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어릴 적 페르메이르의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를 본 뒤 관련 책과 영화를 모두 찾아봤습니다. 잘 그린 건 알겠는데 이 그림이 왜 유명한지 궁금했습니다. 그림 한 장에 얽힌 이야기가 그렇게 많은지 몰랐습니다. 즐거웠습니다. 세상을 보는 눈이 조금은 달라졌다는 느낌도 받았습니다. 이 경험을 나누고자 글을 씁니다. 미술사에서 가장 논란이 된 그림, 그래서 가장 혁신적인 그림, 결국에는 가장 유명해진 그림들을 함께 살펴봅니다.

“천사요? 데려오면 그려드리죠” 이놈의 똥고집[후암동 미술관-귀스타브 쿠르베 편]
귀스타브 쿠르베, 화가의 작업실 : 화가로서의 7년 생활이 요약된 참된 은유(일부), 1854~1855, 361 x 598 cm

[헤럴드경제=이원율 기자] "여보, 여기 좀…. 이상하죠?"

1855년 프랑스 파리. 반짝이는 옷과 장신구로 꾸민 중년 여성이 남편 팔을 꽉 쥔 채 속삭입니다. 처음에는 괜찮았습니다. 옆 골목에서 열린 만국(萬國)박람회와 똑같은 입장료를 받는 건 미심쩍긴 했지만요. 문을 열자마자 말끔히 생긴 한 남성이 싱긋 웃으면서 맞아줬습니다. 자신감 넘치는 표정, 꼿꼿한 자세는 신뢰감을 주기에 충분했습니다. 건네받은 안내 책자를 슥 훑어보니 문구도 나름 빽빽했습니다. 이 덕분에 의아함은 금세 눈 녹듯 사라졌습니다. 구름 떼 같은 사람들에 지쳐 바람이나 좀 쐬려고 나왔을 뿐인데 진흙 속 진주를 찾은 기분이었지요. 두 사람은 '역시 이 시대 지식인이라면 시야가 넓어야 하는 법이지'라며 뿌듯해했습니다.

그런데요. 이 부부는 벽에 걸린 그림들을 보면 볼수록 아리송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농부 그림, 광부 그림, 이건 좀 다른가 싶으면 시골 가족 그림…. 그림이란 무릇 벅찰 만큼 웅장하거나 찡할 만큼 예뻐야 하는데 이 남성의 작품에선 그런 게 없었습니다. 부부는 '따지자면 못 그린 건 아닌데 모델들을 굳이 왜?'라는 생각이었습니다. 둘은 전시장 한가운데 있는 6m짜리 초대형 그림 앞에 섭니다. 중구난방입니다. 어디서 급하게 쓸어 담은 듯한 남녀노소가 떼거리로 그려졌습니다. "이 화가 말이야. 허우대는 멀쩡해 보였는데 작품은 영 부담스럽구먼." "그렇죠? 혹시라도 여기에 호기심을 갖는 이가 있다면요. 제가 앞장서 말리겠어요." "그래서 책자에 쓰인 사실주의란 게 뭐야? 저 사람, 눈빛이 좀 이상하긴 했어. 돌아보니 광신도의 눈 같기도 했군." 둘은 미련 없이 떠납니다.

위험한 눈빛을 지닌 이 화가.

훗날 사실주의의 창시자, 더 나아가 새로운 화가의 아버지로 불리게 될 귀스타브 쿠르베는 이들의 퇴장을 씁쓸히 지켜봅니다. "그럼에도 내 시대는 곧 올 거야." 쿠르베는 두 사람이 손가락질한 자신의 그림 '화가의 작업실, 7년 생활이 요약된 참된 은유'(화가의 작업실)을 보고 혼잣말을 합니다.

도떼기시장 아니라 작업실이라고?

