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모더니스트
<동행하는 그림>
풀밭 위의 점심 식사
올랭피아
폴리 베르제르의 술집
편집자주
페르메이르의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를 본 뒤 관련 책과 영화를 모두 찾아봤습니다. 잘 그린 건 알겠는데 이 그림이 왜 유명한지 궁금했습니다. 그림 한 장에 얽힌 이야기가 그렇게 많은지 몰랐습니다. 즐거웠습니다. 세상을 보는 눈이 조금은 달라졌다는 느낌도 받았습니다. 이 경험을 나누고자 글을 씁니다. 미술사에서 가장 논란이 된 작품, 그래서 가장 혁신적인 작품, 결국에는 가장 유명해진 작품들을 함께 살펴봅니다. 기사는 역사적 사실 기반에 일부 상상력을 더한 스토리텔링 방식으로 쓰여졌습니다.
[헤럴드경제=이원율 기자]에두아르 마네는 이 누드 그림 탓에 욕이란 욕은 다 먹었다.
격분한 사람들은 그림에 침을 뱉으려고 했다. 지팡이를 들고 휘휘 저으며 찢어버리려고 했다. 프랑스 파리 당국이 마지못해 경호원 세 명을 투입했다. 하지만 이들 또한 이따위 일을 왜 해야 하느냐 식의 태도였다. 마네의 친구 앙토냉 프루스트 말을 들어보면 당시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행정부의 (경호원 투입)조치가 있어 (그나마)그림에 구멍이 나는 일은 막을 수 있었다." 언론은 마네를 미친 사람 취급했다. 관람객도 마네를 제정신이 아닌 사람으로 치부했다. "그림 속 비너스는 시체처럼 침대 위에 완전히 벌거벗고 있다." "더러운 손과 주름진 발을 지닌 매춘부가 (…) 검푸른 빛을 띠고 있다." 평단은 작정하고 악담을 퍼부었다.
"자네는 그저 욕먹기를 즐기는 사람인가?"
마네 지인이 물었다. "내가 아는 자네는 그렇게 대범한 사람이 아니야. 그런데도 비난받을 게 뻔한 그림을 재차 내놓는 건 말이오. 그냥 이런 상황을 좋아하기 때문인가?" 이해할 수 없다는 투였다. "이봐. 당신은, 내가 즐거워 보이는가." 마네는 느릿느릿 말했다. 그의 눈은 붉게 충혈돼 있었다. 사달이 난 후부터 며칠 밤을 설친 듯했다. 두 손과 두 다리도 산만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는 분명 울분에 차있었다. "그러면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렇게 그렸소?" 이 말에 마네는 이렇게 대꾸했다. "아무 뜻도 없소. 거기에 그녀가 있었어. 내가 본 걸 그대로 그렸을 뿐이야."
문제의 이 그림은 1865년 파리의 살롱전에 등장했다.
벌거벗은 백인 여성이 침대에서 포즈를 잡고 있다. 검은 피부의 하인이 옆에서 꽃을 들고 있다. 끄트머리에는 까만 고양이가 꼬리를 꼿꼿이 세웠다. 제목은 '올랭피아'였다. 이 그림에선 과거 모든 그림과 달리 우아함은 찾아볼 수 없었다. 여성 누드화라면 당연히 여신과 요정, 신화 속 왕비와 공주 등을 그려야 할 때였다. 이들의 아름다운 외모, 풍만한 몸, 부드러운 자태를 묘사해야 할 시대였다. 이건 수백년 전부터 지금껏 이어진 불문율이었다. 마네의 그림은 그간의 공식을 깨부순 변종이었다. 그렇기에 큰 논란을 일으켰다. 주인공은 무려 현실 여성이었다. 게다가 '올랭피아'는 성매매 여성을 가리키는 은어였다. 건방지게 티치아노의 '우르비노 비너스'를 패러디하고선, 은밀한 여신은커녕 관람객을 노려보는 듯한 뒷골목 여인을 표현한 셈이었다. 이뿐인가. (당시 기준으로)지위가 낮은 흑인 하인이 큐피드 자리를 꿰찼다. (물론 당시 기준으로)불운을 의미하는 까만 고양이가 충절의 상징인 개의 자리를 대체했다. 도발적 요소가 가득하다 못해 넘쳐흘렀다. 예술계 기득권 입장에선 이 정도면 그냥 싸우자는 게 아닌가 싶었다.
비슷한 시기에 나온 알렉상드르 카바넬의 그림 '비너스의 탄생'을 보면 마네의 그림이 얼마나 발칙했는지를 알 수 있다. 이는 통치자 나폴레옹 3세가 보자마자 사들인 당시 교과서 같은 작품이었다.
마네의 금기를 깬 도전은 또 실패로 끝나는 듯했다.
내 방식에 맞춰 그린 그림으로 성공하겠다는 뜻이 끝내 꺾일 듯했다. 그에게 남는 건 무모한 관심종자 내지 동시대 최악의 화가라는 꼬리표밖에 없을 것 같았다. 마네가 이번에야말로 도전을 멈춘 채 주저앉으려고 할 때, 저 멀리서 여러 사람의 실루엣이 다가왔다. 그의 뜻을 받아 함께 전선으로 뛰어들겠다는 청년들이었다. 그의 이름은 에밀 졸라였다. 그의 이름은 카미유 피사로였다. 클로드 모네였다. 오귀스트 르누아르였다. 알프레드 시슬레였고, 폴 세잔이었다. 마네는 그의 뜻과 상관없이 깃발을 잡았다. 마네는 이제 별종이 아니었다. 그는 최초의 모더니스트(Modernist)였다.
