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어릴 적 페르메이르의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를 본 뒤 관련 책과 영화를 모두 찾아봤습니다. 잘 그린 건 알겠는데 이 그림이 왜 유명한지 궁금했습니다. 그림 한 장에 얽힌 이야기가 그렇게 많은지 몰랐습니다. 즐거웠습니다. 세상을 보는 눈이 조금은 달라졌다는 느낌도 받았습니다. 이 경험을 나누고자 글을 씁니다. 미술사에서 가장 논란이 된 그림, 그래서 가장 혁신적인 그림, 결국에는 가장 유명해진 그림들을 함께 살펴봅니다.
[헤럴드경제=이원율 기자] 1434년 플랑드르 브루게. 매서운 눈매의 남성이 가로·세로 1m도 되지 않는 작은 캔버스에 붓을 댑니다. "팔은 이렇게 하면 되오?" "제 옷깃이 예쁘게 잡혔나요?" 가만히 선 자세가 영 어색해 질문을 이어가는 남녀도 몰입하는 이 남성을 본 후 말을 아낍니다. 영리한 강아지는 자기 자리를 찾아 가운데 섰습니다. 공간은 금세 고요해집니다. 시큼한 오렌지 향과 동양풍 카펫의 먼지 냄새, 물감을 품은 캔버스에서 올라오는 기름 냄새만 진동합니다.
무섭게 집중하는 이 남성은 종종 심호흡하듯 고개를 들어 주위를 살핍니다. 모델이 된 남녀는 그럴 때마다 흠칫합니다. 그런데도 개의치 않습니다. 천장부터 마룻바닥까지 꼼꼼히 관찰합니다. 허투루 그리는 게 없습니다. 주어진 시간이 무한한 양 옷 주름 하나, 심지어 강아지의 털 한 가닥까지 공을 들입니다. 광택을 뿜어내는 가늘고 얇은 붓끝은 캔버스 위에서 쉴 새 없이 춤을 춥니다. 무한한 줄 알았던 이 작업도 끝이 보입니다. 남성의 표정은 그제야 누그러집니다. "나, 얀 반 에이크가 여기 있었노라." 그는 흡족한 마음으로 그림 중앙에 이렇게 씁니다. 근 600년 뒤 가장 오래된 유화 '명작'으로 칭해질,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2인 초상화가 될 이 작품이 생명력을 갖는 순간입니다.
디테일의 ‘화신’
"예술의 모든 건 디테일에 있다." (크리스티안 마클레이, 비디오 작가)
남녀가 나란히 서 있습니다. 한눈에 봐도 돈이 많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경건한 분위기 속에서 서로의 손이 맞닿았습니다.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The devil is in the detail)고 합니다. 이 그림은 언뜻 보면 옛사람들의 초상화,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닌 듯합니다. 그런데 이 작품을 하나씩 따져보면요. 현존하는 가장 악마 같은 그림으로 기억해도 무방합니다. 고작 59.7cm X 81.8cm 크기의 캔버스 속 디테일이 말 그대로 '미쳤기' 때문입니다.
먼저 눈여겨볼 만한 부분은 볼록 거울입니다. 볼 게 한가득한데 이 손톱만 한 걸 왜…? 누군가 가리키지 않는다면 그냥 지나칠 만큼의 작은 크기입니다. 반 에이크는 이 거울 속에 또 다른 세계를 만들었습니다. 남녀의 뒷모습, 창문과 샹들리에 등 거울의 시선에서 볼 수 있는 모든 게 담겨 있습니다. 두 남녀 앞에 반 에이크 등 두 사람이 있었다는 점 또한 이 투명한 창(窓)을 통해서만 알 수 있습니다. 거울 테두리도 10개의 서로 다른 그림을 품고 있지요. 고난받는 그리스도와 관련한 장면들입니다. 대충 그린 게 없습니다. 각각 장면을 하나씩 따로 내놓으면 그 자체로 작품이 될 만큼 정성을 기울였습니다.
사실은 이런 거울의 디테일도 빙산의 일각입니다. 당장 마룻바닥만 봐도 질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강아지의 털도 한 올 한 올 살아있습니다. 창문으로 들어오는 빛줄기는 손에 잡힐 듯합니다. 부부의 의상부터 창틀, 슬리퍼는 물론 작은 솔 하나까지 모든 게 돋보기를 댄 양 세밀합니다.
