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편 126. 레오 1세(게르만족 대이동)]
'신의 채찍' 훈족 등장에 지각변동
최악위기 처한 동로마·서로마제국
레오 1세, 제국 명운 건 담판 나서
훈족 뜻밖의 퇴각…대체 무슨 일이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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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 명운을 건 ‘담판’
훈족의 왕 아틸라가 몰고 오는 전사들은 존재 자체가 악몽이었다.
이들은 늘 전쟁에 굶주린 존재였다. 날고기를 씹어먹고, 덧댄 들쥐 가죽을 덮고 자면서도 살육과 정복만을 생각하는 야수였다. 본인이 죽든 말든 괴성과 함께 돌진하는 이들은, 잘 조여진 살인 기계와 다를 게 없었다.
그런 훈족이 당장 노리는 건 서로마제국의 로마였다. 이대로면 세계의 머리로 불린 이 도시는 물론, 고대부터 명맥을 이어온 나라 전체가 흔들릴 게 뻔했다. 서로마제국 황제 발렌티니아누스 3세는 이미 지쳐있었다. 더는 이 족속과 싸울 자신도, 여유도 없었다. 그런 그가 택한 건 평화 협상이었다. 문제는 거래 조건이었다. 훈족은 이미 자기네가 압도적 우위에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결코 쉽게 물러나지 않을 것이었다.
그래도 이것말고는 방법이 없으니, 발렌티니아누스 3세는 훈족과 마주할 교섭단을 꾸렸다.
여기서 대표로 나선 이 중 한 명, 그가 이제 나이 오십 줄에 닿은 교황 레오 1세였다.
452년, 만토바.
담판의 날. 레오 1세와 아틸라가 만났다. 레오 1세는 평소처럼 성직자복을 입었다. 표정은 온화했고, 움직임은 부드러웠다. 주변에는 그처럼 비무장한 시종 몇 명뿐이었다.
움푹 들어간 눈두덩이, 떡 벌어진 어깨와 흉터투성이 몸…. 언뜻 봐도 위협적인 아틸라는 그런 레오 1세를 보고 왠지 움찔한 듯했다. 호흡을 크게 가다듬는 게 보일 정도였다. 둘은 곧 장막 안으로 사라졌다. 이제 두 사람만의 시간이었다. 레오 1세 입장에선 제국의 역사를 건 순간이었다. 아틸라는 말도 안 되는 조건을 걸고 전쟁 명분이나 강화할 생각이었다.
얼마 후, 이들은 다시 천을 걷고 햇살을 맞았다.
협상을 마치고 나온 레오 1세와 아틸라는 서로에게 예를 갖췄다. 그리고, 돌아선 아틸라는 주변 참모들에게 즉각 명령했다. "병력을 돌려라." "예?" "모든 군은 철수시켜라." "왕이시여, 갑자기 왜 그러십니까. 계속 진군하면 로마를 우리 손에…." 아틸라는 참모의 말에 눈을 번뜩였다. "내게 두 번 말하게 하지 말라."
그사이 무슨 일이 있었을까. 아틸라가 워낙 큰 변화를 보인 만큼, 이유를 놓곤 지금도 의견이 분분하다. 이 가운데 가장 많이 알려진 건 레오 1세와 관련한 전설이다. 내용은 이렇다. 아틸라가 레오 1세를 보자마자 흠칫한 데는 이유가 있었다. 아틸라는 이 나이 든 교황을 보고 놀라지 않았다. 정확히는, 레오 1세 양옆에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가 칼을 빼든 채 서있어 몸을 움츠린 것이었다. 눈을 비빈 뒤 봐도, 고개를 돌렸다가 봐도 이들은 그대로 있었다. 그래서 괜히 심호흡이나 크게 한 것이었다. 아틸라는 레오 1세와의 협상 중에서도 진땀을 뺐다. 레오 1세에게 붙은 두 환영은 이때도 사라지지 않았다. 외려 아틸라를 향해 칼끝을 들이밀며 "당장 퇴각하지 않으면 화를 입으리라"는 식의 협박만 이어갔다. 레오 1세는 이를 아는지 모르는지 시종일관 평온했다. 아틸라는 결국 두 성인의 위협에 굴복해버렸다. 그 결과 기껏 몰고 온 대군을 퇴각시켰다는 이야기다.
