는 마지막 점을 찍기까지 근 2주일의 시간을 썼다. 그만큼 공을 더 들이고, 혼을 더 실은 것이었다. 두 사람의 사색이 함께 담긴 결정체로 봐도 무방했다. "침울한 표정을 짓는 가셰 박사의 초상화를 그렸어. 누가 보면 인상을 잔뜩 찌푸리고 있는 듯 보이겠지. 하지만 나는 옛날의 정적인 초상화보다 오늘날의 초상화가 훨씬 생생한 표정과 감정을 드러낼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어." 그림을 완성한 반 고흐가 남동생 테오에게 쓴 글이었다.
반 고흐는 꺽꺽 소리를 내며 울었다.
그간 잠잠하던 발작이 또 고개를 든 날, 애써 쌓아올린 모든 희망이 불타 사라지는 듯했다. 반 고흐의 몸 상태는 가셰 박사의 초상을 다 그릴 때쯤부터 더 나빠질 수 없을 만큼 나빠져 갔다. 그는 그해 7월27일, 화구를 챙겨 여관 밖으로 비틀대며 나갔다. 그리곤 권총에 맞은 채 피를 쏟으며 돌아왔다. 여관 사람들이 의사 둘을 불렀다. 복부에 박힌 총알을 간신히 뺄 수 있었으나 그 이상 치료는 어려웠다. 입에 담배를 문 반 고흐는 착실하게 죽어갔다. 총상을 입은 뒤 이틀 후인 7월 29일 새벽 1시 30분, 반 고흐는 영영 눈을 감았다. 그렇게 가셰 박사의 초상은 반 고흐의 초상화 중 최후 작품이 됐다.
‘유랑’의 그림
반 고흐의 죽음 후 가셰 박사의 초상은 기구한 운명의 소용돌이에 휘말렸다. 국경을 숨 가쁘게 넘나들고, 수많은 사람의 손을 탔다. 그림 한 점에 당대의 사회상이 오롯이 스며들게 됐다.
시작은 반 고흐의 모든 그림을 상속받은 테오였다. 반 고흐가 죽고 1년 후인 1891년, 테오마저 세상을 떠나자 소유권은 그의 부인 요한나에게 넘어갔다. 반 고흐에게 매몰차게 대했음을 그가 죽고 난 후에야 후회했던 요한나는 그림 한 점도 함부로 팔지 않았다. 요한나는 가셰 박사의 초상 등 반 고흐의 그림을 업고 자기 고향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으로 갔다. 그리고 1893년, 덴마크 코펜하겐에서 협조 요청을 받았다. 반 고흐와 고갱의 그림을 한 공간에 전시하고 싶다는 공문이었다. 이번 일로 반 고흐 최후의 초상화는 완성되고 3년 만에 세상 빛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뿐이었다. 몇몇 비평가들의 찬사도 있었지만, 대부분 대중의 반응은 여전히 시큰둥했다.
이쯤부터 요한나는 생활고를 겪었다.
요한나는 화상을 통해 반 고흐의 그림 중 일부를 팔겠다는 뜻을 보였다. 1897년, 요한나는 화상 앙브루아즈 볼라르를 통해 가셰 박사의 초상을 팔았다. 새로운 주인은 화가 겸 수집가 알리스 루벤이었다. 외부인으로는 최초로 소유권을 얻은 것이었다. 그녀는 이 그림을 300프랑(당시 약 58달러)을 주고 샀다. 반 고흐가 아직 재평가를 받기 전이라고 해도 눈에 띄게 싼 가격이었다. 시골에 사는 웬 맥빠진 노인의 초상화로 여겨져 더욱 평가절하됐을 가능성이 컸다. 루벤은 가셰 박사의 초상을 들고 덴마크로 넘어갔다. 정확한 시점은 알 수 없지만, 루벤은 1904년 전에 화가 겸 디자이너였던 모겐스 발린에게 이 그림을 넘겨줬다. 발린도 곧 이 그림을 팔 결심을 했다. 미술 거래가 가장 활발한 파리에 내놓으면 좋겠지만, 아직도 파리지앵은 반 고흐에 별 관심이 없는 듯했다. 그래서 택한 곳이 독일 베를린이었다. 발린의 감은 적중했다. 관심을 보이는 이가 있었다. 수집가 파울 카시러였다. 그는 2477마르크(당시 약 400달러)를 지불했다. 여전히 높은 값은 아니지만, 7년 전과 비교하면 7배가량 오르기는 했다. 같은 해, 카시러는 해리 케슬러에게 이 그림을 다시 팔았다. 케슬러는 바이마르 내 '미술 및 공예 박물관'의 관장이었다. 케슬러는 이를 자기 저택으로 챙겨갔다. 개인 감상용으로 걸어뒀다. 숨 가쁘게 움직이던 이 그림은 그렇게 새로운 안식처를 찾는 듯했다.
