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0년 전통 삼해소주 김현종 대표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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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딱 1병 빚는 30만원짜리 '이 소주'…'식객' 허영만도 취한 그 맛[채상우의 미담:味談]
삼해소주 김현종 대표가 23일 서울 마포구 삼해소주 양조장에서 헤럴드경제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임세준 기자

[헤럴드경제=채상우 기자] '사람은 귀신이 되고, 귀신은 사람이 되는 술'

1년에 350병, 하루에 단 한 병 꼴로 만드는 명품 소주가 있다. 900년 역사를 이어온 '삼해소주(三亥燒酒)'를 한 단계 끌어올린 소주, '삼해귀주(三亥鬼酒)'다.

애주가들 사이에서 '한국 최고의 소주'라고 입소문을 타며, 극히 일부만 즐겼던 삼해귀주가 20대 젊은 층에게도 인기몰이 중이다. 초록병에 든 희석식 소주의 가격 인상에 대한 '배신'과 새롭고 다양한 주류를 맛보고 싶은 '바람'이 맞물린 결과다.

차별화된 소주에 열광하는 이들에게 삼해귀주는 먹고 싶어도 찾기 힘든, '레어아이템'으로 불리며 더 큰 호기심을 불러 일으키고 있다. 대체 '하루 한 병'을 만드는 극강의 장인정신은 어떻게 탄생한 것일까. 고(故) 김택상 명인이 삼해귀주를 만든 일화를 삼해소주 김현종 대표와의 인터뷰를 통해 재구성했다.

"해외 유명 주류 이긴다"…명인의 집념이 만든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술'

하루 딱 1병 빚는 30만원짜리 '이 소주'…'식객' 허영만도 취한 그 맛[채상우의 미담:味談]
고(故) 김택상 명인. 삼해소주 제공

"으잇, 이게 무슨 맛이야." 2014년 가을, 우연한 기회에 바카디를 마신 김택상 명인은 인상을 찌푸리며 탄식을 내뱉었다.

"왜요, 선생님 입맛에 안 맞으세요?" 바카디를 대접한 지인이 물었다.

"글쎄, 내 입맛에는 안 맞아. 우리도 이것보다 더 좋은 술을 만들 수 있겠는데 말이지..." 자기도 모르게 튀어나온 말에 김 명인은 가슴 속 어딘가 '탁'하고 타오르는 불꽃을 느꼈다.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술을 만들어보자'는 오랜 시간 마음 속으로만 되새겨온 염원이 버티다 못해 입밖으로 튀어나온 것 같았다.

하루 딱 1병 빚는 30만원짜리 '이 소주'…'식객' 허영만도 취한 그 맛[채상우의 미담:味談]
삼해귀주. [막스타그램]

김 명인은 이듬해인 2015년 혼을 담아 만든 삼해귀주를 세상에 선보였다. 삼해귀주의 '귀'는 귀할 귀(貴)가 아니라 귀신 귀(鬼)를 쓴다. '사람은 귀신이 되고, 귀신은 사람이 되는 술'이라는 뜻이다. 귀신에게 업혀가도 모를 정도로 강렬한 삼해귀주의 맛을 표현했다.

"나보고 공장을 차리라고? 절대 그럴 수 없네! 술맛은 손맛이야. 기계로 만들면 절대로 맛있는 술을 만들 수 없어."

삼해소주는 1년에 단 세 번만 빚는다. 삼해귀주는 이 귀한 삼해소주를 두 번 더 증류해 만든다. 많이 만들고 싶어도 하루 400ml 작은 병 하나밖에 나오지 않는다. 수요에 비해 턱없이 부족한 생산량 탓에 공장화를 제안하는 사람도 많았다. 그럴 때마다 김 명인은 손을 내저으며 단호히 거절했다.

"돈 때문에 맛을 잃을 수는 없지. 돈이 중요했으면, 진작에 공장에서 술을 만들었을텐데 내가 왜 안했겠나." 큰 돈을 벌 기회를 놓친 걸 아쉬워하는 지인들에게 김 명인은 너털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하루 딱 1병 빚는 30만원짜리 '이 소주'…'식객' 허영만도 취한 그 맛[채상우의 미담:味談]
2017년 3월 영국 케임브리지대학에 열린 시음회에서 삼해소주와 삼해귀주를 선보이는 김택상 명인. 삼해소주 제공

김 명인의 집념이 담긴 삼해귀주의 맛은 외국에서도 인정 받았다. 삼해귀주를 외국에 처음 선보인건 2017년 영국 케임브리지대학에서 열린 시음회에서다. 삼해귀주를 맛본 영국인 100여명은 기립박수를 치며 "위스키보다 맛있다"는 평가를 내렸다. 해리 해리스 전(前) 주한 미국 대사도 관저 행사 때면 삼해귀주를 찾았다고 한다.

