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희의 화가
[헤럴드경제=이원율 기자]1880년, 프랑스 파리의 한 작업실.
46살의 에드가 드가는 14살 발레리나 마리 반 괴템에게 먼저 말을 거는 법이 없었다. 드가는 멀뚱히 서 있는 괴템을 뚫어지게 살펴봤다. 괴템도 질세라 눈길을 피하지 않았다. 드가는 모델로 데려온 괴템에게 아무런 요구도 하지 않았다. 괴템 입장에서야 나쁠 게 없었지만, 심심한 건 어쩔 수 없었다. 너무 따분하면 스트레칭도 쭉쭉했다. 얼마 전에 배운 발레 동작도 취해봤다. "…오늘, 날씨가 좋아요. 그렇죠?" 괴템은 또 졌다. 이번에도 말을 먼저 걸었다. "그래." 드가가 대답했다. "아저씨, 저 언제까지 서 있기만 해요?" "머릿속에 그려질 때까지." 괴템의 이어진 말에 드가는 건조하게 대답했다. "오늘은 집에 가도 돼." 드가가 말했다. 그는 여전히 붓도, 조각칼도 한 번 휘두르지 않았다. "다음 주도 같은 시간 맞죠?" 괴템이 외투를 입었다. 드가는 눈을 크게 깜빡였다. 당연한 걸 왜 묻느냐는 듯했다. "꼬마야." 드가가 떠나는 괴템에게 말을 툭 걸었다. "집으로 바로 가. 엉뚱한 골목길로 가지 말고." 드가는 나가는 문을 향해 눈짓했다. 이 사람, 뭐야…? 괴템은 뜨끔했다.
바로 다음 날, 드가는 오페라 극장 발레학교를 찾았다.
뚱한 얼굴의 드가는 여느 때처럼 여러 수업에 참관했다. 가끔은 연필을 들고, 때로는 붓을 든 채 무언가를 쓱쓱 그렸다. "너, 저 사람 작업실에서 모델 일해?" 드가를 슬쩍 보던 괴템에게 친구가 다가와 말했다. "응." "소문이 맞아?" "무슨 소문?" 괴템이 되물었다. "저 아저씨, 실은 여자를 혐오하는 사람이래. 딴 목적이 있어서 우리를 그렇게나 열심히 그리는 거래." "딴 목적이 뭔데?" "아마 돈? 엄마가 그랬어." 친구가 어깨를 으쓱했다. "글쎄. 좀 쌀쌀맞긴 한데…." 괴템은 입술을 쭉 내밀었다.
괴템은 이날도 발레학교에 밤늦게까지 머물렀다.
괴템의 집은 파리에서 가장 누추한 곳에 있었다. 문을 열면 쿰쿰한 냄새가 밀려왔다. 괴템의 아버지는 죽었다. 세탁부인 어머니는 집에 와선 주로 누워있었다. 괴템이 집에 오면 늘 돈 이야기가 나왔다. 듣기가 지긋지긋했다. 괴템은 메마른 어머니 손에 이끌려 화가의 모델은 물론, 식당 서빙부터 오페라 단역 등 갖은 일을 했다. 어머니는 가끔씩 괴템과 낯선 사내를 한 방에 조용히 넣어뒀었다는 말도 있다.
어둠이 짙게 깔리고서야 괴템은 발레복을 가방에 쑤셔 넣었다.
집으로 향했다. 큰길 말고 골목길로 빠질까 고민했다. 좁은 길로 가면 운 좋게 취객의 지갑 한두 개를 훔칠 수도 있었다. 위험한 일이지만, 그놈의 돈타령에서 잠깐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수였다. 엉뚱한 골목길로 가지 말고…. 드가의 말이 떠올랐다. 쳇, 자기가 뭘 안다고…. 괴템은 투덜댔다. 그녀의 발걸음은 큰길로 향했다.
"…그런 소문이 있어요. 그냥, 참고하라고요."
괴템은 또 뭘 씹은 듯한 표정을 짓는 드가에게 당돌하게 충고했다. 드가는 아무 말이 없었다. "아저씨, 그런데요. 얼마 전에 저희 엄마 세탁소 근처에서 뭐 그렸죠? 윗집 아줌마가 운영하는 모자가게에도 맴돌다가 그림 그렸죠? 제가 봤어요." 괴템의 말문이 터졌다. 드가는 작업용 의자에 앉아 그런 괴템을 쳐다봤다. 손으로 턱을 괸 채 입을 씰룩였다. "다 그렸다." "네?" "머릿속에서 네 모습을 다 그렸어." 드가가 숨을 크게 내쉬었다. "오늘은 집에 가도 돼." 드가가 말했다. "다음 주도 같은 시간 맞죠?" "아니, 내일 바로 와. 그리고…" 드가가 담담하게 덧붙였다. "내일은 쉽지 않을 게다."
