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마우리치오 카텔란 ‘코미디언’

[0.1초 그 사이]는 역대급 몸값 자랑하는 작품의 면면을 들여다보는 코너입니다. ‘찰나의 순간’으로 승부가 나뉘는 치열한 미술시장에서 선택받은 그림들, 그 안에 얽힌 속사정을 들려드립니다.

마우리치오 카텔란의 ‘코미디언’(2019). 카텔란은 1달러도 안 되는 가격에 구입한 바나나를 은색의 덕트 데이프로 벽에 고정시킨 뒤, 12만 달러(1억6000만 원)에 판매했다. 이후 5년 만에 이 작품은 미술품 경매에서 620만 달러(86억7000만 원)에 낙찰됐다. [리움미술관]
마우리치오 카텔란의 ‘코미디언’(2019). 카텔란은 1달러도 안 되는 가격에 구입한 바나나를 은색의 덕트 데이프로 벽에 고정시킨 뒤, 12만 달러(1억6000만 원)에 판매했다. 이후 5년 만에 이 작품은 미술품 경매에서 620만 달러(86억7000만 원)에 낙찰됐다. [리움미술관]

[헤럴드경제=이정아 기자] 전시장 벽에 은색의 덕트 테이프로 붙인 바나나 한 개.

누가 장난치나 싶은 이 작품이 미술품 경매에서 620만 달러(한화 약 86억7000만 원)에 팔렸다고 하면 사람들은 묻습니다. “아니, 이게 왜?” 그런데 오늘날 현대미술은 이렇게 답합니다. “예술이니까요.”

금기를 넘나드는 게으른 악동인가, 예술을 해방시키는 비상한 천재인가. 알다가도 영 모르겠고 모르다가도 어느 순간 무릎을 ‘탁’ 치게 만드는 그 사람. 몸값 무지하게 비싼 작가로 말하자면 빼놓을 수 없는 마우리치오 카텔란(Maurizio Cattelan·65) 이야기입니다.

화장실에 있어야 할 소변기를 전시장에 둔 마르셀 뒤샹의 ‘샘’(1917), 작은 깡통마다 똥을 30g씩 담은 피에로 만초니의 ‘예술가의 똥’(1961), 시중에 판매되는 통조림을 본떠 그린 앤디 워홀의 ‘캠벨 수프 캔’(1962)까지. 하나같이 일상의 평범한 것을 예술로 가져와 세상을 발칵 뒤집은 문제작들인데요.

(미술계에서 자주 쓰는 전문용어로 이를 ‘레디메이드’(Ready-made)라고 합니다. 일상 물건을 예술적 맥락에 배치해 그것을 예술작품으로 재정의하는 개념을 의미하죠.)

마르셀 뒤샹의 ‘샘’(1917). 뒤샹은 남자 소변기를 90도로 방향을 돌려 놓고 표면에 ‘R. Mutt 1917’(1917년 R. 머트 만듦)이라고 적었다.
마르셀 뒤샹의 ‘샘’(1917). 뒤샹은 남자 소변기를 90도로 방향을 돌려 놓고 표면에 ‘R. Mutt 1917’(1917년 R. 머트 만듦)이라고 적었다.

“이게 뭘까?” 싶은 이 작품들을 한 마디로 쉽게 말하면, ‘도대체 무엇이 예술이냐’고 노골적으로 묻고 있는 겁니다. 예술의 진짜 본질을 따져 보자는 것이죠.

벽에 테이프로 고정한 바나나 한 개. 단순해 보이는 바로 이 논란의 카텔란 작품도 마찬가지입니다. 미술품을 판매하는 세계적인 아트페어인 아트바젤 마이애미에서 카텔란이 처음 선보인 이 작품의 제목은 ‘코미디언’(2019). 작품명부터 심상치 않죠. 현대미술의 모순을 풍자하고 예술과 상업, 관객의 시선을 조롱하는 작가의 의도가 오롯이 담긴 작품입니다.

여기서 바나나는 단순한 과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예술과 돈의 논리가 뒤얽힌 현대미술의 단면을 드러내는 상징이죠. 그래서 이 작품은 ‘평범한 물건도 예술이 될 수 있냐’는 질문을 넘어서, 오늘날 현대미술이 얼마나 ‘돈에 의해 좌우되고 있는지’를 날카롭게 비판합니다. 첫 공개 당시 12만 달러(1억6000만 원)라는 엄청난 가격표를 달고 판매된 이 작품이 사실, 작가가 뉴욕 맨해튼의 한 매점에서 1달러도 안 되는 가격에 산 바나나로 만든 걸 알게 되면, 더욱 기가 막힙니다. 상업적 논리에 깊이 얽혀있는 현대미술을 이처럼 적나라하게 보여줄 수 있을까 싶은데요.

