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미술 창시자
<함께 보는 작품>
사과와 오렌지
생 빅투아르산
대수욕도
편집자주
페르메이르의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를 본 뒤 관련 책과 영화를 모두 찾아봤습니다. 잘 그린 건 알겠는데 이 그림이 왜 유명한지 궁금했습니다. 그림 한 장에 얽힌 이야기가 그렇게 많은지 몰랐습니다. 즐거웠습니다. 세상을 보는 눈이 조금은 달라졌다는 느낌도 받았습니다. 이 경험을 나누고자 글을 씁니다. 미술사에서 가장 논란이 된 작품, 그래서 가장 혁신적인 작품, 결국에는 가장 유명해진 작품들을 함께 살펴봅니다. 기사는 역사적 사실 기반에 일부 상상력을 더한 스토리텔링 방식으로 쓰여졌습니다.
[헤럴드경제=이원율 기자]"그런데 말이야."
이 사내는 오늘 처음으로 입을 뗐다. 목소리는 걸걸했다. 그는 손에 쥔 카드패를 구길 듯이 손가락에 힘을 줬다. 육중한 다리를 산만하게 움직였다. "크흠, 친구. 드디어 좋은 패가 들어왔나?" 맞은 편에 앉은 동년배 남자가 씩 웃었다. 덥수룩한 수염 틈으로 누런 이를 내보였다. 싸구려 담배를 입에 문 채였다. "안목이 썩 괜찮은 화가가 있었어." 사내는 못 들은 척 말을 이어갔다. "문제는 세상이 녀석을 알아주지 않았다는 거야." "갑자기 무슨 말인가?" "들어봐. 그 화가는 회심의 그림을 살롱전에 출품했어. 결과는 낙선이었지." "아무렴. 성공이 어디 쉬운가." 말을 듣고 있던 남자가 습관처럼 기다란 턱수염을 쓸어내렸다.
"낙담한 화가는 파리에서 시골로 도망치듯 와버렸어. 그런데 끝내 절망감을 못 이기고…"
"크흠, 이제야 알겠네. 그 화가 이름이 폴 세잔, 바로 당신이란 거지? 이봐, 괜찮아. 자네는 아직 쓸 만해!" 실패한 화가 이야기를 들려주던 세잔은 털보의 말을 듣자마자 눈썹 사이를 구겼다. "그러니까, 자네가 듣기에도 내 이야기 속 화가놈이 나 같단 말이지?" "그래. 자네 이야기 아니었어?" "에밀 졸라, 이 개자식!" 세잔은 주먹을 들고 갑자기 테이블을 쾅 쳤다.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코트를 홱 걸쳤다. "크흠, 이봐. 카드놀이하던 건 어쩌고? 졸라는 저 멀리 파리에 있다며? 다른 세상에 있는 그 친구 욕은 갑자기 왜 하는…." "역시 날 조롱한 게 맞았어. 빌어먹을." 세잔은 당황한 털보를 뒤로한 채 문을 쾅 닫고 나가버렸다. "…하여간 저 성질머리하고는. 나이 들고 처음 봤는데도 변한 게 없군. 졸라와는 어릴 적부터 절친 아니었나? 대체 왜 저러는지." 남겨진 털보가 바닥에 떨어진 카드 뭉치를 주우며 투덜댔다.
졸라. 아무리 내가 패배자라지만, 이따위 모욕을 줘?
세잔은 혼잣말을 하며 시골길을 걸어갔다. 세잔은 졸라가 낸 새 소설 '작품' 속 주인공의 삶을 간만에 본 고향 친구 털보에게 말한 것이었다. 소설에는 끝내 절망감을 못 이기고 극단적 선택을 하는 실패자가 등장했다. 세잔은 졸라가 자기를 모델로 이 비운의 주인공을 창조했을 것으로 확신했다. 살롱전에 그림을 내면 욕만 먹는 머저리, 도시에 있지 못하고 시골로 돌아온 부적응자…. 모두 자기 얘기 같았다. '…그는 열과 성을 다해 캔버스 위에 자연의 모든 것을 옮기려고 했지만 끝내 작품을 완성하지 못하고 (…) 별 볼 일 없는 사람,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사람, 소외되는 사람, 얼마나 우울하고 처량한가.' 세잔은 졸라의 소설 속 이 문장을 읽고선 뜨끔했다. 분노와 치욕스러움에 손발이 떨렸다. "어느 날 졸라의 책 '작품'을 받았어. 그 책은 정말 충격적이었어. 그가 나를 내심 어떻게 생각해 왔는지 알게 됐지. 몹시 나쁜 책이고, 다 틀린 이야기야." 이쯤 세잔은 한 술자리에서 이런 말도 했다.
원래 세잔과 졸라는 형제보다 더 가까운 죽마고우였다.
어릴 때는 세잔이 졸라를 챙겼다. 이탈리아 이민자 출신의 졸라는 항상 무언가 부족했다. 넝마를 입은 그는 늘 주변 눈치를 봤다. 세잔이 그런 졸라에게 손을 내밀었다. 남다른 덩치의 세잔은 졸라에게 달라붙는 불량배를 내쫓았다. 종종 세잔은 졸라를 부축하며 생 빅투아르 산을 탐방했다. 초록 잎에 코를 댔다. 엉금엉금 기어가는 곤충을 손가락으로 톡톡 건드렸다. 두 사람은 산속 계곡에 파묻혀 어떻게 살아갈지를 고민했다. 둘 다 꿈은 예술가였다. 서로 잘되기로 약속했다. 그런데 30년이 흐른 지금은? 세잔은 실패한 화가였다. 졸라는 대문호(大文豪)를 향해 착실히 가고 있는 성공한 작가였다. "나도 네놈 소설 속 주인공처럼 죽으라는 건가? 졸라 자식. 어릴 적 결핍은 다 잊고 저택에, 양탄자에, 비싼 가구들에…. 오만해지더니 이젠 타락했군." 세잔은 혼잣말을 했다. 바닥에 침을 탁 뱉었다. 나는 내 길을 포기하지 않아, 절대 포기하지 않아…. 거듭 중얼댔다.