다음 날이었다.
드가는 엉거주춤하게 서 있는 괴템을 꿰뚫어 보듯 바라봤다. 평소의 관찰하던 눈빛과는 확연히 달랐다. 드가는 괴템에게 뒤로 깍지를 낀 채 머리부터 어깨뼈, 등뼈까지 위로 힘주기를 주문했다. 금방이라도 깍지 낀 손을 풀고 핑그르르 돌 듯한 모습이 나왔다. 드가는 괴템의 자세가 어긋나면 불같이 화를 냈다. 괴템은 그럴 때마다 울컥했다. 어쨌든 모델이었기에 그냥 눈물을 삼켰다. 이제 드가는 괴템을 거의 매일 불렀다. 괴템은 몇 시간씩 포즈를 취했다. 발레학교에 빠져야 할 때도 있었다. 시간은 착실히 흘렀다. "됐어." 드가가 그제야 허리를 폈다. 영원할 듯했던 작업이 드디어 끝났다. 1m 높이쯤의 조소였다. 괴템은 뛸 듯이 기뻤다. 드디어 벗어날 수 있다. 완성된 조각상이 뭐가 어떻든 간에 진심으로 핑그르르 돌 수 있을 것 같았다.
"발레복 사이즈가 몇이야?"
"에?" "토슈즈 사이즈는?" "아, 그러니까…." 드가는 괴템이 말한 옷과 신발 크기를 꼼꼼히 받아적었다. "내일부터는, 나오지 않아도 돼." 드가가 말했다. 코 밑으로 생쥐가 지나가는 듯 인상을 펼 줄 몰랐다. "바라던 바네요. 쉽지 않았어요." 괴템도 심통 난 표정을 지었다. "정말, 세상에 모든 예술가가 아저씨 같다면 모델 일은 다시는 못하겠어요." 분명 밥맛인 인간이 확실한데, 막상 못 본다니 섭섭한 마음도 들었다. "어이, 꼬마야." 드가가 괴템을 불렀다. 문고리를 쥔 괴템이 뒤를 돌아봤다. "집으로 바로 가. 엉뚱한 골목길로…." "알았어요. 거기 안 간 지 꽤 됐어요." 괴템이 말을 끊었다. 괴템은 문을 홱 열어젖히려다 한 번 더 뒤를 돌아봤다. 드가가 그대로 서 있었다. 잘못 본 것인지 알 수 없지만, 그의 눈에는 눈물이 고인 듯도 했다.
드가는 1834년 파리의 부잣집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잘나가는 은행가였다. 어머니는 그보다 한참 젊은 크리올(Criole·유럽계 혼혈) 여인이었다. 백인과 흑인 피가 섞인 데 따른 이국적 아름다움이 있었다. 드가는 능력 있는 아버지, 매력적인 어머니 사이에서 행복하게 클 수 있었다. 하지만 그의 삶은 흔한 가족 드라마가 아니었다. 어머니는 바람을 피웠다. 상대는 아버지의 남동생, 즉 드가의 삼촌이었다. 아버지는 어머니를 너무나 사랑했기에, 기를 쓰고 못 본 척을 했다. 이 와중에 철없는 어머니는 요절까지 했다. 겨우 32살이었다. 아버지는 무너졌다. 듬직하던 큰 산은 사막처럼 황폐해졌다. 드가도 고통의 시간을 보냈다. 드가는 이 모든 일을 가슴에 새겼다. 대책 없이 떠난 어머니를 평생 증오하고, 환멸하고, 저주했다. 그가 고작 13살일 때였다. 훗날 사람들은 드가가 보인 까칠함의 이유를 여기에서 댄다. 안 그래도 예민함을 타고난 아이인데, 가정에 극도로 소홀했던 어머니가 이를 부추겼다는 이야기다. 아울러 드가가 평생 여성을 멀리하며 독신으로 산 이유도 여기에서 찾는다. 어머니를 향한 극도의 혐오가 여성 전체로 번졌다는 추측이다.
그래도 어릴 적 드가는 예술을 좋아한 아버지 덕에 미술과 친해졌다.
