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 전남 순천시 선암사

내 마음대로 사찰여행 비경 100선

사찰은 불교의 공간이면서, 우리 역사와 예술의 유산입니다. 명산의 절경을 배경으로 자리 잡은 사찰들은 지역사회의 소중한 관광자원이기도 합니다. 치열한 일상에서 벗어나 잠시 휴식을 얻고자 할 때 우리는 산에 오르고 절을 찾습니다. 헤럴드경제는 빼어난 아름다움과 역사를 자랑하는 사찰 100곳을 소개하는 ‘내 마음대로 사찰 여행 비경 100선’ 시리즈를 연재합니다.

사계절 아름다운 유네스코 ‘산지승원’…태고종 총림 선암사 [정용식의 내 마음대로 사찰여행 비경 100선]
전남 순천시 선암사

눈물이 나면 기차를 타고 선암사로 가라

선암사 해우소로 가서 실컷 울어라

해우소에 쭈그리고 앉아 울고 있으면

죽은 소나무 뿌리가 기어 다니고

목어가 푸른 하늘을 날아다닌다.

풀잎들이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아주고

새들이 가슴 속으로 날아와 종소리를 울린다.

눈물이 나면 걸어서라도 선암사로 가라

선암사 해우소 앞 등 굽은 소나무에 기대어 통곡하라

우리나라에서 가장 운치 있는 뒷간이라고 하는 선암사 해우소에 걸려있는 정호승 시 ‘선암사’이다. 유홍준 교수는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에서 “내 마음속의 문화유산이요, 우리나라 산사의 전형”이라고 극찬하며 가장 아름다운 사찰이라고 칭송했다.

사계절 아름다운 유네스코 ‘산지승원’…태고종 총림 선암사 [정용식의 내 마음대로 사찰여행 비경 100선]
선암사 등 굽은 소나무

봄에는 홍매화와 겹벚꽃, 여름에는 수령 수백 년 되는 상수리나무, 밤나무 등 울창한 수목과 수정 같은 계곡물, 가을에는 형형색색의 단풍이, 겨울에는 붉은 동백꽃이 선암사의 사계절을 아름답게 장식하고 있다. 선암사 인근에는 고로쇠 나무가 자생하고 있어 매년 경칩을 전후해 약수를 맛볼 수 있다. 800년 전통을 지닌 자생 다원과 송광사에서 선암사를 잇는 조계산 등산로, 특히 가을 단풍이 멋을 더해주는 곳이라는데, 그 시기에는 너무 복잡할 듯 해 미리 다녀왔다. 선암사(仙巖寺)는 신선이 바둑을 두는 큰 바위가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 선암사

사계절 아름다운 유네스코 ‘산지승원’…태고종 총림 선암사 [정용식의 내 마음대로 사찰여행 비경 100선]
입구 부도전

선암사는 전라남도 순천시 조계산(887m)에 위치한 사찰이다. 예전엔 송광산으로 불렸는데, 고려 희종이 보조국사의 수행결사에 발맞춰 송광산 길상사를 조계산 수선사(현 송광사)로 바꿔 부르도록 한 왕명에 의해 조계산으로 바뀌었다. 조계산은 중국 선종의 6조 혜능대사가 있던 광동성의 지명이자 혜능대사의 법호를 딴 것으로, 그리 높지 않은 산임에도 두 개의 명 사찰을 품고 있다.

조계산 서쪽에는 조계종 21교구 본사이자 16국사를 배출한 승보사찰인 송광사가 주암호를 품고 있다. 동쪽으론 태고종 총림이지만 조계종 20교구 본사라는 이름을 동시에 가지고 상사호를 품고 있는 선암사가 있다. 선암사는 사적지로, 명승지로 등재돼 있으며 2018년에는 ‘산사, 한국의 산지승원’이라는 명칭으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도 등재됐다. 사찰 전통문화가 가장 많이 남아 있는 절 중 하나이며 10여종의 보물 등 많은 문화재를 보유하고 있다.