케슬러는 가셰 박사의 초상을 이곳에서 썩히기에는 영 아깝다고 생각한 걸까.
6년이 흐른 1910년, 케슬러는 반 고흐 관련 전시를 한 적 있는 수집가 외젠 드뤼에에게 이 그림을 팔았다. 당시 함께 판 그림은 폴 고갱의 '지켜보고 있는 망자의 혼(마나오 투파파우)'이었다고 한다. 두 작품값으로 5400달러를 받았다. 케슬러가 둘을 같은 가치로 놓고 넘겼다면 가셰 박사의 초상은 2700달러가 되는데, 그가 산값보다 7배 가까이 높은 가격이었다. 얼마 안 돼 영국 출신의 화가 겸 평론가 로저 프라이가 드뤼에의 화랑에서 가셰 박사의 초상을 보고 깊은 인상을 받았다. 그 해 영국 런던에서 전시를 할 참이었던 프라이는 이 그림을 빌리기로 했다. 같은 해 11월 8일, 런던에서 '마네와 후기 인상주의자' 전시가 열렸다. 가셰 박사의 초상은 당당하게 내걸렸다. 하지만 런던 또한 반 고흐의 요동치는 화혼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였다. "뱃멀미에 시달리는 노인 같다"는 등 원색적인 비난이 이어졌다.
결국 가셰 박사의 초상은 런던에서 자리 잡지 못한 채 다시 독일로 팔려갔다.
"영국 사람들은 20년쯤 흐르면 렘브란트의 그림 값 정도를 내야 반 고흐의 작품을 살 수 있다는 걸 모르는군. 그때가 되면 땅을 치고 후회할 테지." 아쉬움을 감추지 못한 프라이의 조소였다.
나치 손아귀에서 벗어나다
돌고 돌아 가셰 박사의 초상의 소유권은 독일 프랑크푸르트 슈타델 미술관 관장인 게오르그 슈바르젠스키에게 넘어갔다.
전시장을 찾은 대부분이 이 그림에 손가락질할 때 2만 프랑(당시 약 3900달러)을 주고 산 것이었다. 이젠 첫 거래 금액 약 58달러와 비교하면 67배 넘게 뛰었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 때마침 미술관에 있던 덕에 가셰 박사의 초상은 안전하게 있을 수 있었다. 전쟁에서 패한 독일 내 엄청난 혼란이 있을 때도 외풍에 휩쓸리지 않을 수 있었다. 하지만 평화는 영원하지 않았다. 1933년 봄, 아돌프 히틀러가 독일을 장악했다. 히틀러의 최측근이자 당시 국민 계몽 선전 장관을 맡은 요제프 괴벨스는 독일 문화성을 설치하고 미술을 통제했다. 나치 독일은 표현주의, 입체파와 야수파 등 대상을 '보이는 대로 그리지 않은' 그림을 게으른 화가들의 삼류 작품으로 취급했다. 이런 그림들을 뺏어와 '퇴폐 미술전'이라는 전시도 했다. 이쯤 가셰 박사의 초상은 당연히 압수 대상이었다. 어쩐 일인지 나치 독일은 몇 번이나 대대적 조사를 펼쳤지만 이 그림을 찾지 못했다. 나치 독일의 폭주를 눈치챈 슈바르젠스키가 일찌감치 미술관 지붕에 숨긴 덕이었다.
