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아이
편집자주
페르메이르의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를 본 뒤 관련 책과 영화를 모두 찾아봤습니다. 잘 그린 건 알겠는데 이 그림이 왜 유명한지 궁금했습니다. 그림 한 장에 얽힌 이야기가 그렇게 많은지 몰랐습니다. 즐거웠습니다. 세상을 보는 눈이 조금은 달라졌다는 느낌도 받았습니다. 이 경험을 나누고자 글을 씁니다. 미술사에서 가장 논란이 된 작품, 그래서 가장 혁신적인 작품, 결국에는 가장 유명해진 작품들을 함께 살펴봅니다. 〈인물편〉은 역사적 사실 기반에 일부 상상력을 더한 스토리텔링 방식으로 쓰여졌습니다.
[헤럴드경제=이원율 기자]촛불이 그림을 머금었다.
열병처럼 번진 화염은 그림을 꿀꺽 집어삼켰다. 잿가루가 흩날렸다. 한 사내의 비명이 복도까지 울려 퍼졌다.
1912년, 오스트리아 빈의 한 법정.
에곤 실레는 초조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판사의 눈총을 받자 주뼛거렸다. 시선을 어디에 둬야할지 몰라 거듭 고개를 젖히고 숙였다. "어이." "네?" 판사는 실레를 벌레 보듯 했다. "직접 말해보게. 자네가 소녀를 유괴했어?" "아니요." "소녀를 유혹한 건가?" "검사의 말은 사실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대체 왜 그 아이가 자네 집에 있었느냐는 말이야. 그러고 보니, 그 집은 진작부터 비행 청소년 아지트였다지?" "판사님, 저는 단지 그림을…." 허! 판사는 대놓고 분노했다. "그림? 이따위 저질 누드화를? 지금 제정신이야?" 판사는 소리를 버럭 내질렀다. 그는 종이 한 장을 들고 거칠게 흔들었다. 실레가 그린 여성 누드화였다.
"저걸 그림이랍시고 그린 거야…?"
법정이 술렁였다. 누군가는 야유했고, 누군가는 손가락질했다. 변태라는 말도 나돌았다.
판사는 당황한 실레, 팔랑대는 그림을 번갈아 쳐다봤다. 사람도, 그림도 역겨운 듯 입술을 꽉 깨물었다. 판사는 책상 끝에 있는 초를 끌어왔다. 그리곤 참을 수 없다는 양 그림을 촛불에 마구 휘저었다. 그림이 화르르 타올랐다. 처음에는 붉게, 그다음에는 검게 물들었다. 끝내 이 세상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판사님, 도대체 무슨…. 안 돼!" 실레가 외쳤지만 늦었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남은 건 알싸한 종이 탄내뿐이었다.
실레는 미성년자 유괴, 추행 혐의를 받았다.
그는 유치장에 갇혔다. 구금이었다. 실레는 그 안에서도 화구를 쥐었다. 자기만의 살굿빛 그림을 또 그렸다. 밥을 먹고, 잠을 자고, 화장실에 갈 때를 빼곤 집요하게 작품 활동을 했다. 여윈 몸을 돌돌 말아 새우처럼 웅크려 지낼 법도 했지만, 끝내 그러지 않았다. "…내 그림과 드로잉이 에로틱하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에로틱한 그림도 늘 예술이지 않았는가. 여태 에로틱한 그림을 그린 화가가 나 하나뿐이란 말인가." 실레는 이런 일기도 썼다(그의 친구가 썼다는 말도 있다). '에곤 실레. 미성년자 유괴, 추행 혐의는 모두 없던 것으로.' 실레는 스무날 동안 꼼짝 없이 갇힌 후에야 이런 통보문을 접했다. 그는 안도했다. 당연한 결과였다. 이제 해방인가 싶었지만….
'다만.'
실레는 이어지는 문장을 읽고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이 자의 작업실에 걸린 누드화들은 미성년자를 유혹하는 포르노로 보기에 충분했음. 그렇기에 모두 압수.' 실레는 망치로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었다. 내 자식 같은 그림 수백 장을 다 가져가겠다고…? 그 판사의 뒤끝일지도 모를 일이었다. 실레는 사흘간 옥살이를 더 했다. 속이 까맣게 타들었다. 그가 옥중에서 그린 그림 13점을 안고 세상 빛을 봤을 땐, 그새 몇 년은 더 늙어 보였다.