세잔은 한때 영혼의 단짝이던 졸라와 다시는 만나려고 하지 않았다. 인간 혐오가 생긴 듯 세상 사람들을 더 멀리했다. 시골에 파묻힌 채 더 깊은 은둔의 골로 들어갔다. 그의 인생은 그렇게 끝날 게 확실해보였다. 아무도 몰랐다. 그런 그가 곧 19세기 가장 위대한 화가 중 한 명이 될 줄은.
파리로 간 시골 쥐…드라마는 없었다
세잔은 1839년 남프랑스 엑상프로방스에서 세상 빛을 봤다.
아버지는 규모있는 은행의 창업주였다. 소위 금수저 집안이었다. 세잔은 법학을 공부했다. 길거리 모자 판매부터 은행 설립에 이르기까지 갖은 생고생을 한 아버지의 한풀이였다. "판사나 변호사를 해라. '교양 없는 졸부'라는 말이 더는 나오지 않도록." 아버지의 당부이자 부탁이었다. 그러나 세잔의 진짜 관심은 다른 데 있었다. 예술이었다. 세잔은 그림을 그리고 싶었다. 눈이 시리도록 밝은 햇살, 목덜미를 스쳐가는 바람, 나아가 엑상프로방스 특유의 진한 녹음(綠陰)을 화폭에 담고 싶었다. 세잔은 꿈을 억누른 채 일대 법과대학에 진학했다. 은행에서 아르바이트도 했다. 도저히 안 맞았다. 세잔은 끝내 아버지에게 고백했다. 법조인 따위 할 수 없노라고 털어놨다. 사실 아버지도 알고 있었다. 머리는 꽤 좋지만 그뿐, 이 어눌하고 툴툴대는 아이에게 법조인 자질은 찾기 힘들구나. 비쩍 곯은 한 녀석과 산에 올라 그림이나 그리더니 설마…. "아버지, 저는 화가가 되고 싶어요." 세잔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널리고 깔린 직업 중에 왜 하필 화가냐." 아버지는 아들의 결심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너도 요즘 애들처럼 예술병에 걸렸어? 차라리 내 밑에서…." "죄송해요. 그럴 수 없어요." 세잔도 지지 않았다. 냉전은 3년쯤 이어졌다. 그때도 부모는 자식을 이길 수 없었다. 세잔은 대학을 중퇴했다. 1861년, 무작정 파리로 갔다. 그가 22살 때였다. 평생 편히 살 수 있는 지름길을 등진 그는 인내의 삶, 고통의 여정에 발 디뎠다.
파리로 온 세잔은 촌스러운 행색이었다.
" 어이, 친구!" 기차에서 내린 세잔을 보고 한 사내가 소리쳤다. 팔이 떨어질 듯 손을 흔들었다. 파리에서 먼저 둥지를 튼 졸라였다. "반갑네, 반가워. 시골 쥐들끼리 잘 지내보세." 졸라가 씩 웃었다. 파리 물을 먼저 마신 졸라의 처지는 조금 더 나았다. 출판사에 번번이 퇴짜를 맞았지만, 나름 추종자도 생기고 있었다. 세잔은 그런 졸라 덕에 젊은 예술가 모임에 낄 수 있었다.
그러나 재야의 고수가 좋은 사람들을 만나 성공 가도에 오른다는 식의 성공 드라마는 없었다.
세잔은 우물 안 개구리였다. 동네에선 나름 한가닥한 그가 파리에선 그저 평범한 화가 중 하나였다. 그는 카미유 피사로, 에두아르 마네, 에드가 드가 등 실력과 독창성을 모두 갖춘 괴물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이 사람들조차 제대로 된 대접을 받지 못한다는 데 더 충격을 받았다. 세잔은 자기 그림과 이들의 그림을 견줘봤다. 그의 붓질은 부끄러울 만큼 평범했다. 피사로의 작품보다 정갈하지도 않고, 마네나 드가의 작품만큼 파격적이지도 않았다. 젠장, 젠장!…. 그는 좌절했다.
그러나 절망은 오래가지 않았다. 그는 온갖 부정적 감정을 게걸스럽게 입에 넣었다. 이를 뱉지 않고 바득바득 씹어먹어 동력으로 만들었다. 분노와 비관에 잠식되지 않고 그 안에서 어떻게든 헤엄치는 것. 세잔 평생의 생을 특징짓는 가장 큰 성향이었다. 세잔은 작업실과 골목길을 오가며 그림을 그렸다. 마구 긋고 마구 칠했다. 당시 그의 심정이었는지, 거무죽죽한 그림이 거듭 탄생했다. "고작 이따위로!" 그는 허구한 날 그림을 걷어찼다. 캔버스를 마구 밟았다. 마음속에 있는 무언가를 온전히 표현할 수 없어 낙담했다. "친구. 붓을 또 집어던졌다지. 왜 그렇게 변덕이 죽 끓듯 하는가." 부쩍 예민해진 세잔에게 졸라가 쓴 편지였다. 나는 천 번이고 만 번이고 그리고, 걷어차고, 찢을거야. 그들을 이길 그간 없던 예술을 찾고 말겠어. 세잔은 입술을 깨물었다.
하지만 평범한 화가가 뜻밖의 재능을 찾고 단숨에 예술계를 제패한다는 식의 반전 드라마도 없었다.
세잔은 프랑스 국립미술학교(에콜 데 보자르·L‘Ecole des Beaux-Arts) 입학에 실패했다. 살롱전에서도 계속 탈락했다. 세잔은 인고의 시간만 겪었다. 그런 그는 어느 날 굳은 표정으로 초상화 한 점을 그렸다. 1866년, 파리로 온 후 5년쯤 흐른 뒤였다. 모델은 아버지였다. 자기 앞에서는 아픈 말을 쏟아내지만, 뒤에서는 행여나 빌빌댈까봐 생활비를 보내주는 애증의 대상이었다. 그림 속 세잔의 아버지는 의자에 걸터앉아 신문을 보고 있다. 1865년에 창간한 '레벤망(L’Événement)'이다. 아버지가 가장 싫어하는 아들 친구, 졸라가 소설을 연재하는 매체였다. 그걸 굳이 보는 아버지도, 앞서 하필 이 신문을 건넨 아들도 보통은 아니었다. 세잔의 아버지는 노안이 온 듯 얼굴을 구기면서 신문을 읽고 있다. 혹시 오늘은 내 아들 이름이 있을까. 이놈이 기어코 살롱전 최고 화가로 뽑혔다는 기사가 실리지는 않았을까. 기대하는 듯도 하다. 제목은 '신문을 읽는 화가의 아버지'였다. 세잔은 아버지가 아들의 행복을 염원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아버지의 뜻을 걷어찬 아들이지만, 이렇게 된 이상 거기서 삶의 가치를 찾길 바란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세잔은 그런 아버지에게 고맙고도 죄송한 마음이 있었다. 아버지가 곧 내 이름이 쓰인 신문을 읽도록…. 세잔은 이 그림을 그리며 마음을 다잡았을 듯하다. 이제, 다시 현실이었다.
