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사반장’·‘전원일기’ 안방의 얼굴 67년

서른에 노인, 마흔에 이승만 ‘노역 배우’

“시청자께 감사, 그게 광대의 마음”

최불암. [초록우산어린이재단]
최불암. [초록우산어린이재단]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불의를 참지 않는 수사반장이었고, 한국의 맛을 찾아 전국을 누빈 길손이었으며, 영원한 ‘국민 아버지’였던 배우 최불암이 별세했다. 향년 87세.

30일 방송가에 따르면 최불암(본명 최영한)은 전날 밤 10시께 서울 강서구의 한 병원에서 입원 치료 중 세상을 떠났다. 지난해 허리디스크 수술을 받은 뒤 재활에 매달려 왔으나 최근 건강이 급격히 나빠진 것으로 전해졌다.

1959년 연극 ‘햄릿’으로 첫 무대에 선 지 67년. 최불암은 형사 반장으로 18년, 농촌 마을 어른으로 22년, 전국 팔도 밥상 앞의 길손으로 14년을 살았다. 고개를 젖히며 터뜨리던 ‘파하~’ 웃음은 세대를 건너 한 시대의 소리로 남았다.

명동 ‘은성’의 아이, 연출가를 꿈꾸다

1948년 인천 동방극장. 영화 ‘수우(愁雨·슬픈 비)’의 시사회장 앞자리에 아홉 살 소년이 아버지의 영정을 안고 섰다. 영화를 만든 아버지 최철은 시사회를 앞두고 과로로 쓰러져 서른다섯에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를 일찍 여읜 그 소년은 반세기 넘게 브라운관 속 ‘아버지’로 살았다.

남편을 잃은 어머니 이명숙은 인천 동방극장 지하에 음악다방 ‘등대 뮤직홀’을 열었다가 서울 명동으로 옮겨 막걸리집 ‘은성’을 꾸렸다. 1950년대 은성은 시인과 소설가, 기자들이 모여 시대와 예술을 논하던 사랑방이었다. ‘명동백작’ 이봉구와 박인환, 천상병이 드나들었고, 박인환의 시에 이진섭이 곡을 붙인 ‘세월이 가면’도 이 술집에서 태어났다는 일화가 전한다. 넉넉지 않은 살림에도 어머니는 가난한 예술가들에게 외상 장부를 열어 줬다.

최불암[KBS ‘한국인의 밥상’]
최불암[KBS ‘한국인의 밥상’]

예술가들의 술자리 곁에서 자란 소년은 중앙고 연극반에서 무대와 처음 만났다. 서라벌예대에서 연출을 익혔고 한양대 연극영화과를 졸업했다. 꿈은 배우가 아니라 연출가였다. 고교 동창인 소설가 김춘복은 올해 5월 MBC 다큐멘터리에서 청년 최불암을 두고 “제임스 딘과 비슷했다”고 돌아봤다.

1959년 극단 ‘실험극회’의 ‘햄릿’에서 최연소 햄릿으로 데뷔했고, 1965년 국립극단 단원이 되며 연기의 길에 본격적으로 들어섰다. ‘불암(佛巖)’이라는 예명을 쓰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다. 같은 이름의 배우가 이미 활동하고 있어서였다. 아버지를 일찍 여읜 조카에게 건강하게 오래 살라는 뜻을 담아 숙부가 지어 준 이름이었다. 산 이름과 한자까지 같았던 덕에 2009년엔 불암산 명예 산주로 위촉되기도 했다.

서른에 노인, 마흔에 여든… 나이를 앞질러 간 배우

1967년 서울중앙방송(현 KBS) 특채 6기 탤런트로 뽑혀 처음 받은 배역은 드라마 ‘수양대군’의 노년 김종서였다. 1969년 MBC로 옮겨서는 개국 드라마 ‘역풍’에서 서른 살에 노인을 연기했고, 40대에는 ‘제1공화국’(1981~1982)과 ‘제2공화국’(1989~1990)에서 80대 이승만을 맡았다. 작품의 완성도를 위해서라면 조연이든 노역이든 가리지 않았다.

1971년 3월 6일 MBC ‘수사반장’이 첫 전파를 탔다. 실제 사건을 토대로 한 한국형 수사극의 원형이었다. 베이지색 트렌치코트를 걸친 박영한 반장은 범인을 쫓되 생계형 범죄 뒤에 숨은 사연을 외면하지 않았고, 최고 시청률은 70%를 넘었다. 1984년 10월 680회로 막을 내렸다가 시청자 성원에 이듬해 5월 돌아왔고, 1989년 10월 12일 880회 ‘서울은 비’로 18년의 여정을 마쳤다. 현직 형사 최중락이 자문을 맡았고, ‘빠라바라밤’ 테마곡은 훗날 영화 ‘살인의 추억’에서 송강호의 콧노래로 되살아났다.

배우 최불암. [연합]
배우 최불암. [연합]

경찰도 이 반장을 잊지 않았다. 1972년 처음 명예 경찰에 위촉됐고, 2012년 명예총경을 거쳐 2024년엔 민간인 최초로 명예 국가수사본부장(치안정감)에 올랐다. 같은 해 프리퀄 ‘수사반장 1958’에 특별출연해 이제훈이 연기한 청년 박영한의 먼 훗날이 돼 줬다.

