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수한 방랑자
편집자주
페르메이르의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를 본 뒤 관련 책과 영화를 모두 찾아봤습니다. 잘 그린 건 알겠는데 이 그림이 왜 유명한지 궁금했습니다. 그림 한 장에 얽힌 이야기가 그렇게 많은지 몰랐습니다. 즐거웠습니다. 세상을 보는 눈이 조금은 달라졌다는 느낌도 받았습니다. 이 경험을 나누고자 글을 씁니다. 미술사에서 가장 논란이 된 작품, 그래서 가장 혁신적인 작품, 결국에는 가장 유명해진 작품들을 함께 살펴봅니다. 역사적 사실을 기반으로 한 스토리텔링 방식으로 몰입도를 높였습니다.
[헤럴드경제=이원율 기자]"1944년 9월2일 오후 6시. 벨라가 죽었다. 천둥이 치고 구름이 펼쳐졌다."
마르크 샤갈은 힘겹게 글을 썼다. "그리고, 모든 게 캄캄해졌다." 샤갈은 손을 덜덜 떨었다. 눈물이 종이 위로 후드득 떨어졌다. 목울대가 또 뜨거워졌다. 그대로 엎드린 채 훌쩍였다. 이날 샤갈은 아내 벨라 로젠펠트를 잃었다. 감염병이었다. 긴 방랑에 힘이 빠진 벨라는 이국에서 허무하게 생을 마쳤다. 투병 생활은 고작 사흘도 안 됐다. 샤갈은 아직도 벨라의 죽음을 이해할 수 없었다. 우연히 보게 되는 그녀의 옷과 양말, 머리카락이 엉켜있는 빗, 턱 끝까지 올려 덮던 담요…. "아직 멀었어요? 이제 쉬세요." 벨라의 목소리는 여전히 생생했다. 그녀가 당장 뒤에서 안아줄 듯했다.
샤갈은 한동안 붓을 쥐지 못했다.
그냥 다 꼴 보기 싫었다. 이젤은 뻥 차버렸다. 작업실 안 그림도 모조리 뒤로 돌렸다. 밥도 잘 안 먹고, 물도 제대로 안 마셨다. 샤갈에게 벨라는 아내 그 이상이었다. 벨라만이 샤갈의 방방 뛰는 그림과 정신을 온전히 이해했다. 샤갈이 간질 발작을 일으킬 땐 유일하게 당황하지 않고 응급처치를 했다. 샤갈은 모든 일을 벨라와 의논했다. 그림을 다 그려도 그녀가 "좋아요"라고 말하기 전까지는 서명을 망설였다. 샤갈은 친구들에게 "벨라가 늘 옳았다"고 자랑했다. 그런 벨라가 죽었다. 샤갈은 이제 잠드는 일이 괴로웠다. 잠이 들면 무조건 꿈을 꿨고, 반드시 벨라와 만났으며, 틀림없이 울먹이며 깼다. 차라리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는 게 더 나았다.
그랬던 샤갈이 갑자기 결심한 듯 붓을 들었다.
벨라를 떠나보내고 9개월이 흐른 뒤였다. 그동안 샤갈은 딸 이다와 함께 벨라의 회고록을 다듬는 데 전념했다. 잃어버린 사랑도 사랑이었다. 더는 벨라의 웃음을 볼 수 없고, 음식을 가져다줄 수 없고, 함께 춤을 출 수 없는 대신 다른 감각이 살아났다. 추억이었다. 작업을 이어갈수록 추억은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시간은 거듭 벨라의 조각을 안겨줬다. 눈 뜬 시체처럼 살던 샤갈은 이를 양분 삼아 슬픔을 넘어보기로 했다. 샤갈은 벨라의 회고록 속 삽화 일로 작품 활동을 다시 시작했다.
샤갈이 이때 그린 그림 중 하나가 '그녀 주위에'다.
샤갈과 벨라의 모습이 가장 행복하게 담긴 옛 그림 '곡예사들'을 변형해 만든 작품이다. 딸 이다가 샤갈과 벨라가 연을 맺은 도시 비테프스크의 풍경을 들고 있다. 크리스마스 스노우볼처럼 아련하다. 젊고 건강했던 벨라는 오른쪽 밑에서 슬퍼하고 있다. 가장 예쁜 장밋빛 옷을 입었지만 생기가 느껴지지 않는다. 샤갈은 왼쪽 아래에 있다. 손에 팔레트를 들고 있다. 샤갈은 그림에서 종종 거꾸로 든 고개를 표현하곤 했다. 이는 본인이 내면세계에 집중하고 있다는 걸 의미했다. 그림 속 샤갈은 벨라의 혼을 곁에 둔 채, 온통 벨라 뿐인 비테프스크에서의 추억을 돌아보고 있다. 촛불은 유한한 생명, 새는 벨라를 죽음의 계곡에서 건져내지 못한 죄책감을 의미한다. 어두운 푸른색 때문인지 그림은 눈물에 푹 젖은 듯 절절하다.
