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마모토성 천수각 야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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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전국시대를 평정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1592년 조선을 침략했다. 하지만 1598년 병사하면서 도쿠가와 이에야스 등 5명의 다이묘인 ‘오대로’(五大老 고다이로)는 일본군의 퇴각을 명령한다.

영화 ‘노량’을 보면 사쓰마번(현재 가고시마현)의 권력자인 시마즈 요시히로(백운식 분)가 ‘살마군’을 이끌고, 순천왜성에 있던 고니시 유키나가(김무생 분)를 도와주며 일본군의 퇴각을 지휘한다. 우리의 이순신 장군(김윤식 분)은 퇴각하던 일본군의 조총에 맞아 고귀한 생명을 거둔다.

고니시 유키나가와 함께 일본군의 선봉인 가토 기요마사는 조선 최고의 의병장인 ‘홍의장군’ 곽재우에게 밀려 울산 학성에서 왜성을 쌓고 버텼다. 물도 먹지 못해 말의 피로 연명했다. 결국 가토는 도망가면서 울산의 조선인 포로들을 대거 데려가 구마모토 성을 짓는데 동원했다.

임진왜란 왜장 고니시와 가토, 두 라이벌의 뒤바뀐 운명

KBS 사극 ‘징비록’(2015년)에서는 임진왜란의 두 왜장, 고니시 유키나가(이광기 분)와 가토 기요마사(이정용 분)을 사뭇 대조적인 캐릭터로 세밀하게 살려냈다.

가토는 불교 집안 하급 사무라이 출신으로 잔인하고 다혈질이다. 반면 기리시탄(기독교) 상인 집안에서 자란 고니시는 협상을 할 줄 아는 지략가다. ‘징비록’ 제작진은 두 캐릭터를 만들 때, 두 라이벌이 펼치는 숙명적인 대결과 심리, 처세술을 담은 엔도 슈사쿠의 역사소설 ‘숙적(宿敵)’을 참조했다고 밝힌 적이 있다.

임진왜란 당시만 해도 고니시가 가토에 비해 약간 유리한 면이 있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얼마나 신임을 얻느냐가 둘의 권력 사이즈를 결정했다.

하지만 히데요시 사후 ‘세키가하라 전투(동서합전)’가 벌어지면서 이 둘의 운명이 바뀐다. 고니시는 히데요시의 아들 히데요리를 지지하며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반대파인 서군에 섰다가 패하는 바람에 조리돌림을 당한 후 서군 대장인 이시다 미츠나리와 함께 참수당했다.

반면, 가토 기요마사는 동군인 도쿠가와 이에야스편에서 전쟁을 도와 구마모토를 영지로 얻었고, 구마모토 성을 지어 성주가 된다. 가토 기요마사도 아들까지만 구마모토 성주를 유지한다. 가토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사람이라는 느낌이 강해서 도쿠가와 막부에서 견제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도쿠가와 막부는 3대 구마모토 성주부터는 호소카와 다다토시에게 맡겨 호소카와 가문이 성주를 이어간다. 호소가와 가문은 구마모토현 지사를 2차례나 역임하고, 1990년대 비(非)자민당파로는 처음으로 일본 총리대신을 지낸 호소카와 모리히로를 배출했다. 호소카와 모리히토 전총리의 친할아버지인 호소가와 모리다치는 일제강점기 우리의 곡창지대인 전북 익산시(구 이리) 춘포면 만경강 일대의 대장촌에서 1500정보(1정보는 3000평)의 대농장을 경영하며 대규모 도정공장까지 짓고 쌀을 일본에 수탈해간 인물이기도 하다.

가토 기요마사는 구마모토성을 지을 때, 울산에서 데려온 조선인들을 동원한 것이 일본으로서는 독특한 ‘기요마사류’ 건축으로 특징지어지는 이유가 된다. 구마모토성을 가본 사람이라면 가토의 축성술에 한번 놀라게 된다. 내성과 외성을 거의 수직 높이로 쌓아올려 난공불낙의 요새로 만들었다. 구마모토성이 오사카성, 나고야성과 함께 일본 3대 명성이 된 것은 이유가 있다. 천수각에 올라가서 보면 ‘뷰’가 엄청나다.

