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니카스 사프로노프 ‘트럼프 초상화’

작가도 모르게 미국으로 가 백악관에 선물

강하고 위엄있는 모습 ‘이상적인 지도자’ 담아

백 마디 말보다 강했나…미·러 관계 개선 물꼬

[0.1초 그 사이]는 역대급 몸값 자랑하는 작품의 면면을 들여다보는 코너입니다. ‘찰나의 순간’으로 승부가 나뉘는 치열한 미술 시장에서 선택받은 그림들, 그 안에 얽힌 속사정을 들려드립니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에게 지난해 대선 유세 중 괴한의 총격을 받은 장면을 그린 그림을 선물한 것으로 알려졌다. [CNN]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에게 지난해 대선 유세 중 괴한의 총격을 받은 장면을 그린 그림을 선물한 것으로 알려졌다. [CNN]

[헤럴드경제=이정아 기자] 러시아 대통령인 블라디미르 푸틴이 지난 3월, 그림 한 점을 미국 중동특사 스티브 위트코프에게 건넸습니다. 그림 속 인물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지난해 7월 대통령 선거 유세 도중 암살 시도에서 살아남은 트럼프가 결연한 표정으로 피를 흘리며 주먹을 치켜든 모습입니다. 그것도 성조기와 자유의 여신상 앞에서 말이죠.

‘선물’이라는 형식을 빌렸지만, 알고 보면 그 안엔 철저하게 계산된 메시지가 담겨 있습니다. 푸틴은 직접 말하지 않았습니다만, 침묵 속에서 그림은 마치 웅변하듯 이야기를 생생하게 전하고 있거든요.

크렘린궁에서 백악관까지…그림 한 점에 담긴 ‘메시지’

러시아 화가 니카스 사프로노프와 그가 그린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초상화. [로이터]
러시아 화가 니카스 사프로노프와 그가 그린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초상화. [로이터]

우선 이 그림을 그린 화가 니카스 사프로노프는 러시아에서 유명한 화가 중 한 명입니다. 그런데 그는 자신이 그린 트럼프 초상화가 러시아와 미국 간 외교의 도구가 될 것이라곤 꿈에도 생각지 못했습니다. 그의 붓끝에서 나온 그림이 크렘린궁을 거쳐 백악관까지 가게 된 여정은 그에게도 무척이나 뜻밖이었던 건데요.

사프로노프는 이름을 밝히지 않은 옛 고객에게 연락을 받았고, 트럼프 초상화를 잠시 빌려줬습니다. 돈을 지불 받지 않고 그림을 넘겼고요. 그런데 난데없이 그 그림이 트럼프 손에 쥐어 쥐게 된 겁니다. 그조차도 언론 보도로 이 사실을 알게 됐다고 말합니다.

“그림을 가져간 사람이 러시아 대통령을 위해 일한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습니다. 푸틴이 직접 전화를 걸어와 감사 인사를 전했고, 작품이 마음에 든다고 했어요. 짧은 통화였습니다.”

로이터와의 인터뷰에서 그가 밝힌 말을 따라가다 보면, 그림을 그린 화가조차 놀란 기색이 역력히 드러납니다. 그는 푸틴이 연락하기 전까지 트럼프에게 전달된 초상화가 자신의 작품이었다는 사실을 몰랐다고도 덧붙였습니다.

‘국민 화가’로 꼽히는 사프로노프는 주로 초상화를 그리는 작가인데요. 그가 그린 화폭 속 인물은 단순한 그림이 아닌 듯 보입니다. 정치적이고 역사적 의미를 그 안에 내포하고 있어서죠. 그는 소련의 최초이자 마지막 대통령으로 재임한 미하일 고르바초프와 같은 권력자들의 초상화뿐 아니라, 마돈나와 스티븐 스필버그 같은 글로벌 스타들의 얼굴도 그렸습니다.