마무리, 끝.
굳은 돌처럼 앉아있던 샤갈이 몸을 일으켰다. 여전히 눈물이 흘러내렸지만 마음은 한결 가벼웠다. 가슴 밑바닥을 끊임없이 긁던 추(錘)가 사라졌다. 몇 달을 웅크리고만 있었는데, 오늘에서야 제대로 된 애도를 한 것 같았다. 고개를 풀썩 숙였다가 힘껏 들었다. 살아가자. 벨라를 생각해서라도…. 샤갈은 이제야 마음을 다잡을 수 있었다.
내 고향 비테프스크, 그곳이 잊힐리야
1887년 7월7일. 샤갈은 벨라루스공화국 비테프스크에서 태어났다.
9남매 중 첫째였다. 집은 가난했다. 게다가 유대인이었다. 러시아 영향권에 있는 이 땅에서도 유대인은 2등 시민이었다. 아버지는 청어 장수였다. 매일 생선 궤짝을 날랐다. 월급은 보잘것없었다. 비린내에 푹 젖은 20루블을 받는 정도였다. 훗날 샤갈은 아버지의 일을 놓고 "지옥 같은 일이었다"고 회상한다. 화가가 된 후에도 이 가여운 가장을 계속 추억한다. 그를 떠올리며 적지 않은 그림에 생선 도상(圖像)을 그리게 된다.
눈 떠보니 돈 없는 이방인이었다.
그게 샤갈의 처지였다. 그래도 어린 샤갈의 삶이 막 비루하지만은 않았다. 비테프스크에서 샤갈이 살던 곳은 유대인들이 옹기종기 모여 살던 마을이었다. 아버지와 함께 유대교 예배당에 가면 많은 이가 머리를 쓰다듬어줬다. 마을은 고요했다. 사람들은 소박했다. 동산과 실개천은 서정적이었다. 동물들은 맑은 하늘처럼 순했다. 샤갈은 시(詩)의 한 구절 같은 이 풍경 속에서 화가의 꿈을 키웠다. 그는 언젠가 자서전에서 "내 그림 중 비테프스크로부터 영감을 받지 않은 작품은 한 점도 없다"고 고백한다.
어머니가 샤갈의 남다른 면을 알아봤다.
아버지가 생선 장수였다면 어머니는 채소 장수였다. 어머니는 상식적이었다. 어머니는 샤갈이 미술 교육을 받을 수 있게끔 수소문했다. 기본기가 꽤 탄탄한 유대인 화가도 소개해줬다. 장남이면 집안일이나 도우라고 샤갈에게 닦달하지 않았다. 이 덕분에 아버지를 도와 생선 궤짝을 옮기는 일도, 어머니와 함께 무를 뽑는 일도 거의 하지 않을 수 있었다. 어머니가 없었다면 눈부신 재능을 쥐고도 소일거리만 하다 잊힐 수도 있을 터였다.
“운명의 여인이었다”…잊지 못할 첫 순간
1906년. 샤갈은 러시아제국 수도이자 예술 중심지인 상트페테르부르크로 갔다.
좋은 예술학교가 몰린 도시였다. 울타리를 벗어난 유대인의 삶은 녹록지 않았다. 샤갈은 친구에게 임시 통행증을 부탁했다. 유대인이기에 받아야 할 검문을 피하려면 이 증명서가 필요했다. 샤갈은 1908년부터 2년 정도 짜반체바 미술학교에 다녔다. 샤갈은 레온 박스트의 지도를 받았다. 박스트도 유대인이었다. 하지만 박스트는 그 시절 러시아제국 황제 니콜라이 2세의 작업 의뢰를 받을 만큼 성공한 예술인이었다. 반(反)유대주의 세계에 들어가자마자 받은 차별에 말까지 더듬게 된 샤갈은 그런 박스트가 대단해 보였다.
샤갈은 박스트를 본보기로 삼았다. 그를 보고 더 버티기로 했다. 샤갈은 고향을 떠올리며 농부, 염소, 산양, 닭, 생선 등을 자주 그렸다. 나름의 '힐링' 방법이었다. 그렇게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견디고 버틴 덕에 새로운 세상을 볼 수 있었다. 진짜 사랑의 세계, 터질듯 펄펄 뛰는 심장, 한 번도 겪지 못한 몽글몽글한 감정.
1909년 여름 끝자락, 샤갈은 여자친구였던 테아의 집을 방문했다.