조롱·모욕 다 견디고…오직 ‘본질’을 찾아서
"함께 할까?"
1874년, 세잔은 살롱전과 상관없는 '우리만의 전시'를 기획하는 한 화가에게 제안을 받았다. 웬 어중이떠중이가 한 말이었다면 성질이나 냈을 것이다. 그런데 그 말을 한 사람은 피사로였다. 세련된 감각, 따뜻한 포용으로 훗날 인상주의 화가들의 맏형이 되는 사내였다. 깐깐한 세잔이 흠모하는 몇 안 되는 남자기도 했다. 세잔은 고민 끝에 피사로, 드가, 클로드 모네, 오귀스트 르누아르 등과 전시를 개최했다. 야심 차게 열었으나 결과는 처참했다. 기성 화단은 이들의 도전적인 그림을 이해하지 못했다. 인상주의라는 명칭이 처음 탄생한 행사였지만, 당시 이 용어에는 "그림에 본질은 없고 인상만 있다"는 식의 조롱만 담겨있었다. 평단은 특히 세잔을 향해 저주 같은 막말을 내뱉었다. 그의 어두운 그림을 놓고 "임산부는 보면 안 된다"는 투의 극언을 했다. "피사로, 내가 뭐랬어. 저 녀석 그림은 우리와도 어울리지 않아. 그냥 손가락질로 끝날 걸 쟤 때문에 따귀까지 맞은 격이라고!" 세잔 특유의 시니컬함을 싫어한 '동료'들도 이때다 싶어 그를 내몰았다.
세잔의 그림은 확실히 특이했다.
그 특이한 인상주의자들 틈에서도 가장 특이했다. 세잔은 화폭에 형상과 구도를 단순화한 그림을 그렸다. 드라마틱한 구성도, 밝은 색채의 기교도 없었다. 그렇기에 언뜻 보면 어린애 낙서 같았다. 가령 세잔의 대표적 특이한 그림인 '사과와 오렌지'를 보면, 두 종류 과일이 하나같이 동글동글하게 그려졌다. 벌레 먹은 과일, 울퉁불퉁한 못난이 과일도 있을 법한데 다 똑같은 구(球·공처럼 둥글게 생긴 물체)의 모습이다. 세잔은 귀찮으니까 그냥 안 보고 대충 그린 걸까. 사실 반대였다. 세잔은 사과와 오렌지를 뚫어지게 쳐다봤다. 잘 썩지 않는 사과가 썩고, 바꾼 사과가 또 썩을 때까지 관찰했다. 이 그림은 몇 년에 걸쳐 겨우(!) 완성한 작품이었다.
그러면 무엇이 그리 어려웠던 걸까. 세잔은 대상의 겉모습에 만족하지 못했다. 그가 원한 건 대상의 본질이었다. 그러니까 사과와 오렌지를 인간의 색안경에서 '입에 넣고 씹으면 달콤한 맛이 나는 디저트'로 보지 않고, 이를 벗어던진 채 사과와 오렌지 '그 자체'의 본질을 보고자 했다. 세잔은 사과와 오렌지의 본질을 구로 봤다. 세잔에 앞서 마네는 대상을 '보이는 대로' 그렸다. 신격화 등 각색, 원근법과 중간색 등 기계적 법칙을 내던졌다. 그렇게 해 '풀밭 위의 점심 식사', '올랭피아' 같은 작품이 탄생했다. 세잔은 더 나아갔다. 보이는 대로? 아니, 난 보이는 대상이 꼭꼭 감춘 본질까지 파고들어 그리겠어…. "우리 눈앞에 있는 모든 건 흩어지고 사라져. 자연은 늘 그대로지만, 겉모습은 항상 바뀐단 말이야. 우리 예술가의 임무는 늘 변화하는 외양을 가졌으면서도 여전히 그대로인 자연의 영원함, 그 신비로움을 꽉 붙잡는 것이야. 그림으로 그 자연의 영원함을 맛볼 수 있도록 해야 해." 세잔은 대상의 본질을 끄집어냈다. 그 결과, 구라는 새로운 형태를 부여한 것이었다. 수백년, 어쩌면 수천년간 아무도 하지 않은 시도였다. 혁명 정도가 아니었다. 새로운 제국 건설이었다.
그에게 '그림을 사진처럼 잘 그렸다'는 말은 치욕이었다. 훗날, 세잔이 찾은 본질의 형태를 마구 흩뜨린 후 다시 짜 맞추는 이가 등장한다. 그런데 이를 원래 있던 곳이 아닌 이상한 데 제멋대로 끼워 넣는다. 그의 이름은 파블로 피카소였다. 그의 방식은 입체주의였다. 먼 미래, 피카소는 "세잔은 나의 아버지"라며 받들었다.
하지만 이 또한 미래의 평가일 뿐, 당장의 세잔은 그냥 어디가 아픈 사람처럼 보일 뿐이었다.
세잔은 그런 모욕을 당하고도 그저 참고 견디기만 했다. 그는 아침 6시부터 11시까지는 작업실, 정오부터 4시까지는 루브르 박물관에서 계속 그리기만 했다. 밤이 되면 또 작업실과 골목길에 처박혀있었다. 가끔 답답할 땐 파리 시내 카페 게르부아 등에서 앉아있었다. 보풀 잔뜩 생긴 외투를 걸친 그는 구석에서 또 뭘 그리고 있었다. 마네와 드가, 모네 등이 건너편 테이블에서 시끌벅적 떠들 때도 못 본 척 술이나 콸콸 마셨다. "세상은 나를 이해하지 못해. 그런데 말이야. 나도 그런 세상을 이해하지 못하겠어." 세잔은 술에 취할 때면 이런 말도 했다. 내 길을 계속 가겠다는 선언이었다.
