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 이전과 달라진 노골적 ‘포병사격’ 위반 감행
정부 北 도발 지속시 폐기 불가피 공감대 확산
[헤럴드경제=신대원 기자] 한반도에서 군사적 긴장 완화와 신뢰 구축에 있어 나름 ‘안전판’ 역할을 해왔던 ‘9·19 군사분야 남북합의’가 4년여 만에 존폐 위기에 봉착했다.
9·19 군사합의 위기 국면의 방아쇠는 북한이 당겼다.
북한은 지난달부터 이달 초까지 김정은 국무위원장 지휘 아래 이어진 전술핵운용부대의 군사훈련을 마친 뒤에도 강도 높은 대남 군사적 도발을 지속하고 있다.
지난 14일 하루에만 군용기 10여대를 동원한 위협비행과 단거리 탄도미사일(SRBM) 발사를 감행했다.
특히 수백여발의 포병사격도 이날 이뤄졌다.
북한은 새벽 1시 20분께부터 1시 25분께까지 황해도 마장동 일대에서 서해상으로 130여발, 2시 57분께부터 3시 7분께까지 강원도 구읍리 일대에서 동해상으로 40여발의 방사포 등 포병사격을 실시했다.
다시 같은 날 오후 5시께부터 6시 30분께까지 강원도 장전 일대에서 동해상으로 90여발, 오후 5시 20분께부터 7시께까지 서해 해주만 일대 90여발, 서해 장산곶 서방 일대 210여발의 포병사격이 관측됐다.
북한은 이날 하루에만 무려 560여발의 포병사격은 감행한 것이다.
특히 북한의 포병사격으로 우리 영해에서 관측된 낙탄은 없었지만, 동서해 북방한계선(NLL) 북방 해상완충구역에 낙탄돼 9·19 군사합의 위반이라는 비판이 뒤따랐다.
9·19 군사합의 1조 2항은 남북 쌍방의 군사분계선(MDL) 일대에서 상대방을 겨냥한 각종 군사연습을 중지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지상의 경우 군사분계선으로부터 5㎞ 안에서 포병사격과 연대급 이상 야외기동훈련을 전면 중지하고, 해상에서는 동서해에 설정한 수역에서 포사격과 해상기동훈련을 중지하기로 했다.
또 공중에서도 MDL 동서부 상공에 설정한 비행금지구역에서 실탄사격 등 전술훈련을 금지하기로 했다.
북한의 9·19 군사합의 위반 논란이 처음 있는 일은 아니다.
2019년 11월 23일 창린도 방어부대의 해안포 사격과 2020년 5월 3일 중부전선 비무장지대(DMZ) 감시초소(GP) 총격 등 이전에도 북한의 9·19 군사합의 위반 논란은 몇 차례 있었다.
다만 이전까지는 소규모이거나 우발적 성격이 강했으며, 이번처럼 북한이 작심하고 9·19 군사합의를 노골적으로 겨냥한 것도 아니었다.
더욱이 북한의 강원도 장전과 서해 해주만, 장산곶 일대 포병사격은 앞서 황해도 마장동과 강원도 구읍리 일대 포병사격 이후 우리 군이 9·19 군사합의 준수와 재발 방지를 촉구하는 동시에 엄중 경고하면서 즉각 중단할 것을 촉구한 것을 사실상 묵살했다는 점에서 심각성이 더하다고 할 수 있다.
일단 정부는 9.19 군사합의를 당장 포기하지는 않겠지만 향후에도 북한의 도발이 지속된다면 폐기도 배제할 수 없다는 기류다.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 14일 북한의 포병사격이 9·19 군사합의를 명시적으로 깼는데 어떻게 보느냐는 취지의 질문에 “하나하나 다 검토하고 있다”고 답변했다.
대통령실은 9·19 군사합의를 먼저 위반한 것은 북한이라면서 9·19 군사합의를 계속 유지할지, 파기할지는 결국 북한의 태도에 달려있다고 밝혔다.
이미 정부 내에서는 북한의 도발이 지속될 경우 9·19 군사합의 파기는 불가피하다는 공감대도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
앞서 이종섭 국방부 장관은 국정감사에서 9·19 군사합의를 전면 폐기해야한다는 여당의 지적이 나오자 공감한다면서 “북한은 합의사항을 준수하지 않는데 우리만 준수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며 “북한의 도발 강도를 봐가며 9·19 군사합의의 효용성을 검토하도록 하겠다”고 언급한 바 있다.
권영세 통일부 장관도 “아주 특단의 사정이 없는 상태에서 우리가 9.19 군사합의를 비롯한 남북 간 합의를 먼저 깨는 것은 옳지 않다”면서도 “최악의 상황에서는 모든 옵션을 검토할 필요는 있다”고 말했다.
이미 북한의 9·19 군사합의를 겨냥한 포병사격이라는 ‘특단의 사정’이 조성된 상황에서 윤석열 정부가 굳이 문재인 정부 시절 남북합의를 고수할 지는 미지수다.
한편 9.19 군사합의는 2018년 9월 19일 당시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평양 남북정상회담을 통해 채택한 평양공동선언의 남북 간 군사분야와 관련한 부속합의서로, 당시 송영무 국방부 장관과 노광철 북한 인민무력상이 평양 백화원 영빈관에서 서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