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1년 어린이재단과 인연
1985년 전국후원회장 맡아
해외 아동 지원·미아 찾기
위기 청소년 교화에 평생 헌신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1981년 6월 16일 방송된 MBC 드라마 ‘전원일기’ 33회 ‘버려진 아이’.
장터에서 깡통을 앞에 놓고 노래하며 밥값을 구걸하던 어린아이를 김 회장(최불암)이 집으로 데려온다. 금동이라는 이름을 얻은 아이를 씻기고 밥을 먹여 돌려보내려 했지만, 동네엔 김 회장이 밖에서 낳아 온 아이라는 소문이 돈다. 김 회장은 결국 금동이를 양자로 받아들인다. 방송이 나간 뒤 시청자들의 편지와 전화가 방송국으로 쏟아졌다. 배낭에 담아 옮겨야 할 만큼 편지가 밀려들었다고 한다. 정작 최불암은 자신이 아닌 김정수 작가의 대본이 만든 감동일 것이라 생각했다. 화면 속 아버지의 선행을 자신의 것으로 돌리는 시청자들에게 미안했던 그는 한 아이를 돕기로 했다. 드라마 속 금동이에게 내민 손길은 그렇게 현실의 수많은 아이에게로 이어졌다.
지난 29일 별세한 배우 최불암(본명 최영한·87)은 45년 가까이 어린이들의 곁을 지켰다. 1981년 MBC 드라마 ‘전원일기’에서 금동이를 입양하는 에피소드를 계기로 당시 한국어린이재단(현 초록우산)과 인연을 맺었다. 1985년 전국후원회장을 맡은 뒤 40여년간 어린이들을 위한 나눔 활동을 이어왔다. 2015년 후원회장 취임 30주년을 맞아 그는 “지난 30년의 세월은 내게 좋은 일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줬다. 나를 살린 것”이라고 말했다.
그의 나눔은 후원에 머물지 않았다. 2006년 스리랑카를 시작으로 2007년 에티오피아, 2008년 우간다 등 해외 어린이들을 찾아갔다. 2015년엔 케냐의 식수 지원 현장을 방문했다. 우물에서 나온 물을 아이들이 마시고 얼굴에 맞던 모습을 떠올리며 큰 행복을 느꼈다고 했다. 그가 생각한 봉사는 일방적으로 도움을 건네는 일이 아니었다. “진정한 봉사는 비 맞고 있을 사람에게 우산을 받쳐주는 것이 아니라 함께 비를 맞아야 한다”는 말엔 그가 지켜온 나눔의 태도가 담겼다.
실종 아동을 찾는 일에도 목소리를 보탰다. 최불암은 미아 찾기 특별 생방송 ‘엄마, 아빠 저 여기 있어요’에 출연해 실종 아동 문제에 대한 사회적 관심을 촉구했다. 2026년 5월 방송된 MBC 다큐멘터리 ‘파하, 최불암입니다’에서 소개된 내용에 따르면 이 프로그램은 두 차례 방송을 통해 120여 명의 아이들이 가족을 찾는 데 도움을 줬다. 첫 방송에서만 40명이 넘는 아이들이 부모와 재회했다. 그는 방송에서 단순 실종과 유괴에 의한 실종의 차이를 짚으며 아이들을 보호하기 위한 사회적 노력이 필요하다고 호소했다. 희귀·난치병 어린이를 돕는 MBC 공익 프로그램 ‘어린이에게 새 생명을’에도 참여했다.
그가 유독 아이들에게 마음을 쏟은 데는 자신의 어린 시절과도 무관하지 않다. 최불암은 여덟 살이던 1948년 아버지를 잃었다. 일제강점기 중국으로 건너갔던 아버지는 해방 후 돌아왔지만 영화 제작 일을 하느라 가족과 많은 시간을 보내지 못했다. 다큐멘터리 ‘파하, 최불암입니다’에서 그는 “아버지라고 불러본 기억이 몇 번 안 난다”고 회고했다. 어린 시절 아버지와 함께한 시간은 3년이 채 되지 않았다. 평생 수많은 작품에서 아버지를 연기한 배우는 정작 아버지의 기억이 희미한 소년이었다.
소년수형자들을 위한 활동은 그가 생각한 어른의 책임을 보여주는 또 다른 사례다. 최불암은 문화예술을 통해 위기 청소년과 소년수형자의 사회 복귀를 돕는 사단법인 제로캠프 활동에도 참여했다. 2012년 시작된 사업에서 초기 운영위원장을 맡았으며, 이후 사단법인 이사장으로 활동했다. 제로캠프는 소년교도소에서 뮤지컬과 악기 교육, 인성 교육 등 문화예술 프로그램을 운영하며 청소년들의 교정·교화를 지원했다.
2014년 11월 경북 김천소년교도소에서는 소년수형자 69명이 배우와 스태프로 참여한 창작 뮤지컬 ‘날개’가 무대에 올랐다. 수형자들이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작품을 만들고 공연에 참여했다. 최불암은 예술인들의 참여를 이끌어내 소년수형자들에게 전문적인 문화예술교육과 무대 경험을 제공했다. 단순히 범죄를 저지른 아이들을 교화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데 그치지 않고, 자신의 이야기를 표현하고 새로운 삶을 설계할 기회를 마련한 것이다.
제로캠프의 활동은 교도소 밖 청소년들에게도 이어졌다. 2019년 8월 13일 서울지방조달청에서 열린 기증식에서 최불암은 제로캠프 이사장 자격으로 청소년 미혼모·미혼부 지원 사업에 참여했다. LG전자가 제로캠프를 통해 한국건강가정진흥원에 16㎏ 용량 통돌이세탁기 30대를 기증한 것이다. 당시 최불암은 “청소년 미혼모·미혼부를 도울 수 있게 돼 매우 감사드린다”며 이들의 자립을 위한 지원을 이어가겠다는 뜻을 밝혔다. 이 사업은 1969년 금성사(현 LG전자)의 백조세탁기 출시 50주년을 기념해 추진됐다. 당시 백조세탁기 광고 모델이었던 최불암이 제로캠프 이사장으로 참여해 기업의 기념사업을 청소년 지원으로 연결했다.
최불암에게 따라다니는 ‘국민 아버지’라는 호칭은 연기만으로 얻은 것이 아니었다. 자신이 받지 못했던 아버지의 품을 다른 아이들에게 내어주고, 다시 시작할 기회를 잃은 청소년들에게 무대를 마련했다. 배우의 영향력을 사회적 책임으로 연결한 행보는 후배들에게도 이어졌다. ‘전원일기’에서 금동이를 연기한 임호는 MBC 다큐멘터리에서 최불암을 두고 “배우, 예술가, 연기자이기 때문에 갖는 책무 중에서도 사회적 책무에 대한 부분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배우계의 어른”이라고 회고했다. 코미디언 이홍렬 역시 그와의 만남을 계기로 어린이를 위한 활동을 이어왔다며 “나이 들었다고 다 어른은 아닌데, 정말 어른이시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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