계곡을 옆에 끼고 물소리를 들으며 20여분 숲길을 걸어가다 보면 장승 한 쌍이 산문 역할을 하는 듯 길 양편에 서있다. 곧바로 수많은 탑비 중 하나의 탑비가 방향을 달리하고 있어 독특한 승탑밭을 마주한다. 산 모서리를 돌아가면 선암사의 상징처럼 알려진 환상적인 분위기를 연출하는 무지개다리 승선교(보물)가 맞아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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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선교

길이 14m, 높이 4.7m, 폭 4m의 우리나라 돌다리 중 최고 명작이라는 아치형 다리로 받침대가 자연 암반으로 돼있어 견고하다. 아치 중심 아래에 석재 용머리(이맛돌)가 고개를 내밀고 있는 듯 돌출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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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선교 아치 중심 아래 위치한 석재 용머리(이맛돌)

고통의 세계에서 부처의 세계로 건너는 중생들을 보호 수용하겠다는 의지가 담겨있는 것이라고 한다. 다리 아래 계곡으로 내려가서 승선교를 바라보니 강선루 정자가 아치형 다리 사이로 들어온다. 저기에 단풍이 들어오면 말 그대로 천상의 기분을 느낄 것 같은 생각에 잠겨 잠시 계곡 물소리에 취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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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선루

기둥 하나가 계곡물에 걸쳐 있는 듯한 강선루(降仙樓) 정자에 올라서 승선교를 바라보고 싶었지만 누각 보호 차원에서 출입이 금지돼 있다. 일주문 밖에 누각이 있는 사찰에 대한 기억이 없는데, 선암사는 어떤 의미로 일주문 밖 누각을 지었을까. 궁금증을 안고 누각 밑을 지나 올라가면 불교 사상을 구현한 독특한 양식의 타원형 연못인 삼인당(三印塘)과 마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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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인당

연못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며 세 가지 불교의 중심 사상을 마음에 새긴다는 의미다. 삼인은 제행무상인(諸行無常印), 제법무아인(諸法無我印), 열반적정인(涅槃寂靜印)이다. 삼인은 인생의 모든 괴로움(苦)으로부터 벗어나는 방법으로, 연못 가운데 조그만 섬이 있고 섬 위의 배롱나무 한 그루가 애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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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문

야생차나무 밭을 지나 에스(S)자로 휘어진 길을 돌아가면 돌계단 위에 우뚝 서 있는 ‘조계산 선암사’라 붙은 일주문을 비로소 만나게 된다. 선암사는 큰 절임에도 수많은 전각이 무질서하게 배치된 듯 복잡하지만 오래된 나무 향을 풍기는 무정형의 아름다움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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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문

일주문, 종각을 지나니 대웅전 앞을 가로막고 있는 만세루에 붙은 오래된 ‘육조고사(六朝古寺)’현판이 묘한 감흥을 준다. 달마대사가 살았던 육조시대부터 내려오는 오래된 절이라는 뜻인지 혹은 중국 선종의 육조혜능대사를 모신 절이라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오래된 고찰임을 표현하고자 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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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세루

대웅전 앞마당에 들어오니 만세루 안에서 50여명 남짓한 행자승들이 수계식을 앞두고 마지막 교육을 받고 있다. 태고종이라 그러한지 연령층이 20대부터 중장년층까지 다양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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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웅전

사면이 막힌 대웅전 앞마당 좌우엔 보물로 지정돼 있는 삼층석탑이 멋스럽게 있다. 사찰 규모에 비해 작게 느껴지는 보물 대웅전은 석가불만 있고 좌우 협시불이 없다. 특이하게 대웅전 가운데 스님이 드나드는 ‘어간문’이 막혀 있고 큰절임에도 사천왕상이 없어 3무(三無)의 절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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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웅전 석가불

선암사 삼인당 앞에서 우측 일주문 방향이 아닌 좌측 대각암(大覺庵) 올라가는 등산로 중간에 마애여래입상이 있다고 해 올라갔다. 높이 7m, 넓이 2m의 바위에 음각으로 귀가 상대적으로 큰 균형 잡힌 얼굴을 새겼는데, 마애불이 제작된 지는 그리 오래되지 않은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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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애불

선암사 성보박물관에 사리 장엄구, 대각국사 의천 진영, 선각국사 도선 진영, 괘불탱 및 부속유물, 33조사도 등 많은 보물이 있다. 여느 사찰처럼 개방하지 않고, 북승탑과 동승탑도 보물이지만 출입제한으로 볼 수 없었다.

태고종의 총본산 선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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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룡송

선암사는 백제 성왕 527년에 아도화상이 비로암에 터를 잡고 통일신라 도선국사가 지금의 선암사를 창건하고 고려시대 대각국사 의천이 중창했다. 왕자의 신분으로 천태종을 창건했던 대각국사 의천이 선암사를 중창할 때 심은 게 600년 된 ‘등 굽은 소나무 와룡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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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우소

와룡송은 삼성각과 무량수전 사이에서 한쪽 줄기는 하늘로, 다른 한쪽은 땅을 기어 다니는 듯한 형상으로 묘한 자태를 뽐낸다. 아름다운 해우소 ‘뒤깐’을 바라보며 있는 걸 보니 정호승의 시 ‘선암사’에서 “선암사 해우소 앞 등 굽은 소나무에 기대어 통곡하라”는 구절이 생각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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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우소