드가는 처음에는 가업 계승을 위해 법 공부를 했다. 파리 대학 법학부에도 들어갔다. 하지만 곧 학업을 내려놨다. 무슨 바람이 들었는지, 드가는 아버지에게 화가가 되겠다고 선언했다. 아버지는 쉬운 출셋길을 포기하는 아들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1854년, 드가는 파리 국립미술학교에 입학했다. 21살 때였다. 수업 시간에는 공부하고, 쉬는 시간에는 루브르 박물관에 쪼르르 달려갔다. 거장의 그림을 열심히 모사했다. 1855년에는 그 시절 신고전주의의 대가, 살아있는 전설인 도미니크 앵그르를 만났다. "젊은이, 선 긋기에 충실하게." 앵그르는 드가의 그림을 몇 장 보곤 이같이 조언했다. 자존심이 센 드가는 그가 건넨 말을 평생 기억한다. 선 긋기에 너무 충실하게 임한 덕에 훗날에는 데생의 천재라는 말도 듣게 된다. 드가는 1856년부터 3년간 이탈리아를 여행했다. 초기 르네상스 화가인 안드레아 만테냐, 도메니코 기를란다요부터 니콜라 푸생과 한스 홀바인까지 폭넓게 접했다. 그 기간 700점이 넘는 그림을 베껴 그렸다. 기본기를 완전히 체득했다. 이제야 화가로의 준비를 마쳤다.
1862년, 드가는 루브르 미술관에서 디에고 벨라스케스의 그림을 베끼고 있었다.
"맨날 뭘 그렇게 그리오?" 이때 드가에게 한 사내가 관심을 보였다. 그의 이름은 에두아르 마네였다. 곧 기성 화단에 '풀밭 위의 점심 식사'와 '올랭피아'라는 폭탄을 던질, 그 덕에 인상주의의 아버지로 통하게 될 그 화가였다. 드가는 원래 역사화가가 될 생각이었다. 옛 거장처럼 과거의 한순간을 담담하게 그리려고 했다. 보고 배운 게 그것밖에 없어 다른 생각을 할 틈도 없었다. 그런데 2살 형이었던 마네가 드가의 지향점을 바꿨다. 마네는 드가에게 새로운 세상을 보여줬다. 옛날을 다룬 그림은 곧 퇴물이 될 테고, 현재를 담은 그림이 대세가 된다고 했다. 변화의 흐름이 당장은 핍박받는 듯 보이지만, 이는 거부할 수 없는 미래가 된다는 말이었다. 모더니즘 정신을 주입한 것이다. 드가는 마네를 통해 클로드 모네, 오귀스트 르누아르, 베르트 모리조 등 인상주의자들과도 마주했다. 모두 그 시절 별종들이었다. 드가는 이들과 교류했다. 인상주의 전시에도 꾸준히 참여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드가의 삶을 관통하는 큰 요소는 그의 특이한 성격이다.
좋게 보면 소신남이었고, 대놓고 말하자면 밥맛 기질의 아웃사이더였다. 드가의 우상은 여전히 앵그르였다. 그렇기에 어디로 튈지 모르는 젊은 애들과 한통속으로 묶일 뜻이 전혀 없었다. 그는 자기보다 예닐곱 살씩 어린 모네와 르누아르를 풋내기로 봤다. 드가는 순간을 잡아 캔버스에 담는 일 말고는 인상주의자들과 공통점이 없다고 생각했다. 드가는 치밀하고 계산적으로 그림을 그렸다. 일단 머릿속으로 구도부터 색깔까지 완벽하게 짜 맞춘 뒤 붓을 드는 스타일이었다. 그런데 드가가 볼 때 인상주의를 따른다는 작자들은 밖에 나가 팽팽 돌아다니면서 그림을 그렸다. 즉흥적으로 물감을 찍어 발랐다. 드가 입장에선 정말 딱 질색이었다. 언젠가 드가는 "내게 행정권이 있다면 붓 들고 싸돌아다니는 애들을 감시할 특수 경찰부대를 만들 것"이라는 투의 말도 했다.
드가의 초기작 중 대표 그림은 '실내'다.
작은 램프 조명이 켜진 좁은 방이다. 공간 전체에 알록달록한 벽지가 붙었지만, 음침한 분위기가 역력하다. 벽에 기댄 남성, 옷이 반쯤 벗겨진 채 웅크린 여성은 대치 중이다. 여성은 손으로 눈물을 훔치는 듯하다. 두 사람은 아무 말도 없고 어떤 큰 동작도 취하지 않는데, 상황이 좋게 풀릴 기미는 없다. 사람들은 이 그림을 보고 잘 짜인 여러 드라마를 상상했다. 에밀 졸라의 소설 '테레즈 라캥' 등 문학 작품과 연결 지으려는 시도도 했다. 이 그림에는 '실내'가 아닌 또 다른 제목도 붙었다. '강간(Le Viol)'이었다. 이는 드가의 회화적 지향이 '밖보다는 안, 즉흥 아닌 계산이'라는 점을 명징하게 보여주는 작품이다.
