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 바이든 제안 ‘레이디 가가-블랙핑크 협연’ 누락

문화 행사 넘어 동맹국 신뢰 손상 외교 결례 판단

김일범 의전·이문희 외교비서관 사퇴도 같은 사유

대통령비서실·외교부와 갈등설…김태효와 알력설도

탁현민 “블랙핑크 정도로 안보실장 안 날아가”
김성한 국가안보실장이 23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에서 오는 29일부터 이틀간 열리는 제2차 민주주의 정상회의 관련 브리핑을 하고 있다. [연합]

[헤럴드경제=정윤희 기자] 김성한 전 국가안보실장이 전격 사퇴하면서 대통령실 안팎이 뒤숭숭하다. 윤석열 대통령의 미국 국빈 방문을 한 달도 채 남겨놓지 않은 시점의 ‘외교안보 수장’ 교체란 점에서 사실상 ‘경질’이란 해석이 유력하다.

30일 대통령실 안팎에 따르면, 전날 김 전 실장의 사퇴에는 최근 윤 대통령의 방미 일정 조율 과정에서 불거졌던 실책이 결정적인 배경으로 작용한 것으로 전해졌다.

그동안 외교안보 라인에서 미국 측이 제안한 윤 대통령 부부와 바이든 대통령 부부 동반 만찬에서의 ‘레이디 가가-블랙핑크 합동공연’에 대한 보고를 수차례 누락했고, 윤 대통령이 해당 사실을 이달 초에야 뒤늦게 외교부를 통해 인지하게 됐다는 것이다.

‘레이디 가가-블랙핑크 합동공연’은 질 바이든 여사가 제안한 것으로, 우리 측 확답이 늦어지면서 해당 행사가 무산될 위기에 처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단순 문화행사 보고 누락을 넘어 자칫 양국 간 신뢰를 저해할 수 있는 심각한 외교 결례에 해당한다는 것이 윤 대통령의 판단이다. 앞서 사퇴한 이문희 전 외교비서관·김일범 전 의전비서관 역시 같은 사유로 직에서 물러난 것으로 알려졌다.

김 전 실장 역시 이 같은 사실을 염두에 둔 듯 전날 오후 늦게 사의를 표명하며 “저로 인한 논란이 더 이상 외교와 국정운영에 부담이 되지 않았으면 한다”고 했다. 대통령실 고위관계자는 “정확한 실체는 알 수 없다”면서도 “결과적으로 논란이 일고 있으니까 (김 전 실장이) 대통령께 누가 될 수 없다는 생각이 강했던 것으로 알고 있다. 논란에 대한 도의적 책임을 본인이 지겠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윤 대통령이 방미가 코앞임에도 외교안보 라인을 대거 교체한다는 부담을 감수한 데는 블랙핑크 건 외에도 그동안 수차례 누적된 외교안보 라인의 실책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달 들어 강제징용 해법을 내놓고 한일 정상회담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외교안보 라인에 크게 실망했다는 후문이다. 윤 대통령이 한일회담 이후 일본 측에서 위안부‧독도 등으로 ‘언론플레이’를 했을 때 외교안보 라인의 안이한 대처를 질책했다는 얘기가 회자되기도 했다.

여권 관계자는 “윤 대통령이 이례적으로 국무회의에서 23분간 모두발언을 생중계하며 한일관계 정상화를 얘기한 것도 외교안보 참모들이 대통령의 뜻을 제대로 알리지 못했다고 생각했기 때문 아니겠나”고 말했다.

다만, 전날 오전까지만 해도 대통령실 내에서는 내달 말 방미까지 김 전 실장이 마무리 지은 후 교체되는 것이 자연스럽다는 의견에 무게가 실린 것으로 전해졌다. 대통령실이 김 전 실장 교체설에 “사실이 아니다”고 부인해온 이유다. 김 전 실장은 이달 초 직접 미국을 방문해 한미 정상회담 의제와 방미 일정 등을 조율해왔다.

그러나 오후 들어 분위기가 바뀌었다고 한다. 방미뿐만 아니라 오는 5월 주요 7개국(G7) 정상회의 초청국 참석, 이르면 6월로 예상되는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의 답방 등 굵직한 외교일정이 줄줄이 이어지는 만큼 외교안보 라인의 난맥상을 빠르게 매듭지을 필요가 있다는 이유에서다.

일각에서는 대통령실 내 갈등이 수면 위로 떠오른 것도 이유로 꼽는다. 대통령실 내에서는 그간 안보실이 지나치게 외교 관련 정보를 독점한데 대해 대통령비서실 내 불만이 있었던 것으로 전해졌다. 또, 외교부와 안보실 사이에도 알력다툼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김 전 실장과 김태효 안보실 1차장 사이 갈등이 있었다는 말도 대통령실 내부에서는 나온다. 지난해 정부 출범 초기부터 두 사람의 관계가 매끄럽지 못했다는 얘기다. 또다른 여권 관계자는 “스타일이 다르다보니 의견 충돌이 잦고, 두 사람의 사이가 좋지 않다는 얘기는 작년부터 꾸준히 나왔다”고 했다.

윤 대통령은 김 전 실장의 후임으로 조태용 주미대사를 낙점했다. 방미 전 업무공백을 최소화하기 위해 곧바로 후임자를 내정한 것으로 풀이된다. 조 신임 실장은 정통 외교관 출신으로 ‘미국통’, ‘북핵통’으로 꼽히는 전문가다. 재외공관장 회의 관계로 한국에 머물고 있던 조 신임 실장은 이날 오전부터 대통령실로 출근하며 곧바로 업무에 들어갔다. 후임 주미대사에는 조현동 외교부 1차관을 내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