메이지 유신의 3걸중 한 명인 사이고 다카모리가 유신 정부에서의 사무라이 처리 문제 등으로 이견을 보인 오쿠보 도시미치와의 마찰로 유신 정부의 요직을 내놓고 메이지 10년인 1877년 관군과 세이난 전쟁을 벌이는데, 구마모토성을 차지한 관군을 뚫지 못하고 실패하면서 “우리는 정부군에 진 게 아니라 청정(清正)공에게 졌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가토는 울산에서 학성과 서생포에도 왜성을 지었다. 구마모토성 주위를 도는 시로메구린(순환버스)을 타면 ‘울산마치’ 정류소가 지금도 있다. 가토는 울산 학성에서의 쓰라린 저항과 농성이 트라우마로 작용해 구마모토성 축조시 우물을 100개 넘게 팠고, 음식을 항상 가지고 다니게 했다는 말도 가이드가 해주었다.

가토는 우리에게는 조선을 침략한 적장이지만 일본에서는 임진왜란 공로자, 세키가와라 전투의 승자, 조선의 왕자인 임해군과 순화군을 생포하고 조명연합군과 맞선 함경도를 넘어 일본 무장으로는 최초로 만주 용정의 여진족 부락을 공격해 전공을 세운 장군으로 평가받고 있다. 구마모토성 입구에 세워진 가토의 큰 동상이 이를 상징한다.

데지마 전경

도쿠가와 막부의 폐쇄적 개방성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1603년 세운 일본의 3번째이자 마지막 막부(幕府)인 에도(도쿄) 막부는 마지막 쇼군(15대)인 도쿠가와 요시노부가 국가통치권을 일왕에게 돌려준 1867년까지 260년간 지속됐다. 이 기간동안 일본은 전쟁이 없는 시기다. 사무라이들이 칼을 들게 될 일이 없으니, 사케와 게이샤 문화, ‘스미마셍’ 문화 등이 만들어진 시기라고도 할 수 있다.

일본의 독특한 중앙집권적 봉건제도인 막번 체제는 근대적인 정부라고 할 수는 없다. 무가(武家) 정권 정도로 볼 수 있다. 이 때만 해도 조선은 왕과 의정부, 6부의 관료조직을 가진 정부 행태를 띠고 있었다. 그래서 조선은 ‘국가도 아닌’ 일본과 외교를 하고싶지 않았을 것이다.

일본의 도쿠가와 막부도 개방적이라기 보다는 폐쇄적이었다. 외모나 종교, 문화 등에서 선뜻 이질적인 서양을 받아들이기가 어려웠다. 특히 1637년 나가사키현에 위치한 시마바라(島原)에서 일어난 천주교도의 반란을 지역군으로 감당하기 힘들어 막부군까지 동원해 잔인하게 진압한 후에는 쇄국정책을 더욱 강화하고 있었다. 이 때 포르투갈 신부와 함께 배를 타고 아예 유럽으로 가버린 일본인 ‘기리시탄’(기독교인)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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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니 데지마

그럼에도 에도 막부의 경제발전과 도시화, 부유한 상인층의 등장은 필연적으로 개방을 잉태하고 있었다. 17세기후반~18세기초 성장한 서민계급들이 ‘괴로운 세상에서 뜬 세상으로’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발전시킨 ‘겐로쿠 문화’(元禄文化)가 문예, 학문, 예술 등에서 나타난 것도 외부와의 교류를 필요로 했다.

에도막부 시절은 폐쇄적이었지만 일본의 근대화에 필요한 물건이나 정보는 이 때 일본 전국으로 확산된다. 그 거점은 나가사키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데지마(出島)다.

나카사키현 서북부 사세보항에서 멀지 않은 섬 히라도항에 포르투갈 선박이 나타난 때가 16세기 무렵이다. 그래서 나가사키는 외래문물이 들어오는 ‘관문’(關門)이 됐다. 포르투갈인들은 조총을 가지고 왔고, 일본에 최초로 가톨릭을 전한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신부도 들어왔다. 이어 네덜란드 상인도 히라도 상관에 거주했다. 네덜란드 연합군은 말레이시아 말라카항에서 포르투갈과 이미 일전을 치르고 승리한 후, 대만을 거쳐 나가사키로 입항했다.

