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코의 긍지
편집자주
페르메이르의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를 본 뒤 관련 책과 영화를 모두 찾아봤습니다. 잘 그린 건 알겠는데 이 그림이 왜 유명한지 궁금했습니다. 그림 한 장에 얽힌 이야기가 그렇게 많은지 몰랐습니다. 즐거웠습니다. 세상을 보는 눈이 조금은 달라졌다는 느낌도 받았습니다. 이 경험을 나누고자 글을 씁니다. 미술사에서 가장 논란이 된 작품, 그래서 가장 혁신적인 작품, 결국에는 가장 유명해진 작품들을 함께 살펴봅니다. 연재글은 역사적 사실을 기반으로 한 스토리텔링 방식으로 쓰여졌습니다.
[헤럴드경제=이원율 기자]똑똑똑. 철컥.
"어서 오세요. 출판사 인쇄소입니다." "사장님 있어요?" "없는데요." "미치겠네." 1894년 12월26일, 모두가 크리스마스 연휴를 즐긴 이날. 텅 빈 인쇄소를 홀로 지키던 알폰스 무하는 카운터에 턱을 괸 채 말을 이어갔다. "무슨 일이시죠?" "사라 베르나르 알죠?" 무하가 묻자 이 남자가 대뜸 되물었다. "유명한 여배우요?" "맞아요. 제가 그 사람 매니저인데요." "나가세요." "아니…. 진짜, 거짓말이 아니고요."
이 남자는 한숨을 푹 쉬었다. 그리곤 사연을 말했다.
당시 베르나르는 중세 그리스 배경의 연극 '지스몽다(Gismonda)'에서 열연했다. 연말까지만 하려고 한 이 작품은 예상보다 더 흥행했다. 베르나르는 신이 났다. 무작정 연극 일정을 늘렸다. 그러니 공연 연장을 알릴 포스터를 찍어야 했다. 문제가 있었다. 인쇄소 중 문을 연 곳을 찾기 힘들었다. 모두가 연말연시 연휴를 만끽했다. 종일 돌아다니다가 찾은 곳이 지금 자네가 있는 이 인쇄소며, 사장이 없으니 또 허탕이라고 이 남자는 토로했다. "아무튼 그래요. 근처에 사장님도 있는 인쇄소는 없을까요?" 그는 모자를 벗었다. 흐르는 땀을 닦았다.
"선생님."
무하가 이 남자를 불렀다. "왜요? 나 진짜 바빠요." "포스터 만들고 찍어내는 일요. 제가 해볼게요." 잠깐 정적이 흘렀다. "당신의 뭘 믿고요? 솔직히, 이 연휴 중 혼자 남아 잡일하는 사람에게 이런 일을 맡기고 싶지는 않아요." 무하는 이 남자가 자신을 떠보고 있다는 걸 알았다. 어차피 자기 말곤 대안도 없을 터였다. "전 제가 맡은 일을 성실하게 하고 있을 뿐이에요. 그리고…." "그리고?" "예전에도 삽화로 베르나르를 그린 적 있어요." 이 말은 진짜였다. 남자의 인상이 살짝 펴졌다. "그림 잘 그려요?" 밑도 끝도 없는 질문을 훅 던졌다. 무하의 입에서 돌아오는 말이 더 가관이었다. "네."
무하는 극장으로 내달렸다.
'지스몽다' 표를 샀다. 베르나르의 연기를 직접 봤다. 분장한 베르나르는 큰 눈과 높은 코, 반짝이는 의상으로 시선을 끌었다. 움직임은 섬세했다. 고혹적이었다. 청춘의 시절을 떠나보내고도 여전히 생기가 가득했다. 무하는 바로 일에 나섰다. 2m 종이 위에 베르나르가 우아하게 서 있다. 비잔틴 귀족 복장의 그녀는 실물 크기로 구현돼 포즈를 잡고 있다. 머리에는 월계수 화관이 있다. 왼손은 머리카락 끝에 닿아있다. 오른손은 연극 장면 중 하나인 부활절 행렬에서 쓰는 종려나무 가지를 쥐고 있다. 베르나르의 머리 뒤에는 그녀 이름이 쓰인 무지개 모양 아치가 있다. 성인(聖人)의 후광 같다. 무하는 짧은 시간 최선을 다했다. 하지만 한계는 있었다. 결국 배경 일부는 흰색으로 둬야 했다.
"아이고, 내가 미쳤지!"