1872년, 드가는 동생과 함께 미국도 여행했다.
38살 때였다. 드가는 어머니 고향인 미국 루이지애나주(州)의 뉴올리언스로 갈 기회를 잡았다. 그는 5개월간 머물렀다. 미국의 역동성을 체감했다. 드가는 종종 외삼촌이 운영하는 공장을 찾았다. 그곳의 실내 풍경을 보고 그림 '뉴올리언스의 목화 공장' 등을 만들었다. 드가는 이렇듯 비교적 풍족한 삶을 향유했다. 잘하던 공부를 때려치우고도 갑자기 미술학교에 갈 수 있었고, 이탈리아나 미국 등도 여행 겸 유학으로 경험할 수 있었다. 값싼 안주에 싸구려 압생트를 달고 살던 몇몇 인상주의자들과 는 또 다른 점이었다. 하지만 1874년, 드가의 삶이 뒤집혔다. 아버지가 죽었다. 큰 빚을 남긴 채 세상을 떴다. 동생은 회사를 부도내버렸다. 드가에게 이제 느긋한 삶 따위는 없었다. 당장 돈이 필요했다. 지금 바로 그림을 팔아 생계를 유지해야 했다.
당시 프랑스는 벨 에포크(belle époque·19세기 말~20세기 초 프랑스가 누린 풍요와 평화)를 맞이했다.
산업화와 도시화가 함께 이뤄졌다. 어수선한 혁명의 바람, 시끄러운 정치적 혼란은 잠잠해졌다. 거리는 활기찼다. 돈과 술이 마구잡이로 오갔다. 하지만 빛이 강할수록 그림자도 짙어졌다. 변두리 사람들은 변화에 올라탈 힘이 없었다. 그렇기에 여전히 비루했다. 이들 중 여성은 발레리나, 오페라 여가수, 세탁부 등 가진 자들의 유희 내지 뒤치다꺼리를 충족하는 일에 나섰다. 드가는 이들을 뚱하게 쳐다봤다. 웃음을 흘리며 우아하게 춤추지만 이제 겨우 소녀티를 벗어가는 발레리나들, 당당하게 노래 부르지만 무대 밑에서는 정장 입은 남성에게 끌려가는 오페라 여가수, 손이 쩍쩍 갈라지는 빨래에 종일 매달리는 세탁부를 유심히 바라봤다. 드가는 결심한 듯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가 향한 곳은 발레학교와 극장 등이었다.
드가는 그래봤자 아직 10대에 불과한 발레리나를 그리기 시작했다.
역시나 춤을 신분 상승 사다리로 보고 뛰어든 하층민 소녀가 대부분이었다. 귀족의 후원을 받기 위해 기를 쓰는, 결국에는 성 상납을 하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드가는 이들 틈에 부대껴 그림 '더 스타'를 그렸다. 눈처럼 새하얀 발레리나가 공연 중 절정에서 환호받는 듯하다. 하지만 드가는 굳이 그녀 목에 검은색 초크를 넣었다. 굳이 그녀 뒤에 정장 차림의 남성을 표현했다. 이 때문에 그녀는 여전히 불안해보인다. 이 남성의 통제를 받는 듯한 느낌도 역력하다.
드가는 그림 '발레 수업'도 완성했다. 발레리나들이 수업 중 다양한 포즈를 취한다. 한가운데에는 당시 유명 안무가였던 흰 머리의 쥘 페로(Jules Perrot)가 막대기를 짚고 있다. 드가는 굳이 또 오른쪽 맨 뒤에 발레복을 입지 않은 여성들을 넣었다. 발레리나들의 엄마였다. 이들은 귀족에게 자기 딸을 소개하는 등 역할을 자처했다. 이 작품 또한 그 시절 발레의 이면을 들추고 있었다.
마리 반 괴템.
드가의 모델이 되는 14살 발레리나의 어머니 또한 그런 일을 했다. 그녀는 재단사인 남편이 죽은 후 여유를 잃었다. 당돌한 딸에게 너무 일찍 생의 부담을 안겼다. 그녀는 괴템에게 여러 남성을 소개했다. 드가 또한 그녀 덕에 괴템을 알고 모델로 삼을 수 있었다.
드가는 발레리나 말고도 세탁부, 전업 여성 모델 등도 열심히 그렸다.