그렇게 되자 막부는 포르투갈인을 수용할 목적으로 25명의 유력한 나가사키 쵸닌(町人 도시 상공업자)들의 출자로 나가사키항 바로 앞에다 인공섬 데지마를 축조했다. 하지만 도쿠가와 막부시절 가장 큰 난인 시마바라의 난이 1637년에 발발하자 막부는 포르투갈인을 추방해버렸다. 데지마는 사람이 살지 않은 텅 빈 상태가 계속됐다. 데지마 건설시 출자한 쵸닌들은 임대료 수입이 막혔다.

데지마에 들어온 네덜란드 선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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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지마는 처음에는 바다속 부채골의 인공섬이었다.

인공섬 데지마 네덜란드 상관…근대화에 필요한 문물·정보가 모였다

포르투갈 함선의 내항이 금지되면서 쵸닌들의 항의와 함께 히라도에 있는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상관은 데지마로 이전했다. 그때부터 메이지 유신까지 200여년간 데지마에는 네덜란드를 통해 들어온 서양의 학문과 기술, 문화를 의미하는 ‘난가쿠(蘭學)’을 비롯해, 일본의 근대화에 필요한 물건이나 정보가 모여든다. 난학 뿐만 아니라 해시계 등과 같은 기술, 커피나 식물 등 서양의 문화가 전해졌다. 해외의 우수한 지식과 문화는 데지마를 통해 일본 전역으로 확산되어 갔다.

데지마는 축구장 2개 넓이보다 조금 큰 부채꼴 모양의 인공섬이다. 메이지 시대부터는 주변이 매립되어 바다에 떠있는 부채꼴이었던 원래 모습은 사라지고 육지처럼 돼있다. 현재 데지마는 관람객을 맞이하면서도 19세기초 모습을 복원하는 공사가 한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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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지마의 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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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지마의 수리중인 건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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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지만 안내인

데지마에 들어가면 많은 창고를 볼 수 있다. 수입품인 설탕을 보관하던 창고, 향신료로 쓰이는 정향나무 창고, 에도시대 일본에서 생산된 구리를 보관하던 창고 외에도 상관직원들이 사용하였던 취사실과 선장이 묵었던 카피탄 주택, 오모테몬 문으로 출입하는 사람들을 감독하기 위한 데지마 관리자인 오토나가 대기했던 오토나 초소 등을 둘러볼 수 있다.

특히 ‘난학관’으로 불리는 네덜란드인 수석 서기관 주택은 장부 등의 필기를 담당하는 네덜란드인 서기장이 살았던 건물이다. 내부에는 네덜란드를 통해 일본에 들어온 유럽의 학술 문화 기술인 ‘난학’이 소개돼 있다.

당시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그림들도 적지 않다. 에도시대의 모습이 그려진 그림에는 네덜란드인과 하인인 인도네시아인이 그려져 있다. 당랑관 연회도 두루마리 그림에는 다다미 위에 테이블을 두고, 서양식 식사를 하고 있다. 마루야마 유곽(丸山遊廓)에서 온 유녀의 모습도 보인다. 네덜란드인의 데지마에서의 식사, 스포츠, 음악, 동물의 모습까지 그려져 있는데, 고기를 먹기위해 소를 해체하는 그림도 있다.

일본은 7세기 덴무천황이 국교인 불교 교리를 내세워 살생금지령을 내린 이후 메이지 유신직전까지 무려 1200여년간 육식금지령이 내려졌다. 하지만 나가사키만은 소, 멧돼지, 양, 닭, 사슴, 오리 고기를 자유롭게 먹을 수 있었다. 네덜란드와 포르투갈 사람들의 식문화에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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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지마의 건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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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덜란드인 식사 모습 모형

나카사키에는 포르투갈 가톨릭 신자들이 사계제일(四季齊日, 포르투갈어는 텐포라)에 먹을 수 없는 고기의 대용품으로 생선과 채소 등을 기름에 튀겨 먹는 ‘텐포라’(일본식 발음 덴뿌라)와 황족과 화족(귀족)만 먹을 수 있는 카스텔라도 유입됐다. 천년이상 먹지 않던 소고기가 일본인에게는 낯설 수밖에 없어 절충식인 스키야키(전골 스타일)가 탄생했다.

