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토크쇼·에세이로 돌아본 연기관
육영수 전화에 깨달은 TV의 무게
“얼굴값이 된다면 무슨 일이든”
“여한이 남아 여러분이 대신해 주길”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국민이 가야 할 길 위에 가시덤불이 있으면 그걸 치우는 게 광대 정신.”
2024년 4월 MBC 다큐멘터리 ‘돌아온 레전드 수사반장’. 배우 최불암은 ‘수사반장 1958’에서 젊은 날의 형사들을 연기할 이제훈, 이동휘에게 이렇게 말했다. 연기를 하는 배우라도 ‘사회의 비리’를 고발하는 데 힘을 보태라는 당부도 있었다. 자신은 그러지 못한 여한이 남았으니 후배들이 대신해 주길 바란다는 마음이었다.
1959년 연극 ‘햄릿’으로 데뷔, 67년의 긴 세월을 배우로 살았다. 최불암은 130여 편의 드라마와 90여 편의 영화, 55편 남짓한 연극을 거쳤다. 방송과 토크쇼, 잡지 대담과 손수 펴낸 에세이에 남긴 말들은 한 배우의 연기론이자 한 어른의 인생론이었다.
백지와 칠판
“연기자는 백지 같아야 한다.”
최불암이 평생 붙든 지론이다. 의사 인요한과 나눈 월간 ‘샘터’ 대담에서 그는 좋은 연기를 하려면 그림 그리는 캔버스처럼 맑아야 한다며 이렇게 말했다. 한 배역이 끝나면 빨리 잊고 타성에 젖은 연기와 관습적인 캐릭터를 깨뜨려야 한다는 것이다. 그 일을 두고 “칠판을 닦듯이 지워야 하는 것”이라 했다.
지워내는 일이 그에겐 유난히 무거운 숙제였다. 18년의 박 반장(‘수사반장’)과 22년의 김 회장(‘전원일기’)은 쉽게 닦이지 않는 얼굴이었다. 2007년 KBS 1라디오 ‘박인규의 집중인터뷰’에서 그는 분장실 거울 앞의 의식을 털어놨다. 분장과 의상을 마치면 거울 속 자신에게 “여기서 쉬고 있으라 일러두고, 김 회장이 되어 스튜디오로 들어간다”는 것이다. 하루 20시간 넘게 그 사람으로 사는 날도 있었다.
노역은 일찍 찾아왔다. 20대 후반의 TV 데뷔작 ‘수양대군’(1967)에서 50대 김종서를, 서른 살에 MBC ‘역풍’(1969)에서 여든 넘은 노인을, 40대 초반엔 ‘제1공화국’(1981~1982)에서 80대 이승만을 맡았다. 같은 라디오 인터뷰에서 최불암은 “연기는 몸이 아니라 생각으로 하는 일”이라 했다. 다만 “생각이 깊어질수록 몸이 따라가지 못하는 때가 온다”고 했다. “사람은 예순엔 1년에 한 번, 일흔엔 한 달에 한 번, 여든이 넘으면 매일 변한다”는 말도 덧붙였다.
겉모습을 다듬는 데 매달리는 연기는 경계했다. 2007년 펴낸 에세이 ‘인생은 연극이고 인간은 배우라는 오래된 대사에 관하여’에서 그는 “어떻게 하면 예쁘게 보일까, 거울만 들여다보는 게 연기자가 아니다”라고 썼다. 작품 안에서 “스스로 길을 찾지 않고 겉만 그럴싸하면 결국 정체가 들통난다”는 것이다. 2013년 MBC ‘사람이 좋다’에선 후배의 연극을 보다가 “광대의 피는 타고 나는 것 같다”며 무대에 다시 오르고 싶다는 마음을 비추기도 했다.
노크 없이 안방에 드는 손님
‘수사반장’의 박 반장은 유달리 골초였다. 한 회동안 태우는 담배만 해도 네 대나 됐다. 도입부에 한 대, 바쁜 현장에서 한 대, 클라이맥스에서 한 대, 속상할 때 한 대. 최불암이 직접 짠 설정이었다. 2007년 KBS 1라디오에서 최불암은 이 담배 때문에 걸려 온 전화를 회고했다. 육영수 여사가 “국민이 모두 따라 피울까 걱정된다”며 담배를 줄여 달라고 했다는 것이다. 배우 한 사람의 몸짓이 얼마나 멀리 번지는지 실감한 날이었다. 최불암은 그 전화를 잊지 못한다고 했다.