라파엘로 산치오가 이 기록에 감명받고 그린 그림이 있다. 〈교황 레오 1세와 아틸라의 만남〉이다.
장비 하나 없는 교황과 그의 일행은 왼쪽에 있다. 투구와 갑옷, 성난 말 등 잔뜩 힘을 주고 온 이들은 아틸라와 그의 군단이다. 서로마제국 대표단 뒤로는 로마의 여러 건물을 볼 수 있다. 훈족 대표단 뒤에는 이들이 만들어낸 화염과 연기만 가득하다. 그럼에도 교황 쪽은 차분해보인다. 외려 훈족 무리가 당황한 기색을 드러내고 있다. 군대의 눈과 팔이 향하는 곳, 하늘 한 귀퉁이에는 두 인물이 있다. 이들이 바로 천국의 열쇠를 든 성 베드로, 성령의 장검을 쥔 성 바오로다. 둘은 더 이상 파괴는 용납할 수 없다는 듯, 특히 로마를 건드리는 순간 심판을 면할 수 없다는 양 호통을 치는 모습이다. 아틸라와 그의 세력이 이를 실제로 봤다면 간담이 서늘해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물론 이는 전해오는 설일 뿐이다. 다만, 레오 1세가 피 한 방울 흘리지 않은 채 조국을 통째로 지킨 건 분명하다.
그렇다면 이러한 극적 순간이 오기까지 역사는 어떻게 쓰이고 있었을까.
이를 알기 위해선, 지금 사건이 쓰인 페이지를 잠깐 접어둔 채 앞으로 크게 넘겨봐야 한다.
신의 채찍, 유럽을 휩쓸다
유럽과 아시아 대륙은 이 일이 있기 100년가량 전인 4세기 중후반부터 격동의 시기를 맞고 있었다.
갑자기 등장한 훈족 때문이었다.
유라시아 대초원 서부에서 세력을 꾸린 훈족은 즉시 주변부를 향해 팔을 뻗었다. 염소뿔 장식을 쓴 채 각궁을 쏘는 이들의 파괴력은 그간 본 적 없는 수준이었다. 그렇기에 금세 '신의 채찍'이라는 별명도 붙었다. 온 사방을 내려치며 힘을 과시한 채찍은 비로소 한 방향을 잡았다. 서쪽이었다. 훈족은 몇 세대에 걸쳐 조금씩 서진(西進)했다.
가장 먼저 날벼락을 맞은 건 게르만족이었다. 이들은 물밀듯 밀려오는 전쟁광들 앞에선 맥을 추지 못했다.
훈족은 게르만계에서 가장 세력이 큰 동고트족을 순식간에 제압했다.
훈족은 그러고도 여전히 배가 고팠다. 이제는 서고트족, 그리고 일대 흩뿌려진 게르만계 왕국을 차례로 집어삼킬 태세였다. 하지만 이를 알고도 게르만족은 감히 맞붙을 수 없었다. 이들 또한 더 서쪽으로, 서쪽으로 맥없이 물러설 뿐이었다.
그간 동로마제국과 서로마제국은 이를 국경 멀리에서 벌어지는 야만족 사이 갈등 정도로 봤다.
하지만, 어느새 이들 또한 '훈풍' 영향권에 들기 시작했다.
동로마제국은 소아시아와 유럽 동부 등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이 국가는 훈족이 이제 자기네 땅을 향해 군침을 흘린다는 걸 알았다. 이미 동로마제국의 드넓은 영토 곳곳에서는 크고 작은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이런 와중에 또 다른 적, 그것도 죽을 때까지 싸우기로 악명 높은 무리가 새롭게 생긴 건 그 자체로 큰 부담이었다.
이탈리아반도 등 유럽 서부를 다스린 서로마제국은 어떤 면에서는 더 골치가 아팠다. 훈족을 피해 도망친 게르만족은 서로마제국을 피난처로 삼았다. 비교적 군사력이 센 동로마제국 대신 만만한 땅을 고른 것이었다. 게르만족은 압도적 숫자로 서로마제국을 뚫고 들어갔다. 그런 뒤 점거하듯 영토 곳곳에 터를 잡았다. 군인과 용병으로 자연스럽게 녹아드는 이도 있었지만, 상당수는 국가 통제를 거부하는 그들만의 연맹을 꾸리기에 열을 올렸다. 훗날 역사가들은 훈족발(發) 대륙의 격변을 '게르만족 대이동'이라고 칭하게 된다.
