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토 곳곳 방어기지서 신속 출격

스웨덴만의 작전환경 맞춤형 기체

짧은 이륙거리·높은 기동성 특징

영국·태국·체코 등서도 현재 운용

중립국 지키는 자객의 비수, JAS-39 그리펜 전투기

1813년, 나폴레옹과의 전쟁을 마친 뒤 지금껏 단 한 번도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리지 않은 나라 스웨덴은 올해 2월 27일 북대서양조약기구 NATO의 32번째 회원국이 되면서 210년 넘게 유지해 온 중립국의 지위를 버리고 다자안보체계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제1·2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도 중립국 지위를 유지했던 스웨덴의 비결은 강력한 국방력을 바탕으로 한 무장중립에 있었습니다.

강력한 병역제도와 전차, 장갑차는 물론 전투기까지 생산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면서 그 힘을 바탕으로 독일과 연합군 사이에서 교묘한 줄타기를 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에는 핵전쟁이나 냉전의 소용돌이에 빨려 들어가지 않기 위해서 스웨덴만의 전략을 마련합니다.

영토 곳곳에 항공자산을 숨겨놓고 적의 침입이 발생하면 어디서든 출격해 기습하고 소모전을 벌여 적의 기세를 꺾는 일종의 고슴도치 전략이 그것입니다.

이런 전략을 구사하기 위해 스웨덴은 ‘드라켄’과 ‘비겐’이라는 전투기를 만들었습니다.

전투기를 만든 회사는 우리에게 자동차로 더 친숙한 사브(SAAB)입니다. 하지만 1960~70년대를 풍미했던 이들의 교체시기가 다가오자 스웨덴 공군은 적이 침공했을 때 방어적 분산 기지 계획을 더 잘 수행할 수 있는 차세대 전투기를 원했습니다. 스웨덴 공군이 원했던 스펙은 ‘비겐보다 작지만 기동성과 속도가 높고 짧은 활주거리에서도 이륙이 가능하며 적국이 공격했을 때 스웨덴 전역에 있는 소규모 방어기지에서 출격할 수 있는 기체’였습니다.

중립국 지키는 자객의 비수, JAS-39 그리펜 전투기

스웨덴 정부는 이 같은 요구조건을 충족할 수 있는 전투기를 탐색했습니다. 처음에는 F-16이나 F/A-18, F-20, 미라주2000 같은 당시 최신 전투기들도 검토했던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하지만 결국 스웨덴 정부는 사브에 새로운 전투기 개발을 맡겼습니다. 1979년 스웨덴 정부는 공대공(Jakt)과 공대지(Attack), 정찰(Spaning)임무를 수행할 수 있는 다목적 전투기 개발 연구를 시작했습니다. 그리핀 앞에 붙은 JAS-39의 JAS는 바로 공대공, 공대지, 정찰을 뜻하는 스웨덴어의 앞 글자에서 따 온 겁니다. 그리고 그리펜이라는 이름은 우리가 국민공모를 통해서 결정한 ‘보라매’처럼 공모를 거쳐서 정해졌습니다. 사브 로고에 새겨져 있는 상상속의 동물 그리핀의 스웨덴어 ‘그리펜(Gripen)’이 채택됐죠.

스웨덴 국방부 산하 국방물자관리국(FMV)은 사브에서 제출한 ‘프로젝트2015’설계를 국방부에 추천했습니다. 이 전투기를 만들기 위해 사브 스카니아와 LM에릭슨, SRA, 볼보가 합작회사를 만들었습니다. 이들은 제너럴일렉트릭(GE)사의 F404엔진을 볼보가 면허생산한 RM-12엔진을 추진기관으로 선정했고 디지털 비행제어 시스템과 카나드를 부착한 단발엔진, 단좌식 경전투기 제작을 추진했습니다.

1982년 6월 30일, 스웨덴 의회는 정부의 계획을 승인했고 국방물자관리국은 사브와 257억 크로나, 약 31억1200만달러의 계약을 맺고 5대의 프로토타입과 초기 생산물량 30대를 발주했습니다. 첫 시제기가 출고된 날짜는 1987년 4월 26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출시 직후 시작하려던 시험비행은 비행제어시스템 문제로 18개월 동안 지연됐습니다. 때문에 이듬해인 1988년 12월 9일 초도비행을 시작했죠.

51분 동안 진행된 첫 비행이후 약 2달 뒤인 1989년 2월 2일, 6번째 시험비행 도중 처음 문제로 지적됐던 비행제어시스템 문제가 결국 드러났습니다. 그리펜 시제기가 스웨덴 남부 린셰핑 공항에서 착륙하던 중 돌고래처럼 다시 튀어 올랐다 떨어지면서 왼쪽 날개를 활주로에 부딪치면서 추락하고 말았습니다.

사브는 미국 회사의 도움을 받아가며 소프트웨어를 수정했고 사고 15개월 후에 시험비행을 재개했습니다. 그렇게 1990년과 1991년에는 대체로 남은 5대의 시제기가 시험비행을 수행할 수 있었습니다.