같은 인터뷰에선 영화를 내려놓은 사연도 밝혔다. 1980년대 들어 한 방송사에서 ‘수사반장’과 ‘전원일기’를 동시에 이끌던 무렵, TV로 충분하니 영화는 사양하겠다고 선언했다. 영화에서 일하는 이들의 몫을 남겨 두는 게 도리라고 여겨서다. 스스로를 부를 때는 ‘광대’라는 단어를 골랐다. 넓을 광(廣)에 큰 대(大). 광대는 “국민에게 알 권리를 전하는 사명을 지닌 이들이고, 오늘의 방송이 곧 광대패의 일”이라는 생각이었다.
일생을 안방극장에서 헌신한 그는 TV라는 매체의 영향력에 대한 기대와 책임도 컸다. 2007년 에세이에서는 “닮고 싶은 인물, 따라가고 싶은 인간상을 TV가 그려 내야 하지 않을까”라고 했다. 2013년 에세이에선 “방송이 시대를 묵묵히 이끄는 ‘문화 버팀목’이어야 한다”고 썼다. 공인으로서의 도리도 같은 결이었다. 2011년 KBS 2TV ‘여유만만’에서 최불암은 “대중 앞에 얼굴을 내놓고 산 사람이니, 얼굴값이 된다면 무슨 일이든 뛰어들어야 한다”고 했다.
부재한 아버지를 상상하다
1948년, 영화 ‘수우’를 만든 아버지 최철이 개봉을 앞두고 세상을 떠났다. 2009년 경인방송 ‘최불암의 인천사랑이야기’에서 최불암은 자신이 영정을 들고 인천 동방극장 시사회장에 섰다고 회고했다.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짧았다. 최불암은 부친의 빈자리를 연기의 재료로 삼았다. 2007년 KBS 1라디오에서 이렇게 말했다. “아마 없는 아버지를 상상해서 내놓는 것이 배우로서는 더 좋은 작업일 것 같아요.”
‘전원일기’ 22년은 흔들리는 가부장의 자리를 붙잡고 있던 시간이었다. 같은 인터뷰에서 최불암은 농경사회의 대가족이 핵가족으로 바뀌던 무렵 4대를 거느린 가장을 연기했으니 ‘아버지’라는 말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에세이에선 ‘그늘 넓은 느티나무’ 같은 아버지를 그리고 싶었다고 썼다. 명절이면 동네 사람들 세배를 받고, 고향을 찾은 청년들의 어깨를 두드려 주는 어른이다.
정작 실제의 자신은 강한 아버지가 아니었다. ‘샘터’ 대담에서 그는 “약한 아버지라는 표현이 맞을 것”이라고 했다. 4대를 거느린 김 회장도 강한 사람이 아니라고 그는 이야기하 한다. 손주와 자식과 노모를 쓰다듬고 안으려면 강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었다. 최불암 역시 오래 연기한 김 회장을 닮아 갔다. 아내 김민자는 “텔레비전 앞에 앉은 남편의 뒷모습을 보고 꼭 김 회장이 앉아 있는 것 같다”고 했다.
아버지 대신 최불암을 키운 건 어머니 이명숙이었다. 지난 5월 MBC 다큐멘터리 ‘파하, 최불암입니다’에서 최불암은 “어머니가 쌓아 준 틀 속에 오늘의 자신이 있다”며 “어머니 정말 고맙습니다”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고 했다. 박 반장이 권총과 수갑 대신 하얀 손수건을 든 것도 어머니 덕이었다. 범인은 ‘총이 아니라 정신으로 다스려야 국민이 박수를 쳐 준다’는 조언이었다.
