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거 우리집 의자인데”…알고보면 ‘원작’ 따로 있다? [김유진의 브랜드피디아]
미드센추리모던 스타일 의자. 찰스 임스(Charles Eames)와 레이 임스(Ray Eames) 부부가 디자인 한 DAR(왼쪽), DSW(오른쪽). [©Vitra]

[헤럴드경제=김유진 기자] 코로나19 팬데믹 시대가 남긴 최대 유행어 가운데 하나는 ‘미드 센추리 모던(mid-century modern)’이다. 너도나도 집 꾸미기 열풍에 빠진 지난 몇년간 국내 인테리어 유행을 평정한 스타일이다. 그 바람을 타고, 절제미와 조형미가 돋보이는 미드 센추리 모던 시대의 디자인이 대중에게 눈도장을 찍었다.

문재인 전 대통령을 비롯한 정치인부터 예술에 관심이 높은 유아인 등 연예인에 이르기까지…. 유명인의 집에는 하나씩 보인다는 ‘건축가의 의자’를 탐색해 봤다. 어느새 우리집 책상과 식탁 의자까지 점령한 그 디자인. 그곳에 숨겨진 비밀을 찾아 1920년대 독일 예술교육기관 ‘바우하우스’와 1950년대 미국으로 시간여행을 떠나보자. 언제 어디서 누가 만들었는지 몰랐어도, 한번 보면 ‘아, 저 의자!’라며 탄성을 지를 만한 의자들이 상당하다.

“이거 우리집 의자인데”…알고보면 ‘원작’ 따로 있다? [김유진의 브랜드피디아]
데사우에 자리한 바우하우스 빌딩. [ⓒPen Magazine]

훌륭한 가구는 훌륭한 건축가의 손에서…바우하우스의 프로 ‘N잡러’

예술에도 사조와 계보가 있듯, 건축도 시대별로 스타일을 구분한다. 미드센추리 모던 스타일은 1930년대 후반 등장해 1940∼1960년대 미국을 휩쓴 현대적인 건축·인테리어 스타일이다. 이 물결을 어디부터 흘러왔을까? 그 대답은 ‘오늘의 집’에서 불티나게 팔리는 포스터의 주인공, ‘바우하우스(Bauhaus)’에 있다.

“이거 우리집 의자인데”…알고보면 ‘원작’ 따로 있다? [김유진의 브랜드피디아]
바우하우스 포스터. [오늘의집]

독일에서 탄생한 세계 최초의 디자인 교육기관인 바우하우스는 1919년 1차 세계대전 이후의 폐허 속에서 문을 열었다. 1933년 나치에 의해 강제 폐교되기까지 건축을 중심으로 순수 미술과 디자인, 공학 기술을 통합시키는 교육을 맡았다. 당연히 초대 교장도, 마지막 교장도 건축가다.

바우하우스가 배출한 건축가는 21세기 건축가와 성격이 조금 달랐다. 화가이자, 건축가이자, 공학자이자, 시인이었던 ‘N잡러’ 미켈란젤로가 부러웠을까? 이들은 집을 짓고, 가구를 디자인하고, 그림도 그리는 20세기 르네상스인을 자처했다. 추상 미술의 대가로 불리는 바실리 칸딘스키(1866~1944)가 동문이라면, 이들의 예술혼이 어느 정도였는지 가늠할 만 하다. 훌륭한 가구가 훌륭한 건축가의 손에서 나오던 시대는 그렇게 등장했다.

바실리·세스카·캔딜레버·바르셀로나…한번쯤 봤을 걸?

“이거 우리집 의자인데”…알고보면 ‘원작’ 따로 있다? [김유진의 브랜드피디아]
1925년 마르셀 브로이어가 디자인한 바실리(Wassily) 의자. 장식 없는 기하학적 형태의 실용성과 아름다움에 집중한 그의 손끝에서 ‘쇠파이프’가 의자의 재료가 됐다. 수십년이 지나도 형태를 유지하는 자전거처럼, 그의 의자도 아직까지 빈티지 제품들이 불티나게 팔린다. [Knoll]

바실리·세스카·캔딜레버·바르셀로나…바우하우스에서 탄생한 불멸의 의자 디자인이다. 이들의 공통점은 뭘까? 시선을 아래로 향해 의자의 다리를 보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건 ‘스틸 프레임’이다.

