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판부, 실적 중심 평가와 고용 형태를 큰 압박으로 판단
“우울증 기저질환 있었지만 이직으로 증상 악화”
[헤럴드경제=박지영 기자]우울증을 앓던 펀드매니저가 성과 압박 등으로 병세가 악화돼 자살했다면 업무상 재해로 판단해야 한다는 법원 판결이 나왔다.
15일 법조계에 따르면 서울행정법원 행정13부(부장 박정대)는 최근 자산운영사 펀드매니저 A씨의 유가족이 근로복지공단을 상대로 “유족 급여 부지급 처분을 취소하라”며 제기한 소송에서 원고 승소 판결했다.
A씨는 2018년 펀드매니저 업무를 시작했다. 2021년 1월 자산운용사 B사로 이직한 뒤 5달 만인 같은해 5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A씨의 유가족은 B사의 실적 압박으로 인한 업무상 스트레스와 과로로 사망한 것이라며 유족급여를 청구했다.
하지만 2022년 6월 근로복지공단은 A씨의 사망은 업무상 재해가 아니라며 유족급여 지급을 거부했다. 펀드매니저 업무 특성상 성과 압박은 불가피한 것이고, A씨가 평소 우울증을 앓았던 점을 들어 인과관계를 인정할 수 없다고 봤다.
법원은 A씨 유가족의 손을 들어줬다. 재판부는 “펀드매니저로서 성과 압박을 받았고 그로 인한 과로, 스트레스로 우울증이 심해져 스스로 정상적인 의사 결정을 할 능력이 현저히 약해진 상태에서 자살에 이르렀다”고 했다.
우선 재판부는 B사의 실적 중심 평가와 고용 형태 등이 A씨에게 큰 압박으로 다가왔을 것으로 판단했다. A씨는 2년 계약직으로 이직했다. 실적에 따라 기간제 근로계약을 연장하거나 정규직으로 전환될 수 있었지만 실적부진을 이유로 계약을 해지 당할 수도 있었다.
업무 강도도 높았다. 재판부는 “매주 월요일 6시 30분 주간 전략회의, 매일 오전 7시 40분 모닝 미팅, 매월 첫째 수요일 정오 종목발표 회의 등 수시로 목표 제고를 위한 회의가 진행됐다. 정기적으로 실적이 평가돼 상당한 스트레스를 받았다”며 “A씨가 2021년 5월경 6개월 단위 운용 성과평가에서 상대적으로 열위에 있었다. 업계 특성상 2년 경과 후 저평가로 계약이 종료될 경우 향후 전직에 영향을 미친다는 부담도 있었다”고 했다.
판결문에 따르면 A씨는 이전 직장에서 높은 성과를 냈지만 이직 이후 업무 성과 저조하자 주변인에게도 스트레스를 호소한 것으로 나타났다. A씨는 지인들에게 일별 성과 보고 등을 이유로 “회사 업무 스타일이 잘 안맞는다”고 말하기도 했다.
재판부는 A씨가 우울증 기저질환이 있었던 것은 맞지만 2021년 이직으로 증상이 심각해진 것으로 봤다. 재판부는 “2019년보다 2020년경 증상이 잦아들었다가 이 사건 회사 입사 이후 업무 부담, 실적 압박으로 인한 과로, 정신적 스트레스가 심해지면서 우울증 정도가 급격히 악화됐다”며 “업무적 요소가 주된 원인이 되어 고인의 기저질환을 자연적인 속도 이상으로 현저히 악화시켰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