이제 두 주인공과 주변을 봅니다. 반 에이크는 두 사람이 굉장한 부자이며, 여유가 흘러넘친다는 점을 보여주기 위해 온갖 장치를 뒀습니다. 엄숙한 표정의 남성은 왼손으로 여성의 오른손을 살포시 잡고 있습니다. 여성은 수줍은 듯 고개를 약간 숙인 상태입니다. 몸을 보니 임신이라도 했는지 배가 불룩 튀어나왔습니다. 실제로 아이를 품은 건 아니었습니다. 이는 당시 유행하는 패션이었습니다. 많은 옷을 겹쳐 입은 뒤 옷깃을 잡고 다니는 일 자체가 부의 과시였습니다.
두 사람의 모피와 비단은 강렬합니다. 옷감 재질이 그려질 만큼 생생합니다. 특히 여성이 녹색 드레스가 눈길을 끕니다. 당시에는 물감 중에서도 특히 녹색이 비쌌습니다. 값을 그램(g) 단위로 계약할 정도였습니다. 그런 녹색을 아낌없이 쏟아냈습니다. 왼쪽 창문 주변에는 오렌지가 굴러다닙니다. 이 시기에는 오렌지도 귀한 과일이었습니다. 붉은색 천을 두른 침대, 동양풍 카펫, 거울 옆 빛나는 묵주 등도 이들의 재력을 짐작하게 합니다.
이들 둘의 사랑이 성스럽다는 면도 내보였을까요? 침대 옆에 작게 그려진 조각상은 성 마거릿입니다. 여성들의 수호성인이지요. 왼쪽 하단에는 남성용 신발이 있습니다. '하느님이 이르시되 이리로 가까이 오지 말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출애굽기 3:5)'는 문장을 떠올리게 합니다.
샹들리에에는 초 하나가 켜져 있습니다. 당시 촛불 하나는 신의 눈을 의미했습니다. 강아지는 예나 지금이나 충성의 상징입니다. 거울 속 파란 옷을 입은 이는 반 에이크, 빨간 옷을 입은 이는 반 에이크의 조수 혹은 여성의 아버지로 해석되고 있습니다. 둘의 사랑을 증명하기 위해 온 사람들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입니다. 반 에이크의 '아르놀피니 부부의 초상'(1434)입니다.
유화 시대의 문을 열다
반 에이크는 유화의 시대를 연 선구자입니다. 이 그림은 그런 그가 남긴 대표적인 유화 작품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2인 초상화로 칭해지는 까닭입니다. 미술 평론가들 사이에선 "그간의 기법이 다 비포장 된 흙길이라면, 유화는 깔끔히 다듬어진 아스팔트 도로"라는 말이 있지요. 유화 기법의 확립은 미술사 중 선이 굵은 혁명 중 하나였습니다.
반 에이크는 유화 기법 덕에 손톱만 한 거울 속 새로운 세상을 창조할 수 있었습니다. "저걸 어떻게 그렸어?" 당시 템페라·프레스코 기법만이 진리라고 믿은 화가들은 망치로 머리를 맞은 기분이었습니다. 천동설의 세상 속에서 지동설을 처음으로 받아들이게 된 학자들이 느낀 충격과 다를 게 없었습니다.
유화용 물감은 색깔 있는 식물·광물 등을 빻은 가루에 올리브유 등 정제된 기름을 섞어 만들었습니다. 무엇보다 화가가 더 이상 쫓기듯 작업하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디테일에 마음껏 공을 들일 수 있게 됐습니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몇 번이나 수정도 할 수 있었습니다. 기름 성분이 공기 중 산화되는 과정이 긴 만큼, 물감이 마르는 데도 긴 시간이 걸렸기 때문입니다. 깊이 있는 표현도 할 수 있었습니다. 이미 칠해진 색에 새로운 색을 얹어도 자연스럽게 섞인 덕입니다. 기름이 섞였으니 광택 효과도 덩달아 따라왔습니다. 은은히 뿜어내는 빛은 고급스러운 분위기를 더해줬지요.
다만 반 에이크는 유화의 선구자라는 말이 어울리지, 유화의 발명가로 보기는 어렵습니다. 고대 이집트 시대에도 그림 보존을 위해 작업 마무리 단계에 기름을 덧발랐다는 식의 기록이 남아있습니다. 반 에이크는 유화의 잠재력을 극대화했다고 표현하는 게 맞습니다.
