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레디메이드 인생〉 中개밥의 도토리다. 인텔리가 아니 되었으면 차라리 노동자가 되었을 것인데 인텔리인지라 그 속에는 들어갔다가도 도로 달아나오는 것이 99퍼센트다. 그 나머지는 모두 어깨가 축 처진 무직 인텔리요, 무기력한 문화 예비군 속에서 푸른 한숨만 쉬는 초상집의 주인 없는 개들이다. 레디메이드 인생이다.“
[헤럴드경제=김용훈 기자] 1934년 발표된 채만식 소설 〈레디메이드 인생〉의 주인공 P는 취업청탁을 거절 당한 후 저렇게 읊조린다. P는 당대 일본에서 대학교육까지 받은 인텔리지만 취직을 못하고 떠돈다. 잘 아는 신문사 사장에게 일자리를 청탁했지만, 거절을 당한다. “거참 큰일들 났어. 저렇게 좋은 청년들이 일거리가 없어서 저렇게 애를 쓰니.” 그 사장은 이렇게 말한다.
89년이 지났지만 2023년 대한민국에도 레디메이드 인생의 주인공 ‘P’들이 넘쳐난다. 지난 2월 비경제활동인구(취업자나 실업자가 아닌 인구) 가운데 활동상태를 ‘쉬었음’이라고 답한 청년층은 49만7000명이다. 2003년 1월 통계 작성 이래 가장 큰 규모다. ‘쉬었음’은 구직도 취업 준비도 하지 않고 말 그대로 쉬었다는 뜻이다. 쉽게 말해 ‘취업포기자’다.
룸펜은 말한다, “뭐 어디 빈자리가 있어야지”
이들은 왜 쉬고 있을까. 통계청의 작년 8월 조사를 보면, ‘몸이 좋지 않아서’(39.4%)가 가장 많고 ‘원하는 일자리·일거리를 찾기 어려워서(18.1%)’가 두 번째다. 하지만 이는 ‘쉬었음’ 인구의 43.6%를 차지하는 60세 이상이 포함된 전 연령 조사결과다. 청년층만 보면 ‘원하는 일자리를 찾기 어려워서’란 응답이 가장 많을 것이란 게 통계청 추측이다.
취업포기자가 늘면서 청년층(15~29세) 취업자는 줄고 있다. 3월에도 전년보다 8만9000명 줄었다. 지난해 11월 이후 벌써 5개월 연속 감소했다. 하지만 산업계는 일 할 사람이 없다고 하소연한다. 실제 현재 비어 있거나 1개월 안에 새로 채용될 수 있는 일자리를 뜻하는 빈 일자리는 2월 21만개에 달한다. ‘일자리 미스매치’는 고질병이 됐다.
P의 독백처럼 고등교육을 받지 않았다면 모를까 배움에 걸맞는 일자리에 취직을 해야 하는데 그런 일자리는 좀처럼 늘지 않는다. 한국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7개 중 고등교육 이수율이 가장 높다. 일본(61.5%), 미국(51.9%), 독일(34.9%)도 못 따라온다. 2013년부터 7년간 대졸자는 연평균 3.0% 늘었다. 하지만 고학력 일자리는 1.3% 늘었다.
‘고학력자’들이 일할 곳이 없다보니 우리나라 대졸 청년 고용률은 75.2%로 OECD 38개국 중 31위 수준이다. 일할 능력은 있어도 일할 의사가 없거나 아예 일할 능력이 없는 비경제활동인구 가운데 청년 대졸자가 차지하는 비율은 20.3%로 OECD 국가 중 세 번째로 높다. 지난해 이들의 활동을 보면 열에 셋은 그나마 취업준비생이고, 둘은 ‘그냥 쉬었다’.
이러다보니 ‘전공’은 중요한 게 아니다. 작년 5월 통계청 조사를 보면, 우리나라 취업자의 52.3%는 전공과 일치하지 않는 직업을 가지고 있다. 이 비율이 우리처럼 높은 나라는 드물다. OECD 조사를 보면 대졸(25~34세) 임금 근로자 중 최종 전공과 현재 직업 간 연계성이 없는 비중에서 한국은 50.0%를 기록했다. 독일(26.4%)의 두 배에 육박한다.
지원금 100만원에 대졸이 조선소 갈까?
소설 레디메이드 인생의 주인공 P는 결국 자신의 어린 아들을 인쇄소에 맡긴다. “내가 학교 공부를 해본 나머지 그게 못쓰겠으니까 자식은 딴 공부시키겠다는 것이지요.” 이게 바로 P가 아들을 인쇄소에 맡긴 이유다. 빈일자리가 21만개나 있어도 ‘배운’ 자신은 공장에선 일을 못하니, 아들은 밥벌이를 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말이다.
일자리 미스매치를 해결하고자 하는 정부가 국민들에게 원하는 ‘태도’가 이런 것일까. 정부는 지난 3월 올해 1만4000명의 생산인력이 부족한 것으로 예상되는 조선업에 대해 ‘조선업 일자리도약 장려금’을 신설한다고 발표했다. 이는 최저임금 120%이상 지급하는 업체에 정부가 채용장려금을 월 100만원씩 1년간 지원하는 것이다.
일자리 미스매치 해소안을 발표한 지 1개월 남짓 지난 탓에 아직 정책 효과를 언급할 수 없다는 게 정부 입장이지만, 성공을 점치기 어려운 게 사실이다. 저 장려금을 받고 조선소 하청업체에 들어간다고 치면 1년 간 ‘최저임금의 120%+100만원’ 가량의 임금을 받는다. 1년 후엔 ‘최저임금의 120%’만 받는다. 좋은 일자리도 아니고, 미래도 꿈꿀 수 없다.
고학력자를 조선소에 보내는 건 불가능할 지도 모른다. 대신 정부는 외국인을 들여오고 있다. 3월 외국인 고용보험 가입자는 작년 3월보다 무려 10만명 늘어난 15만4000명이다. 국내 인력을 구하지 못한 중소기업이 정부로부터 허가받아 외국인력을 고용할 수 있도록 한 고용허가제 덕분이다. 올해 고용허가제 인원은 11만명으로 역대 최대 규모다.
고용노동부 고용정책담당자가 채만식 소설 〈레디메이드 인생〉을 다시 한번 읽어봤으면 한다. 소설 속에서 P의 아들을 맡게 된 인쇄소 주인은 P에게 이렇게 말한다. “거 참 모를 일이요. 우리 같은 놈은 이 짓을 해 가면서도 자식을 공부시키느라고 애를 쓰는데 되려 공부시킬 줄 아는 양반이 보통학교도 아니 마친 자제를 공장엘 보내요?”
※[세종백블]은 세종 상주 기자가 정부에서 발표한 정책에 대한 백브리핑(비공식 브리핑)은 물론, 정책의 행간에 담긴 의미, 관가의 뒷이야기를 전하는 연재물입니다. 정책에 대한 이해를 높이고 공무원들의 소소한 소식까지 전함으로써 독자에게 재미와 정보를 동시에 전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