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멀쩡히 병원에 걸어 들어갔던 환자가 ‘오후’에는 싸늘하게 식어서 돌아옵니다. 가족들은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불가능에 가까운 ‘싸움’을 시작합니다. 적금을 깨고, 집을 팔아 마련한 돈은 ‘환자가 왜 죽었는지’를 밝히기 위해 쓰입니다. 하지만 환자와 가족이 의료기관의 책임을 입증하기란 여간 어려운 게 아닙니다. ‘정보의 비대칭성’ 때문입니다.
국내에서 의료분쟁은 크게 한국의료분쟁조정중재원을 통한 조정·중재 신청(연평균 약 2100건), 민사소송(연평균 약 1000건·보험연구원 연구자료) 등을 통해 이뤄집니다. 매해 ‘3000건 이상’의 의료분쟁이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처럼 펼쳐지고 있습니다.
헤럴드경제는 법무법인 오킴스와 함께 다양한 의료분쟁 판례를 분석하고, 다윗이 어떻게 해야 골리앗을 이길 수 있을지 톺아보려 합니다. 환자와 환자 가족들이 ‘메디컬 생존 게임’에서 살아남을 수 있도록 응원합니다. 메디컬 생존 게임은 월 2회(격주 화요일) 연재됩니다. [편집자 주]
[헤럴드경제=고재우 기자] 건강이 우선이었다. 그래야만 했었다. 직장을 쉬어야 한다는 부담감에 다니기 시작했던 한의원 치료 1년만에, 딸은 ‘평생’ 신장 투석을 받아야 하는 처지가 됐다.
지난 2005년 8월, A 씨는 전신 부종으로 B 병원을 찾았다. B 병원 검사 결과는 사구체신염.
사구체신염이란 신장 내에서 혈액 속 노폐물을 걸러주는 ‘필터’ 역할을 하는 미세한 혈관 뭉치에 염증이 생긴 것을 말한다. 사구체에 염증이 생길 경우, 단백질이나 적혈구가 새어나가 단백뇨(소변 거품), 혈뇨가 나온다. 노폐물과 수분이 제대로 걸러지지 않아 몸이 붓는 부종이 생기거나 혈압이 오르기도 한다. 특히 만성 신부전을 일으키는 여러 질환 중 하나다.
사구체신염은 종류가 수십 가지다. 피검사나 소변 검사만으로 어떤 종류 염증인지 정확히 할 수 없다. 이 때문에 ‘조직검사’가 필수다.
하지만 A 씨는 B 병원에 이어 찾은 C·D 대학병원에서도 정확한 진단을 위한 조직검사를 받지 않았다. 생살을 떼어낸다는 두려움, 직장에 병가를 내야 한다는 부담감은 A 씨를 한의원으로 이끌었다. 불행의 시작이었다.
지난 2005년 10월 찾은 한의원에서도 A 씨는 마찬가지로 사구체신염 진단을 받았다. 한의원 치료는 이듬해 9월 8일까지 이어졌다. 한약, 침술, 뜸, 환약, 탕 등 다양한 치료에도 효과가 있다 없다를 반복했고, 결국 한의원은 A 씨에게 내과 치료를 권유했다.
내과에 내원한 A 씨는 C 대학병원 응급실로 전원 됐다. C 대학병원은 A 씨에 대해 만성 간질환 및 신장 투석이 필요한 ‘만성 신부전증’을 진단했다. 한의원 치료를 받기 시작한 지 꼭 1년만, A 씨는 영구적으로 신장 투석이 필요한 ‘환자’가 됐다.
‘주의 의무’ 소홀 인정 법원, 손해배상 ‘제한’
앞날 창창했던 딸, 가족들은 슬퍼할 겨를도 없이 한의원을 상대로 소송에 나섰다. 죽을 때까지 매월 받아야 할 투석 비용 ‘약 62만원’ 때문만은 아니었다. 한의원 치료 과정에서 함께 진행됐어야 할 양방병원 협진 혹은 검사 등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는 원통한 감정 때문이었다.
특히 A 씨가 최초 한의원 내원 시 양방병원에서 조직 검사를 권유받았다는 점을 듣고도 재차 권유하지 않은 점, 치료 기간 1년 동안 신장 기능 확인을 위한 혈액·소변검사 의뢰 혹은 권유, 고혈압 확인에도 치료하지 않은 점 등을 짚었다. 의료진이 환자 ‘주의 의무’에 소홀했다는 주장이다.