그렇다면 반 에이크가 유화의 가능성을 증명하기 전 세상은요. 당시 대부분의 유명 화가들은 템페라화를 떠받들었습니다. 지금 우리가 문서 작업을 위해 컴퓨터를 쓰듯, 이들은 작품 활동을 위해선 당연히 템페라 기법을 따랐습니다. 템페라용 물감은 색깔이 담긴 추출물에 물과 날달걀 등을 섞어서 만들 수 있었습니다. 산드로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 프라 안젤리코의 '수태고지' 등이 템페라 기법을 활용한 대표적 작품입니다.
색채가 생생하고, 잘 마르면 튼튼해 보존 기간이 길었다는 게 장점이었습니다. 그러나 여러 단점이 있었습니다. 특히 마르는 속도가 너무 빨라 긴 시간 작업을 할 수 없다는 게 치명적이었습니다. 템페라용 물감은 신선한 상태에서 쓰지 않으면 발색도 선명치 않았습니다. 사물을 하나씩 공들여 그리고 싶어도, 이미 마른 채 쩍쩍 갈라지기까지 하는 통에 그러기가 힘들었습니다. 수정도 쉽지 않았지요. 색상이 겹치면 명도와 채도가 낮아지는 탓에 그림 전체가 탁해졌기 때문입니다. 물과 날달걀의 비율이 정확하지 않으면 아예 처음부터 새로 섞어야 하는 등 만들기도 어려웠습니다. 따로 수련받아야 할 정도였습니다.
그 시대에는 프레스코 기법도 있었습니다. 석회를 쓰는 방식입니다. 이 또한 회벽이 마르기 전에 그려내야 해 디테일을 담기가 어려웠습니다.
"유화는 실력 없는 화가들이 찾는 기법이야. 실력 있는 화가는 말이야. 잘 된 소묘 위에 딱 한 번의 채색으로 끝낼 수 있어야 하는 거야. 그렇게 나오는 게 진짜 작품 아니겠어?" 당시 템페라·프레스코화를 고집하던 화가들은 반발 움직임도 보였습니다. 그러나 변화의 맛을 본 신진 화가들의 전진을 막을 수 없었습니다. 이들은 더 많은 사물을 더 자세히 그리고픈 욕망을 실현코자 유화를 받아들입니다. 유화는 원근법과 함께 르네상스 시대 최고의 발명품이 됩니다.
의외의 ‘미스터리’ 화가
1395년께 오늘날 벨기에 동부 지역인 마세이크에서 태어난 반 에이크를 연구할 수 있는 자료는 많지 않습니다. 지금은 플랑드르(현재 프랑스 북부와 벨기에 서부, 네덜란드 남서부를 포함한 북해 연안 중세 국가)의 전설로 칭해질 만큼 유명합니다. 하지만 아직도 그에 대한 정확한 출생 시기·장소, 성장 과정, 초기 작품 활동까지 대부분은 베일에 가려진 상태입니다. 그저 1425년 부르고뉴공국의 궁정화가로 일한 일, 그를 고용한 필리프 3세의 결혼을 위한 사절단 일원으로 리스본에 방문했던 일 정도가 전해질 뿐입니다.
반 에이크는 평민 출신입니다. 형인 휴베르트 반 에이크와 누이 마르케레테도 화가였습니다. 현재 영국 런던 내셔널 갤러리에서 볼 수 있는 '남자의 초상'이 그가 남긴 자화상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반 에이크는 1441년 7월 9일 벨기에 브뤼헤에서 사망했습니다. 확실한 그의 그림으로 전해지는 작품은 1432~1441년 사이 만든 25점 정도입니다.
너무나 ‘디테일’해 뒷말 무성
반 에이크가 그린 '아르놀피니 부부의 초상'은 지금도 미술계에서 가장 논쟁이 많이 이뤄지고 있는 작품입니다. 아이러니하지만 작은 사물까지 너무 자세히 그린 탓입니다.
남성은 이탈리아 루카 출신의 지오반니 아르놀피니, 여성은 같은 나라 출신의 지오반나 체나미라는 게 정설입니다. 당시 중요 무역 도시였던 플랑드르 브루게에서 생활한 지오반니는 고급 직물 무역으로 부를 쌓은 재력가였습니다. 체나미도 성공한 사업가의 딸이었습니다.