싸우고, 맞붙고, 저항하고…불굴의 고집
마네는 1832년 프랑스 파리에서 태어났다.
마네는 법관 아버지와 외교관 집안 어머니 밑에서 컸다. 부족할 게 없는 상류층이었다. 어린 마네는 법관의 길을 흐리멍덩하게 쳐다봤다. 집안의 뜻이었다. 그러나 부모의 바람과 달리 마네는 공부에 약했다. 부잣집 자제들 학교로 간 그는 거의 매번 참혹한 성적표를 받았다. 내 자식이 그럴 리 없다며 애써 부정하던 아버지가 결국 물러섰다. "법관이 될 머리가 아니면, 군인이라도 해라." 하지만 마네는 해군사관학교 입학시험에서도 떨어졌다. "네가 고생을 덜 했구나." 마네는 성질난 아버지 손에 이끌려 브라질행 선박에 반강제적으로 탔다. 선원이 된 그는 망망대해에서 6개월여 시간을 버티고 돌아왔다. 아버지의 강요로 사관학교 시험을 또 쳤지만 또 낙방했다.
사실 마네는 다른 꿈이 있었다. 화가였다. 그는 삼촌과 루브르 박물관에 간 그날을 잊지 못했다. 모든 그림이 황홀했다. 모든 작품이 아름다웠다. "물어보자. 너는 대체 무엇이 되려고 그러냐." 불합격 통보서를 마구 구겨버린 아버지가 물었다. "저는 화가가 되고 싶어요. 늘 그랬듯." 이날부터 마네는 집안이 포기한 아이였다. 18살 때였다.
마네는 토마 쿠튀르의 화실로 출근했다.
쿠튀르는 역사화의 대가였다. 좋게 보면 우아한, 나쁘게 보면 틀에 박힌 아카데미풍 그림의 장인이었다. 당시 파리에서 잘나가는 화가가 되려면 살롱전 입상이 필수였다. 쿠튀르는 그런 살롱전의 공인 스타기도 했다. 마네는 쿠튀르에게 회화 기초를 익혔다. 그러면서 마네는 틈만 나면 루브르 박물관에 갔다. 몇 세대 앞선 거장, 디에고 벨라스케스의 그림을 한참 쳐다봤다. 동시대 사람이 담긴 초상화를 보고 눈을 반짝였다. 마네는 쿠튀르의 지향점에 별로 관심이 없었다. 까마득한 과거를 다룬 역사화는 고리타분했다. 재미가 없었다. 마네의 롤모델은 벨라스케스였다. 그처럼 동시대 모습이 담긴 생생한 그림을 그리고 싶었다. 상상 말고 현실을 칠하고 싶었다. 카페에 앉은 신사, 꽃을 파는 여인, 노래하는 가수, 밤의 짝을 찾아 거리를 배회하는 남녀를 화폭에 담고자 했다. 이게 재미있었다. 마네는 6년간 쿠튀르 밑에 있었다. 그는 살롱전 입선을 위한 '테크닉'만 익혔을 뿐, 스승의 예술관은 끝내 외면했다.
마네 평생의 삶을 관통하는 요소는 그가 가진 불굴의 고집이다.
그는 스스로 뜻을 굳힌 일을 놓고는 불도저처럼 밀고 갔다. 온갖 수모를 겪고도 물러서지 않았다. 마네는 곱게 자랐다. 여린 면도 있었다. 그런 그가 어떻게? 이건 성향의 문제가 아니었다. 의지의 문제였다. 그렇게 마네는 아버지와 싸우고, 스승 쿠튀르와 충돌하고, 옛 화풍에 저항했다. 그는 헤라클레스 같은 철인이 아니었다. 실패할 때마다 큰 상처를 받았다. 분노를 품고, 울분을 머금었다. 그래도 타협은 없었다. 그에게 실패는 실패가 아니었다. '내가 맞았다'는 걸 증명하는 때가 조금 더 늦춰졌을 뿐이었다.
1859년, 마네는 회심의 그림을 살롱전에 출품했다.
지친 가장일까, 그냥 거리의 술꾼일까. 한 남성이 거적때기를 두른 채 비스듬히 앉아있다. 눈에는 초점이 없다. 흘러간 과거를 곱씹는 듯, 막막한 미래를 예감한 듯 표정은 굳어있다. 그 옆에는 유리잔이 있다. 마실 때는 '녹색의 요정', 마신 후에는 특유의 쓰라림으로 '녹색의 악마'가 되는 압생트가 채워졌다. 발치에는 빈 술병이 뒹굴고 있다. 파리의 뒷골목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었다. 제목은 '압생트를 마시는 남자'였다. 결과는? 탈락했다. "이런 불결한 그림을!" 탈락 이상의 모욕도 겪었다. 쿠튀르도 심사위원 중 한 명이었다. 그는 이따위 그림을 그린 제자를 변호할 생각이 없었다. 그렇게 마네의 술꾼은 위엄있는 신, 위대한 영웅, 아름다운 요정 뒤로 밀려 낭떠러지로 떨어졌다. 마네는 재차 울분을 토했다. 이해할 수 없었다. 그놈의 지겨운 옛날 일들 말고, 당장 생태처럼 펄떡대는 파리를 그린 게 왜 문제인지 도무지 납득할 수 없었다. 그 말은 즉, 이런 그림을 또 그리겠다는 뜻이었다. 그는 기어코 희대의 문제작을 내고 만다.