바우하우스 교수였던 건축가 마르셀 브로이어(Marcel Breuer,1902~1981)는 스틸 프레임 의자의 선구자다. 그의 눈에 늘상 타던 자전거 핸들의 부드러운 곡선이 남다르게 들어왔던 어느날, 그는 유레카를 외쳤다. ‘나무 합판을 구부렸던 것처럼, 스틸 파이프를 구부려서 의자 다리로 사용하면 어떨까?’ 번뜩 스친 생각은 의자 디자인의 역사를 바꿨다. 이름하야 1925년 등장한 ‘바실리 체어’(Wassily chair)의 탄생이다.

마르셀 브로이어는 먼저 강철 파이프로 의자의 구조를 만들었다. 그리고 엉덩이와 등, 팔을 지탱할 가죽으로 골격사이를 팽팽하게 연결했다. 철골 구조의 선과 선 사이를 면과 면으로 잇는 듯한 디자인이다.

“이거 우리집 의자인데”…알고보면 ‘원작’ 따로 있다? [김유진의 브랜드피디아]
마르셀 브로이어(왼쪽), 바실리 칸딘스키(오른쪽). [©Hulton Archive Collection] 바실리 칸딘스키(오른쪽)

‘자전거처럼 견고해 보이기는 하지만…좋아하는 사람이 있을까?’ 자식같은 작품이지만 생소한 디자인을 세상에 내놓기까지 마르셀 브로이어에게 확신은 없었다. 그런 그에게 용기를 준 건, 다름아닌 바우하우스의 또다른 교수이자 화가인 바실리 칸딘스키였다.

칸딘스키는 마르셀 브로이어의 스튜디오를 찾았다가 바실리 의자를 보고 극찬했다. 이어진 다른 바우하우스 구성원들의 반응도 다르지 않았다. 1년뒤 바우하우스 곳곳에 바실리 체어를 비치하게 됐을 정도로 반응은 뜨거웠다. 비슷한 스타일 의자들이 계속해서 등장하며 유행이 됐다.

‘그래, 칸딘스키의 안목이 틀릴 리 없지’. 훗날 마르셀 브로이어는 자신의 작품을 알아봐준 칸딘스키에 대한 고마움을 담아 이 의자에 ‘바실리’라는 이름을 붙였다. 칸딘스키의 풀네임 ‘바실리 바실리예비치 칸딘스키’에서 따온 것이다.

바실리 체어는 건축 양식의 하나인 ‘캔틸레버(Cantilever)’ 의자라는 별칭도 있다. 네 개의 다리 축 가운데 하나의 기둥을 없애고 아래로 누운 ‘ㄷ자’ 형태로 만든 게 캔틸레버 건축물을 닮았다는 이유에서다.

“이거 우리집 의자인데”…알고보면 ‘원작’ 따로 있다? [김유진의 브랜드피디아]
마르셀 브로이어의 딸 프란체스카 브로이어(Francesca Breuer)가 자신의 집에서 자신의 이름을 딴 세스카(Cesca) 의자에 앉아있는 모습(왼쪽). 브로이어의 코네티컷 뉴캐넌 집에서 촬영했다. [ⓒJohn Naar. the Knoll Archive]

마르셀 브로이어는 의자에 사람 이름 붙이는 걸 좋아했다. 그가 만든 또 다른 캔틸레버 디자인의 ‘세스카(Cesca) 의자’는 딸 이름을 따온 것이다. ‘ㄷ자’ 형태 프레임에 변주를 주고, 의자 쿠션 부분을 위커(wicker·고리버들) 소재로 대체해 편하고 바람이 잘 통하도록 만들었다.

세스카 의자는 최근 몇년새 유행한 대표적인 라탄(Rattan, 동남아시아의 열대지방에서 주로 자라는 야자과의 덩굴 식물) 의자 디자인이다. 위커는 짜임방식, 라탄은 재료 이름인데 국내에선 라탄 의자라는 명칭이 좀 더 자주 보인다. 라탄을 짜서 만든 의자라면 위커 의자로도 부를 수 있다.

세스카 의자는 유사한 디자인이 무수히 판매 중인 의자 중 하나다. 다만, 만듦새를 많이 타는 탓에 저가의 중국산 제품은 라탄 가시가 튀어나오거나, 가시에 옷이 걸려 올이 풀리는 불편함이 생기기 쉽다. 라탄은 그 자체로 습기, 곰팡이, 해충으로부터 취약한 소재로 알려져 있다.