누구도 신경 쓰지 않는 이들의 고단함,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이들의 권태감을 화폭에 꾹꾹 담았다. 이들 중 누가 다가오면 틀림없이 짜증 내고 툴툴대면서도, 끝까지 붓을 놓지 않았다.
그런 드가에게 항상 따라오는 수식어가 있었다. 여성 혐오자다.
실제로 드가는 꽃무늬 장식을 질색했다. 여성용 향수 냄새가 나면 몸서리를 쳤다. 여성 모델이 "그림의 코가 저랑 다른데요?"라고 하자 극히 분노해 벌거벗은 그녀를 그냥 쫓아버렸다는 일화도 있다. "여자의 수다를 듣느니 울어대는 양 떼와 있는 게 낫다"라거나 "대체 아내가 왜 필요한가. 아침에 부스스하게 깨선 밤새 작업한 내 그림을 보고 '정말 잘 그렸네요!'라는 입에 발린 말이나 하는 것 말고는 무슨 일을 할 수 있나"라는 말도 한 적 있다. 드가가 그저 돈을 빨리 벌고자 자극적인 여자 그림을 그렸다는 설, 굳이 어린 발레리나나 세탁부를 택한 건 모델료가 비교적 저렴했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다. 발레리나 그림을 뜯어보면 유독 아이들의 얼굴이 흐릿한 게 많다는 점도 근거로 쓰인다.
그렇다고 드가를 여성 혐오자로 못 박을 수 있을까. 드가가 당시 발레리나의 처우 개선 필요성을 말한 유일한 화가였다는 말도 있다. 어쨌든, 드가의 그림으로 그 시절 발레리나의 비애가 영원히 남았다. 그의 그림 덕에 그 시절 오페라 가수도 세탁부도, 전문 여성 모델의 서러움도 영원히 기록됐다. 베르트 모리조, 메리 카사트, 수잔 발라동 등 어린 여성 화가들을 적극 교육하고 화가로 활동할 수 있게끔 도운 이도 드가였다.
"더 이상 예술이 추락할 곳은 없다." (에드가 드가의 조소 '14살의 어린 무희'에 대한 평가 중 일부)
1881년, 파리에서 열린 여섯 번째 인상파 전(展). 드가는 조소 '14살의 어린 무희'를 출품했다. 괴템을 모델로 한 그 작품이었다. 그러고는 평생 먹을 욕을 다 먹었다. 작품은 너무나 생생했다. 진짜 괴템이 전시장에 온 듯했다. 그녀는 금방이라도 빙글빙글 돌 것 같았다. 꿈을 꾸는 듯한 두 눈, 고집스러운 입, 가만히 비를 맞는 양 치켜든 턱, 앳된 상체, 빈약한 두 다리의 이 조소는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끝이 아니었다. 비단 리본을 머리에 묶었다. 딱 맞는 발레복을 입고, 토슈즈까지 신었다. 여신도, 유명인도 아닌 볼품 없는 14살짜리 꼬마애가 숭고하게 섰다. 그렇다고 딱히 예쁘지도 않다. 그간 본 적 없는 조소였다. 진짜 생명력이 깃든 조각상이었다. 기성 화단은 "이따위 상은 미술관이 아닌 인류 박물관에 있어야 한다", "내 딸이 발레리나가 아닌 게 천만다행" 등 악평을 내질렀다. "소녀가 살아 움직이는 듯하다"는 일부 호평은 아예 묻혔다. 방문객도 질겁했다. 작품 근처에 가는 일조차 꺼렸다.
드가는 기분 나쁜 티를 팍팍 냈다.
그는 전시가 끝나자 이 작품을 작업장 한구석에 처박아버렸다. 드가는 살아있는 동안 두 번 다시 누군가에게 이를 먼저 보여주지 않았다. 언젠가 한 사람이 드가의 작업실을 들렀다가 우연히 이 조각상을 봤다. 그가 관심을 보이자 드가는 슬픈 눈빛으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그것은 내 딸인데, 어떻게 팔 수 있겠나."
한편 괴템은 어떻게 살았을까. 안타깝게도 괴템은 곧 발레학교에서 쫓겨났다. 결석이 길어서였는데, 끝내 절도죄로 체포됐기 때문이라는 말이 있다. 이후 괴템의 삶에 대해선 알려진 게 많지 않다. 직업, 결혼 여부, 죽음의 흔적조차 정확하게 남아있는 게 없다. 그 시절 파리라면 개인의 삶을 살펴볼 만큼의 행정 체계가 있었지만, 그럼에도 지금껏 베일에 가려져 있다.