기차 좋아한 소년…빈 아카데미 ‘최연소’ 입학
실레는 1890년 오스트리아 툴른에서 태어났다.
툴른역 역장인 아버지, 체코 출신의 어머니 아래에서 컸다. 위로는 누나 둘, 밑으로는 여동생과 함께 자랐다. 비교적 유복했다. 그 시절 전형적인 중산층이었다. 실레는 2살 때부터 색연필로 그림을 그렸다. 가장 즐겨 그린 건 기차였다. 아버지 품에서 본 육중한 기계를 종이에 담으면 그렇게나 황홀했다. 실레는 툴른역을 '방앗간'으로 삼았다. 아버지의 손짓 아래 오가는 기차를 관찰했다. 쓱쓱 칠할 때마다 역무원의 호루라기 소리, 레일에 닿는 기차의 바퀴 소리, 자갈이 튀는 소리 등을 흉내 내며 흥얼거렸다.
아버지는 실레가 자기처럼 안정적인 일을 하길 바랐다.
그런 아버지는 실레가 기차보다 '기차 그리기'를 더 좋아한다는 걸 깨닫고서 크게 실망했다. 연필을 뺏고, 스케치북을 찢고 태우는 등의 모습도 보였다. 실레는 굴하지 않았다. 신이 점지해준 길이 예술이라는 양 끝까지 고집을 부렸다. 아버지의 바람과 달리, 실레는 다른 길에 딱히 재능도 없었다. 실레는 중학생 때부터 이미 이상한 아이로 꼽혔다. 숫기가 없었다. 수줍음만 지나치게 많았다. 그림과 운동 말곤 성적도 다 하위권이었다.
자식 진로를 걱정하는 부모, 제 마음대로 하겠다는 아들, 그럼에도 저녁 식사는 늘 함께하는….
그저 그런 행복, 견딜 만한 불행만을 겪던 실레의 집안에 끝내 일이 터졌다. 아버지는 분명 거친 사람이었다. 그런데도 속마음은 따뜻했기에 미워할 수 없었다. 그런 아버지가 어느 순간부터 오락가락했다. 울고, 웃고, 화내기를 반복했다. 고장난 듯 삐걱거렸다. 1905년, 아버지는 또 발작을 일으켰다. 모든 재산 증서와 증권을 난로에 처박았다. 그리곤 죽었다. 54살이었다. 병명은 매독이었다. 실레는 성병에 걸린 아버지의 최후를 안쓰럽게 쳐다봤다. 그 장면은 에로티시즘과 죽음에 대한 환상과 공포를 안겨줬다. 훗날 실레가 퇴폐적 누드화를 그리는 데 영향을 주게 된다.
이제 실레가 사실상 집안 가장이었다.
돈을 빨리, 많이 벌고 싶었다. 가장 잘하는 일을 해야 했다. 그림이었다. 후견인 큰아버지가 철도직을 권했다. 그 말은 귓등으로 들었다. 결국 실레는 빈의 예술 공예학교에 들어갔다. 이때부터 실레는 물 만난 물고기였다. 또래가 겨우 사과 정도를 그릴 때 정교한 기차, 복잡한 역사(驛舍)를 수백 장 그린 난 놈이었다. "얘는 물건이다!" 실레는 교수들의 추천장을 들고 바로 빈 미술 아카데미에 입학했다. 역대 최연소, 겨우 16살이었다. 그러나 실레는 대학에선 영 기를 펴지 못했다. 진리의 상아탑은 생각보다 훨씬 보수적이었다. 실레는 크리스티안 그리펜케를 교수의 수업에 참여했다. 실레는 자유 영혼이었다. 퀭하고 어두운 그림이 전매특허였다. 평생을 쨍한 고전 화풍만 가르친 교수 입장에선 문제아도 이런 문제아가 없었다. 교수는 참다못해 실레를 불러세웠다. 벌게진 얼굴로 폭언을 쏟아냈다. "사탄이 내 수업에 너를 토했어. 어디 가서 절대 내 제자라고 말하지 말거라."
‘우상’ 클림트와 만남…금박을 벗기다
그따위 말에 실레도 오만 정이 떨어졌다.
