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칩(Chip)만사(萬事)’
마냥 어려울 것 같은 반도체에도 누구나 공감할 ‘세상만사’가 있습니다. 불안정한 국제 정세 속 주요 국가들의 전쟁터가 된 반도체 시장. 그 안의 말랑말랑한 비하인드 스토리부터 촌각을 다투는 트렌드 이슈까지, ‘칩만사’가 세상만사 전하듯 쉽게 알려드립니다.
[헤럴드경제=김민지 기자] 어느 부모에게나 ‘아픈 손가락’은 있는 법입니다. 애지중지 키웠는데, 이상하게 안 풀리고 그래서 더 신경이 쓰이는, 그런 자식이 있죠.
삼성전자에게도 ‘아픈 사업’이 있습니다. 바로 자체 모바일 AP(애플리케이션 프로세서)입니다. 첫 제품을 출시한지 약 12년이 지났는데 아직 삼성전자 스마트폰에 꾸준히 들어가지도 못하고 있습니다. 미디어텍, 퀄컴 등 경쟁사과 비교하면 점유율도 미비하죠. 지난해 불거진 스마트폰 성능 논란 때문에 쓴맛을 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도 삼성은 왜 모바일 AP 개발을 놓지 못하고 있는 걸까요? 삼성전자의 자체 칩 도전에 숨겨진 야망, ‘칩(Chip)만사(萬事)’가 쉽게 알려드립니다.
화려하게 등장했지만…10년 후 5위에 정체
모바일 AP는 스마트폰의 속도, 성능, 콘텐츠 품질 등을 좌우하는 두뇌 역할을 합니다. 삼성전자는 2011년 처음으로 자체 모바일 AP의 브랜드 마케팅을 시작하며 ‘엑시노스(Exynos)’를 공개했습니다. 그리스어 ‘스마트(Exypnos)’와 ‘그린(Prasinos)’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렇게 시작한 엑시노스는 삼성전자 스마트폰 ‘갤럭시S2’에 처음으로 탑재됐습니다. 그 때는 호평이 자자했죠. 모바일AP 시장에서 3위 수준을 유지하며 선전했을 정도니까요. 당시 스트래티지애널리틱스(SA)에 따르면, 삼성전자의 모바일AP 시장 점유율은 2011년 10.1%, 2012년 11.1%를 기록했습니다. 갤럭시S·S2 시리즈 흥행이 컸죠.
그러나 2013년을 기점으로 점유율이 7.9%로 떨어지며 하락하기 시작했습니다. 애플과 미디어텍에 밀리며 순위도 4위로 내려갔습니다. 반면 이때부터 퀄컴은 시장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며 독주 체제를 굳혔습니다.
삼성전자가 ‘삐끗’한 이유는 통신용 모뎀이 탑재된 통합 AP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퀄컴 스냅드래곤 모델은 LTE, LTE-A 통신 기능을 지원했지만, 반면 엑시노스는 아니었습니다. 때문에 삼성전자도 갤럭시S4, 갤럭시 노트 3 등 플래그십 스마트폰에는 퀄컴 AP를 주로 탑재해야 했죠. 이후 삼성은 ‘엑시노스 7420’을 갤럭시S6에 탑재하는 등 추격에 나섰지만, 한 번 벌어진 격차를 따라 잡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발열 문제와 성능 면에서 퀄컴에 미치지 못한다는 평가가 계속 나왔습니다.
10년이 지난 지금, 삼성전자의 모바일 AP 점유율은 글로벌 5위 입니다. 카운터포인트리서치에 따르면, 지난해 3분기 모바일 AP 시장 1위는 대만 미디어텍(35%)입니다. 퀄컴이 31%로 2위를 기록했고 3위는 애플(16%), 4위는 중국의 유니SOC(11%)가 차지했습니다. 삼성전자는 7%를 차지하며 5위에 머물렀습니다.
야심차게 갤S22에 탑재…이어진 GOS 사태
그러나 삼성전자는 포기하지 않습니다. 2019년부터 AMD와 협업해 엑시노스의 그래픽 처리 성능을 개선해왔습니다. 그 결과 지난해 AMD의 설계 자산을 기반으로 첫 자체 모바일 GPU ‘엑스클립스(Xclipse)’를 공동 개발하는데 성공합니다.
