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럴드경제=주소현 기자] “송장, 테이프도 안 뜯고 상자 채로”
식재료, 가전제품은 물론 세제, 휴지 등 생필품까지, 클릭 한번으로 집 앞에 오는 온라인 쇼핑이 생활 속에 자리 잡으면서 늘어난 게 바로 종이 상자, 폐지 쓰레기다. 집 앞 재활용 쓰레기장이나 골목 모퉁이마다 켜켜이 쌓인 종이 상자들을 마주할 수 있다.
버리는 방법도 비교적 쉽다. 송장이나 테이프 등을 떼어내는 거다. 이 상자를 납작하게 접어 쌓아두면 더 좋다. 다른 재활용 쓰레기에 비해 내용물을 비우거나 헹굴 필요가 없어 버리기도 쉬운데도, 덕지덕지 무언가 붙은 채로 버려져 있는 경우가 다수다.
상자를 정리하지 않고 버리면, 종이 외 재질의 이물질로 인해 재활용을 하기 어려워진다. 더 큰 문제는 폐지를 줍는 노인들의 건강이다. 하루 종일 종이 상자를 줍고 이물질을 떼고 접어 묶는 과정에서 허리, 무릎 등을 상하기 일쑤라고 한다. 이에 종이 상자를 버릴 때에 끈으로 묶어서 버리자는 시민단체의 제안이 나왔다.
녹색병원 노동환경건강연구소에 따르면 폐지 수집 노인들은 하루에 평균 909.9회 허리를 30도 이상 숙인다. 상자를 밀고 당기는 건 평균 226.8회 반복한다. 평균 78.8세의 폐지 수집 노인들이 하루 8시간 폐지를 줍는다고 가정했을 때 나온 수치다.
소일 거리와 벌이가 필요한 노인들에게 폐지 줍기는 문턱이 낮은 일이다. 그러나 일의 강도는 꽤 높다. 국제환경연구·공중보건저널에 따르면 폐지 수집의 근골격계 질환 발생 유병율이 일반 인구 대비 약 10.42배, 육체노동자 대비 4.65배 높다.
상자를 비롯한 종이 쓰레기 재활용에 노인들의 기여가 절대적이다. 지정된 업체에서 수거하는 아파트나 공장 등 대단위 배출원과 달리, 주거 및 상업 지역에서는 각 문 앞에 쓰레기를 내놓는다. 적은 양씩 곳곳에 흩어져 있는 쓰레기들을 걷으려면 걸어 다녀야 하는데, 이 역할을 대부분 노인이 맡고 있다.
이에 대해 서울연구원은 “서울에서 발생하는 재활용품의 80~90%는 일명 ‘고물상’이라 불리는 민간 재활용품 수집업자들에 의해 수거돼 재활용 경로로 흘러 들어간다”며 “재활용품 수집 노인은 재활용품 시장 생태계로 재활용품이 우선 진입하기 위한 수집 및 평가 과정에 개입하고 재활용품을 고물상에 공급하는 역할의 한 축을 맡고 있다”고 설명했다.
폐지 수집 노인들의 육체적 부담을 덜어주는 방법은 간단하다. 올바른 재활용을 위해 해야하는 일, 상자에 붙은 테이프와 송장을 떼고 버리는 거다. 여기에 하나 더, 상자를 납작하게 펼쳐 포갠 뒤 노끈 등으로 묶는 것까지 하면 완성이다. 이렇게 내놓은 쓰레기는 폐지 수집 노인들이 수레나 자전거 등에 바로 실을 수 있다.
이에 폐지 수집 노인들의 여건 개선을 위해 전태일의료센터 건립위원회는 ‘이어-줄’ 캠페인을 제안했다. 쓰레기를 ‘잘 버리는’ 시민행동을 통해 폐지 수집 노동자의 최소한의 안전 및 건강에 대한 보호장치까지 마련하자는 취지다.
집에 있는 어떤 끈으로도 종이 등을 묶어 내놓을 수 있지만, 이들은 전용 끈을 마련해 만들어 배포 중이다. 밝은 색의 리본끈, 고휘도 반사판, 메모판으로 구성돼 있다. 판매 수익금은 전액 폐지 수집 노동자를 위한 노동작업환경적인 운반구 보급 및 건강권 지원 등에 쓰일 예정이다.
캠페인을 제안한 임상혁 녹색병원장은 “주황색 리본끈으로 폐지를 묶으면 마치 안전을 선물하는 것 같다”며 “쓰레기를 잘 버리는 행동만으로 덜 아프고 덜 다칠 수 있는 환경을 만들 수 있다면 당장 해볼 만 한 일”이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