때마침 구원자가 나타났다. 혼자서 온 세상을 100년은 앞서가는 남자였다. 걸을 때마다 눈부신 황금빛이 후드득 떨어지는 화가였다. 구스타프 클림트였다. 뿌리 깊은 전통, 지긋지긋한 관행을 다 걷어차곤 "시대에는 예술을, 예술에는 자유를!"을 외친 빈 분리파의 대장이었다. "클림트 선생님. 선생님의 드로잉을 제 드로잉과 바꿔주실 수 있으세요? 존경을 담아 부탁드립니다." 클림트를 찾아간 실레가 다짜고짜 종이를 내밀었다. 클림트는 말없이 그림을 건네받았다. 쭉 찢어진 클림트의 두 눈이 커졌다. 그는 그림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클림트는 불안함에 떠는 실레에게 나지막이 말했다. "자네 드로잉이 내 드로잉보다 훨씬 좋아. 굳이 왜 바꾸려고 하는가?" 클림트의 말은 진심이었다. 천재 클림트는 천재 실레를 알아봤다. 어쩌면, 자신조차 뛰어넘을 악마의 재능 소유자라는 걸 알아챘을지도 모른다. 클림트는 자기 그림을 거저 줬다. 실레의 그림은 돈을 주고 샀다. 실레는 감동했다. 그는 이 영광의 순간을 평생 곱씹게 된다.
1909년, 실레는 결국 빈 미술 아카데미를 떠났다.
입학 3년 만이었다. 실레는 자기와 뜻이 같은 동료들을 모아 새로운 조직을 꾸렸다. 일명 신(新) 예술가 그룹이었다. "신 예술가는 자기 자신이어야 한다. 창조자여야 한다. 과거와 전통에 기대지 말아야 한다. 스스로 모든 토대를 닦아야 한다. 이렇게 할 때 비로소 신 예술가가 된다." 이 모임의 선언문이었다. 빈 분리파를 향한 동경, 빈 미술 아카데미에 대한 거리감이 그대로 서려 있다.
실레는 클림트와 계속 만났다.
빈 미술 아카데미를 떠난 그해, 실레는 클림트가 주도한 빈 분리파 전(展)을 둘러봤다. 실레는 클림트의 우아한 황금 장식에 넋을 잃었다. 분리파가 갖고 온 에드바르 뭉크, 빈센트 반 고흐 등 자유로운 표현주의 작품에 혼이 빠졌다. 실레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자신의 예술적 지향이 틀리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클림트는 그런 실레를 지긋이 쳐다봤다. 실레가 정열, 어쩌면 광기일 수도 있는 물살에 비로소 몸을 맡기려는 걸 흐뭇하게 봤다. 클림트는 실레가 분명 무언가 일을 낼 거라고 확신했다. 그는 실레에게 여러 모델을 소개했다. 거래처와의 자리도 만들었다. 더는 주저하지 말거라…. 클림트가 실레에게 원하는 건 딱 하나였다.
그렇게 실레는 사슬을 모두 다 끊어냈다.
날개를 활짝 폈다. 이제 실레는 조금의 눈치도 보지 않았다. 밖이 아닌 안을 마음껏 탐구했다. 외면의 예쁜 풍광 말고, 내면에서 느껴지는 인간의 욕망과 불안에 오롯이 집중했다. 숭고하게 그리자는 아카데미의 관습에서 완전히 탈출했다. 꾸밈없이, 그렇기에 때로는 추악하게 그리자는 목소리에 응답했다. 1911년, 실레는 빈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실레는 성적인 그림, 솔직하고 자극적인 작품을 잔뜩 내걸었다. 그의 결과물은 야했다. 기괴하고, 광폭했다. 인간의 본능 밑바닥을 싹싹 긁어 퍼 올린 듯했다. 심연에 머리를 처박은 채 발버둥 치던 야성이 고개를 든 듯했다.
빈이 뒤집어졌다. 빈 분리파조차 씹어먹는 희대의 반항아가 나왔다고 했다. 실레는 그간 클림트의 그림을 참고했다. 클림트의 작품을 거의 똑같이 그리기도 했다. 그런 실레에게 이제 클림트의 작품은 필요 없었다. 실레는 클림트가 입혀놓은 겉치장을 온통 다 벗겨놓았다. 그는 어떤 면에선 이미 클림트를 뛰어넘었다. 클림트가 생전에 누군가에게 열등감을 느낀 적이 있다면, 그건 오직 실레뿐이었을 터였다.
