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이번 편은 사실주의, 인상주의에 이어 프랑스 낭만주의의 아버지를 다룹니다. 낭만주의 화풍의 그림은 촉촉합니다. 콕 찌르면 그간 꾹 참아온 온갖 사연들을 털어놓을 듯합니다. 그렇기에, 낭만주의를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길 중 하나는 '스토리텔링'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그림 한 장을 놓고 이야기를 들려드립니다. 부디 이 글이 이 작품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면 좋겠습니다. (윌리엄 터너의 그림은 글의 이해를 돕기 위한 장치일 뿐, 이야기와 직접적인 관련은 없습니다.)
[헤럴드경제=이원율 기자] 1816년 7월 2일. 선장이 망설이고 있는 상급 선원을 밀쳤다. "그래도 승객이지 않습니까…"라며 덜덜 떠는 그 손에서 칼을 낚아챘다. 두 뼘은 넘을 듯한 그 칼은 폭풍우가 몰아치는 바다 한가운데에서 유일하게 반짝이는 존재였다. 구명보트 위 사람들, 뗏목 위 사람들 모두 선장의 손만 바라봤다. "속도가 안 나잖아. 우물쭈물하다가는 우리도 다 죽어." 선장의 목소리는 걸걸했다. 선장은 밧줄에 칼을 댔다. 배라고는 할 수 없는 두 물체를 이어주는 유일한 선(線)이었다.
파도는 더욱 높아졌다. 구명보트가 출렁이면 뗏목은 뒤집힐 듯 요동쳤다. 선장은 그 와중에도 밧줄을 놓치지 않았다. 팔뚝에 핏줄이 곤두섰다. 선장은 성실히 밧줄을 한 올 한 올 끊어냈다. 어떤 사람들은 여기라도 살기 위해, 어떤 사람들은 저기에서 벌어지는 일을 막을 길이 없어 가만히 보고만 있었다. 뗏목 위 3등석 사람들은 저항할 한 가닥의 힘도 없었다.
고작 3~4m밖에 안 될 구명보트와 뗏목 사이 거리가 한없이 멀게 느껴졌다. 선장을 향해 욕설이나 내뱉을 뿐이었다. 물리적 저항 없는 이 욕지거리는 공허한 메아리였다. 밧줄에서 삼가루가 연기처럼 피어올랐다. 점차 얇아지던 이 선은 선장의 마지막 일격에 탁하고 끊어졌다. 끝이었다. 뗏목 위 우리는 그 후부터 다시는 선장이 탄 구명보트를 보지 못했다.
우리는 어디서부터 잘못됐을까
나는 묘하게 더 차분해졌다. 물살 너머 멀어지는 구명보트를 보는 사람들이 그제야 절규하는데도 그랬다. 2년 전 오른팔이 너덜너덜한 채 찾아왔던 한 노인이 떠올랐다. 그는 석탄을 캐던 중 동물 뼛조각에 팔이 뚫렸다고 했다. 어르신, 그 팔을 잘라내야 해요. 내가 말했을 때 그 노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신의 뜻이라면 팔 하나쯤 하늘로 올려보낼 수 있지. 그는 흐릿하게 웃었다. 살기 위해 떠난 선장 무리도, 내버려진 우리도 망망대해 속 죽음의 항해를 하는 건 똑같았다. 그래, 이게 신의 뜻이라면. 그 노인의 기분을 이제는 이해할 수 있었다.
언제부터 꼬인 걸까. 아버지는 가난한 시골 의사였다. 나도 가난한 시골 의사였다. 우리는 종교 책을 들고 소명을 다해 살았다. 야망은 없었다. 물 흐르듯 살다 촛불처럼 죽고 싶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이상하게 일하면 할수록 외려 돈은 눈에 띄게 적어졌다. 정직할수록 주머니는 계속 얇아졌다. 우리 의원(醫院)을 찾아온 고위 관리는 뇌물, 자본가로 칭해지는 신흥 세력은 접대를 바랐다. 이들의 눈치를 외면할수록 처지는 더욱 나빠졌다. 아버지는 종종 "연기 뿜는 기계들이 세상을 타락시켰다"고 했다. 도시 출신 자본가가 의원 건물을 사고 싶다고 찾아온 날은 아버지의 장례식을 마친 직후였다.