마우리치오 카텔란의 ‘코미디언’(2019)를 바라보는 관람객 모습. [연합/APF]
마우리치오 카텔란의 ‘코미디언’(2019)를 바라보는 관람객 모습. [연합/APF]
마우리치오 카텔란. [리움미술관]
마우리치오 카텔란. [리움미술관]

카텔란이 미술관이 아닌 유명 아트페어에서 이 작품을 선보였다는 점도 주목할 만합니다. 미술관은 예술의 가치와 사회문화적 담론을 바탕으로 한 작품성을 먼저 봅니다. 반면 아트페어는 세계적인 미술품이 수십, 수백억 원에 거래되는 현장을 목격할 수 있는 곳이죠. 그러니까 작품의 상업적 거래가 중심인 장소에서 누구나 저렴한 가격에 사 쉽게 먹을 수 있는 (작품성 짙은 고고한 미술품과 비교하면 다소 싱거워 보이기까지 한) 바나나를 통해 질문한 겁니다. 예술의 가치를 결정짓는 건 작품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둘러싼 시장과 맥락이 아니냐고 말이죠.

놀랍게도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작가 카텔란은 28세까지 미술관 문턱을 밟아본 적이 없습니다. 정규 미술교육도 받아본 적 없고요. 애초에 제도권 교육에서 멀다 보니 고정된 틀이나 선입견이 없이 자유분방한 작품세계를 보여주고 있는 것만 같습니다. 카텔란의 작품은 공개되는 족족 파장을 불러일으켰거든요. 그런 그를 보여주듯 카텔란이 미술관 바닥에 뚫린 구멍에 얼굴만 내밀고 있는 작품 ‘무제’(2001)는 그가 미술관 정문이 아닌, 마치 두더지처럼 땅굴을 파고 몰래 숨어 들어가 안으로 침입한 모습입니다.

2023년 리움미술관에서 전시된 마우리치오 카텔란의 ‘무제’(2001). 이정아 기자.
2023년 리움미술관에서 전시된 마우리치오 카텔란의 ‘무제’(2001). 이정아 기자.
마우리키오 카텔란의 ‘완벽한 하루’(1999). 벽에 테이프로 고정된 중년 남성은 카텔란의 작품 판매를 맡고 있는 갤러리스트인 마시모데카를로. [마시모데카를로]
마우리키오 카텔란의 ‘완벽한 하루’(1999). 벽에 테이프로 고정된 중년 남성은 카텔란의 작품 판매를 맡고 있는 갤러리스트인 마시모데카를로. [마시모데카를로]

카텔란은 은색 덕트 테이프로 바나나만 벽에 붙인 게 아닙니다. 그는 자신의 작품 판매를 전담하는 갤러리스트를 같은 방식으로 벽에 고정시킨 적도 있거든요. 갤러리스트는 벽에 붙어 있느라 그날 작품을 단 한 점도 판매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끝내 기절해 응급실로 이송됐습니다. 그런데 어처구니없게도 카텔란은 이 작품에 ‘완벽한 하루’(1999)라는 제목을 붙였습니다. 미술계에 드리운 상업적 압박을 비판하고, 작가인 자신조차 그 세계에서 유리된 존재가 아니라고 말하는 듯한 일종의 자기 고발인 셈입니다.

1990년대 초반부터 사람들의 머릿속에 박혀 있는 고정관념과 편견을 충격적으로 뒤흔드는 작업을 해온 작가는 작품마다 스캔들을 일으켰습니다. 그런데 조금만 더 들여다보면 이미 우리 사회 자체가 거대한 스캔들이라고 말하고 있는 그입니다. 카텔란의 작품은 무감각해져 버린 현대인의 현실을 신랄하게 조롱하고, 그 자체로 불편한 진실을 마주하게 합니다. 그래서 관람객은 그의 작품 앞에서 그간 외면해 온 사회적 모순을 직시하게 될 수밖에 없는데요.

2023년 리움미술관에서 전시된 마우리치오 카텔란의 ‘아홉 번째 시간’(1999). 이정아 기자.
2023년 리움미술관에서 전시된 마우리치오 카텔란의 ‘아홉 번째 시간’(1999). 이정아 기자.

유서 깊은 대학이나 기관에서 미술교육을 제대로 받은 작가들조차 입성하기 어렵다는 베니스 비엔날레에 단골로 초청되는 작가가 카텔란이라는 점은 어쩌면 그럴만한 이유가 있는 겁니다. 1993년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카텔란은 자신에게 주어진 넓고 근사한 전시 공간을 이탈리아 향수회사의 광고 에이전트에 팔아넘겼습니다. 이 전시장은 졸지에 스키아파렐리에서 출시한 향수를 광고하는 장소로 전락했고, 카텔란은 전시장 입구에 ‘일하는 것은 나쁜 직업이다’(1993)라는 제목만 달랑 걸어놨죠.