가출 소녀 재웠다가 옥살이…겨우 풀려났다
푸른색의 큰 눈망울이 매력적인 그녀, 붉은색 블라우스가 유난히 잘 어울린 모델.
발부르가 노이질은 클림트가 소개해준 모델 중 한 명이었다. 애칭은 발리였다. 첫 개인전을 연 그 해, 실레는 노이질과 함께 살았다. 실레는 21살, 노이질은 17살이었다. 노이질이 클림트의 총애를 뿌리치고 실레에게 생을 걸었다는 말이 있다. 이 깡마른 사내가 훗날 클림트보다 더 위대한 화가가 되리라는 믿음으로.
실레는 이제 빈이 숨 막혔다.
실레와 노이질은 짐을 쌌다. 체코 체스키크룸로프로 갔다. 어머니의 고향이었다. 실레는 동화 마을 같은 이곳에서 쉬고 싶었다. 노이질을 그리고, 때때로 사람을 화폭에 담으며 안정을 꾀하려고 했다. 하지만 쉽지 않았다. 마을에선 실레와 노이질을 놓고 좋지 않은 소문이 돌았다. 결혼도 하지 않은 두 남녀에 대한 온갖 추측이 나돌았다. 실레가 10대 소녀들을 모델로 둔 점이 실수라면 실수였다. 실레와 노이질은 떠났다. 사실상 쫓겨났다. 고작 3개월 만이었다. 이들은 빈을 찍고, 1912년에 다시 노이렝바흐로 갔다. 이곳에서 사건에 휘말리고 만다.
가장 많이 통용되는 사연은 이렇다.
"문 열어보시죠." 경찰이 실레의 노이렝바흐 작업실 문을 두드렸다. "무슨 일이시죠?" 실레가 문고리를 쥐었다. "당신이 소녀를 유괴했다는 신고를 받았어요. 잠깐 저랑 같이 가시지요." 문은 반강제적으로 열렸다. 눅눅한 공기, 코를 찌르는 물감 냄새, 벽에 덕지덕지 붙어있는 누드화…. 경찰은 망설임 없이 실레를 끌고 갔다.
며칠 전, 비가 억수처럼 쏟아지는 날이 있었다.
실레와 노이질은 쫄딱 젖은 한 소녀를 집에 들였다. 아버지와 싸우곤 대책 없이 나왔다는 그 아이를 외면하지 못해 방에서 재웠다. 그게 문제였다. 소녀의 아버지는 실레를 유괴범으로 신고했다. 안 그래도 실레가 아이들 옷을 벗겨 그림을 그린다느니, 실레 작업실이 동네 불량 청소년의 집결지라느니 하는 소문이 돌던 터였다. 실레는 범죄자 취급을 받았다. 가출한 소녀가 그새 자해로 정신을 잃은 탓에 더 난감해졌다는 설도 있다. 실레는 법정에 끌려갔다. 판사가 자기 그림을 불태우는 수모도 겪어야 했다. 내막은 곧 밝혀졌다. 그는 무죄로 풀려났다.
유명해지자…‘조강지처’ 밀어냈다
실레는 기진맥진한 채 출소했지만, 그가 쥔 옥중 그림은 빛이 났다.
그중 한 점이 '예술가가 활동을 못 하도록 저지하는 것은 하나의 범죄다. 그것은 움트고 있는 새싹의 생명을 빼앗는 일이다'라는 긴 제목의 자화상이다. 실레가 헐렁한 오렌지색 죄수복을 입은 채 서 있다. 그런 그는 박해받는 성자 혹은 깨달음을 얻은 순례자의 모습이다. 고결함을 넘어 성스러움까지 내뿜는다. 실레가 자유의 문을 열자 노이질이 달려왔다. 그를 꼭 껴안았다. 하지만 실레는, 그런 노이질 앞에서 어색하게 웃었다.
실레의 투옥 사건은 스캔들로 번지지 않았다.