덕분에 1992년 6월 스웨덴 공군은 사브와 110대의 그리펜 도입 계약을 채결했고 같은 해 10월 10일 양산기체의 첫 비행 이후 1994년 스웨덴 공군에 인도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1993년 8월 8일 스톡홀름 워터 페스티벌 축하비행 때 또 한 대가 추락해 실제 운용은 1996년 6월부터 시작했습니다. 그리펜은 최소한의 인원으로 신속한 무장장착과 기본정비가 가능한 기체입니다. F404 엔진을 그냥 써도 될 텐데 볼보는 왜 면허생산을 하면서까지 RM-12엔진을 만들었을까요? 그 이유는 바로 엔진의 무게와 부품 수를 줄이기 위해서였습니다.

중립국 지키는 자객의 비수, JAS-39 그리펜 전투기

뿐만 아니라 전투기 설계와 제작 전반에 걸쳐 간편한 정비와 짧은 이륙거리, 동체 크기 대비 큰 탑재 중량, 높은 기동성능 등을 반영했죠. 그리펜은 애초에 스웨덴 곳곳에 숨겨놓은 소규모 기지에서나 임시활주로 등에서도 신속하게 이륙해서 적의 공격을 무력화 할 수 있어야 한다는 목적으로 만들어진 항공기입니다.

때문에 폭 16m 길이 800m의 활주로에서도 이륙할 수 있고, 공대공 무장을 기준으로 10분 이내에 재보급과 재무장이 가능하죠. 또 동체 크기와 주익 사이즈를 줄이고 랜딩기어는 날개가 아닌 동체에 수납하도록 설계해 유사시 기체를 분해해서 은닉할 수 있게 설계했습니다.

그래서 스웨덴 공군이 숙련된 정비사 1명과 신병 5명이면 그리펜의 신속한 무장장착과 출격이 가능하다고 자랑할 수 있는 겁니다.

제가 자객의 비수라고 표현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같은 이유로 운용유지비용도 최소화할 수 있었습니다. 제인스의 수석 컨설턴트인 에드워드 헌트 분석에 따르면 비행시간당 정비비용이 5800달러로 2만2000달러인 유로파이터의 1/4, 1만3600달러인 F/A-18의 1/3밖에 들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리펜을 주목해야할 또 다른 이유는 끊임없는 진화에 있습니다.

처음 스웨덴 공군에 인도됐던 단좌형 그리펜 A, 복좌형 그리펜 B에서 북대서양조약기구, NATO와 호환이 가능하도록 무장과 전자장치 등을 확장한 그리펜 C/D 버전을 만들었습니다. 목적은 당연히 전투기 수출에 있었습니다. 1995년 사브는 BAE시스템즈와 손잡고 개조와 제조, 마케팅 지원을 위해 별도 법인을 설립했죠.

12년 뒤인 2007년, 사브는 그리펜 Demo 기술 시연기라는 또 다른 변신을 시도합니다. GE-F414엔진을 달아 최대 이륙중량을 기존 14t에서 16t으로, 랜딩기어를 재배치해 내부 연료 용량을 40% 늘리고 동체 하단에 두 개의 추가 하드포인트를 달았습니다.

레이더는 AESA레이더로 교체하고 애프터버너 없이 마하 1.2로 순항할 수 있는 능력을 검증했죠. 이후 그리펜 Demo는 차세대 그리펜 프로젝트를 거쳐 그리펜 E/F로 발전했습니다.

이쯤에서 그리펜 E를 기준으로 제원 살펴보겠습니다. 길이 15.2m 높이 4.5m, 날개폭 8.6m로 최대 이륙 중량 16.5t으로 7.2t의 무장 탑재가 가능합니다. GE-F414엔진으로 최대속도 마하 2까지 낼 수 있고 전투반경 1500㎞, 최대 항속거리 4000㎞를 자랑합니다.

그리펜의 최대 장점인 짧은 이착륙거리는 이륙 500m, 착륙 600m로 800~900m 정도가 필요했던 스웨덴의 이전 세대 전투기들보다 월등합니다. 10개의 하드포인트에 AIM-9 사이드와인더와 미티어, 타우러스는 물론 GBU-12 페이브웨이 레이저 유도폭탄과 Mark82 폭탄은 물론 전자전포드와 정찰포드 등도 장착할 수 있습니다.

그리펜은 현재 스웨덴은 물론 영국과 태국, 남아프리카공화국, 헝가리, 체코 등에서 운용하고 있습니다. 안타까운 얘기지만 남아공이나 오스트리아, 체코, 헝가리 등 국가에 그리펜을 마케팅하는 과정에서 BAE Systems와 사브에서 광범위한 뇌물과 부패가 있었다는 보도들도 나왔습니다.

이런 스캔들로 그리펜 인터내셔널은 수사 진행 중 기업을 해산하기까지 했죠.

지난 2013년에는 브라질 차세대 전투기 도입사업에서 미국과 프랑스의 경쟁기종을 정치적 이유로 제치고 선정되기도 했습니다. 태국에 수출할 때는 그리펜 6대를 냉동 닭 8만t과 물물교환하는 조건으로 계약을 해 닭과 맞바꾼 전투기라는 재미있는 사례를 남기기도 했습니다. 닭과 맞바꾼 경험은 약간 웃으며 넘길 수 있는 사례지만 뇌물 스캔들의 경험은 우리가 절대 배우지 말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리펜은 스웨덴의 작전환경과 전략에 기반을 둔 무기체계로 개발됐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안보환경 변화에 따라 끊임없는 진화했죠. 우리나라가 만드는 무기체계도 이렇게 꾸준하게 진화했으면 좋겠습니다.

오상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