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P 인터뷰서 “100년 전 일로 무릎 꿇어라, 받아들일 수 없다”

野 “과거사 인식에 경악”…이재명 “당황스럽고 참담”

작년 ‘날리면 논란’ 이어 방미 첫날 악재…與 내부서도 우려

“과거사 사과 조건부 외교에 선 그은 것” 해석도

‘방미 지지율 반등’ 기대하던 與…尹 “100년 전 일로 무릎” 발언에 당혹[數싸움]
미국을 국빈 방문하는 윤석열 대통령과 김건희 여사가 24일 성남 서울공항에서 공군 1호기에 탑승, 환송객들에게 인사하고 있다. 윤 대통령은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초청으로 이날부터 5박 7일 일정으로 미국을 국빈 방문한다. 국빈 방미는 2011년 이명박 당시 대통령 이후 12년 만이다. [연합]

[헤럴드경제=김진 기자] 윤석열 대통령의 방미를 계기로 지지율 반등 기대감에 부풀었던 여당이 또 다시 설화(舌禍)에 휩싸였다. 발언의 주인공은 다름아닌 윤 대통령이다. 국민 정서에 부합하지 못한 윤 대통령의 발언이 총선을 1년 앞둔 여권 지지율에 찬물을 끼얹었다는 지적이 나온다.

대통령실에 따르면 윤 대통령은 24일(현지시간) 워싱턴포스트(WP)와의 인터뷰에서 “지금 유럽에서는 참혹한 전쟁을 겪고도 미래를 위해 전쟁 당사국들이 협력하고 있다”며 “100년 전의 일을 가지고 ‘무조건 안 된다’, ‘무조건 무릎 꿇어라’고 하는 것은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말했다. 윤 대통령은 “이는 결단이 필요한 것”이라며 “설득에 있어서는 저는 충분히 했다고 본다”고 말했다.

윤 대통령의 발언은 한일 안보협력의 시급성을 강조하는 과정에서 나왔다. 그러나 당장 더불어민주당에서는 “윤 대통령의 일본 과거사에 대한 인식에 경악을 금할 수 없다”는 반응이 나왔다. 강선우 민주당 대변인은 이날 오후 논평에서 “대한민국의 주권과 국익을 지켜야할 대통령의 입에서 나올 수 있는 말인지 충격적”이라며 “역사를 잊은 대통령에게 무엇을 기대할 수 있겠나. 윤석열 대통령에게 과연 대한민국의 주권과 국익을 맡겨도 되는지 대단히 의문스럽다”고 비판했다.

이재명 민주당 대표도 이날 오후 고위전략회의 직후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대한민국 대통령의 발언인가라고 의심이 될 정도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발언이다. 참으로 당황스럽고 참담하다”며 “수 십년간 일본으로부터 침략 당해서 고통받은 대한민국의 대통령으로서 결코 해서는 안 될 발언이라고 생각되고 대통령 역사 의식이 과연 어떠한지 생각해보게 되는 발언”이라고 지적했다.

여당에서도 당혹스러움이 감지된다. 당초 여당에서는 이날부터 5박7일간 이어지는 윤 대통령의 방미 일정을 놓고 대통령·여당 지지율 반등을 기대하는 분위기가 있었다. 한미동맹 70주년을 계기로 이뤄지는 이번 방미는 12년 만에 이뤄지는 대통령의 국빈 자격 방문이다. 지난 두 달 동안 대통령·여당 지지율 동반 하락을 경험한 여권에서는 지지율 반등의 전환점이 될 것이란 전망이 나왔다.

예상치 못한 설화에 한 국민의힘 관계자는 “역대 대통령들의 방미 일정 시기에는 여권 지지율이 상승하는 게 통상적이었다”면서도 “이번 정부에서는 예외적”이라고 말했다. 지난해 9월 유엔총회 방문차 미국을 찾은 윤 대통령이 ‘바이든-날리면 논란’에 휩쓸리며 여권 지지율 하락으로 이어졌던 점을 자조하는 것이다. 또 다른 국민의힘 관계자는 “이대로면 내년 총선에서 개헌 저지선을 사수할 수 없을 것이란 우려까지 나온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여권의 지지율 하락 추세는 지난 두 달간 여론조사에서도 확인된다. 여론조사 전문업체 리얼미터의 주간 집계에 따르면 윤 대통령 지지율은 3월1주차 42.9%로 올해 들어 최고점을 찍고 4월3주차 32.6%로 10%포인트가량 하락했다. 한국갤럽 조사는 2월4주차 37%로 올해 최고점 기록한 뒤 4월2주차 27%로 떨어졌다. 국정 지지도가 20%대에 진입한 건 5개월여만이다. 4월3주차 조사에서 4%포인트 상승하면서 다시 30% 초반대를 회복했다.

국민의힘의 경우 리얼미터 조사를 보면 3월1주차 44.3%를 기록한 이후 4월3주차 34.5%까지 하락했다. 한국갤럽 조사에서는 3월1주차 39%에서 4월3주 32%를 기록했다.

지지율 하락은 대부분 외교·안보 문제에서 불거졌다. 3·1절 기념사 논란에 이어 강제동원 해법 논란, 한일 정상회담 이후 이어진 ‘굴욕 외교’ 논란, 미국 정보기관의 도·감청 논란까지 악재가 계속됐다. 최근에는 ‘우크라이나 무기 지원’, ‘힘에 의한 대만 해협 현상 변경 반대’ 등 외신 인터뷰 발언을 계기로 미국·일본을 넘어 중국·러시아로 외교 쟁점이 확대됐다. 한국갤럽은 최근 조사에서 “대통령 직무 긍·부정 평가 이유 양쪽에서 외교 사안이 두 달째 최상위”라고 설명했다.

특히 국민의힘이 계속되는 설화로 인해 민주당의 ‘돈 봉투 의혹’ 등 불법 정치자금을 둘러싼 야권의 연이은 악재에도 반사이익을 충분히 누리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민주당은 리얼미터 조사상 4월2주차 48.8%에서 1주일 만에 3.1%포인트 하락했다. 이번주 한국갤럽 조사에서도 4%포인트 하락한 32%를 기록했다. 그러나 두 조사 모두 국민의힘 지지율 상승은 1%포인트 미만 소폭에 그쳤다.

배철호 리얼미터 수석전문위원은 “민주당 지지도가 큰 폭으로 하락했음에도 대통령과 여당이 반사 이익을 누리거나 악재 탈출을 하지 못하는 점은 용산(대통령실)과 국민의힘 김기현 지도부가 깊이 고민할 대목”이라고 평가했다. 한 국민의힘 의원은 통화에서 “당이 당의 적을 자처하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다만 윤 대통령 발언의 취지를 왜곡해선 안 된다는 목소리도 있다. 외교통일위원회 소속 한 국민의힘 의원은 통화에서 “표현이 강한 점은 사실”이라면서도 “앞으로 한일관계가 진전이 될텐데, 과거사 사과를 조건부로 하는 방식의 대일 외교는 하지 않겠다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 의원은 “‘사과를 하지 않으면 아무 것도 하지 않겠다’는 식의 한일관계를 이어가지 않겠다는 취지로 봐야 한다”고 부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