그사이 그의 단짝 졸라는?
졸라는 기회를 잡았다. 1865년, 졸라는 사실상 홀로 마네를 옹호하는 글을 썼다. 마네가 '올랭피아'를 선보이고 욕이란 욕은 다 먹고 있을 때였다. 감히 성매매 여성을 성스러운 비너스처럼 그렸다며 주류 예술계가 격분한 와중이었다. 세잔은 처음 본 '파리의 괴물들'에 충격을 받고 작업실에서 자기 그림을 북북 찢고 있던 그 기간이었다. "다른 화가들은 캔버스에 대고 비너스의 거짓말을 표현할 때(모델을 억지로 미화할 때), 마네는 스스로 물었다. 왜 거짓말을 해야 하는가. 왜 진실을 말하지 않는가." 졸라의 비평은 발칙했다. 그러나 그 안에는 주류 예술계가 반박할 수 없는 날카로움이 있었다. 졸라는 도전적인 젊은 예술가들 틈에서 주목받았다. 그는 곧 파리의 신(新)지식인으로 칭해졌다. 유명세는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이제 글을 쓰면 돈이 들어왔다. 성공이었다.
50줄 바라보는 나이에…여전히 ‘실패자’였다
1880년대 초부터 세잔은 고향을 찾는 빈도가 잦아졌다.
기성 화단은 한심했다. 이들과 맞선 인상주의 화가들도 성에 차지 않았다. 좀 더 밝은 그림을 그려라, 좀 더 화사한 그림은 없느냐는 식으로 양쪽에서 내던지는 훈수도 지겨웠다. 한때 소망한 '파리 드림'은 졸라의 것이었다. 성깔있는 산적 두목 같은 세잔의 것이 아니었다. 세잔은 파리에서 아예 짐을 쌌다. 도시에서 완전히 벗어났다. 그는 이제 40살을 훌쩍 넘긴, 참고 견디기만 했을 뿐 무엇 하나 이룬 게 없는 천둥벌거숭이였다. 이쯤 세잔은 졸라의 소설 '작품'을 받았다. 자식, 많이 컸어. 세잔은 책을 펼쳤다. 그의 표정은 종이가 넘어갈수록 굳어졌다. 인정받지 못한 채 망상에 빠져들다가 끝내 극단적 선택을 하는 화가. 소설 속 주인공의 삶에서 자기 모습이 거듭 겹쳐보였다. 자격지심이라기엔 뼈아프게 비슷했다. 실제로 그 말고도 당시 책을 읽은 이 중 상당수가 세잔을 생각했다. 졸라조차 훗날 비망록에서 "극적으로 각색한 마네 또는 세잔, 굳이 말하면 세잔에 가까운 인물"이라고 고백했다. 물론 졸라는 세잔을 비하하려고 이 글을 쓴 게 아니었다. 철옹성 같은 관습 앞에서 반항하고 저항하는 게 얼마나 힘든지를 극단적으로 표현한 것이었다. 세잔이 졸라의 마음을 알 리 없었다. 세잔은 책을 탁 덮었다. 냅다 던져버렸다.
세잔이 도시를 등진 건 그림을 포기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반대였다. 외풍 없이 더 오래, 더 많이 그리기 위해서였다. 세잔은 어릴 적 졸라와 산책하던 그곳, 생 빅투아르산 언덕에 작업실을 차렸다. 거기에서 먹고 자던 세잔은 눈 뜨면 붓을 쥐었다. 계시를 받은 양 이젤과 캔버스를 챙겨 조용히 밖으로 나갔다. "휴." 세잔이 종일 하는 말은 한숨이 전부였다. 세잔은 생 빅투아르산을 그렸다. 파리에서 그랬듯, 대상의 본질을 탐구하는 자기만의 방식을 지속했다. 그림 한 점을 그리는 데 필요한 작업 횟수는 최소 백 번이었다. 그는 붓만 대지 않았다. 셀 수 없이 산에 올랐다. 비가 와도, 눈에 와도 올라갔다. 흙을 쥐고, 꽃향기를 맡고, 계곡물의 차가움을 느꼈다.
그렇게 해 완성한 그림들은 또 하나 같이 특이했다.
세잔은 그림을 그리며 산과 자연을 분석했다. 본질을 찾아 깊이 천착(穿鑿)했다. 깨달았다. 그가 볼 때 자연의 본질은 도형이었다. 흙 알갱이, 꽃잎, 땅을 향해 꺾여 내려오는 들풀과 가지, 물의 파동, 어릴 적 졸라와 함께 올려다본 초승달까지 모두 도형의 일부였다. 모든 고정관념을 걷어낸 그가 자연에서 본 건 원이었다. 원뿔이었다. 원기둥이었다. 매끈한 도형들이었다. 세잔은 거친 붓질로 생 빅투아르산을 표현했다. 구성은 단조롭게, 색 조합도 단순하게 했다. 그는 화폭에 도형의 여러 모습을 그렸다. 규칙과 리듬을 녹여냈다. 원근법이니, 빛의 양이니 하는 건 인간의 기교일 뿐, 자연의 본질이 아니기에 배제했다. 그 결과, 드디어 대상의 재현(再現)을 벗어던진 새로운 그림이 탄생했다. '보이는 대로 그린다? 아니, 더 나아가 느낀대로 그린다.' 현대미술의 헌법 같은 이 말이 생명력을 얻는 순간이었다. 평생 멍청이 소리만 듣고 살았던 이 실패자의 손끝에서. 그간의 수모가 떠올랐다. 꾹꾹 참고 견딘 치욕의 순간들이 스쳐갔다. 비로소 세잔의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세잔은 생 빅투아르 산을 주제로만 30점 넘는 그림을 완성했다.
세잔은 인간의 본질도 연구했다.