이들 무리는 건물 안을 비집고 들어왔다. 자본가는 창가 앞에서 햇빛이 잘 들지 않는다며 투덜댔다. 아버지가 고민에 잠겼을 때 늘 찾는 곳이었다. 사무실이 좁아터졌다고 불평했다. 아버지가 평생 몸을 바쳐 일하던 곳이었다. 자본가는 이 건물을 마음에 들어 했다. 그저 값을 후려치기 위해 트집을 잡는 행위였다. 나는 그에게 어디서 무슨 말을 듣고 왔는지 알 수 없으나 이 건물을 내놓은 적이 없노라고 했다. "그런데 이 건물 말이오. 전체가 불법 건축물인 건 아시오?" 자본가가 느릿느릿 말했다.
그가 품에서 꺼낸 종이를 보니 이 건물 주소 옆에 빨간색으로 '불법'이라는 글자가 쓰여 있었다. 도장을 찍어준 관리의 이름이 낯익었다. 아버지와 내게 끊임없이 뇌물을 요구하던 관리였다. "노인네가 살아있을 때는 딱해 보여 봐줬다던데…. 내가 제값 쳐서 사줄 테니 파시오. 철거되기 전에." 자본가는 '철거'라는 말에 힘을 줬다. 건물이 넘어가는 동안 도와주는 이는 없었다. 모두 눈치만 봤다. "아직 펄펄한 청년이지 않소. 뭐라도 할 수 있을 거요." 자본가는 표정 잃은 내게 돈 몇 푼을 쥐여줬다. 회의감에 모든 의욕을 잃지 않았다면 뺨이라도 올려붙였을 것이다.
나는 떠나기로 했다. 이곳에선 그저 숨을 쉬고 내뱉기만 해도 힘들었다. 나를 위한 공기조차 모두 빼앗긴 듯했다. '식민지 세네갈에 정착할 이주민을 추가 모집함.' 이쯤 마주한 소식이었다. 지금의 나라, 옆 도시, 이 시골을 모두 견딜 수 없었던 나는 평소라면 하지 않을 결정을 했다. 새로운 땅에서 작은 의원을 세우고, 낯선 이들에게 신의 뜻을 알리기로 마음을 먹었다.
출항 날은 해가 뜨거웠다. 타고 갈 해군 군함은 위압적이었다. 귀족이나 자본가의 별장보다 더 컸다. 이름은 '메두사호'였다. 눈을 보는 순간 돌로 굳어버린다는 그 괴물의 이름이었다. 멋들어진 콧수염을 매만지고 있는 선장은 뱃사람보다는 장사꾼 같았다. 떠도는 말에 따르면 그는 해군 장교 출신이었다. 무엇보다 왕 루이 18세의 최측근이었다. 선장은 사람들이 인사할 때마다 큰 소리로 웃었다. 고개를 젖히며 호쾌하게 킬킬댔다. 기분이 좋아 보였다. 그는 세네갈에서 식민지 건설만 잘하면 평생의 부와 권력을 쥘 수 있었다.
승객은 400명 정도였다. 선장과 그의 가족·친척, 관료, 그리고 나와 같은 정착민 등이었다. 가장 좋은 방은 그들 차지였다. 큰 창문이 달린 방, 발코니가 있는 방 등이었다. 하급 군인, 광부, 상인, 미장이 등과 나처럼 가진 게 없는 사람들은 창문 하나 없는 창고 같은 곳에 몰렸다. 200~300명은 되는 듯했다. 이곳은 3등 칸 같았다. 방 한쪽에는 흑인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넓고 좋은 방에서는 매일 밤 경쾌한 소리가 들려왔다. 저 멀리 새로운 대륙에서 잠들고 있을 희망을 일깨우는 소리였다. 우리 방 사람들은 대부분 지쳐 보였다. 하루빨리 도착만 기다리는 듯했다. 메두사호는 각자의 사연을 품은 채 부와 권력을 향해 내달렸다.