나흘 뒤인 12월30일, 무하에게 일을 맡긴 베르나르의 매니저는 머리를 감싸쥐었다. 무하의 그림을 받아든 그의 손은 창백했다. 뭔 듣도 보도 못한 포스터가 왔다. 보통 성인보다 몇 뼘은 더 큰 크기가 부담스러웠다. 시선을 사로잡을 만한 밝은색도 없었다. 공연 제목과 장소, 배우의 이름 등 최소한의 안내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그놈, 인쇄소에 갇혀 살다 보니 나사가 빠진 게 분명했다. 매니저는 벌떡 일어섰다. 포스터고 뭐고 그 자식 멱살부터 휘감고 싶었다.
"매니저, 그 그림 뭐야? 저게 새로 만든 포스터야?"
이때 베르나르가 다가왔다. 야단났다. 툭하면 욱하는 베르나르였다. 이 그림을 북북 찢을 수도 있었다. "아니, 제가 이거 그린 놈을 따끔하게…." "따끔하게 잘 몰아쳤네? 그림이 너무 좋은데!" "에?" 베르나르가 눈을 반짝였다. 어린아이처럼 방방 뛰었다. "이 포스터, 새해 첫날에 바로 뿌리자." "그, 그러죠." 매니저는 어리벙벙했다. 그렇게 1895년 1월1일, 프랑스 파리 전역에 무하의 '지스몽다' 포스터가 내걸렸다. 무하는 그날부터 슈퍼스타로 떠올랐다. 마침내.
‘천사’ 꿈 덕에…세상 빛을 보다
"버려진 아이들이에요. 잘 돌봐줘야 해요."
천사가 아련하게 쳐다봤다. 그렇게 귓속말을 하곤 흰 날개를 쭉 펼쳤다. 하늘로 서서히 사라졌다. 이말리에 말라는 눈을 떴다. 꿈이었다. 분명 푹신한 구름 위에 두둥실 떠 있었다. 지금 손에 잡히는 건 낡은 담요뿐이었다. 말라는 기지개를 켰다. 빗자루를 들고 대문을 열었다. 낙엽을 쓱쓱 쓸었다. 이 편지는 뭐야…? 문 앞에 봉투가 놓여있었다. 뜯어봤다. 그놈의 중매 제안서가 또 왔다. 아이 셋 딸린 홀아비인 온드레이 무하라는 남자가 있는데, 관심 있으면 연락해보라는 내용이었다.
아이참, 나는 결혼 안 할 거라니까!
말라는 툴툴댔다. 잠깐, 아이 셋? 엄마 없는 아이 세 명…? 말라는 오늘 꾼 꿈을 떠올렸다. 천사의 말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계시인가? 신의 뜻이야? 말라는 입술을 깨물었다. 말라는 독실한 신자였다. 결국 온드레이 무하를 만나봤다. 생각보다 멀끔했다. 튀지 않는 성격도 마음에 들었다. 꿈 탓인지 아이들도 다 천사 같았다. 말라는 이 남자와 결혼했다. 그가 품던 아이들을 보살폈다. 말라도 자식을 낳았다. 아들 하나, 딸 둘이었다.
말라가 낳은 아들이 알폰스 무하였다.
무하는 1860년 7월24일에 태어났다. 당시 오스트리아 제국 속주였던 모라비아(현재의 체코 등 일대)의 마을 이반치체에서 세상 빛을 봤다. 집은 넉넉지 않았다. 아버지는 법원 안내원이었다. 어머니 말라도 평범한 방앗간 집 딸이었다. 무하는 걸음마를 할 때부터 그림에 관심을 가졌다. 연필 달린 목걸이를 찬 무하는 온 집안 벽지와 땅바닥에 낙서를 했다. 한 동네 상인은 무하가 연필과 장난감 중 연필을 잡는 것에 감동해 종이를 공짜로 후원했다. 현재 무하의 초기작은 극소수만 남아있다. 무하가 8살 때 그린 '십자가'가 대표작이다. 벌써 이런 작품을 만들었다.
무하는 될성부른 떡잎이었다.
그런 그는 미술계가 아닌 음악계에 헌신할 뻔도 했다. 사실 어릴 적 무하의 꿈은 가수였다. 무하는 마을 성당 성가대로 활동했다. 어머니 덕이었다. 무하는 노래도 잘했다. 감미로운 알토 목소리를 구사했다. 바이올린 연주도 수준급이었다. 그 소문이 대도시까지 퍼졌다고 하니 말 다 했다. 그런데 너무 열심히 한 탓일까. 목이 상했다. 음 이탈이 잦아졌다. 변성기도 찾아왔다. 예전 그 목소리를 찾을 수 없었다. 무하는 그때부터 그림만 팠다.