이렇듯 동로마제국과 서로마제국 모두 당장 처한 상황은 달랐지만, 한 가지 생각만은 똑같았다.
곧 훈족과 국가 명운을 건 전쟁을 벌여야 한다는 것.
위기의 로마제국
440년대 말. 올 것이 왔다.
작고 통통한 수백, 수천 마리 말의 발굽 소리가 울렸다. 그 위에 올라탄 이들의 우짖음과 뿔피리 소리도 평원 위 마른 공기를 갈랐다. 훈족이었다.
늘 그랬듯 맨 앞에서 날래게 달려오는 이는 훈족의 왕 아틸라였다.
잔혹함, 그리고 뜻밖의 지략과 통솔력까지 갖춘 아틸라는 당시 모든 유럽인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다. 외젠 들라크루아의 그림 속 짐승 가죽을 쓴 아틸라는 얼핏 보면 힘의 신 헤라클레스로 착각할 수 있다. 한 손에는 철퇴, 또 다른 손에는 길쭉한 창 내지 화살촉을 쥔 그는 전쟁터를 안방처럼 누비는 모습이다. 존재 자체가 두려움이었던 아틸라와 훈족이 먼저 친 곳은 서로마제국이 아닌, 테오도시우스 2세 황제의 동로마제국이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더 가깝고, 더 약탈할 게 많아보여서였다. 때마침 동로마제국군 상당수가 파견 중이었기에, 지금이 절호의 기회인 점 또한 있었다.
테오도시우스 2세도 나름의 저항은 했다.
그러나 이 유목민의 물오른 채찍질을 견디기는 역부족이었다. 훈족은 동로마제국령의 발칸 반도를 신나게 짓밟았다. 이는 조르주 앙투안 로슈그로스의 〈아틸라와 훈족〉 같은 모습이었을 것이다. 까무잡잡한 피부의 훈족이 웅장한 저택을 마음껏 휘젓는다. 훈족은 인간을 전리품처럼 대한다. 노예로 삼아 잡일을 시키거나, 노리개로 취하거나, 심심풀이로 죽이는 것 말곤 관심이 없을 터였다. 무릎을 꿇고 이미 죽은 자를 바라보는 이들에게 느껴지는 감정은 절망밖에 없다. 훈족에게 들어올려진 여인 또한 최후의 발악을 하는 듯하지만, 표정에는 이미 좌절감만 깔려있다. 조각과 건축 등 찬란한 문명 또한 이 유목민에게 그저 비웃음거리일 뿐이다. 테오도시우스 2세는 결국 뇌물 주듯 금은보화를 잔뜩 안겨 훈족을 달래야 했다.
449년.
굴욕감을 떨치지 못한 테오도시우스 2세는 아틸라를 없앨 구상도 짰다. 꾀어낸 그의 측근을 시켜 칼을 박겠다는 계획이었다. 야만족 따위 지도자만 없어지면 곧장 와해하리라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암살 사례비로 미리 금을 받은 이는 외려 이중 첩자가 돼 아틸라에게 모든 일을 밀고했다. 아틸라는 테오도시우스 2세의 금을 그대로 동로마제국에 돌려보냈다. "어찌 명예로운 가문의 후계자가 이런 비열한 짓을 하는가"라는 조롱과 함께.
훈족 입장에서 황당한 일은 또 있었다.
동로마제국을 신나게 털어먹던 450년께, 봄. 옆 동네 서로마제국 황제 발렌티니아누스 3세의 친누나(또는 친동생)라는 자가 뜬금없이 아틸라에게 청혼을 한 것이었다. 그녀 이름은 유스타 그라타 호노리아. 그녀는 원로원 귀족과의 정략결혼이 싫어 이런 철없는 짓을 벌였다. 훈족은 이를 굴러들어온 호재(好材)로 봤다. 아틸라는 곧장 결혼 지참금으로 서로마제국 땅 절반을 요구했다. 서로마제국은 "개인의 돌출 행동이었다"며 수습하고자 했지만, 물은 엎질러진 후였다.
