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회 27. 김환기 ‘우주’
한국 미술품 중 역대 최고가 받은 사연
‘과거의 나’ 버리고 새로운 예술세계로
[0.1초 그 사이]는 역대급 몸값을 자랑하는 작품의 면면을 들여다보는 코너입니다. ‘찰나의 순간’으로 승부가 나뉘는 치열한 미술 시장에서 선택받은 그림들, 그 안에 얽힌 속사정을 들려드립니다.
![내년 5월까지 진행되는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소장품 상설전 ‘한국현대미술 하이라이트’ 전시 도입부에 소개된 김환기의 전면 점화 ‘산울림19-II-73#307’(1973). ‘이건희 컬렉션’이다. [국립현대미술관]](https://wimg.heraldcorp.com/news/cms/2025/05/23/news-p.v1.20250522.6ba5b0e6c72b47c8a0ebcff30828c8f1_P1.png)
[헤럴드경제=이정아 기자] “점 찍은 건데, 이 그림이 왜 서울 아파트 한 채 값이에요?”
“우리 딸이 그린 것 같은 그림인데, 왜 이렇게 비싼 거예요?”
미술 담당 기자로 취재하다 보면 이런 질문을 자주 듣습니다. 독자와 대화를 나누다 보면 미술품 가격에 대한 궁금증은 언제나 빠지지 않죠.
당연합니다. 미술시장은 우리에게 익숙한 소비시장과는 전혀 다르게 작동하니까요. 보고 만지고 비교해서 사는 방식이 통하지 않습니다. 미술품을 구매하려는 사람이 얻을 수 있는 정보는 최소한으로 제한되는 경우가 많기도 하고요. 저 역시 그 낯설고 불투명한 세계 앞에서 여러 번 고개를 갸웃거렸습니다.
‘좋은 그림’이 곧 ‘비싼 그림’은 아니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입니다. 미술시장은 여전히 은밀한 구석이 많고요. 엘리트적이고 배타적인 이미지를 일부러 대중에게 각인시키기도 합니다. 의도적으로 가격이 조정되는 어처구니없는 현장을 목도한 적도 있죠.
그래서 안개 속에서 헤매게 만드는 미술품 가격 앞에서 많은 이들이 더더욱 묻게 될 수밖에 없을 겁니다. “그림 한 점에 수십억? 대체 왜?”라고 말이죠.
![2019년 132억 원에 팔리며 국내 미술품 최고가 기록을 쓴 김환기의 ‘우주(05-IV-71 #200)’(1971)를 낙찰받은 사람은 글로벌세아그룹을 이끄는 김웅기 회장이었다. 글로벌세아는 2022년 서울 대치동 본사 사옥에 갤러리 S2A를 개관하고 해당 작품을 전시했다. [연합]](https://wimg.heraldcorp.com/news/cms/2025/05/23/news-p.v1.20250522.ee5617c5672b4e4aa651fdd51e7cd2b3_P1.png)
![김환기의 ‘우주(05-IV-71 #200)’(1971) 작품 확대 이미지 [크리스티]](https://wimg.heraldcorp.com/news/cms/2025/05/23/news-p.v1.20250522.f702344d95ba40e0a7500c88b14a8954_P1.png)
혹자에게 이 질문은 2019년 11월 홍콩섬 완차이 해안의 홍콩 컨센션센터 3층 그랜드홀에서도 유효했을지도 모릅니다.
한국 미술품이 해외 미술시장에서 100억 원 이상에 거래된 첫 사례, 바로 김환기 작가의 ‘우주’(원제: 05-IV-71 #200) 작품이 크리스티 미술품 경매에서 132억 원(8800만 홍콩달러)에 ‘판매’된 날이거든요.
낙찰가는 크리스티가 예상한 추정가(4800만~6200만 홍콩달러)를 한참 웃도는 금액입니다. 당시 59억 원에 시작된 경매는 불꽃 튀는 가격 경합으로 이어졌고, 경내는 크게 술렁였죠.
그런데 작품이 판매됐다는 건 김환기 작가의 작품을 132억 원에 ‘구매’한 사람이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미술시장에서 구매자가 작품의 최종 가격을 만들고 있다고도 볼 수도 있는 거죠. (낙찰자는 섬유업체 글로벌세아그룹을 이끄는 김웅기 회장입니다.)
물론 그림 가격을 형성하는 요소는 너무나 다양해서 “구매자가 그 가격에 샀으니까!”라고 단순하게 말할 수는 없긴 합니다. 그렇다면 가격의 합리성 여부를 논하기 전에 김환기 작가의 생과 그의 작품 ‘우주’에 담긴 의미를 곱씹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세계 미술시장에서 한국화가 서양화에 밀려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는 오늘날, 한국 추상미술의 선구자이자 기둥 같은 존재가 바로 김환기 작가입니다. 그런 그만의 예술세계가 정점에 이른 작품이 바로 ‘우주’고요.