잘될 듯하다가 거듭 ‘비끗’…굴하지 않았다
"죄송한데, 다른 직업을 찾아보시는 게…."
1878년, 열여덟 살의 무하는 프라하 미술 아카데미에 지원서를 냈다. 입학 심사관은 그의 그림을 보곤 머리를 긁적였다. 불합격이었다. 위대한 예술가의 삶을 짚어보면 의외로 낙방 사례를 쉽게 찾을 수 있다. 시대를 너무 앞선 탓일 때가 상당수다. 무하는 그러려니 했다. 자기 실력은 자기가 가장 잘 알았다. 굴하지 않았다. 1880년, 무하는 오스트리아 빈을 찾았다. 극장 세트장을 꾸며주는 회사의 풍경화 담당 직원으로 취업했다. 쉬는 날에는 빈의 궁정과 정부 청사를 둘러봤다.
무하는 이 시기에 한스 마카르트에게 푹 빠졌다. 당시 '화가의 왕'으로 불린, 빈 역사화를 대표하는 화가였다. 마카르트의 그림은 특유의 웅장함을 내뿜었다. 이는 훗날 고유명사가 되는 '무하 스타일'을 만드는 데 큰 역할을 하게 된다. 1년이 흘렀다. 한 극장에서 큰불이 났다. 하필 무하가 다닌 회사의 돈줄이었다. 무하는 회사를 그만뒀다. 사실상 내쳐졌다. 무하는 이번에도 그러려니 생각했다. 호주머니는 가벼웠다. 무하는 지금 돈으로 갈 수 있는 북쪽행 기차를 탔다. 내린 곳은 오스트리아와 체코 국경지대에 있는 미쿨로프였다. 무하는 계속 붓을 들었다. 프리랜서로 일했다. 초상화, 장식 예술에서 묘비 글씨까지 소화했다.
"젊은이. 나랑 같이 일해보지 않겠어?"
어느 날, 쿠엔 벨라시 백작이 무하를 찾아왔다. 성깔 좀 있을 것 같은 이 남자는 일대의 대지주였다. 벨라시는 무하를 관찰했다. 그의 작업실도 둘러봤다. 꼬장꼬장하지 않아서 좋았다. 말리고 있는 작품들도 수준급이었다. 그림 좀 그린다는 말이 헛소문만은 아닐 듯도 했다. "내 성에 벽화를 그려보지 않겠어? 그러니까, 나는 지금 작업을 의뢰하는 거야." 벨라시는 얼떨떨하게 서 있는 무하에게 손을 건넸다. "음…. 네, 좋아요. 한 번 해보지요." 얼굴이야 좀 무섭긴 했지만, 거래로만 보면 손해 볼 일 없는 장사였다.
무하는 성심성의껏 작업했다. 실력이야 단연 최고였다. 벨라시는 이런 애가 여기에 왜 있나 싶었다. 잘만 키우면 원로 화가들도 다 씹어먹을 것 같았다. 1885년, 벨라시는 무하의 독일 유학비를 댔다. 그는 뮌헨 미술 아카데미에서 공부했다. 무하 입장에선 당연히 고마운 일이었다. 당시 무하는 친구에게 "모든 종류의 물살이 기쁨으로 향한다"는 내용의 편지를 썼다. 1887년에는 그 유명한 프랑스 파리로 왔다. 줄리앙 아카데미에 다닌 무하는 1년 후부터는 콜라로시 아카데미로 편입했다. 보수적이었던 에콜 데 보자르(L‘Ecole des Beaux-Arts·파리 국립 고등예술학교)의 대안으로 세워진 두 사립학교에서 최신 흐름을 보고 익혔다.
1889년, 돈 걱정 없이 살던 무하 앞에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놓였다.
벨라시가 무하에게 후원을 끊겠다고 선언했다. 서른 살쯤 됐으니 이제 알아서 살라며 쿨하게 놔줬다는 말이 있다. 1년 넘게 작업물을 보내주지 않자 괘씸해서 끊었다는 설도 있다. 이 이유라면 더 좋은 결과물을 보여주겠다며 무하가 지나치게 뜸을 들였으며, 벨라시가 이를 오해했을 가능성도 적지 않다. 아름다운 이별이었는지, 찝찝한 결별이었는지 알 수 없다. 확실한 건 이제 밥벌이는 알아서 해야 했다. 무하는 파리와 프라하에 있는 출판사와 잡지사 등에 삽화를 그려줬다. 때로는 출판사 인쇄소에 직접 나와 교정 일도 봤다. 무하는 이 시기에 폴 고갱과 친해졌다. 둘 다 돈도 없고 미래도 흐릿했다. 그보다 12살이나 더 많은 이 건들대는 남자는 무하의 작업실에서 장기간 지낸 적도 있다.