거기에서 벨라와 만났다. 막 20대가 된 샤갈은 녹색으로 꾸민 열네 살 소녀에게 홀딱 반했다. 크고 검은 눈과 진한 갈색 머리, 부드러운 얼굴은 꿈꾸던 이상형의 면모였다. "그녀의 검은 눈은 얼마나 크고 둥근지. 그것은 바로 나의 눈, 나의 영혼이었다. 그녀는 아주 오래전부터 나를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소년 시절의 나도, 현재의 나도, 미래의 나도 모두 알고 있는 듯했다. (…) 나는 그녀야말로 내 운명의 여인, 아내가 될 사람임을 알았다." 샤갈은 벨라와의 첫 순간을 이렇게 돌아본다. "…테아가 나에게 아무 존재도 아님을, 낯선 사람임을 깨달았다." 곧 헤어지게 될 테아에게 다소 잔인할 수 있는 말도 덧붙인다. 샤갈은 이날 이후 더는 테아를 그리지 않았다. 머릿속은 온통 벨라 뿐이었다. 벨라도 샤갈이 싫지 않았다. 훗날 벨라는 샤갈에 대해 "이런 사람은 처음이었다"고 회고한다. 둘은 미래를 약속하는 사이까지 발전했다.
‘미친 도시’ 파리, 마음껏 재능을 펼치다
1910년. 샤갈은 프랑스 파리로 유학길에 올랐다.
벨라를 두고 와 슬픔이 컸지만, 파리에 도착하자 "올 가치가 있었다"는 말이 절로 나왔다. 특히 스승 박스트가 그렇게 가보라고 한 미술관들은 충격적이었다. 마네와 고흐, 마티스 등 개성이 넘치다 못해 철철 흐르는 화가들의 작품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뿐인가. 유명한 예술가는 여기에 다 있었다. 잡화점에서 페르낭 레제가 보였다. 술집에 들어가면 아메데오 모딜리아니가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카페에선 기욤 아폴리네르, 막스 자코브 등이 토론 중이었다. 샤갈에게 파리는 말 그대로 '미친 도시'였다. 샤갈은 파리와 사랑에 빠졌다. 파리를 두 번째 고향으로 품었다. 프랑스식 이름 '마르크 샤갈(Marc Chagall)'은 이때 탄생했다. 그의 본명은 모이셰 하츠켈레프 세갈(Moishe Hatskelev Shagal)이다.
파리지앵(parisien)의 눈에 샤갈은 눈길 끄는 신인이었다.
러시아풍 특유의 진한 색채가 담긴 샤갈의 그림은 이국적이었다. 몽환적이며 환상적이었다. 말을 더듬고 언어가 서툴 뿐, 나름 유머도 있는 등 사람 자체도 괜찮았다. 샤갈은 아카데미 쥘리앙(Academie Julian) 등에 다녔다. 렘브란트 등 옛 17세기 화가들의 작품부터 막 태동하는 입체파와 야수파 화풍까지 폭넓게 익혔다. 샤갈이 파리에서 그린 '나와 마을'은 원과 삼각형, 사각형 등 기하학적 구성으로 짜여있다. 색은 동화책 삽화처럼 다채롭다. 이는 샤갈이 입체파와 야수파 기법을 자기 것으로 씹어먹는 과정 중 만든 그림이다. 고향 비테프스크에 대한 아련함도 담긴 작품이다.
벌써 이런 그림을 그리고 있으니 당연히 인기는 높아졌다.
피카소도 샤갈의 그림을 보고 "마티스가 죽으면 색이 무엇인지 아는 화가는 샤갈 밖에 없을 것"이라고 띄웠다는 말도 전해진다. 샤갈은 1913년 9월 독일 베를린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샤갈을 초대한 독일 미술상의 눈썰미는 정확했다. 대성공이었다. 샤갈은 이후에도 몇 차례 전시를 성황리에 마쳤다. 샤갈은 기쁨이 커질수록 벨라에 대한 그리움도 짙어진다는 걸 느꼈다. 이제는 즐거움을 함께 누리고 싶었다. 꽤 괜찮은 화가로 자리 잡았으니 면(面)도 세울 수 있을 것 같았다. 향수병이 생겼는지 고향 비테프스크도 점점 더 눈에 밟혔다. 그리움은 들불처럼 번져갔다. 아침마다 간 유대교 예배당, 냄새 나는 생선 궤짝과 볼품없는 채소밭, 투박한 가족, 뒷동산을 제집처럼 뛰어노는 동물들이 보고 싶었다. 샤갈은 짐을 쌌다. 고향으로 돌아갔다. 유학 생활 근 4년 만이었다.
전쟁 포화 속에서도 꽃 피운 사랑
1915년 7월25일, 샤갈은 벨라와 결혼했다.