"꽃봉오리를 삼켰더니 뱃속에서 꽃이 활짝 폈다." 다양한 극찬 중에서도 김 명인은 삼해귀주를 맛본 한 외국인의 평가가 무엇보다 좋았다. 그가 염원했던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술'에 가까워진 것에 대한 감격이었다.

"뱃속에 꽃이 폈다" 그 말, 맞았다!…기자가 맛본 71.2도 삼해귀주의 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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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3일 서울 마포구 삼해소주 본사에서 전통 방식으로 술을 빚는 모습. 임세준 기자.

"맛이 어때요?" 지난 23일 서울 마포구 삼해소주 본사에서 만난 김현종 삼해소주 대표가 삼해귀주 한잔을 건네며 기자에게 물었다.

"정말 사과꽃 향이 나네요." 향기로운 사과꽃 같은 향이 입과 코 안에 퍼졌다. 71.2도라는 게 믿기지 않게 부드럽게 넘어갔다. 희석식 소주에서 느껴지는 혀끝을 때리는 강한 단맛 대신 은은한 꿀맛이 났다. 이어 곡식 특유의 고소함이 입안에 맴돌았다. 모두 삼키고 나서 이후 강렬한 꽃향이 다시 한번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이래서 뱃속에 꽃이 폈다고 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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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해소주 공방을 찾은 연예인들. 배우 정준하는 삼해소주를 '인생술'이라 평하기도 했다. 대동여주도 제공

"삼해소주와 삼해귀주 모두 구입한 뒤 2년 동안 숙성을 해야 진정한 맛을 나옵니다. 그 맛이라면, 세상 어떤 술도 이길 자신이 있습니다. 저희 양조장을 찾은 배우 김규리 씨는 술 한 모금 못하는데 삼해귀주를 한 잔 마시고는 '어떻게 제가 이 독한 술을 마실 수 있었죠'라며 놀라기도 했다니깐요." 김 대표가 웃으며 말했다.

삼해귀주와 원류인 삼해소주의 팬으로는 만화 '식객'으로 유명한 허영만 화백과 애주가로 소문난 배우 정준하, 가수 김희철 등 유명인사들이 많다.

김현종 대표는 김택상 명인의 제자였다. 삼해소주의 맛에 빠져 2016년 무작정 김 명인을 찾은 뒤 2017년 대표로 역임해 명인이 세상을 떠난 지금까지 삼해소주의 맛을 지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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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해소주. [와인이좋다]

"삼해귀주를 설명하려면, 원류가 되는 삼해소주를 빼놓을 수는 없죠. 삼해소주가 있어야 명품 삼해귀주를 만들 수 있습니다."

삼해소주는 1241년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집'에 처음 언급된 술로 역사가 900년 이상 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한양에서는 '삼해주'로 불리며, 여러 소주의 대명사처럼 불렸다. 조선시대 대부분의 술이 집에서 빚는 '가양주'였지만, 삼해소주는 마포·공덕 일대 양조장에서 기업 형식으로 만들어 전문적으로 판매됐다.

삼해소주는 왕부터 백성까지 모두 사랑하는 술이었다. 정조는 작황이 좋지 않아 쌀로 술을 빚는 것을 금지해야 한다는 신하의 상소에 "그럼 삼해주도 다 버려야 하는 것이냐"라며 거절했다는 기록도 있다.

일제강점기 주류에 세금을 붙이는 주세령을 도입함에 따라 값싼 희석식 소주가 보급되고, 1965년 쌀로 술을 빚는 것을 금지한 양곡관리법이 시행되면서 양조장에서 빚는 삼해소주는 전멸하게 된다. 다행히 김 명인의 어머니인 고(故) 이동복 명인이 삼해소주 제조법을 전수받아 집에서 가양주로 보존해 오늘날까지 이어올 수 있었다.