"엄마, 배는 원래 이렇게도 흔들리는 거야?" 달빛 한줄기도 내려앉지 않는 어두운 밤, 한 남자아이가 자신 엄마의 옷깃을 잡고 속삭였다. 출항한 지 얼마나 흘렀을까. 분명한 건 며칠 전부터 메두사호가 아프리카 해안으로 들어왔다는 점이었다. 여태 크고 작은 휘청임은 있었다. 이번 요동은 확실히 달랐다. 메두사호는 산이 되려는 듯 우뚝 솟았다가, 바다가 되려는 듯 푹 내려꽂히기를 반복했다. 사람들은 위아래로 끌려다녔다. "밖에서 잠겨있어!" 거칠게 문을 밀던 군인이 소리쳤다. 이때부터 곳곳에서 비명이 들리기 시작했다. "거기 남자들. 와보라고!" 군인이 소리쳤다. 나와 몇몇이 허겁지겁 달려가 문을 밀었다.
문을 겨우 뜯어냈다. 바깥세상은 안보다도 더 아수라장이었다. 머리 위로 번개가 여러 번 스쳐 갔다. 고래 지느러미 같은 파도가 또 몰려왔다. 눈을 감았다 떴을 때 보이는 건 하늘 같은 바다, 바다 같은 하늘 뿐이었다. 양쪽 뺨에 몰아치는 이 물방울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건지, 바다에서 솟구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신의 손바닥으로 따귀를 맞는 듯했다. 좋은 방을 차지했던 사람들은 이미 구명보트 6개에 올라타는 중이었다.
"뭡니까, 도대체!" 나는 허둥지둥 뛰어다니는 선원의 어깨를 끌어당겼다. "선장 때문이라고! 암초를 못 보고 그대로 돌진했어. 20년 만에 처음 키를 잡는 주제에 이깟 폭풍우 따위라더니." 선원은 나를 밀쳐냈다. "3등 칸 사람들은 어떻게 합니까?" "당신들 자리는 없어. 선장이 뒷돈을 받고 자기 사람들을 한가득 더 태웠거든. 빨리 뗏목이라도 만드는 게 좋을 거야." 내 말에 선원이 소리쳤다. 그는 사라졌다. "저 말이 진짜야?" "이미 구명보트 두어 개는 도망칠 기회만 보고 있다던데?" 이 말을 들은 3등 칸 사람들이 웅성댔다.
"목수 더 없어? 나랑 이놈 말고 연장 좀 잡아본 사람 없냐고!" 이들 사이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목수니까 몇 명만 나를 좀 도와주쇼." 그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얼추 50대 정도로 보였다. 키는 작았지만 땅땅한 체구였다. 목수 옆에는 어린 남자아이가 목에 핏줄이 선 채로 서 있었다. 그의 조수처럼 보였다. 목수의 지시에 따라 사람들은 위태롭게 붙어있는 배 갑판을 종이 찢듯 뜯어냈다. 젊은 축에 속한 나도 동참했다. 갑판에 엉겨 붙은 못을 빼려다가 오른손의 엄지손톱이 들어 올려졌다. 고통에 뒹굴고 싶었다. 그럴 틈이 없었다.
