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직기자 출신이 쓴 신간 ‘피고인 김재규’
“다수 국민 희생 막으려 각하 한 사람 희생”
10·26은 민주주의 회복 위한 정당방위
[헤럴드경제=김현경 기자] “우리나라는 자유민주주의 국가여야 한다. 이것은 건국의 이념이요, 우리의 국시다. 수없이 많은 국민들이 희생을 치르고 전체 국민의 수난을 당하고 지켜온 자유민주주의다. 무슨 이유로든 이것은 말살될 수가 없다.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대통령이라도 자유민주주의를 지킬 의무와 책임은 있어도 이것을 말살할 권한은 절대 있을 수 없다.”
탄핵 시계가 빠르게 돌아가고 있다. 윤석열 대통령을 탄핵에 이르게 한 것은 때아닌 ‘비상계엄’이었다. 계엄은 과거 군부 시절을 떠올리게 했고, 국민들에게 독재와 대규모 살상의 공포를 불러일으켰다.
대통령의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던 1970년대에도 계엄 체제에 남몰래 반감을 품은 이가 있었다.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을 암살한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다.
1980년 동아일보 해직 기자 출신으로 대통령자문 정책기획위원, 국회의원을 지낸 저자는 신간 ‘피고인 김재규’에서 10·26 거사의 비공개 재판 법정 증언록을 해부해 그날의 진실을 밝히고자 했다.
두 발의 총탄으로 강고하던 유신을 한순간에 무너뜨린 김재규는 법정 진술에서 “민주주의 국가에서 모든 사람의 목숨은 똑같은 것이다. 다수 국민의 희생을 막기 위해 나의 가족과도 같은 각하 한 사람을 희생시킬 수밖에 없었다. 야수의 마음으로 유신의 심장을 쏘았다”고 밝혔다.
1972년 10월 비상계엄과 함께 선포된 유신 체제로 민주주의가 말살됐고, 유신 헌법은 국민을 위한 것이 아니라 박정희의 영구 집권을 위한 헌법임을 깨닫고 회의를 느낀 것이다.
그는 부마민주항쟁을 보고 유신 체제에 대한 저항과 끌어오르는 민심을 박정희에게 전하며 체제 완화를 여러 차례 건의했다. 하지만 당시 박정희는 오히려 “서울에서 사태가 발생하면 발포 명령을 내가 직접 내리겠다. 대통령인 내가 직접 명령하는데 누가 막겠느냐”며 강경하게 나갔다. 이대로 가면 무수한 국민이 희생될 것이라고 우려한 김재규는 박정희와 국민의 자유·민주주의가 양립할 수 없다고 판단, 결국 거사를 결심했다.
김재규는 “이승만 대통령과 박정희 대통령을 비교할 때, 이승만 대통령은 그만둬야 할 때 그만둘 줄 알았다. 그러나 박정희 대통령은 절대로 그만두지 않는다. 마지막까지 방어를 해낸다. 많은 희생자가 나도 자유민주주의는 회복되지 않는다. 더 이상 국민들이 당하는 불행을 보고만 있을 수가 없기 때문에 이 사회의 모순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 뒤돌아서서 그 원천을 두드린 것이다”라고 말한다.
저자는 김재규의 진술을 바탕으로 박정희 암살 이유를 크게 세 가지로 요약했다. ▷유신 독재에 대한 미국의 비판과 그에 반발해 반미 노선을 감행하려는 박정희에 따른 국가적 위기 ▷부마 민주항쟁이 단순한 재야 민주화 운동권이나 대학생 단체만의 행동이 아닌, 전국적인 ‘독재 반대’ 민심의 발화점이라는 분석 ▷궁정동 안가에 여자를 불러들여 술자리를 즐긴 박정희의 사생활 문제 등이다.
이러한 내용은 김재규 본인뿐만 아니라 당시 관련자들의 진술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박정희의 채홍사 역할을 했던 박선호 중앙정보부 의전과장은 거사에 휘말려 사형에 직면한 상황에서도 김재규를 원망하지 않고 오히려 옹호했다. 그는 법정에서 “부장님은 국민의 가려운 데를 긁어주고 아픈 데를 어루만져줄 수 있는 정확한 판단 하에서 일을 집행하시는 점에서 제가 존경하고 따랐다”며 “최소한 대한민국의 모든 국민이 갈망했던 민주 회복을 10~20년은 앞당겨놓은 분”이라고 진술했다.
변호인들은 변론에서 박정희와 김재규의 관계를 고대 로마제국의 지배자 시저와 브루투스에 비유했다. 브루투스도 자신의 상관이며 양아버지로까지 모셨던 시저에게 칼을 꽂았다. 그러고나서 “나는 시저를 사랑한다. 그러나 나는 로마를 더 사랑하기 때문에 그를 죽였다”고 외쳤다.
저서는 ‘중앙정보부장 김재규는 왜 대통령 박정희를 권총으로 쏘았는가?’라는 물음에 실증적인 해답을 줄 수 있는 책이다. 책에는 10·26 군사재판의 1심 공판 10회와 2심 공판 4회의 전 과정이 담겨 있다.
현직 군인이 아님에도 일반재판이 아닌 군사재판에 회부되고, 신군부의 압박 아래 속전속결로 사형을 선고 받은 김재규는 5·18 광주민주화운동이 한창이던 1980년 5월 24일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하지만 반 세기가 다 되도록 10·26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고, 유족이 2020년 청구한 재심은 올해 들어 심리를 몇 차례 한 채 법원의 판단을 기다리고 있다.
김재규의 거사가 ‘내란 목적 살인’인가, ‘국민의 희생을 막은 정당방위’인가라는 대척점 사이에서 저자는 후자에 무게를 싣고 있다.
“민주주의 국가는 헐렁헐렁하게 좀 여유가 있어야 한다. 구멍이 너무 완벽해서 어디를 눌러도 손톱이 들어가지 않으니 마지막 길로 치닿는 것 외에 방법이 없다. 민주주의 정치는 찬성이 있으면 반드시 반대가 있게 마련이다. 대통령도 99.9% 지지하는 것은 세상에 없다”는 김재규의 말은 45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다.
피고인 김재규/김재홍 지음/폴리티쿠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