"내 예비 신부를 혼미한 사람으로 몰았으니, 어쩔 도리 없이 내가 구하러 가겠다(전쟁을 벌이겠다)."
아틸라는 진지한 표정으로 선언했다. 갇힌 공주를 위해 맹세하는 기사처럼 선전포고했다. 실제로는 호노리아 따위 큰 관심도 없었겠지만. 동로마제국에서 단물을 쭉 빨아들인 이때, 짠 듯이 서로마제국으로 진군할 길이 열린 것이다.
버티고 또 버텼지만…
서로마제국의 저항이 생각보다 격렬했다.
동로마제국보다 한 수 밑인 줄 알았는데, 이곳 또한 만만치는 않았다. 서로마제국 전선을 지킨 명장, 훗날 그 영웅적 행보 덕에 '최후의 로마인'으로 칭해지는 아에티우스 때문이었다.
아틸라의 훈족과 아에티우스의 서로마제국군은 451년, 지금의 프랑스 동북부에서 결전을 벌였다.
결과는 훈족의 패배였다. 기동력이 좋은 아틸라의 훈족 주력군은 적 중앙부터 뚫으려고 했다. 그다음 솟아오른 분수 줄기 갈라지듯 군을 양쪽으로 찢어 좌우까지 무너뜨릴 구상이었다. 훈족은 게르만계 동고트족을 지원군으로 데리고 나왔다. 이들 중심의 양익(兩翼)은 상대편 양익에 엉겨붙어있기만 해도 된다는 생각이었다.
맞은 편에서 대치하는 아에티우스의 서로마제국군은 게르만계 서고트족을 설득해 함께 전장에 왔다. 아에티우스도 군을 크게 볼 때 중앙군과 양익으로 갈랐다. 서로마제국 중앙군은 훈족 주력군이 밀려오자 조금씩 뒤로 물러섰다. 그 사이 서로마제국 좌우군은 돌격과 도발, 기습과 위협 등으로 훈족의 좌우군 발을 아예 묶어버렸다. 아틸라와 훈족 주력군은 돌아보니 자기네만 서로마제국군 진지에 쑥 들어와있었다. 포위되고 만 것이었다.
내몰린 아틸라는 장작을 쌓았다. 여차하면 스스로 불을 들고 뛰어들어 생을 마감하고자 했다. 그만큼 상황이 급박해졌다. 아틸라는 아에티우스가 모른 척 퇴로를 열어줘 겨우 살았다. 훈족 또한 이 덕에 전멸 위기에서 탈출할 수 있었다. 주 전장이 카탈라우눔 평야였기에, 이번 격돌은 후일 '카탈라우눔 전투'로 불리게 된다.
그런데, 아에티우스는 다 잡은 아틸라를 왜 놓아줬을까.
당시 대륙에선 여러 유목민족이 고개를 들고 있었다. 훈족 눈치를 봐 기를 펴고 있지 않을 뿐이었다. 이 와중에 훈족이 갑자기 스러지면 더 큰 혼란이 생길 가능성이 컸다. 이 명장도 그 지점을 염려해 '죽지 않을 만큼'만 때린 뒤 풀어줬다는 분석이 설득력을 얻는다.
하지만 아에티우스도 궤멸 직전의 훈족이 이렇게 빨리 힘을 되찾을 줄은 몰랐으리라.
훈족은 불과 1년 만에 다시 서로마제국을 쳤다. 이번에는 작정하고 알프스산맥을 넘었다. 아에티우스가 다른 지역에 있는 사이 서로마제국 황제 발렌티니아누스 3세가 있는 라벤나 등 이탈리아 북부를 물 만난 고기처럼 누볐다. 울피아노 체카의 〈로마에 접근하는 훈족〉처럼, 말을 탄 이들은 기세등등하게 신전과 광장, 기둥과 동상을 파괴했다.
발렌티니아누스 3세는 도망을 거듭했다. 그러다 겨우 숨을 돌린 곳이 로마였다. 그런데 훈족이 로마를 노리고 있다니…. 서로마제국의 운명은 체카의 그림 속 밀려오는 먹구름처럼 어두웠다. 발렌티니아누스 3세가 교황 레오 1세 등이 참여하는 교섭단을 급하게 꾸린 배경이었다.
로마의 수호자
다시 452년, 만토바.
