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시나위오케스트라의 실험과 확장
국악과 전자음이 만난 ‘시나위 일렉트로니카2’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무대 위로 우주가 쏟아졌다. ‘미지의 세계’를 향해가는 개척자의 걸음걸음은 하나의 내러티브를 가지고 이어졌다. 글로 치면 서론(‘NOVO 2308’)-본론(‘부유하는 생명들’)-결론(‘별빛 아래’)의 형식. 8개의 세로 조명을 가로지르는 하나의 빛은 음악의 시작(‘NOVO 2308’)을 알리는 전자신호처럼 보였다. 누구도 가본 적 없는 세계로 떨어진 두려움은 ‘충돌과 조합’(‘부유하는 생명들’)으로 구현됐다. 모든 소리가 한 번에 쏟아졌다. 전자음과 국악기가 빚어낸 ‘소리의 충돌’은 소리의 재조합으로 나아간다. ‘후크송’처럼 반복되는 멜로디 위로 가야금은 피아노를 연주하고, 일렉트릭 기타가 묵직한 소리를 얹으며 섬세하게 균형(‘별빛 아래’)을 찾는다. 낯선 세계로의 여정을 마친 존재는 알을 깨고 나와 새로운 세계로 당도한다. ‘시나위 일렉트로니카2’를 위해 창작한 이일우의 무대(‘FOOTPRINTS ON THE MILKWAY’)였다. 공연에선 잠비나이 멤버이자 경기시나위오케스트라 수석악장으로 체득해온 이일우의 음악적 경험이 빛을 발했다. 악기의 특성과 연주자의 강점을 간파한 소리의 조화, 장르를 넘나든 음악가의 대중적 감각이 돋보였다. 국악기와 전자음향의 ‘조화로운 아름다움’은 이 무대에서 나왔다.
‘현재의 음악’에 전자음이 섞이지 않은 것은 없다. K팝, 발라드, 밴드 음악 등 모든 장르를 초월해 ‘음악의 기본’은 전자음향이 된 시대다. ‘새로운 국악’에 대한 고민과 가능성은 여기에서 출발한다. ‘시나위 일렉트로니카’의 주인공은 투톱 체제다. 국악에 전자음악을 또 하나의 주인공으로 가져왔다. 올해로 두 번째 시즌을 맞은 이 공연은 2019년 11월 원일 예술감독 취임 이후 경기시나위오케스트라가 꾸준히 이어온 소리의 실험과 확장의 과정 위에 있다.
지난해 ‘시나위 일렉트로니카’가 전자 음악가와 함께 한 무대였다면, 이번엔 전통음악 기반으로 전자음악을 하고 있는 음악가들이 무대를 꾸몄다. 비트 메이커인 라이언 클래드는 예외다. 무대는 종묘제례악을 ‘요즘 음악’으로 들려주는 얼트-일렉트로닉 듀오 해파리(HAEPAARY)로 시작해 이일우, 라이언클래드, 임용주로 이어졌다. 원일 감독은 협업한 음악가들의 선정 이유에 대해 “전자음악을 접목하고 시도하면서, 국악에 정통한 예술가들이 이제는 일정한 수준의 전자음악적 단계에 진입했다는 지점들을 발견했다”며 “전통음악을 깊게 이해하지 않으면 도달할 수 없는 지점, 구성과 활용 면에서 올드 앤 뉴(Old & New)가 적절히 섞여 있는 점이 돋보였다”고 설명했다. 저마다 각기 다른 무대 연출을 선보여야 했던 탓에 공연은 1부에서 세 팀, 2부에서 한 팀(임용주)으로 배치됐다
해파리와 임용주는 완성도 높은 ‘이종간의 결합’을 보여줬다. 해파리는 ‘탈전통’을 대표하면서 원형의 유지를 고민하는 듀오다. 이들은 공적을 기리는 ‘상징의 집합체’인 종묘제례악을 새로운 시선으로 바라본다. 공연에선 지난해 발매한 첫 EP ‘본 바이 고저스니스(BORN BY GORGEOUSNESS)’를 경기시나위오케스트라 버전으로 선보였다. 전자음악을 가져오면서도, 그것을 과하지 않게 활용한다는 정체성이 경기시나위오케스트라와도 잘 어우러졌다. 세 번째 곡인 ‘소무-독경’에선 세종이 지은 정대업을 주술처럼 외고, 일무를 그들만의 퍼포먼스로 바꿔 선보였다. 같은 동작과 노랫말의 반복이 제례의 의미를 강조했다. 거친 전자음을 내는 거문고 소리가 귀에 꽂히는 ‘귀인-형가’에선 종묘제례악의 고수와 전복이 일어났다. 눈을 감고 들으면, 이 순간 공연장은 베를린의 클럽이었다. 공연의 대미를 장식한 임용주의 ‘울릴 굉轟(Expansion)’은 편경을 비롯한 다양한 전통악기를 아우르는 대편성의 곡으로 무대에 올랐다. 전통 음률의 표준을 상징하는 편경으로 시작해 전통 국악관현악의 요소와 전자음악을 결합한 무대는 완성도가 높았다. 전통음악을 기반으로 창작음악을 해온 임용주의 시도가 새로운 차원으로 접어들었다는 점을 보여준다. 가야금과 거문고의 합주와 전자음의 어우러짐은 기이하고 낯선 폭풍 전야로 관객을 이끌었다.