"제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놀라운 그림이지요. 비평가들은 할 일이 많아질 겁니다. 사람들은 계속 추측하게 될 겁니다." (귀스타브 쿠르베)

“천사요? 데려오면 그려드리죠” 이놈의 똥고집[후암동 미술관-귀스타브 쿠르베 편]
귀스타브 쿠르베, 화가의 작업실 :화가로서의 7년 생활이 요약된 참된 은유, 1854~1855, 361 x 598 cm

이 그림을 보면 중세 시대 세 폭 제단화(triptych·세 부분으로 나눠지는 그림)가 떠오릅니다. 화가를 가운데 둔 채 두 진영으로 나뉘어 맞붙는 구도입니다.

왼쪽은요. 그 시절 흔히 볼 수 있던 사람들이 주를 이룹니다. 농민과 실업자가 보입니다. 광대, 성직자, 무덤 파는 남자, 옷감을 든 상인도 있습니다. 무릎 사이로 총을 둔 뒤 고개를 숙인 밀렵꾼도 그려졌습니다. 캔버스 바로 뒤로는 화살형(刑)을 선고받은 순교자 성 세바스찬의 나체 석고상이 보이지요. 그 앞에선 한 여인이 철퍼덕 앉은 채 아이에게 젖을 물립니다. 눅눅한 신문지 위로는 꺼림칙한 해골이 놓였습니다. 이 무리에 있으면 술과 흙냄새, 알 수 없는 비린내가 폴폴 날 듯합니다.

오른쪽은 분위기가 다릅니다. 비교적 부티가 납니다. 깔끔한 차림새의 사람들이 보입니다. 화가가 이들을 따로 불러 "눈에 힘을 팍 주세요!"라고 당부한 듯 눈빛이 살아 있습니다.

그림 가운데는요. 이 작품을 그린 화가가 있습니다. 쿠르베는 풍경화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상당히 큰 캔버스 앞 자신의 멋짐에 한껏 취한 모습입니다. 나체의 여성은 그런 쿠르베를 애틋이 쳐다봅니다. 어린아이도 눈길을 끕니다. 셔츠의 팔 부분과 바지 밑단이 찢어졌습니다. 흰색 강아지 한 마리는 지금의 분위기에 들뜬 양 꼬리를 둥글게 말아 올렸습니다.

사실적으로, ‘보다’ 사실적으로

쿠르베는 19세기 사실주의(realism)의 선구자입니다.

"사실주의? 그냥 눈에 보이는 걸 따라 그리면 그게 사실주의 아니야?"라는 말이 있을 법합니다. 맞는 말입니다. 다만 이는 사실주의의 절반만 본 해석입니다. 사실주의는 눈앞에 있는 걸 그대로 그리면서, 더 나아가 그 시대상까지 꾸밈없이 담는 화풍입니다.

“천사요? 데려오면 그려드리죠” 이놈의 똥고집[후암동 미술관-귀스타브 쿠르베 편]
귀스타브 쿠르베, 돌 깨는 사람들, 1849

쿠르베가 그린 '돌 깨는 사람들'(1849)을 보면 더 쉽게 이해가 됩니다.

그 시대 노동자를 있는 그대로 그렸습니다. 8등신 몸매도 아닙니다. 과장되게 내리쬐는 빛도, 반짝이는 장신구도 없습니다. 주름살이 보입니다. 옷도 뜯어졌습니다. 생동감은 전혀 없고 그저 지쳐 보입니다. 쿠르베는 이 두 사람을 '사실 그대로' 담으면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당시 노동자가 얼마나 힘든 처지에 놓여있는지를 고찰하고자 했습니다.

쿠르베는 당시 유행하던 신(新)고전주의와 낭만주의는 위선일 뿐이라고 여겼습니다.

쿠르베는 화가라면 '그들만의 세상' 말고 '진짜 세상'을 담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신고전주의는 "고대 그리스와 로마 문화의 고전 양식을 다시 공부하자!"는 데 목표를 둡니다. 낭만주의는 "보다 몽상적으로, 더욱 드라마틱하게!"를 지향했지요. 두 화풍의 같은 점은요. 뜬구름을 잡았다는 겁니다. 두 화풍이 답이라고 믿은 화가들은 14~16세기 르네상스에서 다룬 신화·역사화를 또 끌고 옵니다. 누가 더 비장하게 그리는지 경쟁합니다. 그림은 다시 거룩해집니다.