허락받기까지 고생 좀 했다. 벨라의 집안은 부유했다. 벨라 아버지는 보석상이었다. 비테프스크 등에서 가게 세 곳을 운영했다. 벨라도 재원이었다. 공부도 잘했고, 배우를 꿈꿀 만큼 끼도 있었다. 벨라의 부모는 가난뱅이 출신 화가가 미덥지 않았다. 결혼에 반대했다. 하지만 그때도 자식 이기는 부모는 없었다. 샤갈과 벨라의 불붙은 사랑을 식히지 못했다. 벨라는 이미 샤갈에게 인생을 걸기로 다짐한 상태였다. 샤갈의 생일이자 결혼이 2주 반 남짓 남은 그해 7월7일, 벨라는 꽃다발을 들고 이 남자 품에 안겼다. 샤갈은 황홀함에 휩싸였다. 얼마 후 샤갈은 이 순간을 곱씹으며 '생일'을 그린다. 사랑에 취해 두둥실 뜬 남성이 샤갈이다. 꽃을 든 채 그와 입 맞추는 여성은 벨라다. 검은 드레스의 흰색 옷깃은 순결을 상징한다. 붉은 바닥, 장난감 같은 장식물은 둘의 들뜸을 포근하게 감싸는 듯하다.
둘이 사랑을 속삭이는 사이, 세계는 포화 속으로 내달렸다.
1차 세계대전이었다. 온 나라가 뒤숭숭했다. 러시아 국경도 봉쇄됐다. 결혼 후 바로 프랑스로 가려고 한 샤갈과 벨라는 그대로 발이 묶였다. 그래도 신혼은 신혼이었다. 샤갈에겐 벨라만 있다면 어디든 천국이었다. 딸 이다를 낳았을 때는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았다. 샤갈은 곧 그의 대표작이 되는 '산책', '도시 위에서' 등을 작업한다. '산책'에선 그저 같이 걷는 것만으로 공중에 뜨는 듯한 설렘을 누린다는 걸 알렸다. '도시 위에서'를 통해선 서로 끌어안는 것만으로 하늘을 나는 듯한 기쁨을 느낄 수 있다는 걸 표현했다. 맑은 초록색과 푸른색 옷이 회색 배경 위에서 희망을 꿈꾸게 한다. 바로 밑에는 고향 비테프스크의 풍경이 또 펼쳐져 있다. 울타리 옆에선 한 남성이 엉덩이를 드러낸 채 일을 보고 있다. 이렇듯 전쟁 통에서도 유머는 여전했다.
사실 샤갈은 여러모로 삶에 서툴렀다.
샤갈의 관심은 벨라와 그림, 고향과 유대인 문화 정도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벨라는 그런 샤갈의 아내이자 뮤즈, 어머니 역할도 했다. 벨라는 붓을 든 샤갈 옆에서 큰소리로 책을 읽어줬다. 보들레르의 시 등을 통해 영감을 안겨줬다. 매니저처럼 샤갈의 작업과 전시도 관리했다. 샤갈은 종종 전쟁이 끝나지 않을까봐 불안해했다. 그는 파리에 두고 온 작품들을 걱정했다. 모든 일정이 틀어졌다며 초조해하기도 했다. 그럴 때도 벨라가 그를 다독였다. 가까운 미래에 샤갈 전기를 쓰는 재키 울슐레이저는 "샤갈은 (벨라에게)끊임없이 응석을 부렸다"고 밝힌다.
방랑 생활 시작…핍박 딛고 그림 그렸다
1917년 러시아에서 볼셰비키 혁명이 터졌다.
샤갈은 내심 환호했다. 이들이 소수민족 차별 철폐를 내걸었기 때문이다. 샤갈도 흐름을 탔다. 유대인 신분으로도 비테프스크 미술학교 교장직에 오를 수 있었다. 샤갈은 가슴이 벅찼다. 이대로만 가면 본보기 박스트만큼 잘될 것 같았다. 샤갈은 비테프스크를 파리처럼 만들고 싶었다. 차르(황제) 시대의 고루한 사실주의 화풍을 걷어차고 싶었다. 그러나 상황이 차츰 이상하게 흘러갔다. 샤갈은 열정적으로 임했다. 일이 들어오면 웬만해선 빼지 않으려고 했다. 1918년, 그런 샤갈이 예술인민위원으로 혁명 승리 1주년 축하 행사를 기획하던 중 문제가 터졌다. 혁명가들은 이 순수한 남자의 그림에 적응하지 못했다. 이들은 제멋대로 둥둥 날고 있는 동물 그림들을 보고 "얘, 아직도 이래?"라고 비웃었다. "그러니까, 당신이 그린 동물은 레닌과 무슨 상관이 있소? 공산주의를 위한 그림을 그릴 생각은 있는 거요?" 샤갈에게 따졌다. "비테프스크 전체에 쓴 리본이면 속옷 5000벌은 만들겠네." 샤갈이 성심성의껏 도시 곳곳에 내건 축하 리본을 보곤 대놓고 조롱했다. 샤갈이 원하는 건 파리가 내뿜던 자유로운 예술 문화였다. 샤갈도 처음에는 혁명가들과 타협하고자 했다. 하지만 정치를 위한 예술에 아예 몸을 던질 수는 없었다. 샤갈은 순식간에 혁명의 변절자로 지목받았다. 이제 살기 위해 도망쳐야 했다.