"밧줄!" 목수의 말을 들은 군인이 왼쪽 넓적다리에 걸려있는 단검을 꺼냈다. 돛에 엉켜있는 밧줄을 길게 끊어내 목수에게 던졌다. 사람들은 아무렇게나 뜯어올린 배 갑판 조각을 세 개쯤 이어 붙였다. 목수와 그 조수를 중심으로 열댓 명 사람들이 그 조각의 끝과 끝을 밧줄로 묶었다. 어설프게나마 뗏목이 만들어졌다. 제법 크고 넓은 뗏목 곳곳에는 사람들의 피가 낭자했다. 말 그대로 피와 땀, 절규로 만든 생명선(船)이었다.
물론 이를 만드는 데 들인 시간은 짧지 않았다. 한 뭉치의 사람들이 그사이에 사라지기에는 충분했다. 살기 위해 버둥대던 이들은 바람에 날려가고 물살에 휩쓸렸다. 미끄러운 갑판에 휘둘리다 꼬챙이에 꿰이기도 했다. 두 손 모아 기도하던 몇몇은 파도와 함께 기적처럼 사라졌다. 배와 사람들의 파편은 아무렇게나 뒹굴었다. 엄마와 아빠, 아들과 딸, 친구와 동료를 찾는 목소리가 이어졌다.
"저 구명보트가 사라지기 전에 이 뗏목을 붙여버리자고. 이 밧줄을 갖고." 몇 살인지 가늠조차 힘든 한 노인이 소리쳤다. 그는 자신이 어부라고 했다. 하늘을 보니 폭풍우가 한나절은 더 갈 기세며, 바다를 보니 육지는커녕 작은 섬조차 보이지 않는 게 표류하기에 딱 좋은 환경이라고 했다. 암초로 뱃머리까지 박살 난 메두사호도 지금은 반 이상 떠 있지만 곧 순식간에 침몰한다. 그렇게 되면 더 이상 옮길 짐과 장비조차 없어지는 구명보트도 미련 없이 떠날 것이라고 그는 덧붙였다.
왜 그 생각을 못 했을까. 주위를 둘러보니 선장이 타고 있는 구명보트가 가장 가까웠다. 머리가 산발이 된 선장은 사람들을 깔고 누른 채 지금도 "아직 안 돼. 찻잔이랑 카펫, 벽에 걸린 그림도 가져와! 내가 얼마를 주고 구했는지 알아?"라고 고함을 내지르며 선원들을 쥐 잡듯 잡고 있었다.
늙은 어부의 외침을 들은 3등석 사람들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밧줄을 쥐었다. 나도 내달렸다. 묘한 책임감이 다가왔다. 노인 대부분은 여전히 중얼대며 기도했다. 바지 밑단이 뜯어진 어린아이들은 영문도 모른 채 앙앙 울었다. 모른 척하고 싶었으나 그러지 못한 이유였다. 선장은 이미 눈이 뒤집힌 상태였다. 우리가 무슨 짓을 하는지 알 리 없었다. 선장의 구명보트에 탄 사람들도 모두 공포에 질려 있었다. 이들은 팔다리 하나 꿈쩍할 수 없을 만큼 빽빽이 모여 덜덜 떨었다. 서로가 서로를 짓눌렀다. 설령 누군가 튀어나와 막는다고 해도 우리는 이 행동을 멈출 생각 따위 없었다. 죽음이 걸린 승부였다. 구명보트의 끝단과 뗏목의 가장 튼튼한 나무줄기를 간신히 꽉 묶었다.
나와 사람들은 반쯤은 휩쓸리며 겨우 뗏목으로 돌아왔다. 그 사이 손톱이 날아간 엄지손가락은 물과 피로 퉁퉁 부었다. 돌아와 보니 뗏목도 엉망이었다. 그래봤자 가로 15m, 세로 7m 정도의 뗏목이었다. 족히 150명은 돼 보이는 사람들은 서로를 깔고 누르면서 뒤엉켰다. 그간 한 움큼의 무리가 쓸려갔는데도 그랬다.
나는 근 30년 전, 한 중대(中隊) 정도가 겨우 지낼 수 있는 창고에 노예 400명을 4~5겹으로 쌓아 항해했다고 한 노예선 '종(Zong) 호'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 광경이 눈앞에 생생했다. 이리도 좁은 곳에 이렇게 많은 사람이 있을 수 있다는 걸 처음 알게 됐다.