“천사요? 데려오면 그려드리죠” 이놈의 똥고집[후암동 미술관-귀스타브 쿠르베 편]
자크 루이 다비드, 호라티우스 형제의 맹세, 1785
“천사요? 데려오면 그려드리죠” 이놈의 똥고집[후암동 미술관-귀스타브 쿠르베 편]
외젠 들라크루아, 사르다나팔루스의 죽음, 1827

쿠르베가 볼 때 실제 세상은 두 화풍이 낳은 그림처럼 그렇게 숭고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 가면을 벗기고 싶었습니다.

쿠르베가 만난 농부들은 별로 잘 생기지도 않았고, 근육질도 아니었습니다. 이들의 머릿속은 흉작 걱정 뿐이었습니다. 광부들은 언제 걸릴지 모를 병에 떨고 있었습니다. 먼 옛날 아시리아의 마지막 왕 사르다나팔루스가 어떻게 죽었는지, 로마 신화 속 호라티우스 형제들이 무슨 맹세를 했는지는 별로 관심사가 아니었습니다. "내게 천사를 보여주시오. 그러면 그릴 테니." 이런 문제의식을 느끼고 있을 무렵 쿠르베는 한 의뢰인에게 '천사 그림'을 부탁받습니다. 이때 쿠르베가 했다는 말이 이겁니다.

사실주의는 미술 화풍의 새로운 행성(行星)이라는 점에서 더욱 의미가 큽니다.

사실주의 등장 전 미술 화풍은요. 되풀이의 굴레에서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미술사에서는 고전주의만 3차례 이상 등장하는데요. 기원전 5~4세기 그리스 고전기, 14~16세기 르네상스, 그리고 쿠르베의 시대와도 겹치는 18세기 후반~19세기 초반 등입니다. 당시 미술 화풍을 행성에 빗대면요. 그 행성은 너무나 작은 행성이었던 겁니다. "좁은 이 행성 대신 무한한 가능성이 있는 다른 행성으로 가자!" 쿠르베가 가장 먼저 외친 셈입니다.

쿠르베가 새로운 화가의 아버지로까지 불리는 배경이 여기에 있지요.

사실주의가 고개를 들지 않았다면 이후 인상주의, 입체주의, 초현실주의 등 미술 화풍의 등장도 기약 없이 늦어졌을 가능성이 상당합니다. 늘 그랬듯 미술계는 잠깐 무언가를 시도하는 듯하다가도 다시 고전주의의 유혹을 받았을 테니까요.

화가의 작업실 속 쿠르베의 메시지는

사실주의의 시선으로 '화가의 작업실'을 다시 봅니다.

"왼쪽에는 죽음을 먹고 사는 사람들이 있어. 오른쪽에는 생명을 먹고 사는 사람들이 모여 있고." 쿠르베가 이 작품을 놓고 친구이자 비평가인 샹플뢰리에게 쓴 편지 내용입니다.

왼쪽은 당시 프랑스의 계급 사회를 뜻합니다.

“천사요? 데려오면 그려드리죠” 이놈의 똥고집[후암동 미술관-귀스타브 쿠르베 편]
귀스타브 쿠르베, 화가의 작업실 : 화가로서의 7년 생활이 요약된 참된 은유(일부), 1854~1855, 361 x 598 cm
“천사요? 데려오면 그려드리죠” 이놈의 똥고집[후암동 미술관-귀스타브 쿠르베 편]
프란츠 빈터할터, 나폴레옹 3세, 1855

고개를 숙인 채 힘없이 앉은 밀렵꾼은 당시 황제였던 나폴레옹 3세라는 설이 유력합니다. 실제로 쿠르베는 1851년 쿠데타를 일으킨 뒤 의회를 강제 해산시킨 나폴레옹 3세를 한심하게 봤습니다. 성직자는 종교계, 옷감을 든 상인은 상업계 등을 의미합니다. 당시 프랑스의 여러 계급이 다 모인 셈입니다. 그 결과는요. 해골이 신문을 짓누르고 있습니다. 한 여인은 구석에 내몰려 아이에게 급히 젖을 물립니다. 쿠르베는 프랑스의 계급 사회가 망해가고 있다는 걸 주장하고 싶었습니다.