그림 한 장 냈다가…희대의 ‘스캔들 메이커’
1861년, 어느 날. 마네는 먼지 냄새를 폴폴 풍기는 낡은 판화 한 점을 봤다.
마르칸토니오 라이몬디가 복제한 라파엘로 산치오의 '파리스의 심판'이었다. 마네의 눈이 한 곳에 쏠렸다. 판화 오른쪽, 남성 둘과 여성 하나가 모인 모습이었다. 나체의 세 사람은 모두 바다 신이었다. 물론 마네 입장에선 이들이 신이든, 정령이든, 취객이든 알 바 아니었다. 마네는 이 구도를 따라 그림을 그렸다. 별로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로서는 늘 그랬듯, 바다 신이 있어야 할 곳에 인간을 뒀다. 친구와 처남을 앉혔다. 무심한 듯 쳐다보는 여신 자리에도 현실 여성을 데려다 놓았다. 마네는 이 그림을 1863년 살롱전에 출품했다. 심사할 가치도 없었다. 역시나 폭풍 탈락했다. 그의 도전은 또 빛을 못 보는 듯했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한 사태가 벌어졌다.
그해 살롱전에서는 3000점 가량 그림이 낙선했다.
무더기 낙방이었다. 탈락자들은 강하게 항의했다. 젊은 화가를 중심으로 시위도 벌어질 판이었다. 결국 나폴레옹 3세가 움직였다. 떨어진 그림을 모아 낙선(落選)전을 열도록 지시했다. 말 그대로 '망한 그림'들의 장이었다. 마네가 '파리스의 심판'을 참고해 그린 그림도 낙선전에 걸렸다. 개관 첫날 관람객만 7000명 넘게 몰렸다. 심사위원들이 내던진 '바보 같은 그림'을 조롱하기 위해 온 이들이 다수였다. "특이한 게 많은데…. 이거는 진짜 좀 선 넘은 것 아니야?" 또 마네의 그림이었다. 사람들이 점점 몰려왔다. 술렁임이 커지고, 손가락질이 잦아졌다. "에두아르 마네? 이 자식, 우리가 저런 짓을 한다고 고발하는 거야? 우리를 조롱하고 있잖아!" 이내 비싼 옷을 차려입은 청년들이 고함을 내질렀다. 결국 이 그림은 테러를 당하지 않도록 더 높은 곳으로 옮겨졌다. 문제의 이 작품이 있는 전시홀은 '경악의 방'으로 불렸다. "참으로 뻔뻔한 그림이야." 낙선전을 찾은 나폴레옹 3세조차 혀를 끌끌 찼다.
그림에서 가장 먼저 보이는 건 잘 빼입은 두 남성과 나체의 한 여성이다.
한가롭게 피크닉을 즐기는 분위기다. 뒤에 있는 반라 여성 또한 목욕하며 여유를 갖는 모습이다. 두 남성은 누릴 건 다 누리는 부르주아처럼 보인다. 함께 있는 여성들은 성매매를 업으로 할 가능성이 커 보인다. 왼쪽 앞 풀밭에는 두 여성이 입던 옷이 있다. 빵과 과일 등도 어지럽게 흩어져 있다. 남성의 차림새는 당시 유행하는 패션이었다. 공간은 파리 외곽의 공원이었다. 그러니까, 돈 많은 부르주아 청년이 대낮 공공장소에서 문란한 일을 하는 '실제 상황'을 담은 그림이었다. 화가의 왕자로 불린 라파엘로의 그림, 아울러 회화의 군주로 칭해진 티치아노의 작품 '전원 음악회' 등 신과 요정이 있는 성스러운 명화를 (당시 시선에서)인간의 춘화(春畵)로 전락시킨 셈이었다. 기득권 입장에선 신성모독 행위였다. 유구한 전통을 더럽히는 짓이었다. 일상의 한순간을 역사의 한 장면과 같은 수준에서 보겠다는 혁명적 선언이었다.
그림의 주제만큼 기법도 문제였다.