스크린에선 전혀 다른 얼굴을 꺼냈다. 이두용 감독의 ‘최후의 증인’(1980)에서 살인 누명을 쓰고 20년을 옥에서 보낸 사내 황바우로 분해 제1회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 남우주연상을 받았다. 158분으로 만들어졌으나 검열에 잘려 나간 채 개봉한 비운의 영화로, 한국영상자료원이 2003년 154분 분량으로 복원했다. ‘영자의 전성시대’(1975), ‘바람불어 좋은날’(1980), ‘기쁜 우리 젊은 날’(1987) 등에도 출연했고, 대종상 남우조연상(‘세종대왕’, 1978)과 남우주연상(‘달려라 만석아’, 1979)을 잇달아 품었다.

양촌리 김 회장, 그리고 ‘최불암 시리즈’

1980년 시작된 MBC ‘전원일기’는 2002년까지 22년간 이어진 국내 최장수 드라마가 됐다. 40대에 환갑 넘은 양촌리 김 회장을 입은 최불암 곁엔 김혜자가 있었다. ‘개구리 남편’(1969~1970)에서 처음 호흡을 맞춘 두 사람의 부부 연기는 실제 부부로 착각하는 시청자가 나올 만큼 자연스러웠다.

김 회장은 호통치는 가장이 아니었다. 최불암은 2007년 서울신문 대담에서 자신이 연기한 아버지를 ‘약한 아버지’라 불렀다. 손주와 자식, 노모를 두루 품으려면 강해서는 안 된다는 까닭이었다. 정작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희미했다. 올해 다큐멘터리를 준비하며 “어린 시절 아버지와 이른 이별을 겪어 정작 나에게는 아버지에 대한 경험과 기억이 많지 않다”고 털어놨다.

배우 최불암 [최불암 측 제공/연합]
배우 최불암 [최불암 측 제공/연합]

브라운관 속 부성은 현실로 이어졌다. 1981년 극 중 막내 금동이를 입양하는 에피소드를 계기로 초록우산어린이재단과 연을 맺었고, 1985년부터 후원자들을 대표하는 전국후원회장을 맡았다. 미아 찾기 특별 생방송 ‘엄마 아빠, 저 여기 있어요’와 희소병·난치병 어린이 돕기 방송에도 꾸준히 나섰다. 국회의원 시절엔 소년원 청소년들에게 각별한 관심을 쏟았다.

1980년대 말부터 1990년대 초엔 최불암을 주인공으로 한 단편 유머 ‘최불암 시리즈’가 전국을 휩쓸었다. 남녀노소 모두가 아는 이름이었기에 가능한 유머였다. 최불암은 이 유행을 흔쾌히 받아들였고, 숱한 방송인이 ‘파하~’ 웃음을 흉내 냈다. ‘그대 그리고 나’(1997~1998)에선 영덕 바닷가의 선원 출신 가장 박재천, 이른바 ‘캡틴 박’으로 가부장의 틀을 비틀었다.

정치, 밥상, 그리고 광대

고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과의 인연은 각별했다. ‘야망의 25시’(1983)에서 청년 정주영을, ‘영웅시대’(2004~2005)에선 정 명예회장을 모델로 한 천태산을 연기했다. 1992년 정 명예회장의 권유로 통일국민당 전국구 의원이 돼 14대 국회에 들어갔다. 1996년 15대 총선에서 신한국당 후보로 서울 영등포을에 나섰다 낙선하자 그해 ‘전원일기’로 돌아왔다.

[최휘영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인스타그램 캡처]
[최휘영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인스타그램 캡처]

1999년부터 2008년까지 KBS ‘좋은나라 운동본부’를 진행했고, 2011년부터 지난해 3월까지 14년간 KBS 1TV ‘한국인의 밥상’을 이끌며 전국의 부엌과 장터를 누볐다. 2018년엔 연극 ‘바람 불어 별이 흔들릴 때’로 25년 만에 무대에 다시 섰다.

평생의 동반자는 배우 김민자였다. 첫눈에 반한 최불암은 연극 ‘환절기’(1968) 등을 함께하며 사랑을 키웠고, 4년 교제 끝에 1970년 결혼해 아들 동녘, 딸 동비 씨를 뒀다. 백상예술대상 TV·연극 부문 최우수연기상, 국민훈장 목련장(1998), 은관문화훈장(2014)이 걸어온 길을 증언한다.

마지막 한 해는 재활의 시간이었다. 지난해 허리디스크 수술 뒤 거동이 불편해지며 ‘한국인의 밥상’에서 물러났고, 올봄 동료들의 걱정 속에 건강 이상설이 번졌다. MBC 다큐멘터리 ‘파하, 최불암입니다’(5월 5·12일 방송)엔 기획 단계부터 참여했지만, 재활에 전념하길 바란 가족의 뜻에 따라 직접 출연하진 않았다. 지난 6월 병실을 찾은 최휘영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은 이틀 뒤 자신의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최불암 선생님이 머잖아 퇴원하면 술 한잔하자고도 하셨다”고 적었다. 어머니가 운영하던 주점 ‘은성’ 이야기를 꺼내자 최불암은 환하게 웃었다고 했다.

배우라는 일을 두고 최불암은 늘 ‘광대’라는 말을 꺼냈다. 마지막 다큐멘터리를 준비하며 남긴 말도 그랬다.

“오랜 시간 저를 사랑해 주신 시청자 여러분께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다. 그게 광대의 마음이다.”


shee@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