사실 드가에게는 문제가 있었다.
이는 나이가 들수록 더 크게 다가왔다. 시력 저하였다. 1870년, 아직 혈기 왕성하던 시절 드가는 보불전쟁에서 방위군으로 근무했다. 드가는 자기 눈에 문제가 있다는 걸 소총 연습 중 알았다. 그는 시력이 전쟁의 추위, 바로 얼마 뒤 겪은 미국 뉴올리언스의 뜨거운 햇빛 탓에 더 급속도로 나빠졌다고 생각했다. 드가는 30대 후반부터는 실내조명등을 두고서야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 안 그래도 인상주의자 녀석들이 찬양하는 외광(外光)이 싫었는데, 더욱 거리를 두게 된 이유였다. 훗날 사람들은 드가의 시력장애를 황반변성(黃斑變性·Macular Degeneraton)으로 추측한다. 빛을 포착하는 황반 부위가 퇴화하는 증상이다. 점차 악화할 뿐, 그때는 뾰족한 치료법도 없는 병이었다. 드가는 차츰 유화보다 파스텔화를 그리는 빈도가 잦아졌다. 눈이 멀어가는 그에게 정밀함이 비교적 덜 요구되는 파스텔화는 구원과 같았다. 그런데도 드가는 모델에게 자기 그림의 색감이 잘 맞는지 묻곤 했다. 드가는 57살쯤 되자 그림은커녕 글도 읽을 수 없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조각에 더 몰두했다. 옅어지는 시각을 촉각으로 채우려고 했다.
나이가 들수록 더 심해지는 게 또 있었다.
아집이었다. 드가는 1894년 드레퓌스 사건으로 반(反)유대주의가 파리를 휩쓸 때 거기에 동참했다. 유대인 장교 드레퓌스가 간첩 혐의를 받고 옥살이를 한 일이었다. 이 건으로 프랑스 곳곳에서 유대인 살해가 이뤄졌지만, 진짜 간첩은 드레퓌스가 아닌 육군 소령 페르낭 에스테라지로 밝혀졌다. 잔혹한 해프닝이었다. 드가는 원래도 자기주장이 강했다. 그런 그는 드레퓌스 사건 후 반유대주의적 정서를 그대로 내보였다. 드가는 그의 유대인 지인 모두에게 절연을 선언했다. 그의 무리수에 동료 화가 상당수도 곁을 떠났다. "예술가는 혼자 살아야 하고, 그의 사생활은 알려지지 않아야 한다." 드가는 자신의 이 철학을 지켰다. 끝내는 자기가 사람들을 멀리한 게 아닌, 사람들이 그를 멀리한 셈이 됐다. 말년을 맞은 드가는 거의 실명한 상태로 파리 거리를 돌아다녔다고 한다. 끝까지 그와 함께했던 르누아르마저 그의 고집에 지쳐 왕래를 끊었다고 한다. 드가는 1917년, 83살 나이로 죽었다. 고독한 최후였다.
자신이 인상주의자로 묶이는 걸 질색했지만 인상주의 전(展)에 누구보다 관심을 기울였던 삶. 여성을 멀리했지만 알고 보면 누구보다 여성과 가까웠던 삶. 정치적으로는 꼴통에 가까웠지만 회화에서는 조각과 파스텔 등 새로운 도전을 이어간 삶. 드가는 끝내 비관적인 생을 살았다. 그래도 그는 마음 한쪽에 늘 무언가를 간직하고 있었던 듯하다. 그건 회의 속에서도 꿋꿋하게 피어난 희망 한 줄기였을까.
〈참고자료〉드가, 이연식, 아르테 관계의 미술사, 서배스천 스미, 앵글북스 줄리언 반스의 아주 사적인 미술 산책, 줄리언 반스, 다산책방
〈후암동 미술관 이론 편 읽는 순서〉
1)천사가 이렇게까지 운다고? 무섭게 왜 그래[후암동 미술관-조토 편] - 르네상스 선구자(2022. 7. 2.)
2)뻥 아냐, 600년전인데 이 정도 ‘입체 그림’ 있었다[후암동 미술관-마사초 편] - 원근법 선구자(2022. 8. 27.)
3)세계서 가장 유명한 이 ‘레이저 눈빛’, 그것은 사랑?[후암동 미술관-얀 반 에이크 편] - 유화 선구자 (2022.5.21.)
4)‘레드벨벳’도 춤추게 한 이 화가의 정체…"악마의 아들? 나 원 참" [후암동 미술관-보스 편] - 초현실주의 선구자 (2022.5.28.)