여러 의미로 인상적인 장면은 라이언 클래드와 경기시나위오케스트라의 타악 앙상블 궁궁의 무대에서 나왔다. 전형적인 사물놀이 장단과 비트 메이킹은 조화와 부조화를 반복했다. 때때로 비트메이커와 타악 앙상블은 서로간의 이해가 부족한 것처럼 들렸다. 네 번째 곡에 접어들어서야 사물놀이와 화려한 비트가 어우러져 양쪽의 흥이 살아났다.
음악은 생물처럼 보일 때가 있다. 시대마다 트렌드와 주류 장르가 달라졌다. 악기는 변화하고, 형식과 구성은 진화했다. 그러다 오랜 시간 정체됐다. ‘지금의 국악’은 그 어떤 장르의 음악보다 젊고, 변화에 민감하다. 대중과의 접점을 찾으려는 끝없는 갈증, ‘오늘의 음악’으로 자리하기 위한 갈망이 실험과 도전을 멈추지 않게 했다. 경기시나위오케스트라의 파격은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음악세계로 관객을 이끈다.
이날의 무대는 종묘제례악, 정악, 연희와 같은 기존의 전통을 전자음향으로 해체하고 재조립했다. 곳곳에서 벌어지는 충돌과 융합은 새로운 시대의 음악을 향한 씨앗을 뿌린다. 경기시나위오케스트라의 실험과 확장은 “전자음악이 비정형 튜닝 악기들과의 조화와 5음 음계의 소리적 지평을 확장시킨다”(원일 예술감독)는 확신을 가지고 이어오고 있다. 이 악단은 기존의 국악관현악단과도 다른 지점에 있고, 지향하는 음악 역시 ‘국악 크로스오버’로 가둘 수만은 없다. 가장 진화한 ‘오늘의 음악’이자, ‘최신의 음악’을 들려주는 악단이다. 경기시나위오케스트라의 파격은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음악 세계로 관객을 이끈다. 이번 공연에선 조금 더 높은 수준에 도달한 ‘음악의 실험’을 보여줬다.
다만 지금의 공연이 완성형은 아니다. 기악 연주는 전자음의 빠른 비트를 따라가지 못할 때가 있었고, 소극적인 전자음향은 경기시나위오케스트라의 반주처럼 들릴 때도 있었다. 반복적인 전자음악과 장단의 조화로움을 찾아가는 노력도 필요해보인다. 가장 큰 숙제는 낯선 두 장르가 결합한 음악을 통해 대중성을 찾는 일이다. 생경한 두 장르의 만남은 관객에 따라 호불호가 갈리고, 앞서가는 시도로만 그칠 수 있다. ‘실험의 의의’를 넘어 ‘파격적 음악’의 지속가능성에 대한 고민도 필요한 때다.
원일 감독은 “국악과 전자음악이 만났을 때 더 웅장하고 멋있는 음색과 새로운 경험을 주는 만큼 이 부분을 깊이 연구한 작품을 만들되 전자음악과 국악 코드가 어렵게 다가서지 않는 대중적 기획도 고민하고 있다”고 말했다. 경기시나위오케스트라의 창작 레퍼토리 개발도 이어지고 있다. 원 감독은 “초청 아티스트가 출연하지 않아도 음원 플레이로 재현가능한 작품들이 있다”며 “우리 고유의 레퍼토리로 가능한 일렉트로니카 작품들을 만들어 갈 계획이다”라고 귀띔했다. 이일우 악장의 이번 무대 역시 악단의 레퍼토리로 정착해나갈 계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