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럴드경제=이윤미 기자] 얼마전 소설가 김별아씨가 소설 ‘탄실’을 내면서 결정적인 한 마디를 했다.

“제가 23년차 작가인데 데뷔할 때만 해도 문단이 남성중심적이었어요. 여성 지위라는게 탄실 김명순 시대보다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고 생각해요. 성희롱이 일상적이었고 남성중심적 폭력적인 상황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한 때도 있었어요.”

[취재X파일]“문화계 성희롱, 우리 모두는 방관자다”

김 작가의 이 발언은 1925년 여성최초의 소설집 ‘생명의 과실’을 펴내고 문예지 ‘창조’의 첫 여성 동인이며 평생 소설 23편과 시 107편 등 많은 작품을 남겼지만 문단으로부터 인신공격과 냉대속에 죽은 탄실의 삶을 설명한 뒤에 나왔다. 특히 같이 활동한 김동인, 김기림과 어린이날을 만든 방정환 까지 전방위에서 집요하게 김명순을 공격했다는 얘기는 놀라웠다. 탄실은 일본 유학시절, 리응준에게 성폭행을 당해 신문에 기사화될 정도로 공개됐는데도 이들은 피해자인 김명순이 몸을 제공했다는 식으로 비난했다는 것이다. 김별아씨는 90년대 이후 문단의 남성주의적 상황은 좀 달라졌다고 했지만 문단의 성희롱이 사라졌다고 말한 건 아니었다. 그의 발언이 놀랍지 않은 것은 그런 일을 기자도 목격하기 때문이다. 이름만 대면 누구나 알 만한 원로 작가가 여성 작가의 외모와 표정을 면전에서 비하하는 발언을 코 앞에서 듣기도 했고, 남성 작가들의 여성편력을 무슨 훈장처럼 얘기하는 걸 듣기도 했다. 그리고 그 세계는 으레 그러려니 여겨왔다.

이런 터에 최근 여성혐오 논란이 문단으로 번진 건 김현 시인이 ‘21세기 문학’ 가을호에 기고한 ‘질문 있습니다’ 란 글이 발화작용을 했다. 그의 적나라한 문단의 성추행 고발은 정신이 바짝 들게 만들었다. 그는 여성 문인들이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걸레 같은 X, 남자에게 몸 팔아 시 쓰는 X” 등 성적 비하발언을 들어야 했다며, 어떤 남자 시인은 술에 취해 후배 여자 시인에게 맥주를 따라보라고 한 뒤, 맥주가 꽉 차지 않자 자신의 바지 앞섶을 컵에 갖다 대며 성기를 잡고 오줌 싸는 시늉을 하기도 했다고 전했다. 어떤 남자 시인들은 젊은 여자 후배 시인들의 이름을 늘어놓으며 ‘꼴리는’ 순으로, ‘따먹고 싶은’ 순으로 점수를 매기기도 한다며 이런 일이 비일비재하다고 털어놨다. 눈과 귀를 의심하게 만드는 얘기가 아닐 수 없다. 김 시인의 말마따나 그들은 도대체 이 못된 짓을 다 어디서 배운 걸까.

김현 시인이 말한 걸 입증이라도 하듯 지난 주말 ’은교‘의 작가 박범신 성추행 사건이 sns를 통해 고발됐다.

자신을 출판업에 종사했던 인물이라 밝힌 A씨는 지난 20일 SNS 계정을 통해 박 작가가 한 술자리에서 방송작가들을 ‘젊은 은교’, ‘늙은 은교’라 지칭하고, 불필요한 신체 접촉을 시도했다고 밝혔다.

또 다른 피해자인 B씨는 “어린 여자를 옆자리에 앉혀 놓고 술을 따라주며 ‘너는 XX 번째 은교다’라고 말하곤 했다”고 밝히기도 했다.

박범신 작가의 성추행 건은 지목된 당사자들이 상황을 부인하면서 또 다른 국면으로 바뀌고 있다. 당사자 중의 한 명이라는 방송작가는 “성희롱이라고 느낀 적이 없다”고 밝히고 “방송작가가 아이템을 얻기 위해 성적 수치심을 견뎠다는 뉘앙스의 글은 방송작가 전체에 대한 모욕”이라고 주장했다.

또 다른 여성팬으로 언급된 C씨도 페이스북을 통해 “선생님과 오랜만에 만나 반가움에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손을 잡고 얼싸안았다. 오랜 팬과의 관계에서는 충분히 나눌 수 있는 행동”이라며 반박했다.

작가와 팬의 관계는 특수하기 때문에 시시비비를 가리는 건 간단치 않다. 당사자들의 부인으로 이 상황을 고발한 A씨의 행동을 비난하는 목소리도 있다. 마녀사냥식으로 몰아가선 안된다는 방어적 소리도 나온다.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 자체가 악을 공고히 하고 재생산 구조를 만든다는 ‘맨박스’의 작가, 토니포터의 말을 경청할 필요가 있다.

작가와 지망생 사이에는 더한 권력관계가 존재한다.

그러나 정작 문제는 문단 안에 있다. 남성 시인이 성희롱 사건을 적나라하게 보고해도 여성 작가들은 나서지 못한다. 문단의 오랜 관행과 유명작가에 휘둘리는 출판의 생리에서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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