1937년, 나치 독일은 끝내 가셰 박사의 초상을 손에 쥐었다.
그리고 이듬해, 히틀러 군단의 이인자 헤르만 괴링은 이 그림을 자기 마음대로 수집가 프란츠 쾨니그스에게 팔아버렸다. 쾨니그스가 빼앗기다시피 낸 돈은 57만5000달러였다. 첫 거래가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오른 값이었다. 괴링은 쾨니그스에게 받은 돈을 빼돌려 개인 사치품을 사들였다. 아이러니하지만, 괴링의 이같은 비리 덕에 이 그림은 화형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반강제로 가셰 박사의 초상을 산 쾨니그스는 이 그림을 암스테르담으로 다시 옮겼다. 끝없는 유랑 끝에 테오의 부인 요한나가 태어난 곳으로 또 돌아온 것이었다. 1938년, 쾨니그스는 가셰 박사의 초상을 은행가 지그프리트 크라마르스키에게 팔았다. 정확한 가격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상당한 빚을 지고 있던 쾨니그스가 이번 거래로 적지 않은 금액을 갚았다고 한다.
그런데 이 무렵, 나치 독일이 네덜란드를 곧 침공할 것으로 보였다.
유대인이었던 크라마르스키는 살기 위해 미국으로 갔다. 그렇게 가셰 박사의 초상은 산 넘고 강 건너는 일로 모자라 드넓은 바다까지 횡단했다. 과연 모두가 외면하던 인상주의를 가장 먼저 받아들였던 미국다웠다. 미국은 반 고흐에게 주목하고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부터는 반 고흐 열풍이라고 할 만큼 관심도가 높아졌다. 1956년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서는 반 고흐의 일대기를 다룬 영화 '열정의 랩소디' 시연회를 열었다. 고갱 역을 맡은 안소니 퀸이 이 영화로 아카데미 남우 조연상을 받을 만큼 흥행했다. 자연스럽게 반 고흐의 가셰 박사의 초상도 눈길을 끌었다. 나치 독일의 삼엄한 감시망을 뚫었다는 신화가 더해져 더욱 인기몰이를 했다.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이 194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 6차례에 걸쳐 크라마르스키에게 가셰 박사의 초상을 대여했다.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은 1984년부터 6년 동안이나 이 그림을 빌리기도 했다. 어느덧 가셰 박사의 초상은 인상주의 초상화의 모범, 표현주의 인물화의 표본으로 칭송받았다.
그리고 크라마르스키가 죽고 그의 부인 롤라까지 중병을 앓고 있던 1990년, 이들의 자식들은 가셰 박사의 초상을 팔기로 뜻을 모았다.
잠깐 스쳐지나간 이들까지 포함해 13명의 손길, 프랑스와 네덜란드, 덴마크, 독일, 미국 등 온갖 나라를 떠돌면서도 끝내 살아남은 가셰 박사의 초상은 그렇게 크리스티 경매장에 올랐다. 이들 또한 앞으로 벌어질 일을 예상하지 못했다. 웬 일본인 사업가가 무려 8250만 달러를 주고 살 줄은. 그러고는 웬 창고에 처박아두곤 "내가 죽을 때 이 그림을 화장해달라"는 말까지 할 줄은.
아무도 모르는 행방
가셰 박사의 초상을 7500만 달러에 산 료헤이는 정말 이 그림을 한 줌 재로 날렸을까.