실레는 외려 명성도 얻었다. 당시 빈에서는 퇴폐와 향락의 문화가 뒤늦게 퍼졌다. 뒷골목의 세계는 급속도로 팽창했다. '파리는 무엇이든 받아들이지만, 빈은 무엇이든 허용하지 않는다'는 말이 더는 통용되지 않았다. 실레의 살굿빛 그림이 핫해졌다. 이제 그는 문제아가 아니었다. 최고로 주목받는 예술가였다. 1913년, 실레는 클림트가 회장으로 있는 '오스트리아 예술가협회'에 정식으로 가입했다. 인기에 힘입어 파리, 독일 베를린과 뮌헨, 헝가리 부다페스트, 이탈리아 로마에서 전시회를 열었다. 다 성공했다. 실레는 이제 안정을 원했다. 그는 대뜸 노이질을 카페로 불렀다. "우리, 이제 그만하지." 뜬금없이 이별을 고했다. 조강지처 역할을 자처한 그녀를 아무렇지 않게 밀어냈다. 실레는 언젠가 친구에게 "나는 가장 이로운 결혼을 할 생각이야"라는 편지를 쓴 적이 있다. 온 세상을 돌고 온 실레는 빈에 뿌리를 내리고 싶었다. 그런 실레 눈에 거리를 전전하던 모델 출신의 노이질은 평생 함께하기에는 불안정해 보였다. 지독히도 이기적인 생각이었다. "…저는 결혼할 생각을 하고 있어요. 다행히 상대가 발리(노이질의 애칭)는 아닙니다." 실레는 이쯤 큰아버지에게 편지를 썼다.
실레가 아내로 택한 이는 에디트 하름스였다.
하름스는 유복한 집안에서 자란 교양 있는 딸이었다. 실레가 지긋지긋하게 여긴 돈 걱정(실레는 종종 편지에 '돈은 악마야!'라는 글을 쓰곤 했다)에서 벗어날 수 있을 만큼 여유도 있었다. 1915년 6월17일, 실레는 하름스와 결혼했다. 우연의 일치인지, 그의 부모님 결혼기념일과 같은 날이었다. 노이질은 그 시기에 실레가 쓴 편지를 받았다. "원한다면 나는 당신과 둘만의 시간을 보낼 수 있어. 당신과 둘만의 여행도 즐길 수 있어." 실레 딴에는 나름의 고심이 담긴 말이었다. 하지만 노이질이 보기에는 당연히도 기가 찬 제안이었다. 그렇다면 하름스는…? 노이질은 편지를 마구 구겼다. 휴지통에 휙 던졌다. 노이질은 실레의 순수함을 사랑했다. 하지만 실레의 그 순수함이 온통 자기중심의 지독한 나르시시즘에서 온다는 걸 몰랐다. 실레는 죽을 때까지 노이질을 다시 보지 못했다.
실레는 그러고서 평생 노이질을 그리워했다.
하름스는 좋은 아내였다. 성실하고 현명한 여자였다. 하지만 모델로는 노이질이 더 나았다. 격정적인, 당장 화폭에 담고 싶은 야생적인 면에서도 우위였다. 실레는 노이질을 떠올리며 그림을 그렸다. 그림 속 두 남녀는 서로를 끌어안고 있다. 남성은 차분히 여성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여성은 절박하게 그를 품에 담고 있다. 등 뒤로 있는 힘을 다해 깍지를 끼려고 한다. 황량한 배경, 넝마가 된 옷, 앙상한 모습이 처연함을 더한다. 헤어졌으나 헤어지지 못한 사이의 둘에게선 절망을 넘어 죽음의 향기가 풍긴다. 이 그림에는 '죽음과 소녀'라는 제목이 붙었다. 실레는 곧 닥쳐올 서로의 운명을 느낀 걸까. 노이질은 이후 제1차 세계대전에 종군간호사로 참전했다. 1917년, 발칸반도의 야전병원에서 사망했다. 23살 나이였다. 그리고 곧 실레조차….
아까운 요절, 거대한 세계가 무너지다
실레도 세계대전의 포화를 피하지 못했다.