그렇게 또 몇 년의 시간이 흘렀다.
삽화가로는 나름 경력을 쌓았다. "친구. 이번 크리스마스 연휴에 뭐 하는가?" 1894년 12월, 파리의 한 출판사에 몸담은 친구가 물었다. "별일 없는데." 무하가 웅얼댔다. "잘 됐구먼! 내가 연말 휴가가 잡혔는데 말이야. 혹시 나 대신…." 친구는 그 말만 기다렸다는 양 기뻐했다. 크리스마스 연휴. 무하는 출판사 인쇄소에서 쓸쓸히 교정 일을 봤다. 텅 빈 작업실에서 언 손을 비볐다. 떨어질 보수를 생각하며 시간을 보냈다. 이때 한 남자가 다급하게 찾아왔다. 배우 사라 베르나르의 매니저라고 밝힌 그는 횡설수설했다. 결론은 빨리 포스터를 그려야 한다는 말이었다(베르나르가 인쇄소에 직접 전화해 상황을 설명했다는 설도 있다). 이거, 내가 그려볼 만하겠는데? 무하는 턱을 매만졌다. "선생님." 무하는 입을 뗐다. "왜요? 나 진짜 바빠요." 이 남자가 손사래를 쳤다. "포스터 만들고 찍어내는 일요. 제가 해볼게요."
“이런 천재가 있었어?”…눈떠보니 유명 인사
1895년 새해 첫날, 무하는 갑자기 유명해졌다.
성공 기회는 자연스럽게 문을 두드린다. 하지만 가끔은 우연처럼 찾아오기도 한다. 이때 준비가 돼 있고, 모험할 용기도 갖췄다면 기회는 물 만난 고기처럼 풍덩 안기기도 한다. 무하가 그런 사례였다. 10대 때는 프라하 미술 아카데미에서 '광탈'했다. 20대 때 겨우 일자리를 잡았더니 불이 나서 그만뒀다. 고맙게도 후원자를 만났지만, 30대 때 미처 자리도 잡기 전에 내쳐졌다. 무하의 그릇보다 행운은 대개 소소했고, 불행은 항상 치명적이었다. 그런데도 무하는 그림을 그렸다. 실력을 갈고닦았다. 화가의 길을 정한 뒤로는 그것밖에 없는 양 달려들었다. 그리고, 이날 비로소 성실함이 무엇을 가져다줄 수 있는지를 체감했다.
무하의 '지스몽다' 포스터가 파리 도심을 뒤덮었다.
전례 없는 대히트였다. 그의 그림은 처음에는 파격성, 다음에는 작품성으로 화제를 낳았다. 무엇보다 포스터는 너무 예뻤다. 보기만 해도 심장이 뛰었다. 연극의 작품성, 배우의 외모와 연기력을 모두 기대하게 했다. 기성 포스터와 달리 눈길을 확 끄는 문구도 없었지만(그래서 많은 이가 걱정했었지만), 그렇기에 더 많은 내용을 상상할 수 있었다. "이런 천재가 어디에 숨어있었어?"라는 말이 절로 나온 이유였다. 무하의 포스터는 파리의 모든 이가 봤다. 미술관, 전시회에 안 가고도 즐길 수 있었다. 당시 그의 포스터 앞에서 감동한 듯 한참을 서 있는 사람을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삽화가 제롬 두세는 잡지 '레뷰 일뤼스트레'에 "하룻밤 사이 파리의 모든 시민이 무하의 이름을 알게 됐다"고 썼다.
"무하 씨, 저랑 같이 가요." 무하의 포스터를 쥔 사라 베르나르는 이 화가에게 남은 미래를 걸었다. 화끈하게 6년짜리 전속 계약을 제안했다. 무하는 당연히 승낙했다. 무려 '신성한 사라'로 칭해지는 연극 여제의 부탁을 뿌리칠 이유가 없었다.
'크리스마스의 기적'은 무하를 꽃길로 데려갔다.