특히 벌거벗은 여성은 입체감 없이 평평해보인다. 마네는 그냥 보이는 대로 그렸다. 일단 지르고 보는 기교 따위는 관심 밖이었다. 시선이 가장 밝은색에서 가장 어두운색으로 향할 때 자연스러움을 더해주는 '중간색'도 쓰지 않았다. 게다가 뒤에 있는 여성에겐 원근법도 적용되지 않았다. "주제도, 기법도 하나 같이 천박하다." 문제작 '풀밭 위의 점심 식사'는 그렇게 동네북이 돼 두들겨 맞았다. 우리는 지금을 살면서 왜 지금을 그리지 못하는가. 왜 솔직한 인간을 그리지 못하고, 왜 사적인 일상을 그리지 못하는가. 린치에 가까운 공격을 받은 마네는 또 낙담했다. 이 그림에는 어떠한 정치적 의도도 없었다. 그저 있는 그대로를 보여줬을 뿐이었다. 마네는 물러날 사람이 아니었다. "빅토린 양. 나랑 작업 하나 더 하지." 마네는 빅토린 뫼랑을 불렀다. 화제의 이 그림에서 몸소 나체 여인으로 자세를 잡아준 화가 겸 모델이었다. "이번에는 캔버스 앞 침대에 누워줘야겠어. 물론, 벌거벗은 채로."
고정관념 짓밟은 최초의 ‘현대 아티스트’
그렇게 마네의 '올랭피아'가 탄생했다.
마네는 이미 낙선전 사건 이후 큰 내상을 입었다. 그런 그는 당장은 망설여졌는지 '올랭피아'를 1863년에 다 그리고도 2년을 묵혔다. 그 또한 인간이었음을 재차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그림은 2년 후 살롱전을 통해 모습을 보였다. 기성화단이 볼 때 올랭피아는 풀밭 위의 점심 식사보다 선을 더 넘었다. 재앙이었다. 무슨 이런 놈이 다 있나 싶을 정도였다. "볼 테면 마음껏 보라. 나는 비너스도, 갈라테이아도 아닌 너희와 같은 불완전한 인간이다. 군살도 있는, 피부도 매끈하지 않은…." 뫼랑에서 올랭피아로 재탄생한 여성은 이런 분위기를 아는지 모르는지, 그저 도발하기에 바빠보였다.
마네는 화폭에 진짜 인간을 그린 선구자였다.
위엄 없이 허세에 찬, 미화 없이 군살을 내보인, 이른바 '너무나도 인간적인' 인간을 등장시킨 첫 화가였다. 두 눈에 보이는 대상, 더 정확히는 '두 눈을 통해 받은 인상'을 그린 최초의 현대 예술가였다. 조각 같은 선남선녀를 그린 후 이를 통해 교훈과 깨달음을 안겨야 좋은 그림이라는 법칙, 신과 요정 등을 주인공으로 삼아 이들의 우아함을 부각해야 좋은 작품이라는 신념, 수백년간 헌법처럼 따른 원근법과 중간색 등 기교를 자유자재로 부려야 좋은 결과물이라는 고정관념을 짓밟은 최초의 모더니스트였다. 마네는 예술계를 열린 사회로 만들었다. 그로 인해 수백년, 어쩌면 수천년간 이어지던 닫힌 사회가 박살 났다.
하지만 이는 훗날의 평가일 뿐, 당장의 성과는 아니었다.
내 방식대로 그린 이 그림은 대체 왜 먹히지 않는가. 올랭피아의 수모까지 겪은 마네는 분노했다. 왜 자꾸 거장 그림을 패러디하냐고? 나도 쿠튀르에게 정통 회화 수업을 들었으니까! 마네는 자기가 이들의 혼을 이어받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다. 마네는 거장이 되고 싶었다. 라파엘로와 티치아노, 벨라스케스 같은 위인에 올라 역사에 남고 싶었다. 그가 주류에 속하기 위해 살롱전에 그림을 계속 내는 한편, 세상이 놀랄 '실험'을 거듭 이어간 점은 이런 마음 탓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눈앞 현실은 참담했다. 이때였다. 마네 뒤로 젊은 청년들이 한 둘씩 슬금슬금 다가왔다. 마네가 기득권의 등쌀에도 냅다 불부터 지르는 데 감동한 이들은 그에게서 용기를 얻었다고 했다. 마네는 이제 그처럼 주류 눈 밖에 난 모네, 르누아르, 시슬레 등 대담한 화가들의 정신적 지주였다. 1874년, 모네와 르누아르 등은 그들만의 전시를 열었다. 함께한 화가는 에드가 드가, 피사로, 시슬레, 세잔 등이었다. 하나 같이 자기 색깔 뚜렷한 고집불통이었다. 새로움을 갈구하던 이들은 곧 인상주의자로 불린다. 구심점은 여전히 마네였다.
다만, 마네가 이들의 함께 하자는 요청을 매몰차게 거절한 점은 흥미롭다.
마네는 가난한 인상주의 화가들에게 종종 용돈을 주는 등 인간적 교류는 했다. 같이 분노하고 함께 울분을 토하는 등 작품 활동의 동력이 되는 점에서 이들이 고맙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젊은 문제아들과 한통속으로 묶이는 걸 원치 않았다. 같이 밥을 먹으면 오해받을까 싶어 피할 정도였다. 그는 자신이 '아버지'가 된 인상주의 단체전에 단 한 번의 작품도 내지 않았다. 마네는 어떻게든 주류의 인정을 받고 싶었다. 그게 거장이 되는 가장 빠른 길이라고 판단했다. '비주류' 인상주의에 속하는 순간 커리어가 엉망이 될 것으로 생각했을 수도 있다. 사실 마네는 그를 후려치는 기득권만큼, 그를 추앙하는 이 인간들 또한 이해하지 못했다. 마네는 매 순간 그리고 싶은대로 그렸다. 언젠가 모두가 내 방식을 인정할 것으로 믿고서 꾹 참고 칠할 뿐이었다. 그런 그는 자기 뜻과 상관없이 한쪽에선 파괴자, 한쪽에선 구원자로 불렸다.