보다 깔끔해 보이는 오른쪽 사람들을 볼까요.

“천사요? 데려오면 그려드리죠” 이놈의 똥고집[후암동 미술관-귀스타브 쿠르베 편]
귀스타브 쿠르베, 화가의 작업실 : 화가로서의 7년 생활이 요약된 참된 은유(일부), 1854~1855, 361 x 598 cm

맨 끝 사람의 정체는 쿠르베의 사실주의를 옹호한 시인 보들레르입니다. 눈에 힘을 잔뜩 준 이 사람들은 샹플뢰리, 수집가 브뤼아스, 시인 뵈송, 미술품 애호가 부부 등입니다. 오른쪽 가운데 앉은 이는 무정부주의자 프루동이고요. 이들은 쿠르베의 도발적 이념을 대변하는 세력들입니다. 그런데요. 이 사람들, 언뜻 봐도 '자기 잘난 맛'에 사는 모습이지요.

한가운데 있는 쿠르베는 자신이 추구하는 사실주의만이 두 진영을 중재할 수 있다고 말하는 듯합니다.

“천사요? 데려오면 그려드리죠” 이놈의 똥고집[후암동 미술관-귀스타브 쿠르베 편]
귀스타브 쿠르베, 화가의 작업실 : 화가로서의 7년 생활이 요약된 참된 은유(일부), 1854~1855, 361 x 598 cm

나를 따르라는 겁니다. '자뻑'이 느껴집니다. 이 때문에 이 그림은 화가가 개인의 자의식을 듬뿍 담은 최초의 그림이라는 평도 받습니다. 그림 속 쿠르베는 풍경화를 그립니다. 당시 양극화가 심해지고 있는 사회에서 필요한 건 정치나 물질이 아니라 '자연 그대로'라는 걸 알려줍니다. "현실부터 똑바로 보라"는 겁니다. 옛 화풍의 상징으로 볼 수 있는 벌거벗은 여성은 눈길조차 받지 못합니다. 낭만주의의 도구인 모자, 기타, 단검도 바닥에 처연히 떨어져 있습니다.

“천사요? 데려오면 그려드리죠” 이놈의 똥고집[후암동 미술관-귀스타브 쿠르베 편]
귀스타브 쿠르베, 화가의 작업실 : 화가로서의 7년 생활이 요약된 참된 은유(일부), 1854~1855, 361 x 598 cm

왼쪽 사람들은 서로 다른 곳을 봅니다.

오른쪽 사람들도 별반 다를 게 없습니다. 심지어 보들레르는 굳이 이까지 와서 책에 빠져 있습니다. 프루동마저 쿠르베와 거리를 두고 있습니다. 쿠르베의 '메시지'를 알아차리는 이는 한 명뿐입니다. 어린아이입니다.

쿠르베·프루동, 그 운명적 만남

쿠르베는 어떻게 사실주의에 눈을 뜨게 됐을까요. 가장 큰 영향을 준 이는 프루동입니다.