그는 결혼 사흘 후 징집돼 군 복무를 했다. 그래도 이미 유명 화가였기에 배려는 받을 수 있었다. 실레는 군에 있으면서 전시를 이어갔다. 군 창고를 개조해 작업실로 썼다. 1917년부터는 빈에 있는 집을 오가며 근무할 수 있는 특혜도 누렸다. 1918년, 하름스가 임신했다. 실레는 가슴이 뛰었다. 어릴 적 동경했던 아버지 역할을 이제 곧 자신이 할 수 있었다. 실레는 잔뜩 흥분한 채 화폭 앞에 섰다. 신나게 긋고 칠했다. 그림에는 한 가족이 있다. 실레와 하름스, 곧 태어날 아기다. 실레의 팔과 다리는 키다리 아저씨처럼 길쭉하다. 온몸을 펼쳐 가족을 감싸 안고 품어주려는 듯하다. 평생 불안함만 그린 실레의 가장 따뜻한 그림이다. 주야장천 뒤틀린 표현만 했던 실레의 가장 사랑스러운 작품이다. 제목은 '가족'이다. 실레는 세상에서 부러울 게 없었다.
그 해, 클림트가 죽었다.
실레가 당연히 뒤를 이어받았다. 그는 자신이 클림트의 정통 후계자라고 믿었다. 이제 실레는 오스트리아 최고의 화가였다. 아직 30살도 안 된 이 남자의 표현력을 따라올 사람은 없었다. 오스트리아는 물론, 그의 실력은 전 세계에서 독보적이었다. 하지만 인생은 예측할 수 없다. 심장이 터질 듯한 행복이 오는가 싶더니, 감당할 수 없는 불행이 거듭 고개를 내밀었다. 그의 우상이 죽고 8개월 후, 그의 꿈도 세상을 떠났다. 10월28일, 임신 6개월의 하름스가 죽었다. 이조차도 끝이 아니었다. 실레는 하름스가 세상을 뜨고 불과 사흘 후 사망했다. 당시 유행하던 스페인 독감이었다. 고작 28살이었다. 죽기 직전까지 쥐고 있던 건, 땀에 젖은 채 그리고 있던 하름스의 초상화였다.
"…나는 세계를 꿰뚫어 볼걸세. 이를 통해 끊임없이 무언가를 성취하고, 앞으로 나아가고, 빛나는 것들을 만들 거야."
1911년, 실레는 친구에게 이런 편지를 썼다.
실레의 작품은 현재 약 5000여점이 남아있다. 실레의 지향점은 분명했다. 그는 인간의 은밀한 속살을 넘어 세상의 감춰진 이면을 그리고자 했다. 실레의 세계는 이제야 막 팽창하기 직전이었다. 실레가 그저 마이웨이 누드화가로 기록되기에는 그의 야심이 아까운 부분이다. 어쩌면 신은 예술의 급격한 진보가 두려워, 서둘러 그를 거둬버린 게 아닐까.
〈참고 자료〉
나, 영원한 아이, 에곤 실레, 알비
욕망의 불꽃, 에곤 실레와 뮤즈들, 소피 헤이독, 달다
〈후암동 미술관 이론 편 읽는 순서〉
1)천사가 이렇게까지 운다고? 무섭게 왜 그래[후암동 미술관-조토 편] - 르네상스 선구자(2022. 7. 2.)
2)뻥 아냐, 600년전인데 이 정도 ‘입체 그림’ 있었다[후암동 미술관-마사초 편] - 원근법 선구자(2022. 8. 27.)
3)세계서 가장 유명한 이 ‘레이저 눈빛’, 그것은 사랑?[후암동 미술관-얀 반 에이크 편] - 유화 선구자 (2022.5.21.)
4)‘레드벨벳’도 춤추게 한 이 화가의 정체…"악마의 아들? 나 원 참" [후암동 미술관-보스 편] - 초현실주의 선구자 (2022.5.28.)
5)아리따운 금발 여인, 외간남자 목을 베고 있는거야?[후암동 미술관-카라바조 편] - 바로크 선구자 (2022.6.11.)
6)아름다운 여인, 끌어안고 난리난 옆 커플이 부러워[후암동 미술관-와토 편] - 로코코 선구자(2022.10.8.)
7)맨몸 여인들, 전쟁 뛰어들어 “그만!” 사자후…싸움 막았다[후암동 미술관-다비드 편] - 신고전주의 선구자 (2022.10.15.)
8)표류 D+13, 왜 몰랐지? 뗏목 위 널린 게 먹을건데[후암동 미술관-테오도르 제리코 편] - 낭만주의 선구자 (2022.5.14.)