지난해 7월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버틀러에서 대선 유세 도중 총격으로 오른쪽 귀를 다친 도널드 트럼프 당시 미국 대통령 후보가 경호 요원들에게 둘러싸여 연단을 내려오면서 지지자를 향해 주먹을 불끈 쥐어 보이고 있다. [AP/연합]
지난해 7월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버틀러에서 대선 유세 도중 총격으로 오른쪽 귀를 다친 도널드 트럼프 당시 미국 대통령 후보가 경호 요원들에게 둘러싸여 연단을 내려오면서 지지자를 향해 주먹을 불끈 쥐어 보이고 있다. [AP/연합]

그런데 그의 그림은 리얼리즘을 기반으로 하면서도, 현실을 이상화하는 특성을 갖고 있습니다. 마치 인물의 실제 모습보다 그들이 ‘되어야 할 모습’을 그린 것만 같죠.

트럼프를 그린 이번 작품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림 속 트럼프는 유세 도중 습격을 당한 당시보다 더 강하고 위엄 있는 모습으로 그려졌습니다.

실제로 이 그림 한 장에는 필요한 모든 감정이 집약돼 있습니다. 이미지의 기본 구도인 삼등분할, 피라미드 형태의 구성, 아래에서 위로 인물을 올려 보는 시선, 피 흘리는 트럼프의 포효, 그 뒤로 보이는 파란 하늘에 펄럭이는 성조기와 자유의 여신상까지.

주제를 장엄하고 숭고하게 만드는 완벽한 이 그림 한 점에는 트럼프를 신격화하는 상징적인 요소가 이처럼 가득합니다. (물론 다른 측면에서 보면 지지자들에게 전투 명령을 내리는 모습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특히 이 장면은 미국 내에선 ‘트럼프의 부활’로 읽히는 이미지라는 게 중요합니다. 죽음의 그림자에서 살아 돌아온 남자, 총알보다 더 단단한 결의. 화가가 바로 이 장면을 골랐다는 것은 단순한 미학적 기준에서만의 선택은 아닐 겁니다. 그는 트럼프가 가진 정치적 상징성을 다시 호출해 내고 있는 겁니다. 트럼프를 다시 세계 무대 위에 ‘기억되는 얼굴’로 올려세우기 위해서 말이죠.

외젠 들라크루아,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캔버스에 유채, 260x325㎝, 1930.
외젠 들라크루아,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캔버스에 유채, 260x325㎝, 1930.

흥미로운 건 이 그림과 놀랍도록 흡사한 또 다른 그림이 있다는 겁니다. 바로 프랑스 낭만주의 화가 외젠 들라크루아의 작품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입니다. 7월 혁명 당시 ‘영광의 3일’을 주제로 한 작품인데요. 7월 혁명은 1830년 절대 왕정 복원을 꿈꾸던 샤를 10세를 몰아내고 루이 필리프가 왕위에 오르며 입헌군주제의 기틀을 마련하는 중요한 시대적 사건입니다. 무엇보다 세상을 바꾸길 바라는 시민들의 욕망을 담아내기 위해 들라크루아가 사용한 장치가 트럼프 초상화의 각 요소와도 일치하죠.

이러한 사실로 미뤄보면, 그림 한 장으로 ‘자유로 대표되는 위대한 미국과 이를 이끌 적임자는 바로 트럼프’라는 이미지가 구현될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프로노프는 이 그림이 제 역할을 해내고 세계에 평화를 가져오길 바란다고 했죠.

그림으로 외교하고, 침묵으로 선전하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EPA]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EPA]

그러면 이즈음에서 러시아와 미국, 두 나라의 관계를 살펴볼까요. 굉장히 복잡한 이 두 나라의 관계적 맥락을 알아야 그림의 의미도 좀 더 깊이 이해할 수 있거든요.

러시아와 미국의 관계는 단순히 냉전 이후의 적대감이란 말로 정리되진 않습니다. 두 나라는 서로를 지정학적 경쟁자이자 전략적 위협으로 바라보며, 시기마다 전선을 달리해왔죠.