“천사요? 데려오면 그려드리죠” 이놈의 똥고집[후암동 미술관-귀스타브 쿠르베 편]
귀스타브 쿠르베, 프루동과 그의 아이들, 1865

20대 시절인 1844년 프랑스 살롱전으로 데뷔한 쿠르베는 그 시대 지식인과 만날 수 있는 위치에 서게 됩니다. 1847년 쿠르베는 같은 고향 출신의 프루동을 만납니다. 최초의 무정부주의자로 칭해지는 프루동은 그때도 요주의 인물이었습니다. 그가 1840년에 펴낸 책 '소유란 무엇인가'를 통해 "소유란 도둑질이야!"라며 발칙한 선언을 했기 때문입니다. 프루동은 소유를 '옛날부터 쌓은 경험과 공동 노동의 성과'로 정의합니다. 이를 통해 임대, 고리대금 등 방식으로 개인 돈만 불리면 그게 도둑질이라는 겁니다. 쿠르베는 프루동의 뜻에 동의합니다. 쿠르베는 자신을 '리얼리스트'로 칭하기 시작합니다. 프루동을 따라 신고전주의·낭만주의의 포장지에 가려진 소외계층에 더 눈길을 주게 됩니다. 그 자존심 센 쿠르베가 프루동의 초상화는 기꺼이 그려줬습니다.

쿠르베가 프루동의 이론에 뜨겁게 반응한 데도 이유가 있었습니다.

1819년에 태어난 쿠르베는 그 자신도 프랑스 오르낭 시골 출신이었지요. 집안 자체는 부유해 큰 고생은 하지 않았지만, 노동자의 실상은 쉽게 마주할 수 있었습니다. 사실 쿠르베의 아버지는 그가 법학도가 되길 바랐는데요. 쿠르베는 그때부터 반골 기질이 있었는지 법 공부는 매번 미뤄둡니다. 그 대신 루브르 박물관에서 렘브란트의 그림만 입을 벌린 채 바라봅니다. 우여곡절 끝에 그림을 배우게 됐을 때도 정식 아카데미 교육을 거부합니다. 그 대신 정부의 보조금도 받지 못하던 사립 학교에서 붓을 들었습니다.

“나는 프랑스서 가장 오만한 사람”

프루동의 영향을 받아 사실주의의 불길로 뛰어 들어간 쿠르베는 곧장 사실주의 전도사가 됩니다.

“천사요? 데려오면 그려드리죠” 이놈의 똥고집[후암동 미술관-귀스타브 쿠르베 편]
귀스타브 쿠르베, 안녕하세요 쿠르베씨, 1854

쿠르베의 작품 '안녕하세요, 쿠르베 씨'(1854)입니다. 미술 도구를 잔뜩 챙긴 쿠르베가 들판 한복판에서 수집가 브뤼아스를 만났습니다. 이는 화가와 후원자의 만남이었습니다. 당연히 화가가 을(乙), 후원자가 갑(甲)이라고 보기 쉬운데요. 그 당시에는 실제로도 그런 문화가 지배적이었고요. 그런데 그림 속 쿠르베는 당당합니다. 외려 브뤼아스와 그의 하인이 모자를 벗고 예를 갖춥니다. "나는 프랑스에서 가장 오만한 사람, 가장 자부심이 강한 사람이다." 쿠르베가 이 그림을 완성하기 1년 전에 했던 말입니다. 사실주의에 심취한 자신을 '깨어있는 사람'으로 본 겁니다.

그런 사실주의 그림을 많은 이들에게 알리고 싶었던 쿠르베는 1855년 프랑스 파리 만국박람회에 자기 작품들을 출품합니다.

결과는 전시 거부였습니다. 공식적 이유는 "그림이 너무 크다"였지만 쿠르베의 자화자찬을 아니꼽게 본 기성 화단의 입김도 있었을 겁니다. 그쯤 쿠르베를 놓고 "태도가 건방지다", "그림이 불경스럽다'는 비판도 상당했거든요. 쿠르베가 물러섰을까요. 전혀요. 쿠르베는 후원자들에게 도움을 받습니다. 만국박람회 맞은편 창고를 빌려 개인전을 엽니다. 행사 이름은 '사실주의'였습니다. 만국박람회와 입장료는 똑같았습니다. '화가의 작업실' 등 그림 44점을 내걸었습니다. 이른바 '사실주의 선언'을 담은 안내 책자도 만들었습니다. 첫 날에는 방문객이 약간 있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이곳을 찾는 발걸음이 눈에 띄게 줄었습니다. 결국 쿠르베는 기대 이하 성적을 거뒀다는 평을 받아들여야 했습니다.