모바일 GPU는 스마트폰 게임 성능을 좌우하는 핵심 부품으로, 3D 게임의 그래픽 데이터를 구현하고 이미지센서에서 온 빛의 정보를 사진이나 동영상으로 만들어 주는 등의 역할을 합니다.
삼성전자는 ‘엑스클립스’를 모바일 AP ‘엑시노스2200’에 탑재했습니다. 그리고 엑시노스 2200은 갤럭시S22 시리즈에 적용돼죠.
문제는 갤럭시S22 시리즈가 성능 논란에 휩싸였다는 겁니다. GOS(게이밍 옵티마이징 서비스) 사태가 터지면서 ‘엑시노스 2200’ 성능에 대한 의구심이 불거졌습니다. 삼성전자는 소프트웨어 업데이트를 통해 GOS 적용 여부를 선택할 수 있도록 했지만, 한번 실추된 이미지는 큰 오점을 남겼습니다. 결국 올해 출시된 갤럭시 S23 시리즈에는 퀄컴 스냅드래곤을 100% 사용하는 결정을 내렸죠.
삼성전자는 절치부심하는 마음으로 내년 엑시노스의 ‘화려한 귀환’을 준비 중입니다.
지난 6일 AMD와 전략적 파트너십을 확대한다고 선언했습니다. AMD의 초저전력·고성능 그래픽 설계자산 기반의 차세대 그래픽 솔루션을 삼성전자 자체 칩 ‘엑시노스’ 라인업에 확대 적용하기로 했습니다. 스마트폰에서 콘솔 게임 수준의 고성능·고화질 게이밍 경험을 즐기는 것을 목표로 하는 것이죠.
특히, 이번 협력 확대는 ‘엑시노스’에 최적화된 GPU를 개발하고, 더 나아가 갤럭시 맞춤형 칩 생태계를 강화한다는 의미로도 풀이됩니다. 일각에서는 내년 갤럭시S24 시리즈에 ‘엑시노스 2400’을 탑재될 가능성도 있다고 보고 있는데요. 이제 더 이상의 발열·성능 논란을 일으키지 않겠다는 확고한 의지로 보여주고 있는 것 같습니다.
모바일 AP 값 77%↑…자체 칩 없으면 퀄컴에 휘둘린다
그렇다면 삼성전자는 왜 이렇게 엑시노스에 사활을 거는 걸까요?
바로 자체 모바일 AP 생태계 구축이 수익성 개선에 영향을 끼치기 때문입니다. 자체 칩이 아닌 퀄컴 스냅드래곤에 대한 의존도 증가는 결국 AP 구매 비용 증가로 연결됩니다. 가격 협상 주도권을 빼앗기게 되는 셈입니다. 실제로 삼성전자의 2022년 4분기 사업보고서에 따르면 지난해 모바일 AP 가격은 전년 대비 약 77% 상승했습니다. 모바일 AP는 전체 스마트폰 부품원가(BoM)에서 가장 높은 비중을 차지하는 반도체인데, 가격이 오르면 영업이익 감소에도 큰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지난해 삼성전자 MX사업부 영업이익은 11조3800억원으로 전년 대비 2조 3000억원 가량 줄었습니다.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경쟁력 강화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끼칩니다. 앞서 삼성전자는 2030년까지 시스템반도체 1위 자리에 오르겠다고 선언했습니다. 파운드리 수주를 늘리는 것이 절실한 상황에서, 엑시노스는 팹리스(설계)와 3나노 첨단 공정을 활용한 파운드리 두 분야의 경쟁력을 모두 높일 수 있는 핵심 제품입니다.
불안정한 외부 요인도 배제할 수 없습니다. 지난해 ARM은 퀄컴을 대상으로 라이선스 계약 위반 및 저작권 침해를 주장하며 소송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ARM은 이 사건을 계기로 2024년부터 퀄컴을 포함한 팹리스에 설계 IP 라이선스를 부여하지 않고, ARM 외 다른 회사의 IP를 혼합해 사용하는 것을 금지하기로 했습니다.
문제는 삼성전자의 엑시노스 2200에도 ARM 설계를 기반으로 한 CPU가 적용됐다는 겁니다. ARM의 정책 변경으로 2024년부터는 모두 ARM 설계를 쓰던가, 아예 ARM 설계를 쓰지 않아야 할 수도 있습니다. 업계에서는 이런 일이 실제로 일어날 가능성은 낮다고 보고 있지만, 관련 기업들은 소송 진행 과정을 예의주시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