9)“천사요? 데려오면 그려드리죠” 이놈의 똥고집[후암동 미술관-귀스타브 쿠르베 편] - 사실주의 선구자 (2022.5.7.)
10)“관상가 양반 아니었어?” 조선의 ‘얼굴’, 몰랐던 사실[후암동 미술관-윤두서 편] - 사실주의 특별 편 (2022. 11. 19.)
11)벌거벗은 이 여자, 뭐 때문에 빤히 쳐다보나[후암동 미술관-에두아르 마네 편] - 인상주의 선구자(2022. 4. 23.)
12)“못 그렸는데 폼만 잡아” 욕먹던 이 그림, 3300억이요? [후암동 미술관-클로드 모네 편] - 인상주의 선구자⑵ (2022.4.30.)
13)‘점투성이’ 수상한 커플 정체는? [후암동 미술관-조르주 쇠라 편] - 신인상주의 선구자 (2022. 6. 25.)
14)반 고흐 최애작, 별밤·해바라기 아닌 ‘이 사람들’ [후암동 미술관-빈센트 반 고흐 편] - 표현주의 선구자 (2022.6.4.)
15)이 ‘사과’ 때문에 세상이 뒤집혔다, 도대체 왜?[후암동 미술관-폴 세잔 편] - 근대 회화 선구자(2022. 7.9.)
16)‘생각하는 사람’ 진짜 정체, 남모를 사정도 있었다[후암동 미술관-오귀스트 로댕 편] - 근대 조각 선구자 (2022. 10. 22.)
17)화끈한 키스, ‘이 여성’ 사르르 녹아내리다[후암동 미술관-구스타프 클림트 편] - 분리파 선구자 (2022. 8. 13.)
18)나체 여인, 어쩌다 사자 득실대는 정글 한복판에[후암동 미술관-앙리 루소 편] - 근대 초현실주의 선구자 (2022. 7. 30.)
19)헐크색 피부 갖게 된 ‘이 여성’…이 놈의 ‘남편’ 때문에[후암동 미술관-앙리 마티스 편] - 야수주의 선구자 (2022. 7. 16.)
20)잘생긴 법학 교수님, ‘이것’ 그렸더니 미술계 '발칵'[후암동 미술관-바실리 칸딘스키 편] - 추상회화 선구자 (2022.7. 23.)
21)“이건 나도 그리겠다!” 1순위 그림, 그 놀라운 비밀[후암동 미술관-몬드리안 편] - 추상회화 선구자⑵ (2022. 8. 6.)
22)스파게티 면발? 1315억에 팔린 그림, 충격적 이유[후암동 미술관-잭슨 폴록 편] - 액션페인팅 선구자 (2022. 10. 29.)
23)몸 좋은 보디빌더, 거대 막대사탕 들고 ‘의문의 포즈’[후암동 미술관-리처드 해밀턴 편] - 팝아트 선구자 (2022.11.12.)
24)“동양서 ‘테러리스트’가 왔다” 피아노 다 때려부쉈다[후암동 미술관-백남준 편] - 비디오 아트 선구자 (2022.11.26.)
〈후암동 미술관 인물 편 읽는 순서〉
1)“성폭행 피해자는 나야!” 고문도 견딘 그녀…복수는 우아했다[후암동 미술관-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 편] - 영원한 복수자 (2023. 1. 28.)
2)“예쁜 내 금발 공주님”…‘딸바보’ 국왕 눈에선 꿀이 뚝뚝[후암동 미술관-디에고 벨라스케스 편] - 고결한 관찰자 (2023. 2. 24.)
3)“아내·자식·명예 다 잃었다”…그런데 왜 ‘빵’ 터지셨어요[후암동 미술관-렘브란트 편] - 빛의 마술사 (2023. 1. 7.)
4)‘이 그림’ 때문에 화형당할뻔…어느 야심가의 기구한 삶[후암동 미술관-프란시스코 고야 편] - 흑화한 사상가 (2023. 2. 4.)
5)“날 잊지마오” 가시덤불 ‘감옥’ 8년 갇혔다…그림에 펑펑 울었다[후암동 미술관-추사 김정희 편] - 조선의 품격 (2023. 3. 11.)
