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전북 완주 송광사
내 마음대로 사찰여행 비경 100선
사찰은 불교의 공간이면서, 우리 역사와 예술의 유산입니다. 명산의 절경을 배경으로 자리 잡은 사찰들은 지역사회의 소중한 관광자원이기도 합니다. 치열한 일상에서 벗어나 잠시 휴식을 얻고자 할 때 우리는 산에 오르고 절을 찾습니다. 헤럴드경제는 빼어난 아름다움과 역사를 자랑하는 사찰 100곳을 소개하는 ‘내 마음대로 사찰 여행 비경 100선’ 시리즈를 연재합니다.
유별난 폭염에 시달렸던 여름이었기에 ‘추운 겨울철의 세 벗’을 뜻하는 ‘세한삼우(歲寒三友)’라는 말이 생각난다. 동양화의 주요 주제로 등장하기도 하는 송죽매(松竹梅), 즉 추위에 잘 견디는 소나무, 대나무, 매화나무를 일컫는다. 그 중에서 소나무는 나무 중에 으뜸이라는 ‘솔(率)’이라고 해 애국가에도 등장하고,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나무가 됐다. 궁궐을 지을 때는 소나무만 사용한다고 하며 나무 중 천연기념물도 가장 많다. 특히 소나무는 독특한 향이 있어 다른 식물이 자리잡고 있더라도 일단 소나무가 생장하기 시작하면 소나무 일색이 되고 만다.
불교에서도 화엄종, 천태종 등 다른 종의 가르침이 토착화돼 있더라도 선종(禪宗)이 전래되고 나면 선종 일색이 된다고 해 소나무에 비유되기도 한다. 조선선종수사찰(朝鮮禪宗首寺刹)이라고 해 ‘소나무가 널리 자리한다(松廣)’는 의미의 전북 완주에 송광사(松廣寺)가 있다.
송광사 하면 먼저 떠오르는 곳은 불보사찰 통도사·법보사찰 해인사와 함께 승보사찰(僧寶寺刹)로 우리나라 3대 사찰로 꼽히는 전남 순천 조계산 송광사다. 완주 송광사도 만만치 않은 이력을 지닌 천년고찰인데, 후광에 가려 억울할 법하다. 백두대간이 더 이상 남쪽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멈춰 섰다고 해 종남산(終南山)이라 부르는 산 끝자락 평지에 통일신라 시대에 창건한 사찰이 완주 송광사다.
전남 순천과 전북 완주 송광사 모두 한국 선종의 대 수도 도량으로서 역할을 했고 순천은 수선사에서, 완주는 백련사에서 한자(漢字)까지 똑같은 송광사(松廣寺)로 바뀌었다. 하지만 바뀐 과정에서 송광사가 뜻하는 의미 만큼은 달랐다. 전북 전주시와 가까이 있어 도심 속의 안식처로 자리 잡은 완주 송광사로 간다.
백화도량 종남산 송광사
송광사는 왜 스스로 백화도량(白華道場)이라고 부르고 있을까. 절 담장 옆 넓게 펼쳐진 연밭에는 뒤늦게 핀 연꽃 몇 송이가 바람을 타고 향기를 멀리 내보내고 있었다. 송광사는 옛 이름은 연꽃과 관련 있는 백련사(白蓮寺)였다. 백화도량은 연꽃과 관련해 붙여진 별칭일까 싶었다. 불교에서 ‘백화도량’은 인도 백화산(白華山)에 있는 관세음보살의 도량으로, 관음보살을 근본이 되는 스승으로 모시고 극락정토에 왕생하기를 비는 곳이라고 한다. 송광사가 특별히 관음도량이라고 할 만한 특징을 찾기 어렵다. 특별한 그 무엇이 숨겨져 있는 것을 내가 찾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사찰 일주문과 금강문 사이에도 연꽃 화분이 도열해 손님맞이하고 사찰 앞마당에도 꽃나무들이 화려하다. 돌담길에는 능소화가 꽃은 졌어도 넝쿨이 담장을 멋스럽게 감싸고 있어 전통 가옥의 고즈넉함을 더해주고 있다.
송광사 입구 안내문에 따르면 “일찍이 백제 때 종남산 남쪽에 영험한 샘물이 있어 그 곳에 절을 짓고 백련사라고 하였다. 백련사는 신라말에 보조 체징(804~880)선사에 의해 송광사로 개칭되었다. 체징선사는 설악산 억성사에서 도의국사의 수제자인 염거화상을 스승으로 수행하다 선법(禪法)의 요체를 구하러 당나라 유학을 가던 길에 백련사에 머물렀다. 유학하고 귀국한 후에도 가지산 보림사(장흥 유치)와 이곳 종남산 백련사를 오가면서 도의국사의 선법을 널리 교화하였다. 백련사가 선종의 취지에 따라 송광사로 개칭한 것은 이때의 일이다. 소나무가 널리 자리한다(松廣)는 선종의 비유어로 바꾼 것이다.”