데지마에 네덜란드 상관이 있었던 218년동안 157명의 상관장(카피탄)과 150여명의 상관 전속의가 부임했다고 한다. 대다수가 1년 정도 짧게 체류하는데, 헨드릭 되프는 국가사정으로 19년이나 나가사키에 체류하면서 네덜란드 사전을 편찬했다. 폰 지볼트와 칼 페테르 툰베리, 엥겔베르트 켐벨은 전속의 또는 난학 강사로서 일본에서 서양학문과 문화를 전해준 데지마 3대학자로 꼽힌다.

나가사키에는 보통 1년에 한 번, 2척의 네덜란드 선박이 내항했다. 계절풍으로 인해 여름인 음력 6~7월(양력 7~8월) 입항하고 데지마에 머문 후 음력 12월쯤 돌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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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지마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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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지마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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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지나 내의 도자기

에도 시대 초기 네덜란드로부터 주로 수입된 품목은 생 명주실, 주요 수출품목은 은이었다. 에도시대 중기 이후에는 방모직물, 벨벳, 후추, 설탕, 유리제품 등을 수입하고 구리와 장뇌, 도자기 옻칠 제품 등을 수출했다. 낙타나 코끼리, 타조 등 일본에서 보기 힘든 동물들도 나가사키에 들어왔다. 나가사키는 외국문물과 합쳐지는 곳이었다. 물체의 무게를 정확하게 잴 수 있는 저울과 돈을 계산할 때 사용하던 주판 등도 진열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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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덜란드인 식탁

‘소양이’ 보다는 ‘대양이’, 세상을 읽는 감각이 중요

에도막부는 기본적으로 쇄국정책을 추진하고 있어 데지마에서 네덜란드인과 일본인이 거래를 할 때에는 일본쪽만 네덜란드어 통역관을 대동할 수 있었다. 반면, 네덜란드인들은 일본어 통역사를 데리고 올 수 없었다. 그렇다면 네덜란드인들은 거래의 가장 기본적인 요소들, 예를 들면 흥정할 때의 가격 정도만을 듣고 결정하는 것 외에 비하인드 스토리는 통역이 없어 알 수가 없었다. 이 점 또한 에도 막부의 ‘폐쇄적 개방성’이라 할 수 있다.

에도막부 말기에 접어들면서 외세와 불평등조약을 맺은 막부에 대한 불만이 팽배해지면서 메이지 유신의 기운이 태동했다. 하지만 에도막부 말기에도 계몽사상가와 사회개혁가들은 단순히 ‘존왕양이(尊王攘夷·일왕을 받들고 외세를 배격한다)’가 아니라 ‘우세한 서양의 기술을 배워 서양을 극복하자’는 내재적 발전론도 지니고 있었다. 제1차 아편전쟁(1840년)부터 서구열강인 영국에 당하는 청나라를 보면서 일본은 자신의 미래를 구상하며 서구열강에 피해를 보더라도 보상책을 마련해놓자는 생각에 이르게 됐다.

당시 우리는 서양이라면 무조건 배척하는 ‘소양이’(小攘夷)를 선택했지만, 일본은 서양의 우세한 기술을 배워 서양을 제압하자는 ‘대양이’(大攘夷) 전략을 썼다. 그 선택의 차이가 어떠했는지는 그후의 역사가 잘 말해준다. ‘소양이’와 ‘대양이’를 구분하고 어떤 걸 선택할지에 대한 식견을 갖추게 된 것은 이미 폐쇄속의 개방성을 보인 에도막부의 나가사키에서 시작됐는지도 모른다. 에도 막부는 메이지 유신 이전에도 미국과 유럽에 사절단을 보낸 적이 있다. 유신 직후 메이지 4년에는 이와쿠라 사절단을 구성해 서양 제도와 문물을 배우고 조사하기 위해 1년9개월간 미국과 유럽 12개국을 방문하고 돌아왔다. 역사의 중요한 국면에서는 무엇이 우리에게 유리하고 필요한지, 무엇이 불리하고, 불필요한지를 잘 파악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