2000년대 초반에는 테러리즘 대응과 경제 협력을 매개로 일시적 화해의 시기를 갖기도 했지만, 그 이후 조지아 전쟁, 크림반도 병합, 시리아 내전 개입, 우크라이나 침공 등을 겪으며 미국과 러시아의 대립 구도가 더욱 선명해졌습니다. 푸틴이 권위주의적 리더십을 강화하면서 서방에 대한 반감과 대결의 수위를 높였고, 미국 역시 민주주의와 인권 문제를 앞세워 러시아에 지속적으로 제재를 가하고 있는 거죠.

그런데 지난 2016년 트럼프가 미국 대통령으로 당선되면서 이 구도가 흔들렸습니다. 트럼프는 푸틴에 대해 “강한 지도자”라며 호의적인 태도를 보였고,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를 “구시대적 조직”이라 깎아내렸으며, 미국의 전통적인 외교 노선을 벗어나는 독자적인 행보를 보였거든요.

이 과정에서 ‘러시아 게이트’가 터졌습니다. 2016년 미국 대선 당시 러시아가 트럼프의 당선을 돕기 위해 사이버공격과 여론 조작을 벌였다는 의혹은, 트럼프 임기 내내 그림자처럼 따라다녔는데요. 결국 특검 수사까지 이어졌지만, 트럼프는 ‘공모 없음’을 주장하며 정치적 생존에 성공하게 됩니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EPA]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EPA]

이러한 배경 속에서 푸틴과 트럼프는 표면적으로는 일정한 우호 관계를 유지했지만, 양국 간 신뢰는 사실 예전만큼 돈독할 수는 없었습니다. 트럼프는 미국 정치권에서 ‘러시아의 조종을 받는 인물’이라는 비난을 견뎌야 했고요. 푸틴 역시 미국 정치 시스템을 분열시키는 데 기여했다는 의혹의 중심에 섰습니다. 양국 정상은 서로를 ‘도구’로 이용하면서도 ‘진정한 파트너’가 될 수는 없었던 겁니다.

그럼에도 푸틴은 재선에 성공한 트럼프에게 다시 손을 내밀었습니다. 바이든 행정부의 강경한 대테러 정책 아래 국제적 고립이 심화되는 상황에서 푸틴에게 트럼프는 다시금 ‘활용 가능한 동아줄’로 보였을 가능성이 큽니다. 러시아에 트럼프의 재등장은 단지 미국 국내 정치상 변수에 그치는 게 아니라, 서방 견제를 완화할 수 있는 외교적 기회이기도 하거든요. 실제로 트럼프의 대통령 당선 이후 미국과 러시아는 (우크라이나를 배제한 채) 우크라이나 전쟁의 종식과 양국 관계 복원을 위한 외교 채널을 가동시키도 했습니다. 바이든 전 미국 대통령이 그렇게 애를 써도 안됐던 일이 일사천리로 단번에 진행된 거죠.

그렇기에 푸틴은 언어가 아닌 이미지를 선택한 것만 같습니다. 초상화 한 점으로도 이 모든 복잡다단한 메시지가 전달되는 법이거든요. 정치적 우호나 복귀 지지라는 노골적 제스처보다는 훨씬 더 은밀하고 효과적인 방식이었던 셈이죠.

때론 그림이 말보다 오래 남습니다. 무엇보다 모호하고요. 그래서 강합니다. 공식 입장 없이도 정치적 수면 위에 인물을 띄우는 기술, 어쩌면 푸틴은 이 게임에 능한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런 이유로 이 그림을 단순한 선물로 바라봐선 안 됩니다. 그림이 오간 시기와 전달된 방식, 그 안에 담긴 이미지의 정체성까지 그 자체로 ‘사건’이자 ‘메시지’인 것이죠. 푸틴은 이미 트럼프에게 전한 한 점의 그림, 그다음 장면을 준비하고 있을 겁니다.

<참고자료>

Artist behind Trump portrait gifted by Putin says he hopes it brings peace, Reuters.

Russian artist reveals portrait Putin commissioned him to make as gift for Trump, Sophia Kishkovsky, The Art Newspap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