“인간은 파멸될지언정 패배할 수 없다”
1880년대 초, 마네는 발을 질질 끌며 문을 밀었다. 파리 9구역에 있는 예술가의 모임 장소, 폴리 베르제르였다.
"어이, 독불장군 왔는가!" 마네가 들어오자 멋들어진 수염을 한 사내가 인사했다. "몸은 괜찮고? 아프다는 말을 들었는데." 술 냄새가 확 났다. 마네는 옅게 웃으며 주변을 둘러봤다. 화가와 작가, 음악가와 비평가가 모여있다. 모두 독주를 꿀떡꿀떡 들이켰다. 입에 침을 튀겨가며 젊음, 순정, 낭만, 사랑, 예술 따위를 토론했다. "마네 선생, 마침 잘 왔어. 내가 말이야. 진짜 예술이란 건 말이야…." 마네는 비틀대며 다가오는 또 다른 사내를 두고 능숙하게 돌아섰다. 갑자기 환호가 터졌다. 무용수 무리가 홀에서 우아하게 춤을 췄다. 위를 보니 한 무용수가 공중그네를 탄 채 유영하듯 떠다녔다. 마네는 계속 걸었다. 그가 발걸음을 멈춘 곳은 검은 옷의 여종업원이 있는 바(Bar)였다. "뭘 드시게요?" "음…잠깐." 갑자기 현기증이 왔다. "뒷사람 주문부터 받으시게." 마네는 앉을 곳을 찾아 다시 천천히 움직였다. 휴. 겨우 빈 의자를 찾은 그가 털썩 주저앉았다. 마네는 고개를 세웠다. 여종업원을 다시 봤다. 그녀 근처에서 서성이는 남성, 그녀가 등지고 선 거울이 한가득 담아내는 수많은 사람도 관찰했다. 자유롭고도 어수선한, 향락적이고도 퇴폐적인 세기말의 자화상이었다. 마네가 평생을 매달린 동시대의 가장 솔직한 모습이었다. 마네는 생각했다. …이건, 그려야겠어.
가슴에 꽃장식을 한 검은 드레스의 여종업원이 테이블에 살짝 기대있다.
주황색 머리와 검은색 초크 목걸이, 소매를 살짝 걷어올린 팔에서 빛나는 팔찌 등 치장에 신경을 쓴 모습이다. 그녀는 여왕처럼 우뚝 섰다. 질린 듯, 무관심한 듯 딱딱한 표정과 적당히 벌린 두 팔에서 당당함이 느껴진다. 다채로운 술병과 잔, 탐스러운 과일은 전리품이자 보급품처럼 여겨진다. 거울에 비치는 수많은 사람은 그녀와 한배를 탄 동료처럼 보이기도 한다. 마네는 이 그림을 통해 여종업원, 즉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인간'이 새로운 세계의 아이콘이 될 것이라고 재차 주장했다. 근 20년 전 풀밭 위의 점심 식사를 통해 그랬듯, 된통 얻어맞고도 그린 올랭피아를 통해 또 그랬듯.
이 그림은 마네의 고집이 낳은 최종 결과물이었다.
신화 같은 저 세상이 아닌 당장 눈앞에 있는 우리 세상, 원근법 따위 공식이 아닌 눈에 남은 인상, 역사화를 최고로 친 기득권은 높이 쳐주지 않은 정물의 세밀한 묘사, 무엇보다 또다시 관람객을 쳐다보는 여성의 시선…. 마네가 온갖 욕을 먹고서도 절대 포기하지 않은 모든 요소가 이 그림에 들어갔다. 제목은 '폴리 베르제르의 술집'이었다. 마네의 이 그림은 그의 대부분 작품이 그랬듯 예상 못 한 논란을 부르기도 했다. 거울에 비친 모자 쓴 남성은 누구인가. 여종업원과 대화하는 듯도 한데, 그렇다면 여종업원 바로 앞에 서야 하는 것 아닌가. 그림에는 왜 그게 그려지지 않았는가. 마네가 몸이 좋지 않아 실수했다, 풍경을 제멋대로 조작해 '현대화'에 더 다가갔다는 둥 갑론을박이 벌어졌다. 이 논쟁은 한 세기가 흘러서야 마침표를 찍게 된다. 모자를 쓴 남성은 여종업원 앞이 아닌 왼쪽으로 서 있었다. 그는 여종업원과 다른 방향으로 눈길을 주는 중이었다. 마네는 이를 보이는 대로 그렸을 뿐이었다. 그렇다. 또 늘 그랬듯.
1882년, 마네는 이 그림을 살롱전에 냈다.
마네의 생애 마지막 출품작이었다. 1859년 이후 살롱전 문을 20차례 두드렸던 그의 최후작이었다. 이젠 몸도 성치 않은 그의 졸업작이었다. 당시 나이는 50살이었다. "인간은 패배하도록 창조된 게 아니야. 인간은 파멸당할 수는 있을지 몰라도 패배할 수는 없어." 마네의 끈질김은 작가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소설 '노인과 바다'의 한 구절을 떠올리게 한다.
