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칩(Chip)만사(萬事)’
마냥 어려울 것 같은 반도체에도 누구나 공감할 ‘세상만사’가 있습니다. 불안정한 국제 정세 속 주요 국가들의 전쟁터가 된 반도체 시장. 그 안의 말랑말랑한 비하인드 스토리부터 촌각을 다투는 트렌드 이슈까지, ‘칩만사’가 세상만사 전하듯 쉽게 알려드립니다.
[헤럴드경제=김민지 기자] 미국과 중국의 관계에 변화의 조짐이 보입니다. 미국 국무장관 토니 블링컨이 중국을 방문하면서, 미중 갈등이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는 평가가 나옵니다.
특히, 미중 통상 갈등으로 오랫동안 잠재적인 불안정성에 시달려 왔던 국내 반도체 업계도 최악의 시기는 지났다는 평가입니다.
그렇다면 앞으로 한국 반도체에는 ‘장밋빛 미래’만 가득할까요? 미중 관계 개선 조짐에도 마음을 놓을 수 없는 이유, 칩만사가 알려드립니다.
美·中 대화 물꼬 트였다…회복 기대감 물씬
최근 토니 블링컨 장관의 방중으로 미중 관계가 급물살을 타면서, ‘디리스킹(de-risking)’이라는 용어가 등장했습니다. 그간 미국은 중국을 반도체 등 핵심 산업 공급망에서 배제하는 개념인 ‘디커플링(de-coupling)’을 꾀한다고 인식됐지만, 최근 들어서는 위험을 제거하고 경제와 무역 등에서의 대중국 의존도를 완화하는 ‘디리스킹’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미중 관계의 회복 조짐은 반도체 업계에서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우선, 최근 미국 최대 메모리 반도체 기업 마이크론은 중국 시안에 있는 자사 패키징 및 테스트 공정에 향후 수년간 43억위안(약 7691억원)을 투자할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미국과 중국의 통상 갈등 속에서 미국 대표 반도체 기업의 중국 투자 발표가 나오자 해빙 국면을 맞을까 업계의 기대가 커졌습니다.
아무래도 마이크론은 중국 정부의 압박에 화해의 제스처를 취한 걸로 보입니다. 앞서 중국 정부는 국가안보를 이유로 마이크론 제품의 자국 내 판매를 부분적으로 금지했습니다. 마이크론 매출 중 약 25% 가량이 중국·홍콩 시장에서 창출되기 때문에 큰 타격이 예상됐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마이크론의 ‘통 큰’ 투자 발표는 미중 관계 개선을 위한 포석을 두고자 하는 미국 정부의 속내가 담겼다는 분석이 나옵니다.
미중 관계 회복 양상은 한국 반도체 기업들에게도 좋은 소식입니다. 우선, 불안정성이 어느정도 해소된다는 점이 큽니다.
월스트리트저널(WSJ) 등에 따르면 앨런 에스테베스 상무부 산업안보 차관은 최근 미국 반도체산업협회 관계자들과 만나 삼성·SK 등 한국 기업과 대만 기업에 대해 미국 반도체 장비 수출 통제 유예를 연장할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이로써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중국에 위치한 반도체 제조 공장에 필요한 장비를 장기적으로 들일 수 있게 됐습니다. 중국 공장이 전체 생산량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절반에 가까운 만큼, 최소한 시간은 번 셈입니다. 적어도 중국 공장을 현재 수준으로 당분간 운영할 수 있다는 시그널이 된 셈이죠.
“상황 나아진 것 없다”…중국 의존도 축소 불가피
그러나 전문가들은 한국 반도체 업계의 상황이 나아진 것은 절대 아니라고 입을 모읍니다. 이제 미중 이 대화를 원활하게 할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된 것일 뿐, 가시적인 성과가 나온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연원호 대외경제정책연구원 경제안보팀장은 “최근 양상으로 한국 반도체 기업들의 비즈니스 환경이 나아졌다고는 볼 수 없다”며 “지금까지의 흐름을 봤을 때 미국이 반도체 산업에 있어서는 중국에 양보를 할 가능성이 현저히 낮다고 생각한다”고 말했습니다.
특히, 완전한 탈중국은 아니지만 글로벌 반도체 공급망 재편에서 중국 의존도를 줄이는 것은 필수적이라는 지적도 나옵니다.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삼성과 SK 모두 중국 공장의 생산량 비중을 줄이고 공급망을 다변화하는 것이 큰 과제”라며 “미중 관계가 설령 개선된다고 하더라도, 산업적 측면에서 장기적으로 어느정도 ‘탈중국’을 하는 방향으로 가게 될 것”이라고 내다봤습니다.
반도체 공급망 재편은 현재 진행형…‘용인’이 희망
유럽과 일본의 반도체 공급망 재편 의지가 큰 상황에서, 용인 시스템반도체 클러스터를 중심으로 한 자국 공급망 확보의 중요성도 커집니다.
미국 인텔은 최근 독일 작센안할트주 마그데부르크의 새로운 반도체 공장 2개 설립 한다고 밝혔는데요. 무려 투자 규모가 300억유로(약 42조1005억원)에 달합니다. 앞서 발표했던 투자액 170억유로보다 2배 정도 많은 수준입니다.
이번 독일 공장 계획 발표 직전 인텔은 폴란드 남서부 도시 브로츠와프 인근에도 반도체 생산 및 테스트 시설 건설을 위해 46억달러(약 5조9059억원)를 투자할 것이라고 발표했습니다. 이로써 기존 아일랜드에 이어 독일-폴란드로 이어지는 총 3개 유럽 국가에 인텔 반도체 공장이 세워지게 됐습니다.
인텔이 이렇게 천문학적 돈을 쏟을 수 있는 건 보조금 때문입니다. 이번 추가 투자 발표로 독일 정부가 인텔에 지급하는 보조금은 약 100억유로(14조원)으로 늘어날 예정입니다. ‘보조금 없이는 공장도 없다’는 것처럼 보이는 지점이죠.
요동치는 반도체 지정학에서 국내 반도체 업계는 용인에 집중하는 모양새입니다. SK하이닉스 용인 팹은 2027년 가동을, 삼성전자는 2029년 1기 파운드리 팹 가동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속도 싸움인 반도체 기술 속에서 차질 없이 클러스터가 구축되는 것이 중요한 상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