그 후 송광사는 선종사찰로서의 면면을 이어왔다. 송광사 대웅전 앞마당에 오래된 소나무 한 그루가 이를 증명하듯 고고한 모습을 취하고 있다.
송광사 사적비에 의하면 서기 583년 신라에 처음으로 선종을 도입한 도의국사가 이 지역을 지나다가 신령스러운 샘물이 나오는 것을 보고 그 옆에 백련사를 지었다. 송광사를 867년(경문왕 7년)에 중창했다고 알려진 통일신라 승려 체징(體澄)은 도의국사의 제자인 염거화상의 제자로 구산선문 중 가지산파인 장흥보림사 제3대조로서 산문을 열고 선종을 전파했고 그곳에 사리탑과 탑비가 있는 승려다. 고려중기 대각국사 의천(1055~1101년)이 송나라에서 천태종을 공부하고 돌아와 천태종에 귀속시키면서 잠시 ‘백련사’로 또 바뀌기도 했다.
임진왜란, 정유재란으로 전소된 사찰을 광해군 때 복원을 시작해 인조 때 대대적으로 중창하면서 대웅전과 삼존불 점안을 부처님의 화신으로 여겨 존경받던 진묵대사(1562~1633년)를 증명법사로 한 일화가 부여 무량사와 함께 전해지고 있다.
부여 무량사와 완주 송광사가 동 시기에 삼존불 점안을 위해 인근 봉서사에서 주석하고 있었던 진묵대사를 증명법사로 초청했는데 진묵대사는 부여 무량사에 자신의 염주를, 완주 송광사에는 자신의 주장자(지팡이)를 보내 점안식을 하도록 했다. 점안식 도중에 무량사 염주는 달그락 소리를 내며 돌고 있었고 송광사 주장자는 점안식 내내 서 있었다고 하는 설화가 전해진다.
송광사 안내문에는 진묵대사가 증명법사로 참여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중창 후 벽암(碧巖)대사(1575~1660년)가 초대 주지로 선단(禪壇)을 주관해 50일 동안 화엄법회를 열고 선(禪)수행을 계승하였는데, 이 때 전국에서 수천 명이 모였다고 한다. 이로써 사찰의 위세가 커졌고 인조가 송광사를 조선선종수사찰(朝鮮禪宗首寺刹)이라는 사액을 내렸다고 한다. 벽암대사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시 승군으로 활약했으며 인조 때 팔도도총섭에 임명돼 전쟁으로 소실된 전국 사찰을 중건하고 다니기도 했으며 송광사에서 입적해 현재 승탑이 있다.
삼전패와 왕실사찰 송광사
전북특별자치도 완주군 소양면 종남산(終南山) 자락에 있는 송광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7교구 본사인 금산사(金山寺)의 말사이다. 특이하게 돌담장으로 둘러 처져 솟을대문 같은 일주문엔 ‘종남산 송광사’라는 화려한 문양의 글씨가 새겨져 있다.
금강의 지혜로 깨달음의 세계로 진입한다는 금강문을 지나면 곧바로 사천왕상을 모시고 있는 천왕문이 위치해 있다. 일주문·금강문·천왕문 등 조선시대 사찰 3문과 대웅전까지 그 중심축이 일직선으로 정연하게 배치돼 있어 임진왜란 이후 사찰의 전형적인 특성을 보이고 있다.
금강문은 일반적인 맞배지붕이 아니라 팔작지붕으로 올해 4월에 보물로 지정됐고 사천왕상도 진흙으로 빚은 것 중 가장 오래됐다고 해 보물이다. 송광사의 각종 편액 글씨체들은 유별나게 화려해 보는 맛이 있고, 사천왕상 발밑에 깔려있는 악귀가 무엇인지 보는 것도 사찰의 역사와 연관돼 재미를 더한다.
송광사는 청나라 의복에 벙거지 모자를 쓴 오랑캐가 깔려 있는 것이 병자호란과 연관된 듯하다. 우리나라 사찰들엔 임진왜란 등 일본으로부터 피해를 많이 봐서 악귀들로 왜구가 많고 탐관오리도 있다.
계단 하나 없는 평지 사찰로서 널따란 앞마당의 여유가 돋보이고 정원처럼 공간조성이 잘 돼있는 송광사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열십자(十)모양의 쌍 팔작지붕의 특이한 형태로 2층 아치형 종각이다. 열십자형 지붕은 주로 궁궐 등에 사용하는 건축 양식이다. 고 건축물 중에서 보기 드문 조선시대 건립된 국내 유일의 십자형 종각으로서 보물로 지정돼 있다.
모양 때문에 ‘십자각’이라는 별칭도 붙어있는 장엄하고 화려한 누각 안에는 범종·법고(法鼓)·목어(木魚), 운판 등 기본 사물을 모두 갖추고 있다.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조선 철종 때 다시 세운 것이다. 범종은 원래 광주 무등산 증심사에 있던 것인데 어떤 연유인지 여기까지 와 있다고 한다.