그 시절 세잔이 또 하나 되풀이해 그린 주제는 목욕하는 사람들이었다. 세잔은 어떻게 해야 더 은밀해 보일지, 무슨 수를 써야 더 아슬아슬하게 보일지 등에는 전혀 관심 없었다. 그가 바란 건 인간의 원형 분석이었다. 인간과 자연과의 조화 탐구였다. 세잔은 인간을 도형처럼 단순하게 그렸다. 고정관념을 다 벗어던진 눈으로 본 인간의 본질만 표현했다. 표정과 근육 등 오밀조밀한 신체 묘사 따위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다음 위로는 강과 하늘, 아래로는 인간과 땅, 옆으로는 인간과 나무를 맞물리게 했다. 그렇게 해 자연과 인간을 피라미드 형상 속에 눌러 담았다. 본질과 본질이 포개졌다. 이 자체로 완성작이었다. 더는 손댈 게 없었다. 재현 대신 영혼이 있는 그림, 아름다움 대신 운동감과 리듬감이 있는 그림…. 이 또한 그간 없는 작품이었다. 그리고, 앞으로 펼쳐질 모든 현대 미술의 교본이 될 작품이었다. 제목은 '대수욕도'(목욕하는 사람들)였다. "나는 약간의 진경을 개척했소. 그렇지만, 왜 이렇게 많은 시간과 어려움을 겪어야 했던 거요? 예술은 순수한 마음을 완전히 바쳐야만 그 결실을 볼 수 있는 사제직 같은 거요?" 언젠가 세잔은 이런 말도 남겼다.
그 세잔이 연애를 해?…파리가 술렁였다
삶 전체가 오직 그림뿐이었던 세잔은 의외로(?) 연애를 했다.
1869년, 아직 파리에 머무르고 있던 세잔은 그림 모델로 한 여성과 마주했다. 새하얀 피부, 곧은 자세를 가진 그녀는 오르탕스 피케였다. 앳된 몸을 이끌고 산골에서 파리로 온 소녀였다. 여러 허드렛일을 하고 있던 그녀는 종종 미술학도 앞에 섰다. 외모로도, 센스로도 인기있는 모델이었다. 사랑 따위 사치라고 여길 듯한 세잔은 그런 피케를 보고 첫눈에 반했다. 그 지독한 사람이 붓을 제대로 들지 못할 정도였다. 긴장감에 손을 덜덜 떨고 있으니 무엇이 그려질 리도 없었다. 세잔 자신도 살면서 처음 겪는 일이었다. 덩치는 산만한데 귀여운 면이 있네? 피케도 그에게 호감이 갔다. 얼마 후 세잔은 피케에게 전속 모델 일을 제안했다. "좋아요." 피케는 고개를 끄덕였다. 세잔은 피케를 캔버스 앞에 다시 세웠다. 붓을 들자니 심장이 또 쿵쿵 뛰었다. 그림 연습을 하려면 빨리 이 관계를 결정지어야 했다. 세잔은 안절부절못했다. 머리를 계속 긁적였다. "전에도 묻고 싶었는데, 어디가 불편해요?" 피케가 물었다. "아니, 그…." 세잔은 말끝을 흐렸다. 그런 그는 갑자기 훅 치고 들어왔다. "피케 양. 나랑 진지하게 만나보는 건 어떠오?" 당시 세잔은 30살, 피케는 19살이었다.
그 세잔이 연애를 해…?
세잔과 피케의 행보는 파리 내 젊은 예술가들에게 충격을 줬다. 사교성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뻣뻣한 남자를 설레게한 여성의 매력에 모두가 감탄했다. 일각에선 질이 나쁜 소문도 흘러나왔다. 세잔은 그저 피케를 평생의 공짜 모델로 '소유'하기 위해 대시했다더라, 피케는 세잔이 은행가 부잣집 아들이란 점을 알고 그 배경을 생각해 교제한다더라는 식이었다.
둘은 그따위 소문을 이겨내고 보란 듯 잘 사는 것처럼 보였다.
1872년에는 아들도 낳았다. 서로 뜻을 맞춰 아들 이름도 '폴'이라고 지었다. 하지만 둘 사이 행복은 이쯤에서 끝이었다. 콩깍지가 벗겨진 걸까. 관계에 차츰 금이 갔다. 점점 서로가 서로를 한심하게 보기 시작했다. 세잔은 피케가 답답했다. 교양도 없고, 안목도 없는 듯 보였다. 딱히 뭘 배워보겠다는 의지도 없는 것 같았다. 거적 같은 외투나 걸치던 세잔이 볼 때 피케는 소유욕과 허영심도 많은 것처럼 느껴졌다. 피케도 세잔이 답답하긴 마찬가지였다. 세잔은 피케와 사귀고, 동거하고, 나아가 아들까지 낳았다는 걸 아버지에게 꼭꼭 숨겼다. 그가 모델과 이러고 있다는 걸 알면 아버지가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었다. 아들의 행보를 참고, 또 참아준 아버지가 이번 일만큼은 용납할 것 같지 않았다. 그나마 아버지가 매달 부쳐주는 생활비가 끊길 건 당연한 일이었다. 피케는 유독 가족에게만 당당하지 못한 세잔을 보고 실망했다. 그렇다고 생활비가 그렇게 많지도 않았다. 세끼 밥만 챙겨 먹을 정도였다. 더 견디기 힘든 게 있었다. 세잔의 모델이 되는 일이었다. 피케는 수시로 그의 이젤 앞에 섰다. 세잔은 더는 수줍어하지 않았다. 피케가 살짝 몸을 틀기라도 하면 불같이 화를 냈다. 세잔은 초상화 한 점을 위해 피케를 거의 백 번씩 세웠다. 피케 입장에선 미칠 노릇이었다. 이어지는 본질 타령에 토가 나올 지경이었다. 세잔은 피케 초상화만 29점을 그렸다고 한다. 그녀의 고통을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다.
1878년, 겨울. 세잔과 피케가 동거한 지 10년이 다 돼가는 때였다.