무하는 베르나르의 전속 화가로 그림을 그렸다. 무하의 성실함도 드디어 빛을 발했다. 1896년 '로렌자치오', 1898년 '메데이아', 1899년 '햄릿' 등 역사에 남을 포스터를 쉴 틈 없이 만들었다. 무하의 포스터는 늘 화제였다. 벽에 붙여놓으면 면도칼로 다 뜯어가는 바람에 계속 찍어내야 했다. 수집가들은 무하의 포스터를 얻으려고 뇌물을 건네기도 했다. 포스터를 파는 암시장은 문전성시였다. 무하의 예술 기본기는 탄탄했다. 지난날을 돌아보면 그럴 법도 했다. 이는 무하의 수많은 재주 중 포스터 제작은 고작 일부였다는 것을 뜻한다. 무하는 그 바쁜 와중에도 베르나르의 연극 프로그램, 세트장에 의상, 보석까지 직접 디자인해 갖다줬다. 종종 주변인들에게 불같이 화를 내던 베르나르도 무하의 성실함만은 늘 높게 샀다. 무하 손으로 빚어진 액세서리를 평소에도 애용할 정도였다. 여행용 화장대로 쓰던 모차르트의 휴대용 피아노를 무하에게 선물로 줬다는 말도 있다. "당신은 나를 불멸의 여인으로 만들어줬어요"라며.
드디어 '무하 스타일'도 유행처럼 번졌다.
그대로 아르누보(Art Nouveau)의 선구자로 자리 잡았다. 19세기 말 유럽에서 유행한 아르누보 양식은 프랑스어로 직역하면 '새로운 미술'이다. 이제 그리스, 로마의 조각상에서 미(美)를 그만 찾고 우리 자연에서 아름다움을 찾아보자는 경향이다. 우아한 선, 알록달록한 꽃무늬, 덩굴식물 모양의 장식, 예쁜 여성 등이 핵심 소재였다. 그렇다. 무하의 작품이 곧 아르누보 그 자체였다. 추종자가 구름처럼 모였다. 엽서, 달력, 잡지 커버, 장식 패널 등 의뢰도 넘쳐났다. 인쇄소에서 '땜빵 알바'나 하던 무하를 놓고 이제 예술계는 '파리에서 가장 유명하고 성공한 화가'라는 호칭을 붙여줬다.
‘숙명’ 같은 그림을 그리고자…평화를 꿈꾸다
1904년 3월, 무하는 미국 뉴욕으로 왔다. 무하가 기회의 땅에 온 이유 중 8할은 돈이었다. 그는 돈이 필요했다. 그간 벌어들인 돈보다 훨씬 더 많이 필요했다. 숙명이 된 '그 작품'을 그려내기 위해.
사연은 이랬다.
무하는 평생 슬라브계의 긍지를 간직했다. 그의 조국과 이웃 슬라브 지역은 매번 침략받았다. 분단 아픔도 겪었다. 슬라브족 'Slavs'에서 노예 'Slave'가 나왔다는 설이 있을 만큼 질곡의 세월을 보냈다. 슬라브족은 그럼에도 고유 언어와 문화를 지켰다. 한(恨)을 품고 민족주의를 지탱했다. 무하는 조국과 그 일대의 정치적 독립을 염원했다. 사실 무하는 지금껏 작품 곳곳에 슬라브계의 혼을 박아넣었다. 그를 전설로 키운 '지스몽다' 포스터가 대표적이었다. 슬라브족의 정신적 고향인 정교회 성인들의 후광을 떠올리게 하는 원형 배경, 슬라브풍의 레이스와 자수 장식, 한이 서린 듯한 신비로운 표정 등이 그랬다.
미국 땅을 밟기 5년 전인 1899년. 무하 앞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서신이 놓였다. 내년 파리 세계박람회에 선보일 실내 장식을 꾸미라는 의뢰였다. 말만 제안일 뿐, 사실상 강요였다는 설이 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을 위해 일해야 할 처지, 이 제국의 통치 아래 고통받는 조국과 슬라브족…. 무하는 작업 내내 괴로웠다. 딜레마에 고통스러웠다. 무하는 훗날 슬라브인의 한을 담은 대작을 그리기로 다짐했다. 참회하는 마음에서였다. 돈이 얼마나 드는지, 시간을 얼마나 들여야 하는지는 상관없었다. 뉴욕에 온 무하는 모라비아에 있는 가족에게 편지를 썼다. "내가 파리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할 시간이 없다는 게 분명해요. 출판업자의 변덕에 얽매이게 될 테니까. 나는 미국에서 부, 명성, 안락함을 기대하지 않아요. 단지 조금 더 유용할 일을 할 기회를 찾을 뿐이에요."
