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대 교수들 “당직 서느라 임상시험심사위도 못 열어”

환자 모집·관리 차질 우려에 韓 글로벌 경쟁력 흔들

“임상시험도 제동”…전공의 사라지니 ‘K-의료’ 글로벌 경쟁서도 밀려난다
신약개발 이미지 [123RF]

[헤럴드경제=안효정·박혜원 기자] 의료공백이 장기화하면서 신약 개발 관련 임상시험 진행에도 빨간불이 켜졌다. 의대 교수가 병원을 떠난 전공의를 대신해 환자 진료에 ‘올인’하게 되면서 임상 시험이 지연되거나 중단되는 경우가 속출하고 있다.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K-의료' 임상 역량이 흔들릴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된다.

▶“시작도 못해”…의대 교수 업무 과중에 임상시험 파행= 18일 헤럴드경제 취재를 종합하면 의대 증원으로 촉발된 의정갈등 이후 신약 개발, 약품 발매 등 국내 대학병원의 임상시험 분야가 위축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의대 교수들이 외래 진료, 입원, 중환자 관리부터 당직까지 서다보니 임상시험 및 관련 활동은 우선순위에서 뒤로 밀려난 것이다.

“임상시험도 제동”…전공의 사라지니 ‘K-의료’ 글로벌 경쟁서도 밀려난다
임상시험승인절차 [식약처 홈페이지 캡처]

우선 ‘임상시험심사위원회’(IRB·Institutional Review Board)가 제대로 운영되지 않아 임상시험 시작 자체를 하지 못한 대학병원도 있다. IRB는 병원 교수들이 임상시험 안전성과 윤리성, 과학적 타당성 등을 심의하는 기구로, 제약·바이오 기업 등이 대학병원에서 임상시험을 하려면 반드시 병원 내부 IRB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

수도권 대학병원에서 국제 임상시험을 주관하고 있는 A교수는 “IRB에 참여해야 할 대부분의 교수들이 당장 시급한 환자 진료·수술에 투입돼 (IRB를) 진행할 여력이 없다”면서 “지금뿐 아니라 앞으로도 IRB가 언제 열릴 수 있을지 답이 없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IRB 승인을 받아도 임상 진행이 원만한 건 아니다. 업체-병원 계약, 연구개시방문(SIV·Site Initiation Visits) , 환자 등록 등 임상시험 후속 단계들 역시 지연·중단되고 있다.

전공의 집단사직 이후 임상시험에 ‘손을 대지 못하고 있다’는 상급종합병원 B교수는 “야간 근무도 잦아 업체와 미팅할 시간 확보도 어렵고 임상 단계들에 신경 쓸 겨를도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 “임상시험의 경우 약제 투여·환자 관리 등을 위해 입원이 필수적인데, 병원도 비상경영체제 등으로 병동을 축소 운영해 입원환자를 받기 어려운 상황”이라며 “환자를 모집하고 등록하는 게 쉽지 않다보니 임상일정이 지연되는 것은 물론이고 아예 환자 모집을 일시적으로 중단한 경우도 있다”고 설명했다.

한 제약사 관계자는 “최근 몇몇 병원들로부터 임상시험을 진행할 연구책임자(교수)가 부족해 더이상 임상을 진행할 수 없다고 통보받았다”며 “더 큰 문제는 이런 상황이 언제 끝날지 몰라 업계에서도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것”이라고 하소연했다.

“임상시험도 제동”…전공의 사라지니 ‘K-의료’ 글로벌 경쟁서도 밀려난다
[헤럴드DB]

▶의정갈등 後 올해 임상시험 3분기 연속 추락= ‘임상시험 위기’는 통계로도 확인된다. 지난달 30일 국회 기획재정위원회 소속 더불어민주당 안도걸 의원실이 식품의약품안전처로부터 받은 자료를 분석한 결과 올해 임상시험 승인 건수는 1분기 262건→ 2분기 236건→3분기 223건으로 3분기 연속 줄었다.

특히 올해 2분기에는 전공의 파업으로 인해 국내 임상시험 수가 전년 동기 대비 22% 감소한 156건에 그쳤다. 지난해 3분기 임상시험 수는 250건으로 전년 동기 대비 23.8% 증가했으나, 올 3분기는 전년 대비 10.8% 줄었다.

▶세계 4위 임상시험 강국이었는데…‘코리아 패싱’ 우려도= 의료계에선 이러한 임상시험 위기가 ‘K-의료’의 글로벌 입지까지 흔들 수 있다고 우려한다.

한국은 지난해 제약사 주도 임상시험 등록 건수에서 국가별 순위 세계 4위에 올랐다. 이는 2019년 세계 8위, 2020년과 2021년 6위, 2022년 5위를 기록한 데 이은 역대 최고 기록이다. 하지만 현재와 같은 의료공백이 지속되면 환자 모집·관리에도 장기간 차질이 생겨 글로벌 제약·바이오 업계의 협업 파트너로서 한국의 매력이 떨어질 수 있다.

“임상시험도 제동”…전공의 사라지니 ‘K-의료’ 글로벌 경쟁서도 밀려난다
지난해 한국의 제약사 주도 임상 승인 건수는 660건으로 미국, 중국, 스페인에 이어 세계 4번째로 많았다. [헤럴드DB]

정재호 연세대 의대 외과학 교수는 “특히 글로벌 제약사들이 한국에 많이 의뢰하는 신약 임상의 경우 약물 부작용 관리가 매우 중요하다”면서 “지금의 의료공백 상황을 지켜보는 글로벌 제약사들은 한국에 임상시험을 배정하면 환자 처치가 늦고 치명적인 상황이 발생할 수 있다고 판단해 발을 뺄 수 있다. 이는 곧 임상시험에 대한 글로벌 경쟁력 약화로 이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라고 말했다.

앞서 다국적 제약사들이 소속된 한국글로벌의약산업협회(KRPIA)는 향후 글로벌 임상에서 ‘코리아 패싱’이 발생하지 않도록 대비하는 차원에서 신규환자 등록 상황 등을 전반적인 임상 실태를 파악하겠다는 입장을 밝힌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