편지 한 통이 세잔의 아버지 집 문을 두드렸다. 아버지는 이를 뜯어 읽어봤다. "…세잔 부인과 어린 폴에게도 안부를 보내오." 종이에 쓰인 마지막 문장이었다. 세잔 부인? 어린 폴은 또 누구야…? 아버지는 그제야 이상함을 느꼈다. 세잔의 친구가 치명적 실수를 한 것이었다(비슷한 시기에 피케의 가족도 별 생각 없이 그 집에 편지를 보냈다는 말이 있다). 아버지는 종종 집에 오는 아들을 기다렸다. 그리고, 드디어 그날이었다. "네 이름으로 편지가 왔다. 그런데, 네 친구라는 녀석이 네 아내와 아들 안부도 묻더군." 아버지는 세잔에게 돌직구를 가했다. 세잔은 그대로 굳었다. 아버지의 눈을 봤다. 이미 상황 파악이 끝난 모습이었다. "아버지. 실은요. 그게 어떻게 된 일이냐면…." 세잔은 말을 더듬었다. "오늘은 집에서 나가거라." 아버지는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눈치를 보던 세잔은 슬금슬금 짐을 챙겼다. "저 돈, 들고 가라. 세잔 부인 집에 보내든, 그 어린 폴에게 뭘 먹이든." 아버지가 가리키는 봉투에는 돈이 두둑했다. 이후 아버지는 고민 끝에 아들에게 다시 생활비를 보내줬다. 마음 같아서는 그 봉투를 끝으로 확 끊어버리고 싶었다. 그럴 수 없었다. 그래도 아버지는 아버지였고, 아들은 아들이었던 것이다. 1886년, 아버지는 죽음을 몇 달 앞두고서 둘의 결혼을 승낙했다.
다만, 애석히도 세잔과 피케의 관계는 파탄 나 있었다. 이들에게 혼인이란 아들 폴을 위한 배려, 재산 상속을 위한 형식적 절차에 불과했다. 세잔은 아버지가 숨진 직후 피케와 별거했다. 둘은 끝내 사이를 회복하지 못했다.
위대한 은둔…끝내 ‘괴물’이 되다
"누구쇼?"
"세잔 선생이오? 반갑소!"
1895년, 시골 작업실에 틀어박힌 세잔에게 한 사내가 찾아왔다. 중절모를 벗은 그가 땀을 훔치며 인사했다. 이름은 앙부르아즈 볼라르였다. 그의 직업은 화상이었다. "이곳에 이상한…. 아, 아니. 독특한 화가가 있다고 해 들렀소." 세잔은 의심의 눈초리를 띄운 채 볼라르를 안으로 데려왔다. 볼라르는 작업실 한가운데에서 멈춰섰다. 눈썰미가 좋은 그는 벽과 바닥에 있는 여러 그림에서 그간 없던 혁신을 봤다. 몸이 덜덜 떨릴만큼 요동치는 혁명의 기운을 감지했다. 이 사람은, 정체가 뭐야?…. 볼라르는 한동안 입을 떼지 못했다. "세잔 선생. 당장 나랑 작업 하나 하시죠." 겨우 건넨 말이었다. 이 은둔의 화가가 56살 때였다.
세잔 생애 첫 개인전이 열렸다.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시대를 너무나도 앞서갔던 그는 이제야 빛을 봤다. 그가 은둔의 시간을 보낼 동안 세상이 바뀌었다. 우아한 아카데미 풍 그림은 슬쩍 밀려나고, 개성있는 인상주의 그림이 성큼 다가와 대접받는 흐름이었다. 나아가 인상주의 이후 더는 예술의 새로운 발견이 없을 것이라며 젊은 화가들이 좌절하던 시기였다. 웬 산속 작업실에서 튀어나온 늙은 화가가 이들 마음에 제대로 불을 질렀다. 옛 동료들도 세잔을 인정했다. 인정 이상의 존경을 표했다. 이제 모네, 드가, 르누아르, 폴 고갱 등은 세잔의 그림을 가지려는 데 혈안이었다. 어떻게 한 점을 구하면 캔버스가 뚫어질 듯 분석하고 연구했다. 다만, 세잔은 그 성공 현장에 없었다. 그렇게 참고, 그렇게 견디던 세잔의 속마음은 이미 잿더미였다. 세잔은 성공을 만끽할 생각이 없었다. 뒤늦게 알랑방귀 뀌는 이들과 어울릴 여유도 없었다. 세잔은 수십년간 그랬듯, 고행자의 삶을 이어갔다. 자기 그림으로 그 난리가 벌어졌는데도 혼자 그림이나 그리고 있었다.
세잔은 찬바람을 맞으며 콜록댔다.
그의 머리 위로 빗방울이 내려왔다. 이내 물폭탄이 돼 습격했다. 세잔은 한 손에는 캔버스, 다른 손에는 이젤과 남은 화구를 들고 뛰었다. 나이 든 그는 오래가지 못했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바람이 시렸다. 물먹은 옷이 몸을 끌어당겼다. 세잔은 픽 쓰러졌다. 정신을 잃었다. 몇 시간이 흘렀다. 세탁물 배달 마차에 실린 채 겨우 작업실에 돌아왔다. 다음 날 세잔은 눈을 떴다. 몸이 덜덜 떨렸다. 그런데도 기어코 기어나와 그림을 또 그렸다. 세잔은 이날 밤 심하게 앓았다.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그는 일주일 뒤 눈을 감았다. 그가 죽는다는 말에 달려온 피케와 폴도 보지 못한 채 눈을 감았다. 사인은 폐렴이었다. 1906년 10월, 그의 나이 67살이었다. "고독이 나를 야금야금 끌어내리고 있어. (…) 차라리 그림을 그리다가 죽겠다고 맹세했네." 세잔이 죽기 한 달 전, 친구에게 쓴 편지였다. 평생 그림밖에 모르던 그는 끝까지 그림을 곁에 두고 사망했다.
"내 열정? 세잔의 열정과 비교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세잔이 거의 유일하게 믿고 따른 피사로는 이 비운의 화가를 놓고 이렇게 칭송했다. 마네가 슬쩍 열고 틈을 엿본 현대미술의 문을 세잔이 발로 뻥 걷어차버렸다. 마네의 혁명 '보이는 대로'도 이제 끝이었다. 세잔의 혁명 '느끼는 대로'가 시작됐다. 세잔이 별이 된 그쯤, 한 스페인 출신의 젊은 화가가 '대수욕도'를 유심히 쳐다봤다. 이제 그의 머릿속에는 이 그림과 웬 아프리카 가면뿐이었다. "바로 저거였어!" 그가 눈을 반짝였다. 그가 바로 피카소였다. 그런 그의 손끝에서 탄생한 그림이 바로 '아비뇽의 처녀들'이었다. 이제, 세잔이 개척한 입체주의가 제대로 꽃피울 차례였다.