그렇게 무하는 더 큰 세상, 더 많은 자본이 돌고 도는 시장으로 나섰다.
무하는 미국에서 이미 유명인이었다. 미 언론은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장식 예술가가 왔다"고 했다. 성과는 있었다. 미국에 오가는 사이 백만장자 찰스 크레인과 안면을 텄다. 슬라브족을 가여워한 이 남자에게 두둑한 후원금을 받기로 했다. 그사이 1906년에는 체코 출신의 미술학도 마루슈카 히틸로바와 결혼했다. 그녀는 무하의 매니저로 까다로운 일을 소화하게 된다.
1910년, 무하는 고향으로 돌아왔다. 나이 50세였다.
무하는 1000년 넘는 슬라브족 역사를 그리기 시작했다. 슬라브족의 기원부터 지금까지의 주요 사건 20개를 각각 화폭에 담기로 했다. 말 그대로 서사시였다. 무하는 이것을 그리기 위해 태어난 사람인 양 마지막 생을 갈아 넣었다. 이 무렵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슬라브계 국가 세르비아 사이 갈등이 폭발했다. 1914년, 결국 이 일이 계기가 돼 1차 세계대전이 터졌다. 피비린내 나는 4년의 전쟁 끝에 마침내 신생 공화국 체코슬로바키아가 탄생했다. 무하는 새롭게 태어난 조국을 위해 작업에 더욱 박차를 가했다. 그사이 조국을 위한 우표, 지폐도 무상으로 만들었다.
1919년, 무하는 먼저 다 그린 슬라브 서사시 11점을 공개했다.
이어 9년 뒤 최종 완성작을 공공에 기증했다. '슬라브 찬가, 인류를 위한 슬라브인'은 연작의 끝맺음에 해당한다. 그림은 웅장하다 못해 숭고해 보인다. 슬라브인의 한을 곱씹고, 환한 미래를 꿈꾸게 한다. 승리 세리머니를 하듯 두 팔 벌린 남성은 새로운 슬라브 국가를 뜻한다. 그는 향기로운 화환을 들고 있다. 무지개에 둘러싸인 그의 뒤에는 예수가 든든하게 서 있다. 중앙에는 독립의 기쁨에 취한 여러 슬라브국과 동맹국의 깃발이 휘날린다. 아래쪽에선 민중이 환호하고 있다. 핍박의 역사를 뒤로한 채 함성을 내지르는 모습이다.
무하는 꿈꿨다.
슬라브족의 자유, 유럽의 공존, 더 나아가 전 세계의 평화. 하지만 인류는 곧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 역사는 늘 그랬듯 이번에도 비극을 모른 척한다.
“체코는 훌륭한 아들을 결코 잊지 않는다”
1938년, 뮌헨 협정이 체결됐다.
이날부터 체코슬로바키아 영토 중 많은 곳이 독일 나치의 통제를 받게 됐다. 1년 뒤 독일군은 기어코 프라하를 침공했다. 독일군은 무하를 불온 인물로 찍었다. 체코슬로바키아의 대표적 민족주의자인 이 남자를 넘겨볼 수 없었다. 독일 게슈타포(비밀국가경찰)는 끝내 무하를 체포했다. 이때 무하는 79세의 노인이었다. 게슈타포는 무하에게 고문을 가했다. 건강 문제로 놔주긴 했지만, 후유증은 심각했다. 무하는 풀려나고 며칠 뒤 7월14일에 사망했다. 생일을 열흘 앞둔 날이었다. 사인(死因)은 폐렴이었다.
"가을의 구름이 당신 머리 위를 지나가고, 겨울의 흰 눈이 슬라빈을 덮을 겁니다. 하지만 곧 봄이 돌아올 겁니다. 체코 영토의 숲과 목초지는 온통 꽃으로 덮일 겁니다. 영원한 평화 속에서 편하게 쉬십시오."
무하의 장례식은 프라하의 비셰흐라드 공동묘지에서 이뤄졌다. 화가 막스 스바빈스키가 장례 연설을 읽었다. 나치는 이날 장례식을 통제했다. 일가친척 외 사람들이 오는 것을 금지했다. 협박에 체포까지도 망설이지 않았다. 그런데도 10만여명 인파가 몰려왔다. "체코는 훌륭한 아들을 결코 잊지 않고, 앞으로도 절대 잊지 않을 겁니다." 연설문이 울려 퍼졌다.