끝내 승리했다…‘현대미술’ 시작됐다
마지막에 웃는 자는 마네였다.
그림 '폴리 베르제르의 술집'을 출품하기 직전, 마네는 살롱전에서 은상을 받았다. 살롱전 심사위원들의 검토 없이 그림을 전시할 수 있는 자격의 메달, 최고의 영예로 꼽히는 레지옹 도뇌르 훈장도 함께 쥘 수 있었다. 영광을 안긴 그림은 '사자 사냥을 하는 페르튀제'였다.
이 그림도 논란은 있었다.
마네의 친구였던 사업가 겸 모험가 외젠 페르튀제가 한쪽 무릎을 꿇은 채 앉아있다. 맹수 사자를 잡은 만큼 더 당당히 서 있어도 될 법한데, 굳이 엉거주춤할 수 있는 자세를 취한 모습이다. 사자의 위치 또한 어색하다. 낚시꾼이 대왕 메기 자랑하듯 전면에서 자랑해도 될 듯한데, 웬 나무 뒤에 일부가 가려졌다. 페르튀제가 있는 숲은 어떤가. 푸르스름한 색깔로 인해 언뜻 봐선 땅인지, 연못인지 구분하기 어렵다. 그런데도 심사위원들은 거의 최고점을 줬다. 마네는 변하지 않았다. 변한 건 세상이었다. 사람들은 차츰 모더니즘을 품기 시작했다. 고루한 옛 시대 말고, 생생한 우리 세상을 보고 재미를 느끼기 시작했다. 천편일률적인 옛 그림 말고, 각자 개성이 묻어난 요즘 작품을 보고 흥미를 갖기 시작했다. 끝내 마네의 승리였다.
마네의 건강은 40대 중반부터 악화했다.
숨을 점점 거칠게 내쉬었다. 다리에 부분 마비가 생긴 탓에 발을 절었다. 50살을 전후로는 류머티즘을 앓았다. 합병증까지 찾아와 왼발을 절단했다. 1883년, 마네는 눈을 감았다. 얼마 후 '마네 키즈'들이 모였다. 마네의 그림을 십시일반으로 사들였다. 이들은 마네의 흔적을 루브르 박물관에 기증하고자 했다. 마네의 올랭피아는 우여곡절 끝에 27년 후 당당히 걸릴 수 있었다. 마네의 친구이자 동료, 가까운 동생으로 함께한 모네는 올랭피아를 기증할 때 이렇게 기록했다. "시대를 꿰뚫는 안목과 실력을 모두 갖춘 위대한 마네는 이 작품을 통해 그의 오랜 투쟁에서 승리했다."
"그는 우리가 아는 것보다 훨씬 위대한 사람이었다."
마네와 수시로 다툰 드가는 그가 죽고 난 후에야 솔직한 마음을 고백했다. 이 말은 사실이었다. 마네는 현대미술의 씨앗을 품고 달린 거인이었다. 피를 쏟을지언정 쓰러지지 않은 근성의 소유자였다. 전통과 관습, 법칙의 삼중 벽을 뚫은 그는 끝내 예술계 심장부에 그 씨앗을 집어넣었다. 그의 핏자국을 따라 여러 사람의 실루엣이 다가왔다. 그의 이름은 폴 세잔이었다. 파블로 피카소였다. 현대미술은 그렇게 시작됐다.
〈참고 자료〉
마네, 조르주 바타유, 문학동네
벨 에포크, 아름다운 시대, 메리 매콜리프, 현암사
줄리언 반스의 아주 사적인 미술 산책, 줄리언 반스, 다산책방
관계의 미술사, 서배스천 스미, 앵글북스
〈후암동 미술관 현대미술 편 읽는 순서〉
1) “벌거벗은 女로 우릴 조롱” 욕이란 욕 다 먹었다[후암동 미술관-에두아르 마네 편] - 최초의 모더니스트 (2023. 6. 24.)
2)“나체女에 웬 아프리카 가면?” 얼빠졌다 조롱당한 그의 ‘반전’[후암동 미술관-파블로 피카소 편] - 희대의 반항아 (2023. 5. 20.)
3)“내 이름은 로즈” 여장남자된 30대男 전말…‘빅픽처’ 있었다[후암동 미술관-마르셀 뒤샹 편] - 열정의 탐험가 (2023. 6. 10.)
4)시뻘건 내 피와 교감해보겠나…울든, 기절하든 그대 마음[후암동 미술관-마크 로스코 편] -교감의 마술사 (2023. 6. 17.)
5)“죽일거야” 그녀가 쏜 3번째 총알이 몸 관통…죽다 살아났지만[후암동 미술관- 앤디 워홀 편] - 위대한 악동 (2023. 6. 3.)
6)“흑인의 삶 어때?” 무례한 공격들…마돈나도 반한 27살男 무너졌다[후암동 미술관-장 미쉘 바스키아 편] - 자유의 반군 (2023. 5. 27.)
