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고전번역원의 박세당 차남 이야기
[헤럴드경제=함영훈 기자] 강성 개혁정치인이자 실학자인 박세당(1629~1703)은 주자의 학설, 송시열의 국정이론을 정면으로 비판하던 장관(판서) 출신 실학자이다. 강직한 성품으로 유명해 유배도 여러 번 갔다. 굳센 필법으로 학문에도 뛰어나 산림경제, 사변록, 사서집주 등의 저서를 남겼다.
아버지가 강직하면, 아들의 품성이 강직하기도 하고, 부친의 기에 눌리거나 반대 심리가 작용해 아주 유연해지기도 한다. 박세당의 차남 태보(1654~1689)는 강직한 듯 하면서도, 낭만주의자의 면모가 나타난다.
박태보 역시 조선의 문신으로 이천현감, 암행어사, 광역단체장인 파주목사 등을 지냈는데, 많은 인물소개들을 보면, ‘매우 잘 생긴 로맨티스트 선비’로 묘사된다.
박태보를 흠모해 사모하는 마음을 전한 여인이 평생 수절하다가, 인현왕후 폐위를 반대하여 유배 가던 중 죽음을 맞이한 박태보의 임종을 지키고, 사후 박태보를 배향하는 서원이 세워지던 날, 이 여인이 서원에서 자결하였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어느 집 여인인지 호주의 이름 까지 공개돼 팩트에 가까운 것으로 해석된다.
박태보는 장문의 오언절구를 통해 술과 관련된 시(詩)를 써 눈길을 끈다. 11일 한국고전번역원의 이메일 칼럼, 김효동 연구원의 글에 따르면, 그의 ‘정재집(定齋集)’ 중 ‘유종원의 음주 시를 본떠 짓다(擬柳子厚飮酒)’라는 글은 이렇다.
‘기쁠 땐 술 마시지 말아야 하니/너무 즐거우면 실수가 많아지네/걱정스러울 땐 술 마시지 말아야 하니/취하고 나면 깊은 근심이 되네.
아무 일 없는 때라야/술 마시기 좋으니/마음이 편안한 뒤에/술도 오래 즐길 수 있네/시원한 바람 북쪽 창에서 불어오고/밝은 달은 남쪽 창으로 슬며시 비추네.
한가로운 흥취에 은자는 고무되어/술독 열어 새로 빚은 술 담아 오네/ 술잔 들어 홀로 마시니/어찌 친구가 꼭 필요하랴/얼근하게 기분 좋으면 그만이니/몇 잔을 마시는지는 따질 것 없네.
피부는 술 때문에 매끈해지고/ 마음은 술 때문에 너그러워지네/ 질박하게 순수한 모습으로 돌아가/ 여유롭게 제 수명대로 살아야지.
쩨쩨한 선비들 자질구레한 규범에 구애되어/ 침 흘리면서도 구미 당기지 않는 척하고/ 방탕한 자들 끝내 술독에 빠져/ 머리끝까지 흠뻑 취한 저 모습이란!
굴원도 아니고 순우곤도 아니니/ 이러한 이치 누가 이해하랴.’
얼핏 보면 전형적인 낭만주의 시인 같다. 술 때문에 피부가 매끈해진다는 부분은 과장된 것 같기도 하다.
김효동 한국고전번역원 연구원은 그에게 하나의 이미지를 씌우기 보다는 보다 종합적으로 분석한다.
20대 초반 장원 급제하여 순탄한 관직 생활을 이어 가던 박태보는 자신이 출제한 과거시험 문제가 임금을 비판하는 것이라는 지적을 받으면서 북쪽 변방으로 유배를 가게된다. 이 술 관련 시는 이런 배경에서 지어졌다.
김 연구원은 고전해석칼럼에서 ‘이 시는 술을 즐기는 풍류라기보다 오히려 그의 처신에 대한 다짐으로 읽힌다. 너무 이른 나이에 인생의 큰 굴곡을 겪은 그가 자신의 처신을 술자리의 중도에 비유하여 다짐한 말은 아닐까 추측하게 된다’고 했다.
김 연구원은 이어 ‘2024년 12월 우리는 매우 위험한 주정꾼들을 목도하고 있다. 아집과 독선의 폭탄주에 주량을 넘겨 버린 자도 있고, 모든 사람이 깨어 있을 때 권력의 취기에서 여전히 깨어나지 못한 자들도 있다. 시인이 말한 것처럼 적당한 취기는 마음을 너그럽게 하고 몸을 윤택하게 할 수 있다. 취하지 않는 취기는 모두에게 안전하다. 우리 사회가 하루 속히 굳건한 민주주의의 울타리를 재건하여 모두가 안전하게 취할 수 있는 따뜻한 연말을 되찾길 기원해 본다.’고 글을 맺었다. [취재도움=한국고전번역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