“이거 우리집 의자인데”…알고보면 ‘원작’ 따로 있다? [김유진의 브랜드피디아]
바르셀로나 체어(Barcelona Chair). 바르셀로나 여행자의 필수코스인 몬주익 언덕 근처엔 그가 지은 바르셀로나 파빌리온과 그의 의자가 전시돼 있다. [ⓒKnoll]

‘Less is More’라는 명언을 남긴 바우하우스의 마지막 교장 미스 반 데어 로에(Mies van der Rohe)의 바르셀로나 의자 역시 걸작이다. X염색체를 연상시키는 유선형의 철제 다리 프레임에 고풍스러운 쿠션을 매치했다. 호텔 라운지, 회장님 응접실 등에 어울릴 법한 중후함에 모던함을 더한 디자인이다.

“이거 우리집 의자인데”…알고보면 ‘원작’ 따로 있다? [김유진의 브랜드피디아]
바르셀로나 체어(Barcelona Chair) 디자인 시안. 정면(왼쪽), 측면(오른쪽).[ⓒKnoll]

그도 그럴 것이 이 의자는 애초부터 엄숙하고 근엄하고 진지한 목적으로 제작됐다. 1929년 바르셀로나 국제 박람회를 위해 ‘바르셀로나 파빌리온’을 설계하며, 스페인 국왕이 방문했을 때 앉으라고 만든 의자였던 것. 왕을 위해 만들었던 이 의자는 100년이 다 돼가는 역사에도 불구하고 배우 유아인을 비롯한 ‘연예인 집들이’ 콘텐츠에 꾸준히 등장하는 단골 디자인으로 자리 잡았다.

문 닫은 바우하우스…미국으로 망명한 바우하우스의 남자들

바우하우스 출신 유럽 건축가의 예술혼을 감상했다면, 이젠 미국 대륙으로 건너갈 차례다. 1933년 바우하우스가 해산한 이래, 세계 각지로 망명과 이주를 할 수밖에 없었던 디자이너들이 새롭게 터전으로 삼은 대표적인 나라가 미국이기 때문이다.

초대 교장인 발터 그로피우스는 하버드대학교 건축부장, 마지막 교장인 미스 반 데어 로에가 일리노이공과대학 건축학부장으로 각각 뿌리를 내리며 바우하우스 정신을 이어갔다.

이들이 미국에 뿌린 씨앗은 바우하우스와 더불어 미드 센추리 모던의 또 다른 축이 된 ‘인터내셔널 스타일(International Style)’로 자라난다. 합판, 유리 등 산업 소재를 가구에 도입한 미국만의 실용주의 스타일이 움튼 순간이다.

“이거 우리집 의자인데”…알고보면 ‘원작’ 따로 있다? [김유진의 브랜드피디아]
찰스 임스(Charles Eames)와 레이 임스(Ray Eames) 디자이너 부부. [ⓒEams Office]

“디테일이 디자인을 만든다” 허먼 밀러社 임스 부부의 미드 센추리 모던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패권국으로 부상한 미국에서 중산층의 이상적인 일상공간을 채운 ‘허먼 밀러’는 미드 센추리 모던 인테리어에 활용되는 간판 의자들을 쏟아낸 미국의 국민 가구 브랜드다.

“이거 우리집 의자인데”…알고보면 ‘원작’ 따로 있다? [김유진의 브랜드피디아]
찰스 임스(Charles Eames)와 레이 임스(Ray Eames) 부부의 스태킹 체어(왼쪽), 금속 다리가 있는 라운지 의자인 LCM(오른쪽). [ⓒEams Office]

허먼 밀러 대히트는 가장 성공한 디자이너로 손꼽히는 찰스 임스(Charles Eames)와 레이 임스(Ray Eames) 부부의 활약이 만들었다. 임스 부부가 즐겨 쓴 재료는 저렴하고 평범한 합판의 모양을 자유롭게 변형한 ‘성형 합판(Molded Plywood)’이다. 직선과 사각형 형태가 도드라진 마르셀 브로이어의 의자와 비교하면 임스 부부의 부드러운 곡선과 둥그런 개성은 더욱 선명해진다.