“일을 하며 음악을 들으며 혼자서 간혹 울 때가 있다.
음악·문학·무용·연극 모두 다 사람을 울리는데
미술은 그렇지가 않다.
울리는 미술은 못할 것인가.”
![한국 추상회화 거장으로 우뚝 선 김환기(樹話 金煥基) [환기재단·환기미술관]](https://wimg.heraldcorp.com/news/cms/2025/05/23/news-p.v1.20250522.e3db40ef08aa475c84ae50db29cf016f_P1.png)
작가의 나이 쉰. 서울대 미대 교수, 홍익대 미술대학장을 맡으며 밥벌이 일터가 있는 한국의 안정적인 지위를 뒤로하고 그가 향했던 곳은 바로 미국 뉴욕이었습니다. 아내와 세 딸을 고국에 남겨둔 채 그가 예술가로서 다시 한번 초심으로 돌아가기 위해 힘든 결정을 내린 것이었죠. 권력도, 명예도 다 버리고 낯선 곳에서 완전히 새로 시작하는 이 시간이 작가에게는 얼마나 절실한 순간이었을까요.
마치 그의 강한 의지를 증명하듯 뉴욕으로 건너간 김환기는 10년간 단 한 번도 고국을 찾지 않고 작품 활동에 전념했습니다. 세상을 향해 마을을 열어놓되 스스로에게 엄격하지 않았다면 이루지 못했을 삶이었죠. 그렇게 그는 자신을 가두고 가난과 고독 속에서 자신만의 예술세계를 꽃피웠습니다.
이 시기 탄생한 그의 화풍이 바로 ‘전면 점화’ 입니다.
우선 설명 대신, 물감이 번지듯 화면 전체에 찍어 넣은 수많은 점을 잠시 감상해 볼까요. 구체적인 형상은 사라졌지만, 무수한 점들이 화면의 무게를 지탱하고 있습니다. 그림의 무한한 점들은 무엇을 말하고 있는 걸까요.
![김환기의 ‘우주(05-IV-71 #200)’(1971) [크리스티]](https://wimg.heraldcorp.com/news/cms/2025/05/23/news-p.v1.20250522.824b9c0dc7ac45309b737f6d4a4f49f1_P1.png)
“작가가 늘 조심할 것은 상식적인 안목에 붙잡히는 것이다.
늘 새로운 눈으로, 처음 뜨는 눈으로 작품을 대할 것이다.”
홀로 마주한 침묵, 한국어가 닿지 않는 이방에서의 장벽, 고독과 외로움, 야위어가는 몸, 그러나 생의 마지막까지 붓질을 놓지 않았던 작가의 절박함.
이 모든 것들 사이에서 그는 끊임없이 점을 찍었습니다. 파도 위에 부서진 햇살 같기도 하고 우주의 은하 같기도 한 점들(답은 없습니다. 그저 여러분이 보고 느낀 ‘그것’에 집중하면 됩니다.) 그 사이에서 작가는 마침내 추상 시기로 자신의 스타일을 완전히 바꿔나간 것이죠. 생명의 시원으로 돌아간 티끌 같은 삶에서 모든 것은 점으로 환원됐고, 그 자신 또한 끝내 점이 된 겁니다.
![1968년 프랑스 파리 아뜰리에에서 포즈를 취한 김환기와 그의 아내 김향안 [환기재단·환김술관]](https://wimg.heraldcorp.com/news/cms/2025/05/23/news-p.v1.20250522.60d22f3fa67f4e009d3d410ffe22bf6e_P1.png)
이렇게 그가 말년에 완성한 푸른색 전면 점화가 바로 한국에서 가장 비싼 값에 낙찰된 ‘우주’ 입니다. 특히 이 작품은 여러 전면 점화 중에서도 프리미엄을 가진 작품이라는 점에서 특별하고요.
우선 가로, 세로 길이만 254㎝에 달하는 거대한 크기가 보는 이를 압도합니다. 그가 생의 절정과 고통을 오롯이 마주하며 완성해 낸 가장 규모가 큰 전면 점화입니다. 유일한 두 폭짜리 그림이기도 하고요.
그래서 화폭 앞에 있노라면 푸른 점들로 채워 나간 그 공간에 스며들게 되는 기분이 들곤 합니다. 점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지만 어떤 울림을 전하거든요. 반복되는 점들을 단순한 형식으로 볼 수 없는 이유입니다. 마치 존재의 농축이자 시간의 침전이 우러나온 것만 같죠.