갑자기 뗏목이 뒤집힐 듯 크게 출렁였다. 물에 빠진 채 힘겹게 뗏목 끝자리를 부여잡고 있던 사람들이 가을철 나뭇가지 열매처럼 떨어져 나갔다. "구명보트가 떠나고 있어요." 구명보트는 잡히지 않는 생명을 향해 항해를 시작한 듯싶었다. 뗏목은 그 뒤꽁무니를 착실히 쫓아갔다. 메두사호는 불 위에 놓인 얼음인 양 거짓말처럼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고비는 넘겼다. 그러나 선장은 그 얇디얇은 희망의 끈을 손쉽게 잘라냈다.
우리는 어디까지 잘못돼야 할까
한나절이 지나자 정말 폭풍우가 멈췄다. 그런데도 겨우 쪽잠이나마 잘 수 있게 된 건 뗏목 위에서 사흘을 보낸 후였다. 여태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살기 위해서였다. 우리가 있는 곳은 바다였지만 뗏목 위 세상은 정글에 가까웠다. 당연히도 자기 목숨을 양보할 사람은 없었다. 적자생존(適者生存) 법칙이 서늘하게 피부에 와닿았다. 모든 사람이 뗏목 한가운데를 자기 자리로 만들기 위해 달려들었다. 그나마 재앙에서 가장 안전한 위치였다.
사흘간 물리력이 약한 모든 종류의 사람들은 인종 구분 없이 희생됐다. 그 안에는 구명보트와 뗏목을 밧줄로 이어버리자는 어부 노인도 포함됐다. 희생이란 내가 쓸 수 있는 가장 점잖은 표현이었다. 뗏목 주변을 배회하는 크고 작은 상어들은 떠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전쟁에서 살 수 있는 가장 좋은 전략은 '눈에 띄지 않기'라고 하던가. 굳이 애쓰지 않은 내가 지금껏 살아남은 건 이 때문인 듯했다. 사흘 뒤 뗏목에 남은 사람은 겨우 30~40여 명뿐이었다.
그렇게 전쟁이 끝나자 지옥이 펼쳐졌다. 무엇보다 식량이 문제였다. 떠다니는 짐들 사이에서 건진 축축한 비스킷 박스는 이미 동이 났다. 이쯤부터 뗏목 위는 군인을 따르는 집단과 그러지 않는 집단으로 갈라졌다. 반반 정도였다. 군인은 쩌렁쩌렁한 목소리와 큰 골격이 무기였다. 밧줄을 자를 때 쓰던 단검도 꽉 쥐고 있었다. 어설프게나마 물고기를 가장 잘 사냥하던 사람이었다. "이럴 때 가장 잘 챙겨 먹어야 하는 사람이 누군지 알아? 지도자야. 지도자가 맨정신으로 올바른 판단을 해서 이끌어야 하거든." 군인은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을 앉혀놓고 생선 뼈를 우적우적 씹었다. 하지만 그의 눈빛에는 이미 광기가 서려 있었다.
나를 포함해 각자도생을 택한 사람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생을 꾸려갔다. 그중에는 흑인들도 다수였다. 배 한가운데를 차지한 뒤 노인, 아이 구분 없이 마구 발로 차던 그 군인을 차마 따를 수 없었다. 나는 가끔 바다 위로 튀어 오르는 멸치 같은 작은 생선들을 먹었다. 수분은 생선 눈알과 척추를 쥐어짜 보충했다. 가끔 잔잔한 소나기가 오면 그렇게 반가울 수 없었다. 젖은 옷을 쥐어짜면 그대로 마실 물이 됐다.