“이거 우리집 의자인데”…알고보면 ‘원작’ 따로 있다? [김유진의 브랜드피디아]
LCW(Lounge Chair Wood). 임스 부부의 특별한 합판 성형 기술은 2차 세계대전 동안 미국 해군용 부목(신체를 고정시키기 위한 보조장치)을 구부리고 또 구부려 10만 개 넘게 제작한 끝에 구현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 Herman Miller]

“생산하기 쉽고 저렴한 가구를 만들어야 한다”는 모토로 제작한 히트작 LCW(Lounge Chair Wood) 역시 상판부터 다리까지 모두 성형합판으로 만들었다. 이 선택이 놀라운 건, 편안하게 몸을 뉘여야 할 라운지 체어를 딱딱한 합판 소재로 구현한 과감함 덕분이다. 쿠션감이라곤 없는 합판의 단점을 넓은 시트, 사람 몸의 곡선에 맞게 설계한 인체공학적 디자인으로 극복한 디자인의 승리다.

“이거 우리집 의자인데”…알고보면 ‘원작’ 따로 있다? [김유진의 브랜드피디아]
1956년 출시된 임스 오토만 의자(왼쪽)와 라운지 의자(오른쪽). 오토만은 흔히 알고 있는 ‘오스만’ 제국에서 유래한 이름으로, 해당 디자인의 의자가 18세기 후반 오스만 제국의 심장인 터키를 통해 유럽에 소개되면서 이같은 이름을 얻었다. [ⓒEams Office]

임스 부부의 라운지 의자&오토만(Eames Lounge Chair and Ottoman)은 이들 부부의 디자인 가운데 가장 럭셔리한 의자다. 친구였던 천재 영화감독 빌리 와일더가 제대로 쉴 수 있도록 다리를 올릴 수 있는 보조의자 오토만(Ottoman)까지 함께 제작해 편안함을 극대화했다. 임스 라운지 의자와 오토만은 2012년 문재인 전 대통령의 선거 캠페인에 등장하는 등 남성적이고 중후한 디자인을 앞세워 리더를 위한 클래식 디자인으로 자리잡았다.

유리를 섬유질로 뽑아낸 뒤 플라스틱과 섞은 ‘유리섬유(Fiberglass)’도 이들 부부가 사용한 핵심 소재다. 1950년대 출시한 DAR(Dining Height Armchair Rod Base), DSW(Dining Height Side Chair Wood base) 등은 기본 플라스틱보다 소재감을 살린 유리섬유로 상판을 찍어내고, 에펠탑을 연상시키는 다리형태를 더한 개성 있는 디자인을 자랑한다.

“이거 우리집 의자인데”…알고보면 ‘원작’ 따로 있다? [김유진의 브랜드피디아]
프랑스 파리 에펠탑을 닮은 다리 구조로 '에펠 의자'라는 별명을 얻은 DSW(Dining height, Side chair, on Wood base)에 앉아있는 찰스 임스. DSW는 앞서 출시한 임스 DAR 팔걸이 의자를 좁게 개조한 디자인이다. [ⓒEams Office]

중고품이 더 비싼 아이러니…“닳을까 못 앉는 우리집 보물”

건축가와 디자이너의 숨결이 살아있는 의자들은 수십년 전 생산된 빈티지 제품이 더욱 비싸게 팔리기도 한다. 아직도 손쉽게 새제품을 살 수 있는 생산 중인 의자를 왜 굳이 웃돈을 얹어서 중고품을 사려할까? 그 이유는 의자 하나하나가 곧 미술품이라는 인식에 기인한다.

현재 디자인과 디자이너 이름을 달고 판매되는 의자 대다수는 가구 제작사가 디자인 저작권을 구입해 재생산에 나선 경우다. 이탈리아 카시나, 스위스 비트라, 미국 놀(現 밀러놀) 등이 옛 명작을 다시 생산하는 제조사 제품보다는 출시 당시의 제품이 더 원작에 가깝다고 생각하는 소비자의 인식이 빈티지 의자의 값어치를 훌쩍 끌어올렸다.

“이거 우리집 의자인데”…알고보면 ‘원작’ 따로 있다? [김유진의 브랜드피디아]
[©Vitra]

실용주의를 강조한 바우하우스와 인터내셔널 스타일은 오래된 세월과 시대를 관통하는 디자인으로 예술품의 경지에 다다랐다. 실제 가구 애호가들 사이에선 오리지널 빈티지 의자를 집안에 관상용으로 두고, 새제품이나 이미테이션 의자를 실사용 하는 경우도 있다.

의자라는 물건 하나에서 사람들은 각자 다른 의미를 찾는다. 누군가에겐 권위일수도, 휴식일수도, 존재 그 자체일수도 있다. 각박한 세상 속에 ‘내 자리’로 있어주는 의자라는 사물이 새삼 고맙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