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럴드경제=서정은 기자] “아무리 올라가봤자 2인자. 은행만 성골이냐?”
금융지주 계열사 상당수를 은행 출신이 독점하는 관행이 깨지지 않고 있다. 계열사들은 은행 출신 대표가 관행적으로 오다 보니 전문성이 떨어지는 것은 물론이고 견고한 유리천장으로 내부 직원들의 사기까지 꺾인다고 불만을 제기하고 있다. 최근 금융지주의 지배구조, 영업관행을 손질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면서 이에 대한 비판도 커지는 분위기다.
금융지주 계열사 최고경영자(CEO) 자리를 보면 대부분 은행 출신 인물이 포진해 있다. 많게는 계열사의 80% 이상이 은행 출신으로 채워진 경우도 있다. 연도별로 차이는 있지만 이 같은 관행은 수십년째 깨지지 않고 있다.
KB금융을 보면 KB자산운용, KB인베스트먼트, KB캐피탈, KB증권 등 일부를 제외하고 대부분 CEO은 은행 출신 몫이다. 하나금융도 마찬가지다. 지난해 말 관계사 CEO 등을 대거 물갈이하며 하나벤처스, 핀크, 하나생명보험 등에 은행 출신을 대거 앉혔다. 하나벤처스에는 안선종 하나은행 부행장을 내정했고, 하나생명과 핀크는 각각 하나은행 부행장과 셀장 출신인 임영호 사장과 조현준 사장이 이끌고 있다.
IBK기업은행의 경우 지난해 말까지 8개 자회사 중 7개가 기업은행 부행장 출신이었다. 신한금융 역시 사정은 똑같다. 신한라이프 사장에는 이영종 신한은행 퇴직연금사업부문장 겸 신한라이프 부사장이 앉았다. 신한자산신탁 또한 은행 출신인 이승수 부사장이 사장으로 올랐다.
지주사들이 은행 출신을 요직에 앉히는 이유는 지주 차원의 사업을 신속하게 추진하기 위해서다. 은행이 지주 내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압도적이다 보니 자연스레 은행의 입김이 세질 수밖에 없다. 최근 업권을 뛰어넘어 계열사 간 시너지를 극대화하려는 니즈가 커진 것도 영향을 주고 있다. 지주 관계자는 “계열사가 커지기 위해서는 은행의 지원이 필요한 것이 현실”이라며 “은행 출신들이 지주에 대한 이해도가 높다 보니 자리에 앉을 수밖에 없는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계열사들의 불만도 만만치 않다. 은행과는 업태가 다르고 요구하는 전문성이 다른데 관행적으로 ‘은행맨’이 내려오다 보니 사기 저하는 물론이고 사업의 영속성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계열사 직원들은 “회사 CEO자리는 결국 은행 몫이라는 분위기가 팽배한 데다 업에 대한 이해도가 떨어지니 매번 설명부터 다시 해야 하는 상황”이라며 “설령 은행 출신의 유능한 CEO가 오더라도 성과가 아닌 회장 임기 등에 따라 교체된다는 것이 문제”라고 입을 모은다. 은행 직원들 또한 “회사 내에 첨예한 이슈가 생기더라도 주요 은행 임원들은 계열사 대표라는 ‘다음 스텝’을 생각하다 보니 몸을 사릴 수밖에 없다”고 전했다.
이 때문에 업계 안팎에서는 이 같은 관행에 대해 문제의식을 가져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은행 출신이라는 이유로 유능한 인물을 배제하기는 어렵지만 지주의 지원에 기대다 보면 오히려 자회사의 자생적 성장이 꺾일 수 있다는 얘기다.
금융권 관계자는 “은행들의 영업이 보수적일 수밖에 없다 보니 은행 출신 CEO들은 투자 등을 해야 하는 계열사들의 특수성을 반영하기 어려울 수 있다”며 “지주 회장의 단기 성과만을 위해 전 계열사가 움직이는 ‘참호 구축’까지 벌어질 수 있다는 점도 고려해볼 대목”이라고 말했다.
금융당국이 최근 금융지주사들의 지배구조, 은행 영업관행 손질에 나서는 만큼 이에 대한 고민도 점차 커질 것으로 보인다. 금융위원회 고위 관계자는 “은행 출신들이 계열사 CEO로 가는 경우가 많은데 개별 CEO의 전문성에 대해 평가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