6)“6년 약혼女두고 바람…죽자 묘지까지 파헤쳤다” 이 남자, 변명 들어보니[후암동 미술관-단테 가브리엘 로제티 편] - 위험한 사랑꾼 (2023. 3. 18.)
7)“죄송해요, 엄마가 너무 싫어요” 효자 아니었어?…이 화가의 ‘반전’[후암동 미술관-제임스 휘슬러 편] - 모던한 이방인 (2023. 3. 4.)
8)“14살 소녀 이따위로 만들었어?” 평생 먹을 욕 다 먹었다[후암동 미술관-에드가 드가 편] - 무희의 화가 (2023. 3. 25.)
9)‘미녀 그리기’에 진심이었던 이 화가, 진짜 이유[후암동 미술관-오귀스트 르누아르 편] - 행복을 그린 화가 (2022. 12. 24.)
10)“고갱 그놈, 도대체 왜 그래?” 악마인지 ‘악마의 재능’인지[후암동 미술관-폴 고갱 편] - 고귀한 야만인 (2022. 12. 3.)
11)“나랑 6년 계약해” 유명 女배우의 파격제안…인생 달라졌다[후암동 미술관-알폰스 무하 편] -체코의 긍지 (2023. 2. 18.)
12)“백번은 넘게 봤겠다” 모두 아는 ‘이 절규’의 놀라운 비밀[후암동 미술관-에드바르 뭉크 편] - 노르웨이의 현자 (2022. 12. 31.)
13)“이놈의 짧은 다리 때문에” 카바레 스타의 영광과 몰락[후암동 미술관-툴루즈 로트레크 편] - 작은 거인 (2022. 12. 17.)
14)“로댕 아이를 뱄다” 폭탄선언 여성, 30년 수용소에 갇혔다[후암동 미술관-카미유 클로델 편] - 천재와 맞선 천재 (2022. 11. 5.)
15)눈동자 없는 기괴한 여자 그림, 알고 보니[후암동 미술관-아메데오 모딜리아니 편] - 파리의 귀공자 (2022. 12. 10.)
16)숨참고 키스 다이브!…아내가 그렇게 좋으셨어요[후암동 미술관-마르크 샤갈 편] - 순수한 방랑자 (2023. 2. 11.)
17)“당신은 저질 누드화가야!” 격분한 판사, 면전서 그림 불태웠다[후암동 미술관-에곤 실레 편] - 영원한 아이 (2023. 4. 1.)
18)당신은 모르실거야, 키스하는 두 사람 왜 이 꼴인지[후암동 미술관-르네 마그리트 편] - ‘진짜’ 괴짜 (2022. 9. 3.)
19)피카소도 ‘이 그림’에 “대박!” 감탄, 각성했다는데[후암동 미술관-피카소·마티스 편] - 피·마 대전 (2022. 9. 10.)
20)3번 유산·35번 수술의 악몽…그럼에도, 인생이여 만세[후암동 미술관-프리다 칼로 편] - 고통의 여왕 (2023. 1. 14.)
21)“내 천사여” 편지 사방팔방에 ‘뽀뽀’…한 무연고자의 죽음[후암동 미술관-이중섭 편] - 아고리, 나의 아고리 (2023. 1. 21.)
22)권총도 채찍도 버텼는데, ‘이 남자’ 행동에 무너졌다[후암동 미술관-마리나 아브라모비치 편] - 우아한 전사 (2022. 8. 20.)
〈후암동 미술관 현장 편 읽는 순서〉
1)이건희 컬렉션, 이 ‘다섯 작품’ 놓치지 마시라[후암동 미술관-‘어느 수집가의 초대’ 출장 편] - 전시 특집 (2022. 6. 18.)
2)알코올 중독 ‘이 남자’, ‘파리’에 미치자 놀라운 일 터졌다[후암동 미술관-몽마르트 언덕 편] - 동행자 : 모리스 위트릴로 (2022. 9. 17.)
3)고흐 “슬픔은 왜 나한테만” 펑펑 울었다, 고작 2평 다락방에서[후암동 미술관-오베르 편] - 동행자 : 빈센트 반 고흐 (2022 9. 24.)
4)모네 “앞이 안 보여도 상관없어”…백내장도 못 막은 그의 ‘최후작’[후암동 미술관-지베르니 편] - 동행자 : 클로드 모네 (2022. 1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