5)아리따운 금발 여인, 외간남자 목을 베고 있는거야?[후암동 미술관-카라바조 편] - 바로크 선구자 (2022.6.11.)
6)아름다운 여인, 끌어안고 난리난 옆 커플이 부러워[후암동 미술관-와토 편] - 로코코 선구자(2022.10.8.)
7)맨몸 여인들, 전쟁 뛰어들어 “그만!” 사자후…싸움 막았다[후암동 미술관-다비드 편] - 신고전주의 선구자 (2022.10.15.)
8)표류 D+13, 왜 몰랐지? 뗏목 위 널린 게 먹을건데[후암동 미술관-테오도르 제리코 편] - 낭만주의 선구자 (2022.5.14.)
9)“천사요? 데려오면 그려드리죠” 이놈의 똥고집[후암동 미술관-귀스타브 쿠르베 편] - 사실주의 선구자 (2022.5.7.)
10)“관상가 양반 아니었어?” 조선의 ‘얼굴’, 몰랐던 사실[후암동 미술관-윤두서 편] - 사실주의 특별 편 (2022. 11. 19.)
11)벌거벗은 이 여자, 뭐 때문에 빤히 쳐다보나[후암동 미술관-에두아르 마네 편] - 인상주의 선구자(2022. 4. 23.)
12)“못 그렸는데 폼만 잡아” 욕먹던 이 그림, 3300억이요? [후암동 미술관-클로드 모네 편] - 인상주의 선구자⑵ (2022.4.30.)
13)‘점투성이’ 수상한 커플 정체는? [후암동 미술관-조르주 쇠라 편] - 신인상주의 선구자 (2022. 6. 25.)
14)반 고흐 최애작, 별밤·해바라기 아닌 ‘이 사람들’ [후암동 미술관-빈센트 반 고흐 편] - 표현주의 선구자 (2022.6.4.)
15)이 ‘사과’ 때문에 세상이 뒤집혔다, 도대체 왜?[후암동 미술관-폴 세잔 편] - 근대 회화 선구자(2022. 7.9.)
16)‘생각하는 사람’ 진짜 정체, 남모를 사정도 있었다[후암동 미술관-오귀스트 로댕 편] - 근대 조각 선구자 (2022. 10. 22.)
17)화끈한 키스, ‘이 여성’ 사르르 녹아내리다[후암동 미술관-구스타프 클림트 편] - 분리파 선구자 (2022. 8. 13.)
18)나체 여인, 어쩌다 사자 득실대는 정글 한복판에[후암동 미술관-앙리 루소 편] - 근대 초현실주의 선구자 (2022. 7. 30.)
19)헐크색 피부 갖게 된 ‘이 여성’…이 놈의 ‘남편’ 때문에[후암동 미술관-앙리 마티스 편] - 야수주의 선구자 (2022. 7. 16.)
20)잘생긴 법학 교수님, ‘이것’ 그렸더니 미술계 '발칵'[후암동 미술관-바실리 칸딘스키 편] - 추상회화 선구자 (2022.7. 23.)
21)“이건 나도 그리겠다!” 1순위 그림, 그 놀라운 비밀[후암동 미술관-몬드리안 편] - 추상회화 선구자⑵ (2022. 8. 6.)
22)스파게티 면발? 1315억에 팔린 그림, 충격적 이유[후암동 미술관-잭슨 폴록 편] - 액션페인팅 선구자 (2022. 10. 29.)
23)몸 좋은 보디빌더, 거대 막대사탕 들고 ‘의문의 포즈’[후암동 미술관-리처드 해밀턴 편] - 팝아트 선구자 (2022.11.12.)
24)“동양서 ‘테러리스트’가 왔다” 피아노 다 때려부쉈다[후암동 미술관-백남준 편] - 비디오 아트 선구자 (2022.11.26.)
〈후암동 미술관 인물 편 읽는 순서〉
1)“성폭행 피해자는 나야!” 고문도 견딘 그녀…복수는 우아했다[후암동 미술관-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 편] - 영원한 복수자 (2023. 1. 28.)
2)“예쁜 내 금발 공주님”…‘딸바보’ 국왕 눈에선 꿀이 뚝뚝[후암동 미술관-디에고 벨라스케스 편] - 고결한 관찰자 (2023. 2. 24.)
3)“아내·자식·명예 다 잃었다”…그런데 왜 ‘빵’ 터지셨어요[후암동 미술관-렘브란트 편] - 빛의 마술사 (2023. 1. 7.)