〈참고자료〉
아트 인문학(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법), 김태진, 카시오페아
세잔 : 사과 하나로 시작된 현대미술, 미셸오, 시공사
세잔의 산, 생트빅투아르의 가르침, 페터 한트케, 아트북스
발칙한 현대미술사, 윌 곰퍼츠, RHK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아르놀트 하우저, 창비
〈후암동 미술관 현대미술 편 읽는 순서〉
1) “벌거벗은 女로 우릴 조롱” 욕이란 욕 다 먹었다[후암동 미술관-에두아르 마네 편] - 최초의 모더니스트 (2023. 6. 24.)
2)“11살 연하女와 비밀연애, 자식도 낳았다고?”…10년 숨겼다 ‘들통’[후암동 미술관-폴 세잔 편] - 현대미술 창시자 (2023. 7. 1.)
3)“나체女에 웬 아프리카 가면?” 얼빠졌다 조롱당한 그의 ‘반전’[후암동 미술관-파블로 피카소 편] - 희대의 반항아 (2023. 5. 20.)
4)“내 이름은 로즈” 여장남자된 30대男 전말…‘빅픽처’ 있었다[후암동 미술관-마르셀 뒤샹 편] - 열정의 탐험가 (2023. 6. 10.)
5)시뻘건 내 피와 교감해보겠나…울든, 기절하든 그대 마음[후암동 미술관-마크 로스코 편] -교감의 마술사 (2023. 6. 17.)
6)“죽일거야” 그녀가 쏜 3번째 총알이 몸 관통…죽다 살아났지만[후암동 미술관- 앤디 워홀 편] - 위대한 악동 (2023. 6. 3.)
7)“흑인의 삶 어때?” 무례한 공격들…마돈나도 반한 27살男 무너졌다[후암동 미술관-장 미쉘 바스키아 편] - 자유의 반군 (2023. 5. 27.)
〈후암동 미술관 이론 편 읽는 순서〉
1)천사가 이렇게까지 운다고? 무섭게 왜 그래[후암동 미술관-조토 편] - 르네상스 선구자(2022. 7. 2.)
2)뻥 아냐, 600년전인데 이 정도 ‘입체 그림’ 있었다[후암동 미술관-마사초 편] - 원근법 선구자(2022. 8. 27.)
3)세계서 가장 유명한 이 ‘레이저 눈빛’, 그것은 사랑?[후암동 미술관-얀 반 에이크 편] - 유화 선구자 (2022.5.21.)
4)‘레드벨벳’도 춤추게 한 이 화가의 정체…"악마의 아들? 나 원 참" [후암동 미술관-보스 편] - 초현실주의 선구자 (2022.5.28.)
5)아리따운 금발 여인, 외간남자 목을 베고 있는거야?[후암동 미술관-카라바조 편] - 바로크 선구자 (2022.6.11.)
6)아름다운 여인, 끌어안고 난리난 옆 커플이 부러워[후암동 미술관-와토 편] - 로코코 선구자(2022.10.8.)
7)맨몸 여인들, 전쟁 뛰어들어 “그만!” 사자후…싸움 막았다[후암동 미술관-다비드 편] - 신고전주의 선구자 (2022.10.15.)
8)표류 D+13, 왜 몰랐지? 뗏목 위 널린 게 먹을건데[후암동 미술관-테오도르 제리코 편] - 낭만주의 선구자 (2022.5.14.)
9)“천사요? 데려오면 그려드리죠” 이놈의 똥고집[후암동 미술관-귀스타브 쿠르베 편] - 사실주의 선구자 (2022.5.7.)
10)“관상가 양반 아니었어?” 조선의 ‘얼굴’, 몰랐던 사실[후암동 미술관-윤두서 편] - 사실주의 특별 편 (2022. 11. 19.)
11)벌거벗은 이 여자, 뭐 때문에 빤히 쳐다보나[후암동 미술관-에두아르 마네 편] - 인상주의 선구자(2022. 4. 23.)
12)“못 그렸는데 폼만 잡아” 욕먹던 이 그림, 3300억이요? [후암동 미술관-클로드 모네 편] - 인상주의 선구자⑵ (2022.4.30.)
13)‘점투성이’ 수상한 커플 정체는? [후암동 미술관-조르주 쇠라 편] - 신인상주의 선구자 (2022. 6. 25.)
14)반 고흐 최애작, 별밤·해바라기 아닌 ‘이 사람들’ [후암동 미술관-빈센트 반 고흐 편] - 표현주의 선구자 (2022.6.4.)
15)이 ‘사과’ 때문에 세상이 뒤집혔다, 도대체 왜?[후암동 미술관-폴 세잔 편] - 근대 회화 선구자(2022. 7.9.)
16)‘생각하는 사람’ 진짜 정체, 남모를 사정도 있었다[후암동 미술관-오귀스트 로댕 편] - 근대 조각 선구자 (2022. 10. 22.)
17)화끈한 키스, ‘이 여성’ 사르르 녹아내리다[후암동 미술관-구스타프 클림트 편] - 분리파 선구자 (2022. 8. 13.)
18)나체 여인, 어쩌다 사자 득실대는 정글 한복판에[후암동 미술관-앙리 루소 편] - 근대 초현실주의 선구자 (2022. 7. 30.)
19)헐크색 피부 갖게 된 ‘이 여성’…이 놈의 ‘남편’ 때문에[후암동 미술관-앙리 마티스 편] - 야수주의 선구자 (2022. 7. 16.)
20)잘생긴 법학 교수님, ‘이것’ 그렸더니 미술계 '발칵'[후암동 미술관-바실리 칸딘스키 편] - 추상회화 선구자 (2022.7. 23.)
21)“이건 나도 그리겠다!” 1순위 그림, 그 놀라운 비밀[후암동 미술관-몬드리안 편] - 추상회화 선구자⑵ (2022. 8. 6.)
22)스파게티 면발? 1315억에 팔린 그림, 충격적 이유[후암동 미술관-잭슨 폴록 편] - 액션페인팅 선구자 (2022. 10. 29.)