각자 살길을 찾는 사람들은 대체로 말이 없었다. 말 한마디를 할 힘도 아껴야 할 시기였다. 대체로 군인 집단이 더 잘 먹기는 했다. 이들은 단검으로 뗏목 바닥을 한 겹 죽 찢어 나무 막대기를 만들었다. 끝을 뾰족하게 긁어내니 그럴듯한 작살 몇 개가 만들어졌다. 이들은 쫓아오는 상어의 몸통을 꿰뚫어 뜯어 먹었다. 배고픔을 참지 못한 몇몇은 이를 보고 군인 집단에 새로 합류했다.
며칠이 더 흘렀다. 뗏목은 여전히 외로운 섬이었다. 사람들은 계속 죽어갔다. 갈증을 참다못해 생선 피를 들이켜던 사람, 누가 봐도 암초인데 이를 구조선이라고 소리치며 허겁지겁 물로 뛰어들던 사람, 눈물을 뚝뚝 흘리며 스스로 상어 밥이 되길 택한 사람 등 다양했다. 군인 집단에선 상어를 사냥하던 중 되레 상어에게 끌려가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애초 여기 있는 모든 사람은 기아, 탈수, 질병 등으로 서 있기도 힘든 몸 상태였다. 이렇게 일부는 죽었고, 상당수는 미쳐갔다. 나와 몇몇은 마지막 이성의 끈을 힘겹게 부여잡고 있었다.
신의 뜻은 무엇일까. 이 일은 고행(苦行)일 뿐일까. 그게 아니라면 신은 내가 그저 여기에서 죽기를 바라는 걸까. 신이 원하는 바가 무엇이든 나는 내가 야만인이 될 조짐이 보이면 바로 숨을 끊겠다고 거듭 다짐했다. 물방울이 꽤 굵었던 소나기가 지나가자 상어들은 더 이상 뗏목에 따라붙지 않았다. 시큰한 피 냄새가 모두 씻겨나간 탓이었다.
악몽 같은 시간이었다. 가장 괴로운 건 기약 없는 지금의 상태였다. 다들 피부가 까맣게 그슬렸다. 몸 곳곳에서 하얀 껍데기 같은 게 피어났다. 파도는 끊임없이 밀려왔다. 이제 웬만큼 큰 물살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누군가가 휩쓸려 사라져도 그뿐이었다. 그나마 몸을 잘 사린 군인과 그의 직속 졸개 두 명 말고는 다들 기진맥진이 누워 있었다. 사람들을 지긋이 쳐다보는 군인 무리의 눈빛이 심상치 않았다. 이들은 서로에게 귓속말을 했다.
"왜 몰랐지. 여기 널린 게 먹을 건데." 쉰 목소리가 들려왔다. 뗏목 한가운데에 눌러 앉아있던 이들은 다리를 질질 끌었다. 내가 누워있는 반대편 방향이었다. "이거, 죽은 거지?" 군인이 단검을 댄 '이거'는 여태 쉴 새 없이 중얼대다 최근 잠잠해진 한 흑인이었다. 군인 옆에 선 둘은 고개를 끄덕였다. "손질하자." 군인은 졸개 둘을 시켜 한 명은 양팔, 한 명은 양다리를 쭉 벌리게 했다. 나는 고개를 돌렸다. 서걱서걱. 소리가 들렸다. 웩. 누군가의 구역질 소리도 들렸다. 이내 잠잠해졌다. 그런 뒤 윗니와 아랫니가 부딪히는 소리, 우악스러운 목 넘김 소리가 귓가에 닿았다. 소리는 점점 더 게걸스러워졌다.
"미쳤군." 내 바로 앞에 있던 빨간 옷을 두른 노인이 팔에 볼을 괸 채 혼잣말을 했다. 그는 이 뗏목을 주도적으로 만든 그 목수였다. "이놈도 곧 죽겠어." 나와 눈이 마주친 목수가 우악스러운 왼팔로 지탱하고 있는 건 그의 조수였다. "그래도 내가 이렇게라도 쥐고 있어야 저놈들이 마음대로 못 건들지." 그는 이미 시신이라 해도 이상할 게 없는 조수를 다시 잡아당겼다.
