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330억 규모 변전소 수출 계약

미국 제재로 사실상 사업 무산

법원 “시리아 정부 손해 전가”

미국 제재로 멈춘 시리아 변전소 수출…“보증금 30억 달라” 패소
서울중앙지방법원[연합]

[헤럴드경제=박지영 기자]미국의 시리아 제재로 계약이 체결됐던 국내 에너지 기업의 변전소 수출이 무산되자 시리아측이 30억원의 보증금을 달라며 우리 법원에 소송을 제기했지만 패소했다. 법원은 계약이 시리아 정부의 국제법 위반으로 무산된 만큼 보증금을 지급할 의무가 없다고 판단했다.

6일 법조계에 따르면 서울중앙지방법원 민사46부(부장 김형철)는 지난달 바레인에 본점을 둔 아랍뱅킹이 국내 은행 A사를 상대로 제기한 보증금 청구 소송에서 원고 패소 판결했다.

사건은 14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국내 대형 에너지기업 B사는 2010년 시리아 전력부의 배전청과 330억원 규모의 가스절연개폐기(GIS) 변전소 수출 계약을 체결했다. 배전청은 B사의 귀책으로 변전소 건설이 무산될 경우를 대비해 30억원 가량(215만 유로)의 이행보증서 제출을 요청했다.

B사는 주거래은행인 A사에게 이행보증서를 발행해줄 것을 요청했다. 당시 시리아 배전청은 외국 은행과 직접 이행·보증 관계를 맺는 것을 기피해 관계 금융기관을 통해 구상보증서를 추가로 발행하는 형식으로 계약을 체결했다. 이에 따라 A사의 변전소 수출이 무산될 경우 배전청은 시리아 국영은행에 이행보증금을 청구하고, 시리아 국영은행은 아랍뱅킹에게, 아랍뱅킹은 다시 A사에게 구상보증금을 청구하는 방식으로 약정이 맺어졌다.

문제는 2011년부터 미국의 시리아 제재가 본격화 되면서 발생했다. 미국 의회는 미국 국가 안보에 위협이 되는 조직과 개인의 경제 관계를 규제하기 위해 국제비상경제권한법을 통과시켰다. 미국 해외자산관리국 산하 해외자산통제국(OFAC)은 2011년 시리아가 대량 살상 무기 확산에 관여했음을 이유로 시리아 정부와 관련된 거래를 금지하는 내용의 행정명령을 발동했다.

2018년 시리아 국영은행은 아랍뱅킹에 보증금 지급 또는 구상보증계약 연장을 요청했고 아랍뱅킹은 A사에 이같은 내용을 다시 전달했다. A사는 미국 경제제재를 이유로 구상금 지급을 거절했고, 아랍뱅킹은 2023년 소송을 제기했다.

법원은 국내은행의 손을 들어줬다. 시리아 배전청의 이행보증금 청구 자체가 부적법해 구상권도 행사할 수 없다는 취지다.

1심 재판부는 우선 변전소 수출 무산의 원인이 시리아 측에 있다고 판단했다. 1심 재판부는 “B사가 의무를 이행하지 못하게 된 주된 원인은 시리아 정부가 인권탄압 등 심각한 국제법 위반을 저질러 여러 나라로부터 교육을 거부당하는 사태를 스스로 초래하였기 때문”이라며 “B사의 고의·과실에 의한 것이라 볼 수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 “B사의 귀책 사유에 의해 이행보중금을 청구하는 것은 국제법 위반으로 초래된 손해를 무고한 B사에 전가하기 위한 것으로 청구 권한이 없는 자에 의한 사기적 청구에 해당한다”고 강조했다.

시리아 배전청의 이행보증금 청구를 거절하지 않은 시리아 국영은행, 아랍뱅킹에게도 책임이 있다고 했다. 1심 재판부는 “보증인은 수익자의 보증금 지급청구가 사기적 청구임이 객관적으로 명백할 때는 지급을 거절해야 할 보증의뢰계약상의 의무를 부담한다”며 “이 사건 이행보증금 청구는 명백한 사기적 청구에 해당하므로 시리아 국영은행은 원고(아랍뱅킹)의 이익을 위해 이행을 거절해야 한다”고 했다.

이에 따라 아랍뱅킹의 A사에 대한 구상보증금 청구 역시 부적법하다고 판단했다. 1심 재판부는 “원고의 청구를 허용하는 것은 법원이 불법성으로 집행되어서는 안 되는 공급계약 일부를 집행하도록 허용하는 것이나 다름없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