그는 ‘국민 아버지’로 일생을 국민과 함께 했지만, 말년에 이르러선 우리 사회에서 ‘아버지의 자리’가 사라졌다고 아쉬워했다. 2023년 tvN 스토리 ‘회장님네 사람들’에서 21년 만에 김혜자와 마주 앉은 최불암은 드라마를 멀리하는 까닭을 “아버지 시대가 없다”는 말로 대신했다. 가족을 건사하고 동네를 걱정하던 아버지상이 지워졌다는 것이다. 처음 김 회장 역을 받았을 땐 농사를 지어 본 적이 없어 그저 따라 하려고만 했다는 고백도 이 방송에서 했다.
빌딩이 높아지면 그림자도 길어진다
“빌딩이 높아지면 그림자도 길어진다.”
1989년 ‘수사반장’ 마지막 회에서 박 반장은 이렇게 말하곤 경찰서를 나섰다. 급속한 산업화가 빈부 격차를 키우고, 그 그늘이 범죄로 번지던 시대를 향한 말이었다. 33년 뒤인 2022년 KBS울산 토크쇼 ‘남희석의 울산시대’에서 최불암은 그 대사를 다시 꺼냈다. 눈부시게 성장한 사회일수록 그늘을 돌아봐야 한다고 했다. 물질을 욕심내기보다 자기 임무에 충실하고, 그에 맞는 보상을 받고, 부족한 이웃과 나누라고 했다.
최불암이 꼽은 인생작은 ‘수사반장’이었다. 2017년 KBS 2TV ‘1대100’에서는 ‘전원일기’와 ‘한국인의 밥상’을 두고 ‘수사반장’을 젊은 시절 열심히 한 작품으로 골랐다. 에세이에선 “‘수사반장’의 시그널 음악만 들어도 지금도 가슴이 두근거린다”고 썼다. ‘수사반장’은 연기를 다진 초석, ‘전원일기’는 한 단계 높이 날게 해 준 빛나는 날개라고 했다.
어머니를 떠나보낸 1986년, 최불암은 유품에서 라면 상자 가득한 외상 장부를 발견했다. 2009년 KTV 휴먼토크 ‘내 마음의 고백’에선 처음엔 이걸 다 받으면 금방 부자가 되겠다 싶었다고 털어놨다. 아들을 두고 떠나야 하는 어머니의 마음을 헤아린 건 한참 뒤였다. “인생은 후회의 연속”이라고 그는 고백한다.
‘샘터’ 대담에 실린 좌우명은 즐거워도 넘치지 않고 슬퍼도 비통해하지 않는다는 공자의 말이었다. 2018년 SBS ‘집사부일체’에서 그는 2014년 이후 연기를 멀리한 시간을 “은퇴가 아니라 물러남”이라고 했다. 제작진이 연기를 지적하기보다 어려워만 하니 스스로 발전이 없다고 느꼈다는 것이다. 같은 해 4월, 최불암은 연극 ‘바람 불어 별이 흔들릴 때’로 25년 만에 무대에 다시 섰다.
아내에 대한 마음은 한결같았다. 2023년 ‘회장님네 사람들’에서는 지금도 아내 김민자를 생각하면 가슴이 두근거린다고 했다.
광대의 마음
2024년 ‘수사반장 1958’은 최불암의 마지막 연기가 됐다. 노년의 박영한으로 나와 이미 세상을 떠난 동료 형사들의 무덤 앞에서 경례했다. 지난해 허리디스크 수술 뒤에는 ‘한국인의 밥상’에서 물러났고, 지난해 7월부터는 제작진과 긴 대화를 나누며 MBC 다큐멘터리 ‘파하, 최불암입니다’를 준비했다. 방송에는 재활에 전념하길 바란 가족의 요청으로 직접 출연하지 않았다. 다큐멘터리를 준비하며 시청자에게 건넨 인사는 이랬다.
“오랜 시간 저를 사랑해 주신 시청자 여러분께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다. 그게 광대의 마음이다.”
‘국민 아버지’로 일생을 살아온 최불암은 29일 밤 10시께 서울 강서구 한 병원에서 입원 치료 중 세상을 떠났다. 빈소는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다. 유족으로는 배우 김민자와 아들 동녘, 딸 동비 씨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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