1922년 5월, 샤갈은 가족들과 함께 다시 독일 베를린으로 왔다.
샤갈은 베를린에서 자서전 '나의 인생'을 썼다. 그때가 35세쯤이었다. 그는 "제국주의 러시아도, 소비에트 러시아도 나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나는 그들에게 낯선 남자였다"라는 문장을 꾹꾹 눌러 담았다. 우연의 일치일까. 그쯤 주변인들의 죽음이 잇따랐다고 한다. 러시아에 남은 샤갈의 아버지는 트럭에 치여 숨졌다. 벨라의 처가가 털렸다. 손위 동서는 피살당했다. 샤갈에게 베를린도 안식처가 아니었다. 막 고개를 든 나치는 유대인에게 결코 호의적이지 않았다. 이들은 모든 파격적인 그림도 싫어했다. 샤갈은 유대인이면서 특이한 그림을 그리는 화가였다. 당연히 표적이었다. 샤갈은 재차 파리로 피신했다. 샤갈은 유랑했다. 한 곳에 뿌리를 내리기에 이념, 편견으로 중무장한 세상은 너무 위협적이었다.
1937년. 샤갈은 나치가 자신과 칸딘스키, 몬드리안 등 그림을 모아 뮌헨에서 '퇴폐 미술전'을 열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나치가 독일에 남은 샤갈의 그림 중 '찡그린 자화상' 등을 걸곤 "얼굴의 자조적 분위기가 유대인의 비뚤어진 정신을 표현한다"고 비난했다는 말도 듣게 됐다. 샤갈은 신변의 위협을 느꼈다. 1940년은 그간 유럽 전역을 돌던 샤갈이 프랑스 시민권을 받은 후 한숨 돌리던 시기였다. 이번에는 2차 세계대전이 터졌다. 프랑스 남부에 비시(Vichy) 정부가 들어섰다. 사실상 나치 독일 협력 정부였다. 이들은 유대인의 프랑스 시민권을 뺏는 조직을 꾸렸다. 유대인을 공직, 학계에서 쫓는 반(反)유대인 법도 만들었다. 샤갈은 붙잡혔다. 다행히 겨우 풀려났을 때는 더 먼 곳으로의 피신을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샤갈은 이 와중에도 계속 그림을 그렸다. 피카소 말이 맞았다. 샤갈은 마티스의 색채를 자기 것으로 소화했다. 찬란한 빛깔의 캔버스에 벨라와 비테프스크를 꾸준히 담았다. 현실과 동떨어진 사람, 동물, 자연을 표현했다. 유대교 특유의 신화적 세계를 구현했다. '하얀 십자가상' 등 성서와 학살을 접목한 비판적 작품도 망설이지 않았다. "너무 좋아요." 그림을 받아든 벨라가 이 말을 하면 샤갈은 신나게 자기 서명을 박아넣었다.
모든 것 다 이뤘다고 생각한 때, 세상이 무너졌다
히틀러는 샤갈을 '제거 대상' 화가로 콕 집었다.
1942년 5월7일. 샤갈 가족은 미국 뉴욕으로 탈출했다. 히틀러가 주시하는 이상, 그에게 유럽 전역이 위험했다. 샤갈은 뉴욕을 새 삶의 터전으로 봤다. 피난 온 다른 예술가들처럼 잠시 몸을 피하는 곳으로 여기지 않았다. 뉴욕의 활력을 체감했다. 어쩌면 이곳이 제2의 파리가 될 수 있음을 직감했다. 샤갈은 처음 파리에 갔을 때 그랬던 것처럼 여러 모임에 참석했다. 이번에도 언어장벽을 느꼈으나 인기와 유명세, 특유의 유머로 상쇄했다. 샤갈은 오페라 공연장 천장화와 무대 장식 등 일을 맡았다. 그의 도전은 성공적이었다. 이젤 회화에서 벗어나 구현한 대형 3차원 회화는 꿈속 세계를 체험하게 했다. 그 무렵 뉴욕과 시카고 등에서 샤갈의 작품을 내건 전시회가 이어졌다. 이 또한 흥행했다. 이쯤 샤갈은 누가 봐도 성공한 화가였다.