삼해소주도 삼해귀주만큼은 아니지만, 1년에 약 3500병 정도만 생산되는 희귀술이다. 만드는 법 자체가 까다롭기로 유명하다. 이름에 붙은 삼해(三亥)가 이 까다로운 공정을 의미한다. 가을에 추수한 햅쌀을 이듬 해 정월 돼지의 날 '해일(亥日)'에 밑술을 빚고 두 번째 해일까지 36일을 발효시킨다. 그리고 덧술(술의 품질을 높이기 위해 1차 밑술에 2차로 겹쳐 담가 덧 넣는 술밑이나 술밥)을 해 다시 36일을 발효한다. 세 번째 해일에 다시 덧술을 해 36일을 또 발효해야 비로소 원주가 된다. 여기까지 꼬박 108일이 걸린다. 이를 한번 증류한 것이 삼해소주다.

"초록병 희석식 소주, 이제 그만 먹고픈데…진짜 우리 술은 어디에"

하루 딱 1병 빚는 30만원짜리 '이 소주'…'식객' 허영만도 취한 그 맛[채상우의 미담:味談]
삼해소주가 제품들. 왼쪽부터 삼해고(상황버섯), 삼해귤, 삼해국(국화), 삼해포(포도), 삼해소주, 삼해귀주. 삼해소주 제공

삼해소주가 전통의 맛만 고수하는 것은 아니다. 시대의 흐름에 따라 맛의 변화도 추구했다. 더 고급스러워진 삼해귀주도 그렇고, 국화와 포도과즙 상황버섯 등을 넣어 증류한 여러 맛의 삼해소주를 만든 것도 이런 노력의 일환이다.

"몇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삼해귀주는 사업가, 변호사, 의사 아니면 연예인들 일부가 입소문으로만 사 먹었습니다. 그런데 최근에는 30만원에 달하는 삼해귀주를 찾는 20대 젊은이들이 많이 늘었습니다." 김 대표는 최근 달라진 주류 시장의 변화에 대해 이같이 설명했다.

김 대표의 말처럼 최근 몇년 새 젊은 층을 중심으로 주류 문화가 바뀌고 있다. 초록색 병에 든 희석식 소주와 맥주가 전부였던 시대는 가고 이제는 비싸더라도 맛있는 술을 찾아 마시는 게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 안타깝게도 좋은 우리 술을 찾는 이들은 많지만, 대부분 명맥이 끊겨 이를 찾기란 쉽지 않다. 일본이나 중국만 하더라도 1000년 이상 명맥을 이어온 전통주와 여기서 파생된 고급 주류들이 전세계적인 사랑을 받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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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형마트에서 다양한 술을 보고 있는 손님. [연합]

"현재의 주세 제도를 개편해야 합니다. 소주 등에 '종가세'를 매기는 지금의 주세가 있는 한 고급 술을 만들려는 이들은 앞으로도 없을 것입니다. 이는 오로지 공장에서 찍어내는 희석식 소주 제조업체만을 위한 법이죠. 국민에게 좋은 술을 많이 보급하고 한국의 술 문화를 바꾸기 위해서는 반드시 종량세로 바뀌어야 합니다." 김 대표는 힘을 줘 일갈했다.

'종가세'는 출고되는 술 가격에 부과되는 세금이다. 출고가격이 비쌀 수록 세금 부담이 크게 늘어나 고급 주류 제조를 막는 걸림돌로 지적되고 있다. 맥주의 경우 2020년부터 수량에 따라 세금이 부과되는 '종량세'로 바뀌고 난 뒤 프리미엄 수제 맥주 시장이 부흥기를 맞이했다.

주세도 문제지만, 워낙 소량 생산에 판매하는 곳을 찾기 힘들다는 것도 해결해야 할 과제다. 현재 삼해소주와 삼해귀주는 도매상을 통해 구입하거나 마포 삼해소주를 방문해 구입하는 방법이 전부다. 김 대표는 앞으로 백화점 등 활로를 개척해 더 많은 이들이 삼해소주를 맛볼 수 있게 할 계획이다.

"최근까지도 신세계백화점에서 삼해소주와 삼해귀주를 납품할 것을 요청했습니다. 명인의 별세에 따라 지역특산주면허가 잠깐 정지돼 팔지 못했죠. 다음 달이면 면허가 재발급돼 이제 삼해소주를 백화점에서 판매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됩니다. 앞으로는 더 많은 곳에서 삼해소주를 만날 수 있도록 해야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