울산지방법원(판사 박현정)은 A 씨에 대한 손해배상금 5811만5160원(위자료 500만원 포함) 및 위자료 등 총 6311만5160원을 인정했다.
우선 법원도 원고의 주장을 일부 받아들였다. 구체적으로 ▷한의원이 A 씨가 종합병원에서 조직검사 권유를 받았음에도 재차 권유하지 않은 점 ▷한의학 진단에 의존해 신장 기능을 확인할 수 있는 혈액·소변검사 의뢰 및 양방병원 재검사를 권유하지 않은 점 ▷2006년 5월 8일 치료 과정 중 고혈압 확인에도 치료를 하지 않은 점 등을 인정했다.
특히 만성 사구체신염이 만성 신부전으로 진행하는 경우가 많다. 법원은 만성 신부전 말기에 이를 경우 한약만으로 치료가 불가능해 투석 및 신장이식이 불가피할뿐더러 한의학 진단만으로는 사구체신염 진행 정도를 객관적으로 확인할 수 없다는 점을 들었다.
법원은 “한의원이 A 씨 최초 내원 시 조직검사를 재차 권하거나, 치료 과정에서 양방병원과 협진을 권유하거나 정기적으로 내원해 소변·혈액검사를 받아 볼 것을 권유해야 한다”며 “이 결과에 따라 자신의 치료계획을 수립해 원고를 치료할 의무가 있다”고 적시했다.
이어 “혈압이 높다는 사실을 확인한 이상 적절한 치료를 시행할 주의 의무가 있음에도 이를 해태한 잘못으로, A 씨가 적절한 치료를 받을 기회를 상실한 채 말기 신부전에 이르게 했다”고 덧붙였다.
하지만 한의원의 손해배상 책임은 제한됐다. ▷A 씨가 B·C·D 병원으로부터 조직검사를 권유받았음에도 응하지 않은 점 ▷한의원 치료 과정 중 몸 상태 호전 시 치료에 적극적이지 않았던 점 ▷만성 사구체신염 관련 치료를 받았음에도 결국 투석이 필요한 신부전 상태에 이르게 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는 점 등이 고려됐다.
이에 법원은 한의원 손해배상책임을 ‘25%’로 제한했다. 손해배상은 A 씨 소득(도시 일용 인부 1일 노임 5만6822원), 만성 신구체신염으로 인한 노동력 상실분(52%)에 따른 금액, 향후 치료비 등에서 책임 감경 후 5311만5160원이 인정됐다.
위자료는 A 씨 500만원, A 씨 아버지·어머니 각각 200만원, A 씨 언니 2명에 각각 50만원 등이었다.
조진석 변호사 “환자 ‘치료 선택권’ 주장해야”
조진석 변호사는 A 씨가 한의원으로부터 제대로 된 정보 제공 등을 받지 못해 ‘치료 선택권’이 침해당했다는 점에 주목했다. 일반적으로 손해배상 산정에 피고뿐만 아니라 원고 측 요인도 함께 참작되기 때문에, 피해자의 ‘어쩔 수 없는 사정’을 주장하는 게 나았을 것이란 얘기다.
통상 법원은 가해자에게 손해 전부를 배상하게 하는 것이 공평의 이념에 반할 때, 피해자 측 요인을 참작한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형평의 원칙이 피해자에게 불합리하게 작용토록 해서는 안 된다. 의료인에게 기본적으로 요구되는 주의 의무 소홀로 인한 피해 발생은 손해배상책임을 제한할 만한 요인이 아니라는 뜻이다.
이를테면 만성 사구체신염이 만성 신부전으로 진행하는 경우가 많다고 하더라도, 손해배상책임 산정에 일어나지 않은 사실에까지 고려할 필요는 없다.
조 변호사는 “의사, 한의사, 치과의사 등 의료인에게 요구되는 통상적인 주의 의무를 소홀히 해 피해가 발생한 경우에는 단지 치료 과정에서 손해가 발생했다는 등 막연한 이유만으로 손해배상책임을 제한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일부 책임 제한 사유가 있다고 해도 환자로서는 검사 미시행, 한약 처방 상 잘못 등 한의원 과실로 인해 제대로 된 정보 제공 및 진료를 받지 못한 이유로 발생한 ‘피해’”라며 “이를 통해 한의원 책임 비율을 높이려는 시도를 하면 좋았을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