"하나 더. 하나 더…."
또다시 쉰 목소리가 들렸다. 마지막 이성마저 잃은 소리였다. 참담했다. 요 며칠은 물조차 제대로 마시지 못했다. 그런데도 눈에서는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허기, 기약 없는 표류, 야만인이 된 사람들…. 나는 무엇보다 자신을 견딜 수 없었다. 저들이 벌이는 짓을 알아차린 뒤 나 또한 더욱더 허기를 느꼈던 것이다. 신의 뜻은 도대체 무엇일까. 나는 있는 힘을 다해 뗏목에서 나무 조각을 뜯어냈다. 엄지손가락에서 다시 피가 흘렀다. 상관없었다. 이제 그 조각을 목에 가져다 대려는 순간….
"배다!" 누군가의 외침이 들렸다. 발음이 어눌한 걸 보니 살아남은 흑인 같았다. 정신착란증을 겪고서는 또 환상을 봤으리라. 상상도 못 했던 방식의 죽음이 눈앞에 있으니 무엇이든 보고 싶었을 테다. 나는 고개를 돌려봤다. 신기루가 아니었다. 저 멀리서 흐릿히 보이는 건 분명 배였다. "배라고! 뭐 흔들 거 없어?" 사람들은 마지막 힘을 다해 고개를 쳐들었다. 넝마가 된 옷을 북북 찢어 흔들었다. 잠시 멍하게 있던 군인과 그 졸개도 이내 정신을 차린 듯 벌떡 일어섰다. 여기 사람, 사람이 있다고 소리쳤다.
사람…. 나는 그 표현이 새삼스러웠다. 뱃머리가 우리 쪽으로 돌아섰다. 표류 후 13일 뒤였다. 지금껏 뗏목 위에서 숨이 붙어있는 이는 모두 15명이었다.
메두사호, 낭만주의 신호탄
1816년 7월 2일 프랑스 해군 군함 메두사호가 세네갈을 식민지로 삼기 위해 출항했습니다. 승객은 400여 명 정도였습니다. 메두사호는 아프리카 해안에 다다랐을 때 암초에 걸려 좌초되고 맙니다. 선장과 그의 가족·지인, 상급 선원 등은 구명보트 6개를 타고 대피했습니다. 하급 군인과 이주민 등 149명은 뗏목을 만들어 탈 수밖에 없었습니다. 선장은 구명보트와 뗏목을 잇는 밧줄을 끊어버립니다. 이들은 13일간 표류합니다. 물도, 식량도 충분치 않았습니다. 결국 기아, 탈수, 질병, 폭동을 넘어 표류 중간 쯤부터는 여러 종류의 극단 선택을 하게 됩니다. 영국 국적의 아르귀스 호가 구조할 때까지 살아남은 이는 고작 15명이었습니다.
알고 보니 선장은 20년가량 전장에 나가본 적 없는 무능한 인사였습니다. 루이 18세 측근으로 왕당파에 줄을 잘 선 덕에 선장직을 차지한 인물이었지요. 메두사호의 비극이 언론의 보도로 알려진 후 온 나라가 충격을 받습니다. 그런데도 프랑스 왕정에선 책임지는 이가 없었습니다. 살아남은 선장은 재판에 세워졌으나 고작 3년 형을 받았다고 전해집니다. 뗏목에서 살아남은 이들은요. 5명은 며칠 후 죽었습니다. 나머지 사람들도 멀쩡히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정신병원에 가는 이가 수두룩했습니다.
화가 테오도르 제리코는 이 사건에 매료됩니다. 제리코는 뗏목 위 생존자들의 구조 장면을 극적으로 강조해 '메두사호의 뗏목'(난파 장면)을 그립니다. 제리코는 훗날 이 작품 덕에 프랑스 낭만주의의 아버지로 칭해집니다.