4)‘이 그림’ 때문에 화형당할뻔…어느 야심가의 기구한 삶[후암동 미술관-프란시스코 고야 편] - 흑화한 사상가 (2023. 2. 4.)
5)“날 잊지마오” 가시덤불 ‘감옥’ 8년 갇혔다…그림에 펑펑 울었다[후암동 미술관-추사 김정희 편] - 조선의 품격 (2023. 3. 11.)
6)“6년 약혼女두고 바람…죽자 묘지까지 파헤쳤다” 이 남자, 변명 들어보니[후암동 미술관-단테 가브리엘 로제티 편] - 위험한 사랑꾼 (2023. 3. 18.)
7)“죄송해요, 엄마가 너무 싫어요” 효자 아니었어?…이 화가의 ‘반전’[후암동 미술관-제임스 휘슬러 편] - 모던한 이방인 (2023. 3. 4.)
8)“14살 소녀 이따위로 만들었어?” 평생 먹을 욕 다 먹었다[후암동 미술관-에드가 드가 편] - 무희의 화가 (2023. 3. 25.)
9)‘미녀 그리기’에 진심이었던 이 화가, 진짜 이유[후암동 미술관-오귀스트 르누아르 편] - 행복을 그린 화가 (2022. 12. 24.)
10)“고갱 그놈, 도대체 왜 그래?” 악마인지 ‘악마의 재능’인지[후암동 미술관-폴 고갱 편] - 고귀한 야만인 (2022. 12. 3.)
11)“나랑 6년 계약해” 유명 女배우의 파격제안…인생 달라졌다[후암동 미술관-알폰스 무하 편] -체코의 긍지 (2023. 2. 18.)
12)“백번은 넘게 봤겠다” 모두 아는 ‘이 절규’의 놀라운 비밀[후암동 미술관-에드바르 뭉크 편] - 노르웨이의 현자 (2022. 12. 31.)
13)“이놈의 짧은 다리 때문에” 카바레 스타의 영광과 몰락[후암동 미술관-툴루즈 로트레크 편] - 작은 거인 (2022. 12. 17.)
14)“로댕 아이를 뱄다” 폭탄선언 여성, 30년 수용소에 갇혔다[후암동 미술관-카미유 클로델 편] - 천재와 맞선 천재 (2022. 11. 5.)
15)눈동자 없는 기괴한 여자 그림, 알고 보니[후암동 미술관-아메데오 모딜리아니 편] - 파리의 귀공자 (2022. 12. 10.)
16)숨참고 키스 다이브!…아내가 그렇게 좋으셨어요[후암동 미술관-마르크 샤갈 편] - 순수한 방랑자 (2023. 2. 11.)
17)당신은 모르실거야, 키스하는 두 사람 왜 이 꼴인지[후암동 미술관-르네 마그리트 편] - ‘진짜’ 괴짜 (2022. 9. 3.)
18)피카소도 ‘이 그림’에 “대박!” 감탄, 각성했다는데[후암동 미술관-피카소·마티스 편] - 피·마 대전 (2022. 9. 10.)
19)3번 유산·35번 수술의 악몽…그럼에도, 인생이여 만세[후암동 미술관-프리다 칼로 편] - 고통의 여왕 (2023. 1. 14.)
20)“내 천사여” 편지 사방팔방에 ‘뽀뽀’…한 무연고자의 죽음[후암동 미술관-이중섭 편] - 아고리, 나의 아고리 (2023. 1. 21.)
21)권총도 채찍도 버텼는데, ‘이 남자’ 행동에 무너졌다[후암동 미술관-마리나 아브라모비치 편] - 우아한 전사 (2022. 8. 20.)
〈후암동 미술관 현장 편 읽는 순서〉
1)이건희 컬렉션, 이 ‘다섯 작품’ 놓치지 마시라[후암동 미술관-‘어느 수집가의 초대’ 출장 편] - 전시 특집 (2022. 6. 18.)
2)알코올 중독 ‘이 남자’, ‘파리’에 미치자 놀라운 일 터졌다[후암동 미술관-몽마르트 언덕 편] - 동행자 : 모리스 위트릴로 (2022. 9. 17.)
3)고흐 “슬픔은 왜 나한테만” 펑펑 울었다, 고작 2평 다락방에서[후암동 미술관-오베르 편] - 동행자 : 빈센트 반 고흐 (2022 9. 24.)
4)모네 “앞이 안 보여도 상관없어”…백내장도 못 막은 그의 ‘최후작’[후암동 미술관-지베르니 편] - 동행자 : 클로드 모네 (2022. 1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