이런 무모한 짓에 전시장은 그야말로 발칵 뒤집어졌지만, 카텔란은 이를 즐기는 듯한 태도를 보입니다. 1997년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그는 교황 요한 바오르 2세가 떨어지는 운석을 맞고 쓰러진 모습을 묘사한 ‘아홉 번째 시간’(1999)을 선보이기까지 하거든요. 작가 경력이 끝장날 수 있다는 위험에도 굴하지 않고 보란 듯 종교의 권위에 대놓고 도전한 작가가 카텔란인 겁니다. 카텔란의 작품은 단순한 논란을 넘어서 공고해 보이는 권력 구조를 깨뜨리는 질문을 과감하게 던지고 있는 건데요.

다비드 다투나가 2019년 아트바젤 마이애미 페로탱 갤러리에서 선보인 마우리치오 카텔란 작품 ‘코미디언’의 바나나를 떼어내 먹는 모습.
다비드 다투나가 2019년 아트바젤 마이애미 페로탱 갤러리에서 선보인 마우리치오 카텔란 작품 ‘코미디언’의 바나나를 떼어내 먹는 모습.

다시 벽에 붙인 바나나 작품인 ‘코미디언’으로 돌아와 볼까요. 아트페어에서 처음 공개된 이 작품은 예상치 못한 사고를 당하게 됩니다. 벽에 붙은 바나나를 떼먹은 사람이 있었거든요. 논란의 작가인 그의 이름은 다비드 다투나. 그는 이런 행위를 ‘배고픈 예술가’(Hungry Artist)라는 퍼포먼스로 이름 짓고 작품의 소모성을 강조했습니다. 관람객의 해석이 작품의 일부가 되는 현대미술의 특성이 극대화된 사례죠. 그 이후 작품은 인터넷과 소셜미디어에서 온갖 밈(meme)으로 확산해 수많은 패러디와 재해석을 낳았습니다. 작품이 전시장을 넘어 하나의 문화적 현상으로 자리 잡게 된 건데요.

온갖 밈으로 확대 재생산된 마우리치오 카텔란의 ‘코미디언’(2019).
온갖 밈으로 확대 재생산된 마우리치오 카텔란의 ‘코미디언’(2019).

처음 공개됐을 당시에 1억 원대에 거래된 이 작품은 마치 보란 듯 지난해 뉴욕 소더비 경매에서 약 87억 원으로 판매돼 카텔란 최고 경매가를 기록했습니다. 작품의 실체보다 발상 자체가 중요한 오늘날 시대를 명징하게 보여주고 있죠. 현대미술은 더 이상 시각적 아름다움이나 물리적 영속성에만 의존하지 않고, 그 담론과 맥락 속에서 가치를 만들어내고 있는 건데요.

그런데 한 번 생각해 봐야 할 지점이 있습니다. 막대한 돈으로 이 작품을 구입한 사람이 보여준 기이한 자기 과시적 태도입니다. 코미디언의 보증서와 제작 매뉴얼을 산 사람은 막대한 자산을 일군 30대 홍콩 암호화폐 사업가인 저스틴 선. 그는 일주일 여만에 기자회견을 열고 낙찰받은 코미디언의 작품인 바나나를 떼어내 베어먹는 퍼포먼스를 벌였습니다. 암호화폐 투자 경험을 카텔란의 개념미술에 비유하며 예술가처럼 행세하는 방식으로 전 세계의 관심을 자신에게 집중시킨 건데요.

지난해 11월 마우리치오 카텔란 작품 ‘코미디언’을 86억7000만원에 낙찰받은 30대 홍콩 암호화폐 사업가인 저스틴 선이 작품의 바나나를 떼어내 먹는 모습. [APF/연합]
지난해 11월 마우리치오 카텔란 작품 ‘코미디언’을 86억7000만원에 낙찰받은 30대 홍콩 암호화폐 사업가인 저스틴 선이 작품의 바나나를 떼어내 먹는 모습. [APF/연합]

그날 취재한 기자들에게도 플라스틱 패널에 테이프로 고정한 바나나가 간식으로 주어졌습니다. 저스틴 선이 자신이 구매한 작품을 자랑하듯 단순하게 소비하고 있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죠. 현대미술이 감성적 경험이나 사회성 짙은 메시지의 매개체로 존재하기보다는, 그 자체로 돈의 노예로 전락한 현장을 여실히 드러낸 거라 할만합니다. 자본과 예술이 결합한 냉정한 현실을 고백하는 사건이기도 하고요.

끝나기는커녕 더욱 혼란스럽게 엉켜버리는 부조리한 현실을 보며 카텔란은 무슨 생각을 할까요. 현대미술이 더 이상 작품 그 자체의 의미나 감동을 전달하지 못하는 세상에서 그는 자신만의 예술적 본질을 지킬 수 있을까요. 우리는 과연 예술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요. 현대미술이 사회적 메시지와 감동을 전달하는 매개체로서 존재할 가능성이 과연 남아 있는 걸까요. 일련의 사건이 낳은 무수한 질문들에 대한 정답은 없습니다. 우리는 그저 질문들을 붙잡고, 저마다의 방식으로 치열하게 길을 만들어 나가야 할 뿐입니다. 그 길 위에서 우리의 선택에 따라 예술은 달라질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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