미술계 한쪽에선 두 사람이 포갠 손, 촛불과 묵주 등에 대한 종교적 해석에 따라 결혼식의 장면이었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미술사학자 에르빈 파노프스키가 대표적이었지요. 하지만 다른 쪽에서는 "장소가 너무 사적이지 않아?" "15세기 신부들이 쓰던 결혼용 왕관이 없잖아?" 등의 주장으로 약혼식 일 수 있다는 주장도 하고 있습니다. 미술사학자 에드윈 홀 등의 분석이기도 합니다. 이 평론가는 두 남녀 손이 '잡았다'기보다는 살짝 겹쳐 있는 점, 당시 약혼식은 결혼식과 달리 가정집에서 이뤄질 수 있었던 점, 또 소수의 증인을 데리고도 효력이 있었던 점 등을 근거로 언급했습니다. 반 에이크가 이름·연도를 남긴 일은 약혼 증인으로 '계약' 성립을 증언하기 위한 차원이었다고 설명했습니다.
아예 사랑의 언약식이 아니라는 말도 있지요. 지오반니가 모자까지 쓰는 등 힘껏 꾸민 일, 체나미도 이미 잘 다듬어진 유부녀 스타일의 머리 스타일을 한 것 등 그저 부에 대한 자부심을 표현했다는 해석입니다. 당시 두꺼운 커튼으로 가릴 수 있는 높은 침대는 부유함을 과시하는 대표적인 수단이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되면 굳이 잘 꾸며진 집에서, 오렌지까지 굴려 가며 그림을 남긴 게 이해가 되는 듯도 합니다.
일각이긴 하지만, 약간 섬뜩한 해석도 있는데요. 두 사람이 지오반니의 형제 부부였다는 주장입니다. 즉, 지오반니와 체나미가 아니라는 겁니다. 그런데 지오반니 형의 부인은 1433년에 죽었다고 합니다. 그렇기에 이 그림은 지오반니 형의 부인 사망 1주년을 기념하는 의미를 갖는다는 이야기입니다. 샹들리에의 초 하나가 남성 쪽에서 빛나는 건 그 자체가 생명을 뜻한다는 겁니다.
그런가 하면 반 에이크가 두 사람을 그저 '저격'하기 위해 그렸다는 설도 있습니다. 값비싼 오렌지가 의미 없이 널브러져 있는 장면, 굳이 고난받는 그리스도의 모습을 정성껏 담은 일 자체가 두 사람이 신의 뜻을 올곧게 따르지 않는다는 점을 알려주는 상징이라는 해석입니다.
"'오버'하면서 이것저것 가져다 붙이지 말고 그냥 보이는 그대로만 보라"는 주장도 있고요. 미술사학자 장 밥티스트 브도는 당시 북유럽에서는 낮에도 실내라면 초에 불을 켜놓는 게 일상이었다고 지적했습니다. 신발도 출애굽기까지 갈 필요 없이 그저 선물일 수 있다고 강조했습니다. "내가 본 그대로,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한다"는 말을 남겼다는 반 에이크는 이런 논쟁 상을 보면 어떤 기분일까요. "정답이 안 보이는가? 애써 이런저런 걸 다 공들여 그려줬는데도…. 웃기고 있군." 그의 까칠한 목소리가 벌써 들리는 듯합니다.
‘내 이름’을 남긴 첫 화가
플랑드르를 작품 활동의 주 무대로 삼은 반 에이크는 북유럽 미술 전통의 설립자로 칭해집니다. 플랑드르 미술사에서 그의 이름이 빠진 적은 단 한 순간도 없을 정도입니다.
반 에이크가 개척한 건 유화 기법만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자기 작품 중 상당수에 직접 서명을 남긴 최초의 플랑드르 화가라는 점도 눈길을 끕니다. 'JOhannes DE EYCK' 혹은 자기 개인 좌우명인 'Als ich kan'(as well as i can) 등을 남겼다고 합니다.
당장 아르놀피니 부부의 초상에도 라틴어로 서명을 남겼습니다. '나, 얀 반 에이크가 여기에 있었노라'라고요. 해석에 따라 결혼식 혹은 약혼식의 증인 선언, 단순한 흔적 표시 등으로 볼 수 있지요. 반 에이크가 활동하기 이전 중세 시대의 화가 대부분은 이름도 없이 익명으로 퇴장했습니다. 그저 흔한 노동자 중 한 명일 뿐이었습니다. 그런 취급을 받기 싫었던 반 에이크가 자신을 '브랜딩'한 겁니다. 많은 화가가 이를 따라하기 시작했습니다. 반 에이크가 결과적으로 화가의 위상을 높이는 공도 세운 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