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바로보기] 일본 ‘중류층’ 붕괴의 교훈

2000년대 초만 해도 일본은 ‘1억 총중류(總中流)’ 사회로 통했다. 글자 그대로 ‘1억 인구 모두 중류층’이라는 의미다. 빈부 격차가 적고, 대다수가 풍요로웠던 ‘일본형 사회’를 잘 묘사했다.

2차 세계대전에서 패한 일본은 경제 부흥에 나서 1960년대에 고도 경제성장기에 본격 진입했다. 1968년 미국에 이어 국민총생산(GNP) 기준 세계 2위 경제 대국에 올라섰다. 인구는 1970년 1억 명(1억466만)을 돌파했다. 일본이 국내외에서 ‘1억 총중류’로 불린 배경이다.

일본 내각부가 해마다 실시하는 ‘국민 생활에 관한 여론 조사’ 결과에도 일본인들의 강한 ‘중류 의식’이 드러났다. 1958년 첫 조사에서 자신을 ‘중(中)의 상(上)’부터 ‘중의 하(下)’라고 선택한 사람의 비율이 70%를 넘었다. 자신을 상(上)이라고 답한 사람은 0.2%, 하(下)는 17.0% 였다. 경제 성장과 함께 ‘중류’ 비율이 계속 높아졌다. 1960년대 중반 80%, 1970년대 90%에 달했다. 1990년대 버블 경제 붕괴된 2008년까지도 이 선을 지켰다.

두터운 중류층을 자랑하던 일본에서 지난달 충격적인 조사 결과가 나왔다. 공영방송 NHK가 20~60세 남녀 6000여명을 대상으로 ‘중류의 삶을 살고 있나’라고 묻자 56%가 ‘중류보다 아래’라고 답했다. 응답자의 60% 정도가 중류의 조건으로 ‘정규직, 자가 보유, 승용차’를 꼽았다.

일본에서는 장기 경기 침체가 이어지면서 1인당 국민 소득이 쪼그라들었다. 사회 안전판 역할을 했던 ‘종신 고용’ 제도가 무너지고, ‘비정규직’이 급증했다. 대졸 정규직의 생애 임금은 전성기에 비해 3500만엔 이상 감소했다.

제일생명경제연구소 측은 “40대 남성, 전업 주부, 초등학생 두 명인 ‘모델 세대’의 경우 연간 소득이 1990년 576만엔에서 2020년에 463만엔으로 줄어들었다”고 밝혔다.

노후 생활에 대한 불안감도 ‘중류층’을 줄이는 요인으로 분석됐다. 고령화로 노후가 길어지자 은퇴 이후 경제적 부담이 커졌기 때문이다. 일본의 고령화율(전체 인구에서 65세 이상 비율)은 지난해 29%를 기록, 선진국 가운데 가장 높다. 독일(22%), 프랑스(21%), 영국, 캐나다(19%), 한국, 미국(17%) 순이다. 미래에 대한 비관적인 전망도 많다. 20~34세 젊은층은 ‘부모보다 풍요로워질까’라는 질문에 대해 ‘풍요로워질 수 없다’(34%), ‘비슷할 것’(31%), ‘풍요로워질 수 있다’(15%)라고 답했다.

임금이 오르지 않으면 안정된 수입을 기대할 수 없다. 소득이 줄어들면 소비 감소와 저출산으로 이어진다. 사회에 대한 불만이 쌓여 계층 간 갈등의 골이 더 깊어진다. 전문가들은 “일하는 사람들이 미래에도 안심하고 살 수 있는 사회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며 “국가 정책 목표를 중산층 부활에 둬야 한다”고 주장한다.

경제가 지속적으로 성장하지 못하면 통화 가치도 결국 떨어진다. 엔화는 올 들어서만 달러화 대비 30% 이상 추락했다. 그만큼 국민의 실질소득이 줄어든 셈이다. 성장 없이는 중류층이 유지되기 어렵다. 먼 나라 얘기만은 아닐 듯싶다.

최인한 시사일본연구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