신은 사랑하는 이를 시련으로 단련시킨다고 한다.
이 말이 맞다면 신은 샤갈을 너무 사랑한 것이다. 이제야 힘겹게 꽃길에 발을 딛었을 때, 샤갈의 세상에서 가장 큰 축이 무너졌다. 벨라가 죽었다. 샤갈은 정신을 못 차렸다. 완전히 붕괴됐다. 피신 와중에도 놓지 않던 붓을 내려놨다. "평생토록 그녀는 내 그림이었다." 샤갈은 벨라의 무덤에 비문을 남기곤 훌쩍였다.
이대로 두면 슬픔에 잠긴 채 숨 막혀 죽을 것 같았는지, 딸 이다가 샤갈에게 구명조끼를 건넸다.
샤갈에게 벨라는 뜨거운 첫사랑이었다. 다만 지고지순한 끝 사랑은 아니었다. 이다는 샤갈에게 30살 연하의 여인 버지니아 해거드 맥닐라를 소개했다. 벨라가 죽은 뒤 1년쯤 흐른 후였다. 사실 집안일 도우미 격으로 부른 것이지만, 샤갈과 버지니아의 관계는 깊어졌다. 샤갈은 새로운 사랑에도 서툴렀다. "벨라는 내 옆에서 책을 읽어줬어. 버지니아, 당신도 그렇게 해줘." "벨라는 그런 포즈가 아니었어. 턱을 당기고, 허리를 더 펴고…." 버지니아는 거기에 질렸다. 미련 없이 떠나버렸다. 이다가 또 나섰다. 이번에는 러시아 출신의 발렌티나 바바 브로드스키(애칭 바바)를 데려왔다. 샤갈과 같은 유대 신앙이었다. 취향도 꽤 비슷했다. 그래서인지 처음부터 죽이 잘 맞았다. 60대가 된 샤갈은 바바와 두 번째 결혼을 했다. 바바와 여행을 다니며 생기를 되찾았다. 샤갈은 1948년에 프랑스로 돌아왔다. 1953~1956년께 바바의 초상화를 그린다. 그림 속 구부정한 자세로 팔레트를 든 채 오는 화가는 과거의 샤갈이다. 환한 빛을 받으며 걸어오는 듯한 해사한 여인은 현재와 미래의 바바다. 옆에는 생명력을 가득 품은 꽃이 가득하다. 검붉은 배경은 칠흑 같던 어둠 후 찾아오는 아침 햇살을 떠올리게 한다.
살아있는 화가로 루브르에 ‘작품’ 걸리다
샤갈이 1950년 남프랑스에 정착할 때쯤, 그는 이미 20세기 미술의 거장이었다.
샤갈의 작품 세계는 그의 색채만큼 다채로워졌다. 벨라와 바바 등 사랑, 동물에 대한 애정, 고향 비테프스크의 향수와 함께 유대교를 주제로 한 그림을 자주 그렸다. 특히 1931년 예루살렘에서 '통곡의 벽'을 마주한 후로는 '토라를 들고 있는 랍비', '순교자' 등 걸작을 남겼다. 1951년 샤갈은 20년 만에 다시 예루살렘을 찾았고, 1957년에는 그의 삽화가 들어간 성경책이 출판돼 또 방문했다. 샤갈은 끊임없이 유대인과 유대교를 주제로 작품을 만들었다. 1962년 들어선 예루살렘 히브리 의과 대학의 회당을 장식하는 12개 스테인드글라스도 제작했다. 샤갈의 그림은 루브르 미술관에 걸렸다. 생존 예술가로 겪을 수 있는 최고의 영예였다.
샤갈의 마지막 작품은 1985년작 '또 다른 빛을 향하여'다.
천사의 날개를 단 샤갈이 캔버스 앞에 앉아있다. 표정은 초연하다. 캔버스 안에 있는 두 사람은 평화로워 보인다. 여성으로 보이는 이가 샤갈에게 꽃다발을 건넨다. 주머니 텅텅 빈 꼬마 시절부터 여태 애썼다는 듯. 또 다른 누군가는 두둥실 뜬 채 샤갈의 머리를 쓰다듬어준다. 목숨 건 피란 생활과 이별 등 굴곡진 운명에도 사랑과 예술혼을 간직하느라 고생 많았다는 듯. "…신이시여, 밤이 찾아왔습니다. 당신은 날이 밝기 전에 제 눈을 감게 할 것이고, 그리고 저는 하늘과 땅 위에 당신을 위한 그림을 다시 한번 그릴 것입니다." 샤갈은 20여년 전에 자신이 쓴 시를 이 그림에 붙였다고 한다. 샤갈은 이 작품을 완성한 직후 눈을 감았다. 98세 나이였다.