23)몸 좋은 보디빌더, 거대 막대사탕 들고 ‘의문의 포즈’[후암동 미술관-리처드 해밀턴 편] - 팝아트 선구자 (2022.11.12.)
24)“동양서 ‘테러리스트’가 왔다” 피아노 다 때려부쉈다[후암동 미술관-백남준 편] - 비디오 아트 선구자 (2022.11.26.)
〈후암동 미술관 인물 편 읽는 순서〉
1)“이런 나체화는 뒷골목에 내걸어!” 꼬장한 천재 모욕한 자 최후는[후암동 미술관-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 편] - 신의 예술가 (2023. 4. 7.)
2)“12살 어린 빵집女와 몰래 연애를?” 소름돋은 목격자, ‘증거인멸’해줬다[후암동 미술관-라파엘로 산치오 편] - 모든 화가의 왕자 (2023. 4. 15.)
3)“성폭행 피해자는 나야!” 고문도 견딘 그녀…복수는 우아했다[후암동 미술관-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 편] - 영원한 복수자 (2023. 1. 28.)
4)“예쁜 내 금발 공주님”…‘딸바보’ 국왕 눈에선 꿀이 뚝뚝[후암동 미술관-디에고 벨라스케스 편] - 고결한 관찰자 (2023. 2. 24.)
5)“아내·자식·명예 다 잃었다”…그런데 왜 ‘빵’ 터지셨어요[후암동 미술관-렘브란트 편] - 빛의 마술사 (2023. 1. 7.)
6)‘이 그림’ 때문에 화형당할뻔…어느 야심가의 기구한 삶[후암동 미술관-프란시스코 고야 편] - 흑화한 사상가 (2023. 2. 4.)
7)“날 잊지마오” 가시덤불 ‘감옥’ 8년 갇혔다…그림에 펑펑 울었다[후암동 미술관-추사 김정희 편] - 조선의 품격 (2023. 3. 11.)
8)“6년 약혼女두고 바람…죽자 묘지까지 파헤쳤다” 이 남자, 변명 들어보니[후암동 미술관-단테 가브리엘 로제티 편] - 위험한 사랑꾼 (2023. 3. 18.)
9)“죄송해요, 엄마가 너무 싫어요” 효자 아니었어?…이 화가의 ‘반전’[후암동 미술관-제임스 휘슬러 편] - 모던한 이방인 (2023. 3. 4.)
10)“14살 소녀 이따위로 만들었어?” 평생 먹을 욕 다 먹었다[후암동 미술관-에드가 드가 편] - 무희의 화가 (2023. 3. 25.)
11)‘미녀 그리기’에 진심이었던 이 화가, 진짜 이유[후암동 미술관-오귀스트 르누아르 편] - 행복을 그린 화가 (2022. 12. 24.)
12)“고갱 그놈, 도대체 왜 그래?” 악마인지 ‘악마의 재능’인지[후암동 미술관-폴 고갱 편] - 고귀한 야만인 (2022. 12. 3.)
13)“나랑 6년 계약해” 유명 女배우의 파격제안…인생 달라졌다[후암동 미술관-알폰스 무하 편] -체코의 긍지 (2023. 2. 18.)
14)“백번은 넘게 봤겠다” 모두 아는 ‘이 절규’의 놀라운 비밀[후암동 미술관-에드바르 뭉크 편] - 노르웨이의 현자 (2022. 12. 31.)
15)“이놈의 짧은 다리 때문에” 카바레 스타의 영광과 몰락[후암동 미술관-툴루즈 로트레크 편] - 작은 거인 (2022. 12. 17.)
16)“로댕 아이를 뱄다” 폭탄선언 여성, 30년 수용소에 갇혔다[후암동 미술관-카미유 클로델 편] - 천재와 맞선 천재 (2022. 11. 5.)
17)눈동자 없는 기괴한 여자 그림, 알고 보니[후암동 미술관-아메데오 모딜리아니 편] - 파리의 귀공자 (2022. 12. 10.)
18)숨참고 키스 다이브!…아내가 그렇게 좋으셨어요[후암동 미술관-마르크 샤갈 편] - 순수한 방랑자 (2023. 2. 11.)
19)“당신은 저질 누드화가야!” 격분한 판사, 면전서 그림 불태웠다[후암동 미술관-에곤 실레 편] - 영원한 아이 (2023. 4. 1.)
20)당신은 모르실거야, 키스하는 두 사람 왜 이 꼴인지[후암동 미술관-르네 마그리트 편] - ‘진짜’ 괴짜 (2022. 9. 3.)
21)피카소도 ‘이 그림’에 “대박!” 감탄, 각성했다는데[후암동 미술관-피카소·마티스 편] - 피·마 대전 (2022. 9. 10.)
22)3번 유산·35번 수술의 악몽…그럼에도, 인생이여 만세[후암동 미술관-프리다 칼로 편] - 고통의 여왕 (2023. 1. 14.)
23)“내 천사여” 편지 사방팔방에 ‘뽀뽀’…한 무연고자의 죽음[후암동 미술관-이중섭 편] - 아고리, 나의 아고리 (2023. 1. 21.)
24)권총도 채찍도 버텼는데, ‘이 남자’ 행동에 무너졌다[후암동 미술관-마리나 아브라모비치 편] - 우아한 전사 (2022. 8. 20.)
〈후암동 미술관 현장 편 읽는 순서〉
1)이건희 컬렉션, 이 ‘다섯 작품’ 놓치지 마시라[후암동 미술관-‘어느 수집가의 초대’ 출장 편] - 전시 특집 (2022. 6. 18.)
2)알코올 중독 ‘이 남자’, ‘파리’에 미치자 놀라운 일 터졌다[후암동 미술관-몽마르트 언덕 편] - 동행자 : 모리스 위트릴로 (2022. 9. 17.)
3)고흐 “슬픔은 왜 나한테만” 펑펑 울었다, 고작 2평 다락방에서[후암동 미술관-오베르 편] - 동행자 : 빈센트 반 고흐 (2022 9. 24.)
4)모네 “앞이 안 보여도 상관없어”…백내장도 못 막은 그의 ‘최후작’[후암동 미술관-지베르니 편] - 동행자 : 클로드 모네 (2022. 1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