〈참고 자료〉
로잘린드 오르미스턴, 알폰스 무하 : 유혹하는 예술가, 씨네21북스
Tomoko Sato, Alphonse Mucha : the artist as visionary, Taschen Koln
〈후암동 미술관 이론 편 읽는 순서〉
1)천사가 이렇게까지 운다고? 무섭게 왜 그래[후암동 미술관-조토 편] - 르네상스 선구자(2022. 7. 2.)
2)뻥 아냐, 600년전인데 이 정도 ‘입체 그림’ 있었다[후암동 미술관-마사초 편] - 원근법 선구자(2022. 8. 27.)
3)세계서 가장 유명한 이 ‘레이저 눈빛’, 그것은 사랑?[후암동 미술관-얀 반 에이크 편] - 유화 선구자 (2022.5.21.)
4)‘레드벨벳’도 춤추게 한 이 화가의 정체…"악마의 아들? 나 원 참" [후암동 미술관-보스 편] - 초현실주의 선구자 (2022.5.28.)
5)아리따운 금발 여인, 외간남자 목을 베고 있는거야?[후암동 미술관-카라바조 편] - 바로크 선구자 (2022.6.11.)
6)아름다운 여인, 끌어안고 난리난 옆 커플이 부러워[후암동 미술관-와토 편] - 로코코 선구자(2022.10.8.)
7)맨몸 여인들, 전쟁 뛰어들어 “그만!” 사자후…싸움 막았다[후암동 미술관-다비드 편] - 신고전주의 선구자 (2022.10.15.)
8)표류 D+13, 왜 몰랐지? 뗏목 위 널린 게 먹을건데[후암동 미술관-테오도르 제리코 편] - 낭만주의 선구자 (2022.5.14.)
9)“천사요? 데려오면 그려드리죠” 이놈의 똥고집[후암동 미술관-귀스타브 쿠르베 편] - 사실주의 선구자 (2022.5.7.)
10)“관상가 양반 아니었어?” 조선의 ‘얼굴’, 몰랐던 사실[후암동 미술관-윤두서 편] - 사실주의 특별 편 (2022. 11. 19.)
11)벌거벗은 이 여자, 뭐 때문에 빤히 쳐다보나[후암동 미술관-에두아르 마네 편] - 인상주의 선구자(2022. 4. 23.)
12)“못 그렸는데 폼만 잡아” 욕먹던 이 그림, 3300억이요? [후암동 미술관-클로드 모네 편] - 인상주의 선구자⑵ (2022.4.30.)
13)‘점투성이’ 수상한 커플 정체는? [후암동 미술관-조르주 쇠라 편] - 신인상주의 선구자 (2022. 6. 25.)
14)반 고흐 최애작, 별밤·해바라기 아닌 ‘이 사람들’ [후암동 미술관-빈센트 반 고흐 편] - 표현주의 선구자 (2022.6.4.)
15)이 ‘사과’ 때문에 세상이 뒤집혔다, 도대체 왜?[후암동 미술관-폴 세잔 편] - 근대 회화 선구자(2022. 7.9.)
16)‘생각하는 사람’ 진짜 정체, 남모를 사정도 있었다[후암동 미술관-오귀스트 로댕 편] - 근대 조각 선구자 (2022. 10. 22.)
17)화끈한 키스, ‘이 여성’ 사르르 녹아내리다[후암동 미술관-구스타프 클림트 편] - 분리파 선구자 (2022. 8. 13.)
18)나체 여인, 어쩌다 사자 득실대는 정글 한복판에[후암동 미술관-앙리 루소 편] - 근대 초현실주의 선구자 (2022. 7. 30.)
19)헐크색 피부 갖게 된 ‘이 여성’…이 놈의 ‘남편’ 때문에[후암동 미술관-앙리 마티스 편] - 야수주의 선구자 (2022. 7. 16.)
20)잘생긴 법학 교수님, ‘이것’ 그렸더니 미술계 '발칵'[후암동 미술관-바실리 칸딘스키 편] - 추상회화 선구자 (2022.7. 23.)
21)“이건 나도 그리겠다!” 1순위 그림, 그 놀라운 비밀[후암동 미술관-몬드리안 편] - 추상회화 선구자⑵ (2022. 8. 6.)
22)스파게티 면발? 1315억에 팔린 그림, 충격적 이유[후암동 미술관-잭슨 폴록 편] - 액션페인팅 선구자 (2022. 10. 29.)