생이 더 ‘그림’ 같았다

쿠르베의 그림은 사실적이었지만, 쿠르베의 생은 그림 같은 순간의 연속이었습니다.

“천사요? 데려오면 그려드리죠” 이놈의 똥고집[후암동 미술관-귀스타브 쿠르베 편]
귀스타브 쿠르베, 파이프를 물고 있는 남자(자화상), 1848~1849
“천사요? 데려오면 그려드리죠” 이놈의 똥고집[후암동 미술관-귀스타브 쿠르베 편]
귀스타브 쿠르베, 검은 개를 데리고 있는 쿠르베, 1842

쿠르베에게는 구세주 콤플렉스가 있었던 듯합니다. 쿠르베가 그린 '화가의 작업실'만 봐도 그를 중심으로 빛이 내려옵니다. 마치 계시를 받는 듯합니다. '안녕하세요, 쿠르베씨'를 보면 그는 우월감을 느끼고 내려다보듯 세상을 대합니다. 그런가 하면, 쿠르베는 자신을 거칠고 세련되지 못한 반란군으로 그리는 일을 즐겼습니다. 마치 새 시대를 구상하는 데 전념하는 혁명가의 모습처럼요. "미술을 아는 모든 젊은이가 나를 보고 있다. 나는 그들의 총사령관이다." 1861년 쿠르베의 말입니다.

투쟁의 심장을 가진 쿠르베에게 기회가 옵니다.

1871년 3월 파리코뮌(인민회의) 수립입니다. 이는 프로이센·프랑스 전쟁(보불전쟁)에서 패한 프랑스군의 무능함에 분노한 파리 시민과 노동자가 세운 혁명적 자치 정부입니다. 단 기간에 그쳤으나 세계 최초로 노동자 계급의 자치로 세운 민주주의 정부였습니다. 화가로 만족하지 못한 쿠르베는 코뮌의 평의원으로 정치 참여에 나섭니다. 작품 활동을 멈춘 뒤 코뮌위원, 시의원, 대중교육의원, 국립박물관 총감독관 등 공직에서 일합니다. 이후 코뮌 지도부와 군중들의 과격함에 좌절하고 물러났으나, 직을 맡았을 당시에는 누구보다 열정적이었습니다.

미술계 권력도 쥐어봤지만 결국…

“천사요? 데려오면 그려드리죠” 이놈의 똥고집[후암동 미술관-귀스타브 쿠르베 편]
귀스타브 쿠르베(1819~1877)

쿠르베는 그토록 꿈꾸던 미술계의 권력을 쥐어봤지만, 이 때문에 생의 내리막길로 몰립니다.

도시를 발칵 뒤집었던 파리코뮌은 같은 해 5월 베르사유 정부군 등에 진압 당합니다. 파리코뮌의 주요 인사들은 프랑스 밖으로 망명합니다. 파리에 남아있던 쿠르베는 친구의 집에서 체포된 후 군사 재판을 받습니다. 6개월 형을 선고받은 뒤 감옥 생활도 합니다.

보석으로 풀려나긴 했지만 쿠르베는 고액 배상금을 낼 처지에 처합니다.

파리코뮌 당시 성난 민심이 나폴레옹 1세 동상을 망가뜨렸는데 쿠르베가 이 일의 주도자로 찍힌 겁니다. 그에게 청구된 돈은 28만6500프랑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파산을 눈앞에 둔 쿠르베는 결국 스위스로 망명합니다. 1877년 봉포르라는 낡은 모텔에서 작품 활동을 하다가 외롭게 눈을 감습니다. "내가 죽거든 자유의 규칙 말고는 어느 곳에도 속하지 않았다고 말해달라. 나는 사회주의자일 뿐 아니라 민주주의자, 공화주의자, 혁명이 의미하는 모든 일의 지지자였다. 무엇보다 나는 우선 리얼리스트였다." 쿠르베의 유언으로 전해지는 말입니다.

〈참고 문헌〉

501 위대한 화가, 스티븐 파딩, 마로니에북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