〈후암동 미술관 이론 편 읽는 순서〉
1)천사가 이렇게까지 운다고? 무섭게 왜 그래[후암동 미술관-조토 편] - 르네상스 선구자(2022. 7. 2.)
2)뻥 아냐, 600년전인데 이 정도 ‘입체 그림’ 있었다[후암동 미술관-마사초 편] - 원근법 선구자(2022. 8. 27.)
3)세계서 가장 유명한 이 ‘레이저 눈빛’, 그것은 사랑?[후암동 미술관-얀 반 에이크 편] - 유화 선구자 (2022.5.21.)
4)‘레드벨벳’도 춤추게 한 이 화가의 정체…"악마의 아들? 나 원 참" [후암동 미술관-보스 편] - 초현실주의 선구자 (2022.5.28.)
5)아리따운 금발 여인, 외간남자 목을 베고 있는거야?[후암동 미술관-카라바조 편] - 바로크 선구자 (2022.6.11.)
6)아름다운 여인, 끌어안고 난리난 옆 커플이 부러워[후암동 미술관-와토 편] - 로코코 선구자(2022.10.8.)
7)맨몸 여인들, 전쟁 뛰어들어 “그만!” 사자후…싸움 막았다[후암동 미술관-다비드 편] - 신고전주의 선구자 (2022.10.15.)
8)표류 D+13, 왜 몰랐지? 뗏목 위 널린 게 먹을건데[후암동 미술관-테오도르 제리코 편] - 낭만주의 선구자 (2022.5.14.)
9)“천사요? 데려오면 그려드리죠” 이놈의 똥고집[후암동 미술관-귀스타브 쿠르베 편] - 사실주의 선구자 (2022.5.7.)
10)“관상가 양반 아니었어?” 조선의 ‘얼굴’, 몰랐던 사실[후암동 미술관-윤두서 편] - 사실주의 특별 편 (2022. 11. 19.)
11)벌거벗은 이 여자, 뭐 때문에 빤히 쳐다보나[후암동 미술관-에두아르 마네 편] - 인상주의 선구자(2022. 4. 23.)
12)“못 그렸는데 폼만 잡아” 욕먹던 이 그림, 3300억이요? [후암동 미술관-클로드 모네 편] - 인상주의 선구자⑵ (2022.4.30.)
13)‘점투성이’ 수상한 커플 정체는? [후암동 미술관-조르주 쇠라 편] - 신인상주의 선구자 (2022. 6. 25.)
14)반 고흐 최애작, 별밤·해바라기 아닌 ‘이 사람들’ [후암동 미술관-빈센트 반 고흐 편] - 표현주의 선구자 (2022.6.4.)
15)이 ‘사과’ 때문에 세상이 뒤집혔다, 도대체 왜?[후암동 미술관-폴 세잔 편] - 근대 회화 선구자(2022. 7.9.)
16)‘생각하는 사람’ 진짜 정체, 남모를 사정도 있었다[후암동 미술관-오귀스트 로댕 편] - 근대 조각 선구자 (2022. 10. 22.)
17)화끈한 키스, ‘이 여성’ 사르르 녹아내리다[후암동 미술관-구스타프 클림트 편] - 분리파 선구자 (2022. 8. 13.)
18)나체 여인, 어쩌다 사자 득실대는 정글 한복판에[후암동 미술관-앙리 루소 편] - 근대 초현실주의 선구자 (2022. 7. 30.)
19)헐크색 피부 갖게 된 ‘이 여성’…이 놈의 ‘남편’ 때문에[후암동 미술관-앙리 마티스 편] - 야수주의 선구자 (2022. 7. 16.)
20)잘생긴 법학 교수님, ‘이것’ 그렸더니 미술계 '발칵'[후암동 미술관-바실리 칸딘스키 편] - 추상회화 선구자 (2022.7. 23.)
21)“이건 나도 그리겠다!” 1순위 그림, 그 놀라운 비밀[후암동 미술관-몬드리안 편] - 추상회화 선구자⑵ (2022. 8. 6.)
22)스파게티 면발? 1315억에 팔린 그림, 충격적 이유[후암동 미술관-잭슨 폴록 편] - 액션페인팅 선구자 (2022. 10. 29.)
23)몸 좋은 보디빌더, 거대 막대사탕 들고 ‘의문의 포즈’[후암동 미술관-리처드 해밀턴 편] - 팝아트 선구자 (2022.11.12.)
24)“동양서 ‘테러리스트’가 왔다” 피아노 다 때려부쉈다[후암동 미술관-백남준 편] - 비디오 아트 선구자 (2022.11.26.)
〈후암동 미술관 인물 편 읽는 순서〉
1)“이런 나체화는 뒷골목에 내걸어!” 꼬장한 천재 모욕한 자 최후는[후암동 미술관-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 편] - 신의 예술가 (2023. 4. 7.)
2)“12살 어린 빵집女와 몰래 연애를?” 소름돋은 목격자, ‘증거인멸’해줬다[후암동 미술관-라파엘로 산치오 편] - 모든 화가의 왕자 (2023. 4. 15.)
3)“성폭행 피해자는 나야!” 고문도 견딘 그녀…복수는 우아했다[후암동 미술관-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 편] - 영원한 복수자 (2023. 1. 28.)