![환기미술관 전시 전경 [환기재단·환기미술관]](https://wimg.heraldcorp.com/news/cms/2025/05/23/news-p.v1.20250522.6ff0f36efcbc4528969e4a140024ad39_P1.png)
이런 이유로 김환기에게는 ‘그림으로 시상을 던져주는 화가’라는 평이 늘 따라붙습니다. 추상하면 어렵다는 편견이 지배적이지만 그의 작품은 누구에게나 공감을 일으켰거든요.
그리고 무엇보다 이 작품은 40여년간 잘 보존된 소장 이력을 자랑합니다. 이 또한 작품가에 영향을 미치죠. ‘우주’는 작가가 뉴욕에 거주하던 시절 그의 주치의인 김마태 박사가 처음으로 사들여 가지고 있던 작품이었거든요. 미술시장은 그림을 누가 가지고 있었는지까지도 값에 반영합니다.
다시 정리해 볼까요. ‘작품가 132억 원’이라는 말만 놓고 보면 어쩌면 황당하게 느껴질 수 있지만요. 그 안에는 예술에 생을 모두 걸었던 작가의 삶, 작품이 가지는 존재감, 소장자의 안목, 그리고 미술 시장이 만들어낸 서사가 응축돼 반영돼 있다면 어느 정도 이해가 가지 않으실까요.
“내일 한 시에 수술. 눈치 보니 어려운 수술인 것 같다.
지금 나는 아무런 겁도 안 난다. 편안한 마음이다.”
![김환기의 전면 점화 ‘하늘과 땅 24-Ⅸ-73 #320’(1973) [호암미술관]](https://wimg.heraldcorp.com/news/cms/2025/05/23/news-p.v1.20250522.525148b2ca60418eade857a1d5c5f0b4_P1.jpg)
“이 그림이 정말 그만한 돈값을 하는 겁니까?”
다시 첫 질문으로 돌아와 볼까요. 수없이 많이 받은 질문이거든요. 그리고 고백하자면, 그 물음은 여전히 마음 안에서 지워지지 않은 채 물음표로 남아 있습니다.
미술시장은 이해하기 어렵고 때로는 불합리해 보입니다. 그림값을 결정짓는 기준은 불분명하고, 누군가는 그림을 투자 수단으로만 보기도 하죠.
하지만 김환기의 ‘우주’를 두 눈으로 마주한 그 순간, 세상이 잠시 숨을 멈춘 듯했습니다. 숫자도, 소유도, 시장의 속삭임도 닿지 않는 자리. 모든 외피가 벗겨진 채, 그 침묵 속에서 압도적인 힘이 흘러나오는 순간, 저는 오직 감응하는 존재로 남을 수밖에 없었죠.
점 하나, 또 하나. 그렇게 그리움과 고독을 새기듯 찍어내던 밤들. 그 점들 위로 푸른 숨결이 깃들고 시간의 층위가 겹겹이 쌓여 노래가 됩니다. 잊힌 고향을 부르는 속삭임이자, 자기 소멸을 통해 완성된 생의 형식. 어쩌면 그것이, 작가가 평생 추구한 ‘점’의 본질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이 그림은 단순히 ‘비싼 그림’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누군가의 삶이 고스란히 담긴 흔적이자 자신의 전부를 걸고 남긴 하나의 우주이기에 그 자체로 유일무이한 건데요. 그래도 누군가는 너무 비싸다고 말할 겁니다. 누군가는 벅차게 아름답다고 생각할 거고요. 정답은 없습니다. 여러분의 삶을 더 풍요롭게 하는 자신만의 그림을 찾고 그 안에서 울림을 느끼면 그만입니다.
설명할 수 없어도, 느낄 수는 있는 것. 이유를 다 알 수 없어도, 가슴이 먼저 반응하는 것. 그것이 예술일 겁니다. 인간 김환기는 세상을 떠났지만 예술가 김환기가 여전히 우리 곁에 남아있는 것처럼 말이죠.
<참고자료>
Whanki in New York: 김환기의 뉴욕일기, 2019, 환기미술관.
지난해 2월, 그림 한 점과 그 가격을 둘러싼 은밀한 이면 사이에서 길어 올린 [0.1초 그 사이]가 27편의 이야기를 끝으로 작별의 인사를 전합니다. 독자 여러분들이 미술이 있는 삶을 살 준비를 마치고 나만의 그림을 발견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그림이 그러하듯, 말로 다 전할 수 없는 마음이 언젠가 가닿기를 바라며. 그동안 함께해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