23)몸 좋은 보디빌더, 거대 막대사탕 들고 ‘의문의 포즈’[후암동 미술관-리처드 해밀턴 편] - 팝아트 선구자 (2022.11.12.)
24)“동양서 ‘테러리스트’가 왔다” 피아노 다 때려부쉈다[후암동 미술관-백남준 편] - 비디오 아트 선구자 (2022.11.26.)
〈후암동 미술관 인물 편 읽는 순서〉
1)“성폭행 피해자는 나야!” 고문도 견딘 그녀…복수는 우아했다[후암동 미술관-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 편] - 영원한 복수자 (2023. 1. 28.)
2)“아내·자식·명예 다 잃었다”…그런데 왜 ‘빵’ 터지셨어요[후암동 미술관-렘브란트 편] - 빛의 마술사 (2023. 1. 7.)
3)‘이 그림’ 때문에 화형당할뻔…어느 야심가의 기구한 삶[후암동 미술관-프란시스코 고야 편] - 흑화한 사상가 (2023. 2. 4.)
4)‘미녀 그리기’에 진심이었던 이 화가, 진짜 이유[후암동 미술관-오귀스트 르누아르 편] - 행복을 그린 화가 (2022. 12. 24.)
5)“고갱 그놈, 도대체 왜 그래?” 악마인지 ‘악마의 재능’인지[후암동 미술관-폴 고갱 편] - 고귀한 야만인 (2022. 12. 3.)
6)“나랑 6년 계약해” 유명 女배우의 파격제안…인생 달라졌다[후암동 미술관-알폰스 무하 편] -체코의 긍지 (2023. 2. 18.)
7)“백번은 넘게 봤겠다” 모두 아는 ‘이 절규’의 놀라운 비밀[후암동 미술관-에드바르 뭉크 편] - 노르웨이의 현자 (2022. 12. 31.)
8)“이놈의 짧은 다리 때문에” 카바레 스타의 영광과 몰락[후암동 미술관-툴루즈 로트레크 편] - 작은 거인 (2022. 12. 17.)
9)“로댕 아이를 뱄다” 폭탄선언 여성, 30년 수용소에 갇혔다[후암동 미술관-카미유 클로델 편] - 천재와 맞선 천재 (2022. 11. 5.)
10)눈동자 없는 기괴한 여자 그림, 알고 보니[후암동 미술관-아메데오 모딜리아니 편] - 파리의 귀공자 (2022. 12. 10.)
11)숨참고 키스 다이브!…아내가 그렇게 좋으셨어요[후암동 미술관-마르크 샤갈 편] - 순수한 방랑자 (2023. 2. 11.)
12)당신은 모르실거야, 키스하는 두 사람 왜 이 꼴인지[후암동 미술관-르네 마그리트 편] - ‘진짜’ 괴짜 (2022. 9. 3.)
13)피카소도 ‘이 그림’에 “대박!” 감탄, 각성했다는데[후암동 미술관-피카소·마티스 편] - 피·마 대전 (2022. 9. 10.)
14)3번 유산·35번 수술의 악몽…그럼에도, 인생이여 만세[후암동 미술관-프리다 칼로 편] - 고통의 여왕 (2023. 1. 14.)
15)“내 천사여” 편지 사방팔방에 ‘뽀뽀’…한 무연고자의 죽음[후암동 미술관-이중섭 편] - 아고리, 나의 아고리 (2023. 1. 21.)
16)권총도 채찍도 버텼는데, ‘이 남자’ 행동에 무너졌다[후암동 미술관-마리나 아브라모비치 편] - 우아한 전사 (2022. 8. 20.)
〈후암동 미술관 현장 편 읽는 순서〉
1)이건희 컬렉션, 이 ‘다섯 작품’ 놓치지 마시라[후암동 미술관-‘어느 수집가의 초대’ 출장 편] - 전시 특집 (2022. 6. 18.)
2)알코올 중독 ‘이 남자’, ‘파리’에 미치자 놀라운 일 터졌다[후암동 미술관-몽마르트 언덕 편] - 동행자 : 모리스 위트릴로 (2022. 9. 17.)
3)고흐 “슬픔은 왜 나한테만” 펑펑 울었다, 고작 2평 다락방에서[후암동 미술관-오베르 편] - 동행자 : 빈센트 반 고흐 (2022 9. 24.)
4)모네 “앞이 안 보여도 상관없어”…백내장도 못 막은 그의 ‘최후작’[후암동 미술관-지베르니 편] - 동행자 : 클로드 모네 (2022. 1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