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일 집회 현장 수놓은 알록달록 응원봉
‘탄핵 정국’에 목소리 내는 K-팝 팬덤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소녀시대의 ‘다시 만난 세계’부터 로제의 ‘아파트(APT.)’, 데이식스의 ‘웰컴 투 더 쇼’, 지드래곤의 ‘삐딱하게’까지….
세계가 사랑한 K-팝 스타들의 노래가 흘러나왔고, 팬덤 문화의 상징인 형형색색의 K-팝 응원봉이 쉴새없이 발광하며 하나가 됐다. 샤이니의 ‘슈팅스타’, NCT의 ‘믐뭔봉’, 뉴진스의 ‘빙키봉’, 스트레이 키즈의 ‘나침봉’을 든 20대 K-팝 팬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거리로 나왔다.
지난 7일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에서 열리 ’촛불대행진‘에는 나이와 성별을 초월한 대한민국 국민들이 윤석열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 가결을 요구하기 위해 모여들었다.
이날 집회엔 소위 MZ(밀레니얼+Z)로 불리는 20대의 젊은 여성들이 특히나 많이 모였다. 분노에 가득 차 심각하고, 참담함이 넘실댈 줄 알았던 집회 현장은 K-팝과 K-팝 응원봉과 함께 활기를 띠었다.
외신들도 이러한 모습을 주목했다. 뉴욕타임스는 “토요일 국회 앞 시위가 최대 규모를 예고한 가운데, 축제와 같은 분위기에서 시작됐다”고 보도했다.
지난 3일 계엄 선포, 다음날 계엄 해제 이후 서울 도심 곳곳에서 열리고 있는 집회에선 다양한 K-팝이 흘러나왔다. 소녀시대의 ‘다시 만난 세계’는 시위와 집회 현장의 단골곡이다. 이 곡은 2016년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 집회에서도 울려 퍼졌다. AFP통신는 “유명 걸그룹의 경쾌한 데뷔곡인 이 노래는 정치적인 내용으로 여겨진 적이 없지만, 2016∼2017년 탄핵된 박근혜 전 대통령에 대한 반대 집회에서 젊은 여성 시위대의 인기를 끌었다”고 설명했다.
전 세계 곳곳에서 불의와 불합리에 목소리를 내온 집회 현장에선 K-팝이 흘렀고, K-팝 팬덤은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내왔다. 2019~2020년 사이 이러한 행동이 두드러졌다.
2020년 태국 반정부 시위에서도 미래를 희망하는 세대들을 통해 소녀시대의 ‘다시 만난 세계’가 흘러나왔고, 같은 해 미국 대선 트럼프의 유세 현장에서 K-팝 팬덤은 ‘노쇼’로 단체행동을 해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 미국의 흑인 생명권 운동 ‘블랙 라이브즈 매터(BLM)’ 시위를 지지하며 극우 진영의 해시태그인 ‘화이트 라이브즈 매터(whitelivesmatter)’를 K-팝 스타들의 영상으로 밀어낸 것도 세계의 K-팝 팬이었다. 2019년 10월부터 시작된 칠레 반정부 시위에도 K-팝 팬들이 대거 지원했다.
K-팝이 세계 곳곳의 정치 무대에 소환되고, K-팝 팬덤이 정치적 행동의 아이콘이 된 것은 K-팝의 태생과는 무관하다. 하지만 K-팝이 한국에서 태어난 ‘변방의 음악’에서 아시아를 넘어 유럽, 아메리카 대류까지 뻗어나가 주류를 정복한 과정은 이 땅의 소수자, 비주류, 약자를 건드렸다.
다양한 인종, 자유주의적 경향이 강한 세대로 구성된 K-팝 팬덤의 연대와 정치적 행동은 국내 K-팝 팬덤과는 차별화된 모습이기도 했다. 심지어 국내 팬덤의 경우 자신이 좋아하는 스타들의 정치적 발언과 행동을 우려하던 시절도 길었다. K-팝 스타들과 기획사들은 의도적으로 ‘정치적 표백’ 상태를 유지해왔다. 이제 팬덤은 달라졌다.
현재 국내 K-팝 팬덤, 그 중 MZ세대 여성 팬덤은 꾸준히 사회적 목소리를 내는 데에 동참해왔다. K-팝 산업이 기후위기에 미치는 악영향에 반대하며 지속가능한 K-팝을 위해 각성을 촉구했고, 좋아하는 아티스트에게 도덕적 결함과 치명적인 사건이 발생했을 때 무조건적인 옹호보다 질책과 사과 요구에 앞장섰다.
누구도 예상 못한 초유의 계엄 사태로 민주주의가 위기를 맞은 현재 이들의 시선은 정치로 향했다. 거리로 나선 K-팝 팬덤은 수평적인 소통, 표현의 자유를 강조하고 억업과 증오에 맞섰다. 하향식 권력에 대한 저항과 정치적 선택과 자유가 보장되는 사회를 위한 목소리를 내는 새로운 ‘진보의 주역’이었다.
AFP 통신은 K-팝을 “집회의 필수요소(fixture)”라며 이날의 시위를 “K-팝이 흘러나오는 시위 현장에는 참가자들이 즐겁게 뛰어다니고 다양한 응원봉과 LED 촛불을 흔들며 마치 댄스파티를 떠올리게 했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