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달 “전세금 올려라” 압박하던 집주인
역전세난에 잠잠…이젠 보증금 반환 걱정
서울 아파트 전세가격지수 83.4까지 뚝
월세 수요 계속 늘어…올 들어 비중 증가
정부도 한시적 DSR 규제 완화 검토 고민
[헤럴드경제=고은결 기자] #.지난 2020년 초 숭인동 모 아파트에 전세로 들어간 회사원 김모(36) 씨는 전세 만기가 가까워진 2021년 하반기부터 지난해 하반기까지 1년 넘게 집주인으로부터 매달 내용증명을 받았다. 집주인은 전세계약 갱신 시 기존 보증금의 60%인 1억원을 올려주지 않으면 보증금에서 매월 약 60만원씩 차감하겠다며 막무가내로 집을 비울 것을 종용했다. 김씨는 “특약도 없고, 새로 계약서도 안 썼는데 마음대로 설정한 이자를 보증금에서 차감하겠다고 압박한 것”이라며 “집주인이 돈으로 압박하면 대부분 세입자는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상황은 순식간에 역전됐다. 지난해 말 전국적인 전세사기 사고가 터지자 집주인은 더 이상 내용증명을 보내지 않았다. 김씨는 “다음 세입자를 구하기 어려운 상황이 되자 잠잠해진 것”이라며 “그러나 내년 1월에 전세 만료 시기에 보증금을 돌려주지 않을까 겁난다”고 말했다. 이어 “전세사기로 고통받는 이들이 전세 제도에 치가 떨린다고 했는데, 나도 다시는 전세에 들어가지 않을 생각”이라며 “전세 이자 수준의 월세방을 미리 알아보는 중”이라고 전했다.
전세 시장이 주춤한 가운데 곳곳에서 임대인이 임차인 보증금을 제때 돌려주지 못하는 역전세난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앞선 사례처럼 전세 가격 하락세에도 월세를 찾는 세입자들이 늘어나는 배경이다. 전세사기뿐만 아니라 집주인의 사기 의도가 없는 일반 역전세난도 임차인에게 피해가 돌아오는 만큼 정부도 대책 마련에 팔 걷고 나선 상황이다.
24일 한국부동산원 통계에 따르면 서울 아파트 전세가격지수는 2021년 12월 103.5로 최고점을 찍은 이후 올해 5월 83.4까지 감소했다. 2020년 하반기 임대차 2법 시행으로 급등해 2022년 초까지 높았던 전셋값이 1년여간 하락세를 보였다. 여기에 전세사기 등이 겹치며 보증금 미반환 우려는 커지고 있다. 집주인은 세입자 구하기에 애를 먹고, 세입자들 사이에선 울며 겨자 먹기로 월세를 찾는 이들이 늘어나는 배경이다.
전세금을 떼일 수 있다는 우려에 전세권 설정등기도 증가세다. 법원등기정보광장 따르면 지난달 전세권설정 등기 신청 건수는 931건으로 4월(828건) 대비 100건 이상 증가했다. 전세권 설정 등기는 등기사항전부증명서에 임차인이 세입자란 사실을 기록해, 임차인 입장에선 확정일자와 입주 및 전입신고 요건을 갖춘 것과 비슷한 효력이 발생한다. 만약 보증금 미반환 사고가 발생하면 임차인이 별도의 소송 절차 없이 해당 집을 임의경매로 넘길 수 있다.
아울러 전세대출 금리가 내려가며 전세도 다시 살아나고 있지만, 깡통전세 우려 등은 여전해 월세 수요도 늘고 있다. 서울부동산정보광장에 따르면 지난 1∼5월 서울 주택(단독·다가구·다세대·연립주택·아파트) 전·월세 거래량 22만9788건 중 월세는 11만7176건으로 월세 비중이 51%를 차지했다. 1~5월 기준 서울 주택 임대차 시장에서 월세 비중이 50%를 넘은 것은 서울부동산정보광장이 관련 통계를 집계하기 시작한 2011년 이후 처음이다.
지난 4월 기준 전국 주택 전월세 전환율(전세 보증금을 월세로 전환할 때 적용하는 이율)도 6.1로 2019년 9월(6.1) 이래 최고 수준이다. 특히 전세사기 사건이 터진 인천의 전월세 전환율은 6.7에 달한다. 전세 제도에 대한 신뢰가 흔들린 데다 금리 인상에 전세 실익이 줄면 하반기에도 전월세 전환율은 낮아지지 않을 전망이다. 윤지해 부동산R114 연구원은 “전월세 전환율은 금리에 연동돼, 하반기 금리 인상이 예고된 상황에서 당분간 떨어질 가능성은 낮다”고 말했다.
이런 가운데 정부도 집주인에게 한시적으로 총부채원리금상환비율(DSR) 규제를 완화해주는 등 역전세 충격을 줄일 방안을 강구하고 있다. 직방에 따르면 올해 하반기와 내년 상반기 계약 만료인 전국 주택 전세 거래 총액은 302조1700억원 수준으로 집계됐다. 원희룡 국토교통부 장관은 최근 “보증금 차액에 대해 다음 계약 기간 때까지만 DSR 규제를 완화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고 언급했다. 함영진 직방 빅데이터랩장은 “올해 하반기와 내년 상반기에 역대 최대 규모의 전세보증금 계약 만료가 예상되는 만큼 세입자는 집주인 상환 능력을 미리 살피는 등 대비가 필요하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