다행히 그랬을 가능성은 높지 않다는 게 미술계의 중론이다. 사실 료헤이는 가셰 박사의 초상을 사들인 이틀 뒤 뉴욕 소더비 경매에서 오귀스트 르누아르의 '물랭 드 라 갈레트의 무도회'도 7800만 달러를 주고 구입했다. 이 또한 충격과 경악의 일이었다. 그런 그는 반 고흐의 그림은 물론 르누아르의 이 그림도 함께 태워지길 바란다고 말했었다. 하지만 결국 말뿐이었는지, 료헤이가 죽은 후 르누아르의 물랭 드 라 갈레트의 무도회는 멀쩡한 모습으로 소더비 경매에 나왔다는 말이 돌았다. 현재는 스위스 익명 수집가에게 팔렸다는 설이 유력하다. 그런 만큼 가셰 박사의 초상 또한 어딘가에 비공개 매물로 나와 또다시 주인이 바뀌었을 것이라는 추측이 설득력을 얻는다. 실제로 일본의 다른 자본가에게 넘어갔다는 말, 미국 출신의 수집가가 사들였다는 소문 등이 끊임없이 나오는 중이다. 다만 료헤이가 낙찰받은 후 가셰 박사의 초상이 모습을 드러낸 적은 없다는 점은 확실하다. 가셰의 유랑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을까, 아니면 멈췄을까. 반 고흐의 삶만큼이나 기구한 운명이다.
한편 1890년 6월, 반 고흐는 가셰 박사의 초상을 완성한 후 똑같은 그림을 또 그렸다.
가셰가 첫 그림을 보고 감탄해 한 점 더 그려달라고 했다는 설, 반대로 너무 마음에 들지 않아 다시 그려달라고 했다는 설 등이 있다. 두 그림 모두 크기와 화폭 속 가셰의 자세는 동일하다. 하지만 첫 그림이 구성과 색상, 붓 터치 등에서 훨씬 더 신경을 써서 그렸다는 걸 알 수 있다. 두 번째 그림은 더 어둡고, 덜 입체적이다. 탁자 위에 책도 없다.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반 고흐는 두 번째 그림을 가셰에게 선물했다. 가셰의 유족은 1949년 프랑스 정부에 이 작품을 기증했다. 이 그림은 오르세 미술관에서 볼 수 있다.
〈참고 자료〉
가셰 박사의 초상, 신시아 살츠만, 예담
빈센트 빈센트 빈센트 반 고흐, 어빙 스톤, 청미래
반 고흐, 영혼의 편지, 빈센트 반 고흐, 위즈덤하우스
〈후암동 미술관 작품 편 읽는 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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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독수리가 간 쪼아도 참는다” 최악고문 받는 男, 무슨 사연[후암동 미술관-프로메테우스 편] (2023. 9. 9.)
2)“도저히 못참겠어” 봉인 푼 그녀, 외마디 비명…惡은 그렇게 쏟아졌다[후암동 미술관-판도라 편] (2023. 9. 23.)
〈후암동 미술관 현대미술 편 읽는 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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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나체女에 웬 아프리카 가면?” 얼빠졌다 조롱당한 그의 ‘반전’[후암동 미술관-파블로 피카소 편] - 희대의 반항아(입체파) (2023. 5. 20.)
4)“무자비한 짐승男인 줄 알았는데” 쫙 빼입은 신사 등장, 모두 놀랐다[후암동 미술관-앙리 마티스 편] - 행복의 야수(야수파) (2023. 8. 26.)
5)“내 이름은 로즈” 여장남자된 30대男 전말…‘빅픽처’ 있었다[후암동 미술관-마르셀 뒤샹 편] - 열정의 탐험가(레디메이드·개념미술) (2023. 6. 10.)
6)“외간여성과 시속 120km 광란의 음주질주” 즉사한 男정체 보니[후암동 미술관-잭슨 폴록 편] - 미국의 신화(액션페인팅) (2023. 7. 15.)
7)시뻘건 내 피와 교감해보겠나…울든, 기절하든 그대 마음[후암동 미술관-마크 로스코 편] -교감의 마술사(추상표현주의) (2023. 6. 17.)
8)“나나 네 엄마나 죽느냐 사느냐한다” 190㎝ 키다리 아저씨, 딸에게 한 고백[후암동 미술관-김환기 편] -붓을 든 시인(추상표현주의 특별편) (2023. 8.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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