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븐 사우드 사우디 초대국왕 ‘석유무기화’로 영향력 확대 전세계 석유매장량 25% 차지 금융·무기시장서 막강한 ‘큰손’
압둘 아지즈 이븐 사우드(이븐 사우드) 사우디아라비아 초대 국왕은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왕국을 세운 주인공이다. 그와 사우디왕국을 세계 무대에 우뚝 세워준 무기는 바로 ‘석유’였다.
이븐 사우드 국왕이 아라비아 반도를 처음 통일했을 때만 해도 수입이라고는 ‘메카 성지 순례’ 뿐이이었다. 하지만 1933년 5월 미국의 SoCal(Standard Oil of California)사와 양해각서를 체결하면서 본격적인 원유채굴에 들어가면서 ‘검은 황금의 제국’의 건설이 시작된다.
제 1단계는 ‘개발’이다. 사우디 정부는 SoCal과 현재 국영석유회사인 ‘아람코’의 전신인 ‘California-Arabian Standard Oil Co.’를 합작형태로 설립한다. 하지만 SoCal은 석유 시추에 실패하고 미국의 텍사코(Texas Oil Company)가 이 합작회사의 지분 50%를 인수했다. ‘아람코(Arabian American Oil Company)’라는 이름은 1944년 붙여진다. 1945년 이븐 사우드는 사우디 석유에 대한 미국의 독점권을 인정하고, 무기수입과 경제적ㆍ상업적ㆍ금융적 지원을 얻는 ‘퀸시협정’을 체결했다. 석유탐사권을 발판으로 알 사우드는 국가수입 규모를 1920년 700만 달러에서 1939년에는 2000만 달러로 끌어올리며 왕국의 토대를 튼튼히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븐 사우드의 석유 무기화는 2단계 ‘공유’로 발전한다. 1949년 아람코가 사우디에 내는 로열티보다 텍사코가 미국에 내는 세금이 많다는 보고서를 빌미로 석유 국유화를 선포했다. 당시 트루먼 미국 대통령은 부랴부랴 이븐 사우드국왕을 설득해 50 대 50으로 수익을 배분하는 협상안을 마련했다. 미국이 사우디 원유에 의존할 수 밖에 없게 된 처지를 교묘히 활용한 전술이 통한 셈이다.
3단계는 2대 사우드 빈 국왕 때 석유수출국기구(OPEC)에 참여, ‘조정력’을 얻으면서 이뤄진다. OPEC의 출발은 1960년 9월 이라크 정부 초청으로 이뤄진 이란, 이라크, 사우디아라비아, 쿠웨이트, 베네수엘라 등 5대 석유수출국 간 바그다드회의다. 일종의 국제석유 카르텔인 셈이다. 세계 최대 산유국인 사우디는 오펙을 통해 서방과의 협상력을 높였고, 오펙 내 최대 산유국 지위를 이용해 산유국들의 이너서클에서 영향력을 키울 수 있었다.
석유 무기화의 4단계는 3대 국왕인 파이살 빈 국왕 때 ‘힘의 역전’이다. 1973년 아랍과 이스라엘간 ‘욤 키푸르(Yom Kippur)’ 전쟁과 뒤이은 1차 오일쇼크를 활용해 사우디 정부는 미국 정부를 압박, 아람코 지분을 60%까지 높인다. 50대50의 균형을 깨뜨리고 40년만에 서방에 대해 자국 원유의 주도권을 확보한 셈이다. 그리고 이 때부터 원유의 거래화폐는 미국 달러로 통일된다.
제4대 칼리드 빈 국왕 때인 1980년 사우디 정부는 아람코를 완전 인수하면서 제5단계 국영화, ‘무기화’가 완료된다.
미국에서 셰일가스가 개발되기 전만해도 사우디는 전세계 석유매장량의 약 25%를 차지하는 것으로 추정됐다. 이 석유는 국가, 즉 왕실 소유다. 글로벌 금융위기 전까지 신흥국 경제성장이 원유를 비롯한 ‘원자재 수퍼사이클’을 일으키면서 ‘석유는 곧 힘’이 됐고 사우디 왕실의 부(富)도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미국 달러화의 기축 통화 지위가 공고해진 덕분에 환율변동에도 끄떡없는 경제체제를 이뤄냈다. 사우디는 ‘오일머니(petrodollar)’로 국제금융시장은 물론 자산시장, 무기시장 등에서 ‘큰손’으로 부각하며 막강한 영향력을 구축하게 된다.
국제유가가 한창 치솟던 2002년 국립경찰이 복장불량을 이유로 여중생 3명의 죽음을 방관했을 당시 이를 공식적으로 애도하거나 비판하는 국가는 없었다.
문재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