샤갈이 말년에 살았던 집 응접실에는 그의 그림 '에펠탑의 신랑 신부'가 걸려 있었다. 나치 독일을 피해 미국으로 가기 직전 그린 작품이다. 남성 모델은 샤갈이었다. 여성 모델은 그 시절 그와 울고 웃던 아내, 뮤즈, 나이는 훨씬 어리지만 그에게 어머니 같던 존재, 벨라였다.
〈참고 자료〉
마르크 샤갈, 『샤갈 꿈꾸는 마을의 화가』, 다빈치
에른스트 곰브리치, 『서양 미술사』, 예경
벨라 로젠펠트, 『첫 만남』
재키 울슐레이저, 『샤갈 : 사랑과 유랑』
유현덕, 「샤갈 회화의 향수(鄕愁) 이미지에 관한 연구」, 2018, 호남대학교
〈후암동 미술관 이론 편 읽는 순서〉
1)천사가 이렇게까지 운다고? 무섭게 왜 그래[후암동 미술관-조토 편] - 르네상스 선구자(2022. 7. 2.)
2)뻥 아냐, 600년전인데 이 정도 ‘입체 그림’ 있었다[후암동 미술관-마사초 편] - 원근법 선구자(2022. 8. 27.)
3)세계서 가장 유명한 이 ‘레이저 눈빛’, 그것은 사랑?[후암동 미술관-얀 반 에이크 편] - 유화 선구자 (2022.5.21.)
4)‘레드벨벳’도 춤추게 한 이 화가의 정체…"악마의 아들? 나 원 참" [후암동 미술관-보스 편] - 초현실주의 선구자 (2022.5.28.)
5)아리따운 금발 여인, 외간남자 목을 베고 있는거야?[후암동 미술관-카라바조 편] - 바로크 선구자 (2022.6.11.)
6)아름다운 여인, 끌어안고 난리난 옆 커플이 부러워[후암동 미술관-와토 편] - 로코코 선구자(2022.10.8.)
7)맨몸 여인들, 전쟁 뛰어들어 “그만!” 사자후…싸움 막았다[후암동 미술관-다비드 편] - 신고전주의 선구자 (2022.10.15.)
8)표류 D+13, 왜 몰랐지? 뗏목 위 널린 게 먹을건데[후암동 미술관-테오도르 제리코 편] - 낭만주의 선구자 (2022.5.14.)
9)“천사요? 데려오면 그려드리죠” 이놈의 똥고집[후암동 미술관-귀스타브 쿠르베 편] - 사실주의 선구자 (2022.5.7.)
10)“관상가 양반 아니었어?” 조선의 ‘얼굴’, 몰랐던 사실[후암동 미술관-윤두서 편] - 사실주의 특별 편 (2022. 11. 19.)
11)벌거벗은 이 여자, 뭐 때문에 빤히 쳐다보나[후암동 미술관-에두아르 마네 편] - 인상주의 선구자(2022. 4. 23.)
12)“못 그렸는데 폼만 잡아” 욕먹던 이 그림, 3300억이요? [후암동 미술관-클로드 모네 편] - 인상주의 선구자⑵ (2022.4.30.)
13)‘점투성이’ 수상한 커플 정체는? [후암동 미술관-조르주 쇠라 편] - 신인상주의 선구자 (2022. 6. 25.)
14)반 고흐 최애작, 별밤·해바라기 아닌 ‘이 사람들’ [후암동 미술관-빈센트 반 고흐 편] - 표현주의 선구자 (2022.6.4.)
15)이 ‘사과’ 때문에 세상이 뒤집혔다, 도대체 왜?[후암동 미술관-폴 세잔 편] - 근대 회화 선구자(2022. 7.9.)
16)‘생각하는 사람’ 진짜 정체, 남모를 사정도 있었다[후암동 미술관-오귀스트 로댕 편] - 근대 조각 선구자 (2022. 10. 22.)
17)화끈한 키스, ‘이 여성’ 사르르 녹아내리다[후암동 미술관-구스타프 클림트 편] - 분리파 선구자 (2022. 8. 13.)
18)나체 여인, 어쩌다 사자 득실대는 정글 한복판에[후암동 미술관-앙리 루소 편] - 근대 초현실주의 선구자 (2022. 7. 30.)
19)헐크색 피부 갖게 된 ‘이 여성’…이 놈의 ‘남편’ 때문에[후암동 미술관-앙리 마티스 편] - 야수주의 선구자 (2022. 7. 16.)
20)잘생긴 법학 교수님, ‘이것’ 그렸더니 미술계 '발칵'[후암동 미술관-바실리 칸딘스키 편] - 추상회화 선구자 (2022.7. 23.)