보물로 지정된 대웅전은 인조 때 2층 건물로 지었으나 자꾸 무너져 1857년(철종 8년)에 7개월에 걸쳐 단층 규모로 고친 조선 후기 건축의 전형적인 양식이다. 대웅전 안에도 보물로 지정된 삼존불(석가여래, 아미타여래, 약사여래)이 있어 대웅전 사면에는 ‘보광명전’ ‘무량수전’ ‘유리광전’등 각기 다른 이름의 편액이 걸려있다.
정면의 ‘대웅전’ 편액은 선조의 여덟 번째 아들 의창군의 친필이며 기다란 장대석을 쌓아올린 석축과 계단 좌우 용머리 석물, 거북이 모양 등(燈)받침대 등 왕실사찰의 특성이 엿보인다. 대웅전 내 주불인 석가모니불(550㎝)은 부여 무량사 소조불과 더불어 국내 최대 크기의 흙으로 만든 불상이며, 병자호란 때 청나라 볼모로 잡혀간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의 무사귀환을 위해 조성했다. 아미타여래좌상은 IMF 위기 때 등 최근까지도 나라가 어려울 때나 큰 불행한 일이 있을 때 땀을 흘린다는 설이 전해지고 있다.
특히 대웅전 내 삼존불 사이, 화려한 문양에 230㎝ 크기 3개의 목조 축원패(삼전패)의 “세자저하수천추(世子邸下壽千秋). 주상전하수만세(主上殿下壽萬歲). 왕비전하수제년(王妃殿下壽齊年)” 글귀는 왕실의 안녕과 만수무강을 기원하고 있다. 여기서 왕은 인조이며 세자는 소현세자 와 봉림대군이라고 하는데 불교를 탄압했던 조선 시대에도 국난과 위기 속에서 왕실을 안녕을 기원하기 위해 불교에 의지했던 것을 볼 수 있다. 대웅전 벽과 내부 천장에는 생동감 있는 19세기 작품 주악비천도가 그려져 있다.
목조석가여래삼존상 및 소조십육나한상 등 보물이 있는 ‘나한전’의 나한기도가 영험하다고 알려져 있으나 공사 중으로 내부를 볼 수 없었으나 옆에 임시 건물을 만들어 불단과 불상을 똑같이 조성해서 예불을 드리도록 했다. 완주 송광사는 조선 시대에 재건한 절로 모두 조선 시대의 문화재들인데 특별히 흙으로 빚은 불상 문화재가 유별나게 많다.
송광사는 병자호란 때 왕조실록을 보관했던 전주사고(全州史庫)를 지키는 승군 700여명과 승군장이었던 벽암스님이 머문 호국도량이기도 하며 왕실사찰로서의 여러 흔적들이 남아 있다.
연꽃향기 가득한 도심속의 안식처, 송광사
조계산 깊고 넓은 터에 자리하여 15명의 국사를 배출해 한국 선종을 이끄는 중심사찰, 승보사찰이 된 순천 송광사와 달리 종남산 아래 도심(전주)과 가까운 평지에 자리하고 있는 완주 송광사는 대중교통 접근성이 좋아 템플스테이에 많은 젊은이들이 보인다.
템플 복장으로 마당을 거닐고 있는 한 젊은 여성은 연인과 헤어짐의 아픔을 극복하기 위해 템플에 참여했다고 한다. 또 다른 여성은 대학원생인데 취업 준비 때문에 받는 스트레스를 해소하기 위해 왔다고 한다. 함께 온 여대생 세 명은 대웅전 뒤에서 스님의 설명을 열심히 듣는다. 익살스러운 동자상과 포대화상 부처석상, 돌탑, 그리고 여러 꽃나무들로 꾸며진 넓은 송광사 앞마당이 유난히 평온해 보인다.
봄이 되면 전주 시민들의 벚꽃 명소가 돼 일주문 앞 벚꽃 길은 인산인해가 된다. 돌담길 능소화는 화려함으로 방문객들을 유혹할 것이다. 지금은 늦여름이라 아쉽지만 연꽃이 향연을 베푸는 초여름엔 종남산 기슭 송광사 후원 연밭과 일주문과 금강문 사이 연꽃 화분엔 부처의 손길마냥 연꽃잎이 활짝 웃으며 반길 것이다.
도심 속 아름다운 사찰 송광사는 집착과 분별심을 내려놓고 잠시나마 인간 내면을 돌아보는 시간을 보내기엔 적합한 곳이다. ‘나한전 존상에 대한 인문학 강의’와 이달 7일 ‘송광 백련 나비채 음악회’를 알리는 배너 현수막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자비를 (나)누고, 욕심을 (비)우고, 지혜를 (채)운다는 ‘나비채’ 의 의미를 되새겨 보며 도심 속의 작은 휴식처에서 짧은 시간이나마 수행자가 되어본다.
글·사진 = 정용식 ㈜헤럴드 상무
정리 = 민상식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