4)“예쁜 내 금발 공주님”…‘딸바보’ 국왕 눈에선 꿀이 뚝뚝[후암동 미술관-디에고 벨라스케스 편] - 고결한 관찰자 (2023. 2. 24.)
5)“아내·자식·명예 다 잃었다”…그런데 왜 ‘빵’ 터지셨어요[후암동 미술관-렘브란트 편] - 빛의 마술사 (2023. 1. 7.)
6)‘이 그림’ 때문에 화형당할뻔…어느 야심가의 기구한 삶[후암동 미술관-프란시스코 고야 편] - 흑화한 사상가 (2023. 2. 4.)
7)“날 잊지마오” 가시덤불 ‘감옥’ 8년 갇혔다…그림에 펑펑 울었다[후암동 미술관-추사 김정희 편] - 조선의 품격 (2023. 3. 11.)
8)“6년 약혼女두고 바람…죽자 묘지까지 파헤쳤다” 이 남자, 변명 들어보니[후암동 미술관-단테 가브리엘 로제티 편] - 위험한 사랑꾼 (2023. 3. 18.)
9)“죄송해요, 엄마가 너무 싫어요” 효자 아니었어?…이 화가의 ‘반전’[후암동 미술관-제임스 휘슬러 편] - 모던한 이방인 (2023. 3. 4.)
10)“14살 소녀 이따위로 만들었어?” 평생 먹을 욕 다 먹었다[후암동 미술관-에드가 드가 편] - 무희의 화가 (2023. 3. 25.)
11)‘미녀 그리기’에 진심이었던 이 화가, 진짜 이유[후암동 미술관-오귀스트 르누아르 편] - 행복을 그린 화가 (2022. 12. 24.)
12)“고갱 그놈, 도대체 왜 그래?” 악마인지 ‘악마의 재능’인지[후암동 미술관-폴 고갱 편] - 고귀한 야만인 (2022. 12. 3.)
13)“나랑 6년 계약해” 유명 女배우의 파격제안…인생 달라졌다[후암동 미술관-알폰스 무하 편] -체코의 긍지 (2023. 2. 18.)
14)“백번은 넘게 봤겠다” 모두 아는 ‘이 절규’의 놀라운 비밀[후암동 미술관-에드바르 뭉크 편] - 노르웨이의 현자 (2022. 12. 31.)
15)“이놈의 짧은 다리 때문에” 카바레 스타의 영광과 몰락[후암동 미술관-툴루즈 로트레크 편] - 작은 거인 (2022. 12. 17.)
16)“로댕 아이를 뱄다” 폭탄선언 여성, 30년 수용소에 갇혔다[후암동 미술관-카미유 클로델 편] - 천재와 맞선 천재 (2022. 11. 5.)
17)눈동자 없는 기괴한 여자 그림, 알고 보니[후암동 미술관-아메데오 모딜리아니 편] - 파리의 귀공자 (2022. 12. 10.)
18)숨참고 키스 다이브!…아내가 그렇게 좋으셨어요[후암동 미술관-마르크 샤갈 편] - 순수한 방랑자 (2023. 2. 11.)
19)“당신은 저질 누드화가야!” 격분한 판사, 면전서 그림 불태웠다[후암동 미술관-에곤 실레 편] - 영원한 아이 (2023. 4. 1.)
20)당신은 모르실거야, 키스하는 두 사람 왜 이 꼴인지[후암동 미술관-르네 마그리트 편] - ‘진짜’ 괴짜 (2022. 9. 3.)
21)피카소도 ‘이 그림’에 “대박!” 감탄, 각성했다는데[후암동 미술관-피카소·마티스 편] - 피·마 대전 (2022. 9. 10.)
22)3번 유산·35번 수술의 악몽…그럼에도, 인생이여 만세[후암동 미술관-프리다 칼로 편] - 고통의 여왕 (2023. 1. 14.)
23)“내 천사여” 편지 사방팔방에 ‘뽀뽀’…한 무연고자의 죽음[후암동 미술관-이중섭 편] - 아고리, 나의 아고리 (2023. 1. 21.)
24)권총도 채찍도 버텼는데, ‘이 남자’ 행동에 무너졌다[후암동 미술관-마리나 아브라모비치 편] - 우아한 전사 (2022. 8. 20.)
〈후암동 미술관 현장 편 읽는 순서〉
1)이건희 컬렉션, 이 ‘다섯 작품’ 놓치지 마시라[후암동 미술관-‘어느 수집가의 초대’ 출장 편] - 전시 특집 (2022. 6. 18.)
2)알코올 중독 ‘이 남자’, ‘파리’에 미치자 놀라운 일 터졌다[후암동 미술관-몽마르트 언덕 편] - 동행자 : 모리스 위트릴로 (2022. 9. 17.)
3)고흐 “슬픔은 왜 나한테만” 펑펑 울었다, 고작 2평 다락방에서[후암동 미술관-오베르 편] - 동행자 : 빈센트 반 고흐 (2022 9. 24.)
4)모네 “앞이 안 보여도 상관없어”…백내장도 못 막은 그의 ‘최후작’[후암동 미술관-지베르니 편] - 동행자 : 클로드 모네 (2022. 1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