와룡송과 함께 심었다는 무우전(無憂殿) 담장 따라 피어있는 매화나무 수십 그루는 봄이 되면 넓게 펴진 가지에서 수백 년 동안 짙은 향과 고고하고 화사한 꽃을 피운다. 천연기념물로 지정돼 있으며, 그중 으뜸인 선암매(仙巖梅)는 이제 몸이 무거운 듯 지팡이에 의지하며 버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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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암매

통일신라시대 도선국사는 일주문 주변에 차나무를 심어 선암차를 선(禪)과 함께 보급했고 고려시대 대각국사는 선암사 칠전선원 차밭에 차를 심어 여기서 수확한 차를 송나라에 수출했다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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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생 차밭

지금도 선암사 뒤편의 야생 차밭에는 800년이 넘는 자생 차 군락지가 있고 자연산 야생차는 선암사 차가 최고라고 한다. 다만 차밭은 규모가 크지 않아 수확량이 적고 귀해서 선암사 차를 맛보기란 쉽지 않다. 이러한 차의 역사를 이어가고 전통차의 보급과 활성화를 위해 100여명의 스님들이 노력하고 있다.

선암사는 한국불교 태고종의 총본산이며 태고종 유일의 총림이다. 총림(叢林)은 승속(僧俗)이 한 곳에 머무름(⼀處住)이 마치 수목이 우거진 숲과 같다고 해 이름 붙인 것이다. 총림에는 스님들의 수행 전문도량인 선원(禪院)과 경전 교육기관인 강원(講院), 계율전문교육기관인 율원(律院), 염불 수행을 전수하는 염불원(念佛院)을 모두 갖추고 있어 종합수행도량으로 불린다. 태고종의 유일한 총림인 태고총림으로서 종합수도도량인 선암사는 가장 위쪽에 참선장소로서 일곱 채의 건물 군이 있다. 이를 선암사 칠전선원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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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생 차밭

일제 강점기 일본불교 도입으로 결혼해 가족을 이루고 승려활동을 하는 대처승이 주를 이뤘으나 광복 이후 이승만 정권시절 불교 정화운동이 일어나 비구승 중심의 조계종이 탄생하게 된다. 여기서 밀려난 대처승들이 1970년 태고종을 창단해 선암사는 한국불교 태고종의 총본산이 됐지만 조계종과 사찰 소유권을 둘러싼 분단으로 오랫동안 갈등을 안고 있었던 사찰이었다.

조계종에서도 20교구 본사로 지정하고 끊임없이 소유권을 주장하며 점유를 시도했다. 소유권은 조계종이 점유권은 태고종이 갖고 있는 모양새로 수십 년간 갈등이 있었지만, 작년 말 태고종에게 소유권까지 인정하는 대법원 판결이 내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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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암사 전경

우리나라 불교계는 조계종, 천태종, 태고종, 진각종, 관음종 등 수십 개의 종단이 있으나 비구승으로 이뤄진 조계종이 가장 큰 종단으로 불교 대표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태고종은 일반적으로 대처승 사찰로 인식되는데, 태고종도 스님 중 30% 이상은 비구승이다. 다만 태고종은 승려의 결혼을 자율에 맡기고 사찰의 개인 소유를 인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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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량수전 지붕 벽에 새겨진 수(水)·해(海) 글씨

사계절이 다양한 꽃과 신록으로 아름다운 선암사지만 화재로부터 수차례 피해를 입은 적이 있다. 이를 피하기 위해 부적처럼 등 굽은 소나무 옆 무량수전 지붕 벽에 물 수(水)와 바다 해(海) 글씨를 선명하게 새겨뒀다. 경내에는 아예 불을 밝히는 석등도 두지 않는다.

사계절 아름다운 유네스코 ‘산지승원’…태고종 총림 선암사 [정용식의 내 마음대로 사찰여행 비경 100선]
선암사 전경

잘 정돈된 사찰이 아니라 오밀조밀 집들이 모여 있는 옛 한옥마을 같은 또 다른 정겨움이 물씬 풍겨나는 절이 선암사다. 가족 단위로 템플스테이에 참여한 이들이 유달리 많아 보인다. 아직 물들지 않은 큰 은행나무 기둥을 붙잡고 사진 찍는 중년 부부들의 얼굴에 웃음이 넘쳐난다. 조계종이든 태고종이든 오래된 사찰에서 풍기는 고즈넉함과 멋스러움을 느끼며 한껏 여유로워 진다.

글·사진 = 정용식 ㈜헤럴드 상무

정리 = 민상식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