감성·상상력…‘교과서’ 틀을 깨다
19세기 초 고개를 든 낭만주의 화풍의 핵심은 감성과 상상력입니다. 제리코의 '메두사호의 뗏목' 그림 한 장, 관련 배경지식이 있다면 누구든 영화나 소설의 한 장면을 그려내고 상상할 수 있습니다. 위 이야기 또한 역사의 한 구절을 참고해 쓴 소설입니다.
낭만주의는 성역처럼 여겨진 딱딱한 '교과서적 회화 공식'에서 벗어난 화풍입니다. 그 시절 낭만주의는 신(新)고전주의와 경쟁했습니다. 신고전주의는 언뜻 봐도 알 수 있듯, 삼각형 구도 등 옛 규범에 따른 표현 방식에 맞춰 화가의 주관성을 최대한 억제하는 화풍이었습니다. 두 방식의 공통점도 있습니다. 주로 선남선녀가 있는 점, 대개 근육질 혹은 각선미가 살아있는 인물이 등장한 점 등입니다. 다만 신고전주의가 비교적 건조한 그림이었다면, 낭만주의는 물이 뚝뚝 흘러내릴 듯 촉촉한 그림이었다는 데서 차이점이 있습니다. 낭만주의 화가들은 주관성에 맞춰 자신의 감정을 캔버스 속에서 폭발시켰습니다. 낭만주의가 교과서의 틀을 깨준 덕에 이후 사실주의·인상주의가 눈을 뜰 수 있었다는 분석도 상당합니다.
만약 신고전주의 화가가 '메두사호의 뗏목'을 그렸다면, 아마 빛이 내리쬐는 등 주목 받는 주인공이 있었을 겁니다. 그 주인공은 물을 가르는 등 영웅적 행위도 했을 가능성이 크지요. "여기 정답이 있어. 굳이 더 상상할 필요가 없어"라는 느낌으로요.
꽃 피기도 전에…안타까운 요절
제리코가 1819년 프랑스 살롱에 출품한 '메두사호의 뗏목'은 일약 화제작으로 떠오릅니다.
혁신은 언제나 비난을 부르는 법입니다. 화가의 감성과 상상력이 물씬 묻은 이 그림이 생소했던 이들 가운데선 "시체 더미 그림", "그림이 선거만큼 정치적"이라는 비판이 나옵니다. 제리코가 이 그림을 그리려고 시신을 작업실에 들였다는 말이 돌면서 그에게 '광인'이라는 수식어도 따라붙습니다.
이 그림을 그리려고 머리도 박박 민 채 1년 넘게 작업실에 틀어박혀 있었다던 제리코는 이런 반응에 크게 실망했습니다.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은 제리코는 이때부터 신경쇠약 증세를 보이기 시작합니다.
이후 제리코의 '메두사호의 뗏목'은 1820년 영국 런던, 1821년 아일랜드 더블린에서 화단과 대중 모두에게 호평을 받았습니다. 제리코의 감성에 감동한 젊은 화가들은 그의 화풍을 따라하기 시작합니다. 같은 세대의 화가 외젠 들라크루아는 제리코의 화풍을 이어받아 후에 낭만주의를 꽃피우게 됩니다.
하지만 제리코의 인생에선 불행이 이어집니다. 좌골신경통, 승마 사고, 몸 속 종양 발견 등으로 결국 1823년부터는 침대에서 일어나지 못합니다. 제리코가 눈을 감은 건 1824년, 나이는 고작 32세였습니다. 논란을 부른 제리코의 '메두사호의 뗏목'은 그가 죽은 직후 프랑스 파리 루브르 박물관이 사들였습니다. 가로 7m, 세로 5m에 가까운 이 그림은 지금도 루브르 박물관에서 볼 수 있습니다.
〈참고 문헌〉
줄리언 반스의 아주 사적인 미술 산책, 줄리언 반스, 다산책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