21)“이건 나도 그리겠다!” 1순위 그림, 그 놀라운 비밀[후암동 미술관-몬드리안 편] - 추상회화 선구자⑵ (2022. 8. 6.)
22)스파게티 면발? 1315억에 팔린 그림, 충격적 이유[후암동 미술관-잭슨 폴록 편] - 액션페인팅 선구자 (2022. 10. 29.)
23)몸 좋은 보디빌더, 거대 막대사탕 들고 ‘의문의 포즈’[후암동 미술관-리처드 해밀턴 편] - 팝아트 선구자 (2022.11.12.)
24)“동양서 ‘테러리스트’가 왔다” 피아노 다 때려부쉈다[후암동 미술관-백남준 편] - 비디오 아트 선구자 (2022.11.26.)
〈후암동 미술관 인물 편 읽는 순서〉
1)“성폭행 피해자는 나야!” 고문도 견딘 그녀…복수는 우아했다[후암동 미술관-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 편] - 영원한 복수자 (2023. 1. 28.)
2)“아내·자식·명예 다 잃었다”…그런데 왜 ‘빵’ 터지셨어요[후암동 미술관-렘브란트 편] - 빛의 마술사 (2023. 1. 7.)
3)‘이 그림’ 때문에 화형당할뻔…어느 야심가의 기구한 삶[후암동 미술관-프란시스코 고야 편] - 흑화한 사상가 (2023. 2. 4.)
4)‘미녀 그리기’에 진심이었던 이 화가, 진짜 이유[후암동 미술관-오귀스트 르누아르 편] - 행복을 그린 화가 (2022. 12. 24.)
5)“고갱 그놈, 도대체 왜 그래?” 악마인지 ‘악마의 재능’인지[후암동 미술관-폴 고갱 편] - 고귀한 야만인 (2022. 12. 3.)
6)“백번은 넘게 봤겠다” 모두 아는 ‘이 절규’의 놀라운 비밀[후암동 미술관-에드바르 뭉크 편] - 노르웨이의 현자 (2022. 12. 31.)
7)“이놈의 짧은 다리 때문에” 카바레 스타의 영광과 몰락[후암동 미술관-툴루즈 로트레크 편] - 작은 거인 (2022. 12. 17.)
8)눈동자 없는 기괴한 여자 그림, 알고 보니[후암동 미술관-아메데오 모딜리아니 편] - 파리의 귀공자 (2022. 12. 10.)
9)“로댕 아이를 뱄다” 폭탄선언 여성, 30년 수용소에 갇혔다[후암동 미술관-카미유 클로델 편] - 천재와 맞선 천재 (2022. 11. 5.)
10)숨참고 키스 다이브!…아내가 그렇게 좋으셨어요[후암동 미술관-마르크 샤갈 편] - 순수한 방랑자 (2023. 2. 11.)
11)당신은 모르실거야, 키스하는 두 사람 왜 이 꼴인지[후암동 미술관-르네 마그리트 편] - ‘진짜’ 괴짜 (2022. 9. 3.)
12)피카소도 ‘이 그림’에 “대박!” 감탄, 각성했다는데[후암동 미술관-피카소·마티스 편] - 피·마 대전 (2022. 9. 10.)
13)3번 유산·35번 수술의 악몽…그럼에도, 인생이여 만세[후암동 미술관-프리다 칼로 편] - 고통의 여왕 (2023. 1. 14.)
14)“내 천사여” 편지 사방팔방에 ‘뽀뽀’…한 무연고자의 죽음[후암동 미술관-이중섭 편] - 아고리, 나의 아고리 (2023. 1. 21.)
15)권총도 채찍도 버텼는데, ‘이 남자’ 행동에 무너졌다[후암동 미술관-마리나 아브라모비치 편] - 우아한 전사 (2022. 8. 20.)
〈후암동 미술관 현장 편 읽는 순서〉
1)이건희 컬렉션, 이 ‘다섯 작품’ 놓치지 마시라[후암동 미술관-‘어느 수집가의 초대’ 출장 편] - 전시 특집 (2022. 6. 18.)
2)알코올 중독 ‘이 남자’, ‘파리’에 미치자 놀라운 일 터졌다[후암동 미술관-몽마르트 언덕 편] - 동행자 : 모리스 위트릴로 (2022. 9. 17.)
3)고흐 “슬픔은 왜 나한테만” 펑펑 울었다, 고작 2평 다락방에서[후암동 미술관-오베르 편] - 동행자 : 빈센트 반 고흐 (2022 9. 24.)
4)모네 “앞이 안 보여도 상관없어”…백내장도 못 막은 그의 ‘최후작’[후암동 미술관-지베르니 편] - 동행자 : 클로드 모네 (2022. 1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