역사의 공은 이처럼 흐르고, 요동치고, 돌고 돈 끝에 레오 1세 앞에 멈춘 것이었다. 그러니까, 그 시절 최강인 훈족을 이제는 레오 1세가 홀로 상대해야 한 것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이뤄진 담판의 결과가 훈족의 깔끔한 퇴장이었다.
"그곳이 어디든, 내가 가장 먼저 적에게 창을 던지리라." 훈족 최고 지도자인 아틸라는 병사들에게 늘 이렇게 말했다. 그런 그에게는 이제 '신의 채찍'을 넘어 '신의 징벌'이라는 호칭도 따라붙었다. 이처럼 용맹한 그가 레오 1세 양옆에 정말 환영이 있었다고 한들, 이것만을 보고 로마 공략을 포기했을까. 아틸라는 감동했을 것이다. 잔인무도한 유목민의 왕을 향해 "로마를 보전해주소서"라며 호소하는 성직자를 보고 탄복했을지도 모른다. 프란체스코 솔리메나의 〈교황 레오 1세와 아틸라〉를 보자. 침착한 표정의 교황은 두 팔을 벌리며 아틸라를 마주한다. 그의 뒤 모든 이가 두려움에 떨고 있을 때도 흔들림 하나 없다. 아틸라는 주저한다. 앞으로 나가려다 말고 어정쩡한 자세로 멈춰있다. 얼굴에선 망설임, 그리고 교황을 향한 경외심도 묻어난다.
둘 사이 협상 내용으로 정확히 알려진 건 없다. 레오 1세가 아틸라의 결단을 부추기고자 금과 보석 등 상당량 재물을 건넸다는 추측 정도만 나올 뿐이다.
물론 훈족이 1년 전 내상(內傷)을 완전히 극복하지 못해 못 이기는 척 물러섰다는 말도 있다.
보급이 끊기고 전염병이 도는 등 당시 상황이 좋지 않았다는 이야기도 있다. 다만, 훈족의 이러한 내부 문제설이 다 사실이었다고 해도 레오 1세의 활약을 평가절하할 수는 없을 것이다. 보급이야 주변을 약탈하면 어떻게든 버틸 수 있었다. 전염병은 걸림돌이 될 수 있지만, 거친 생활이 일상인 이들에게 생소한 현상으로 볼 수 없었다. 무엇보다도 생애 첫 굴욕을 맛본 아틸라, 그리고 훈족은 서로마제국에 서슬 퍼런 복수심까지 품은 상황이었다. 레오 1세는 이러한 모든 악조건을 뚫고 평화를 이끌었다. 그가 대교황의 칭호를 받은 첫 번째 교황(Leo the Great)이 된 이유이리라.
이로써 방향을 튼 훈풍이 완전히 잦아들게 된 건 의외의 사건 탓이었다.
그것은 아틸라의 죽음이었다. 453년, 봄. 레오 1세의 청을 받아들여 군을 돌린 다음 해. 아틸라는 일디코라는 젊은 여인과 결혼식을 올렸다. 그리고 그날 밤 아틸라는 갑작스럽게 죽음을 맞고 말았다. 암살설과 심장마비설 등 말이 나오지만, 정확한 사인은 지금도 베일에 가려져있다. 허무하게 왕을 잃은 훈족은 그 자리에서 분열하고, 붕괴하고, 결국에는 급속도로 몰락했다. 한 지도자의 강력한 카리스마로만 지탱되던 무리의 운명이었다.
그렇다면 레오 1세 덕에 위기에서 벗어난 서로마제국은 그대로 융성할 수 있었을까.
그러지 못했다. 제국 수뇌부는 454년, 앞서 훈족의 무적 신화를 깬 아에티우스를 죽였다. 카탈라우눔 전투 당시 훈족을 섬멸하지 않았다는 걸 명분으로 삼았다. 내통과 반란 혐의를 적당히 섞어 없앤 것이었다. 레오 1세는 461년에 선종했다. 서로마제국은 그렇게 로마의 수호자를 둘 잃었다.
여기서 다시 짧게 게르만족 대이동 이야기를 끌어와야 한다. 훈족은 힘을 잃었지만, 이들이 촉발한 게르만족의 대이동은 계속해 이어졌다. 훈족에게 밀려서 서로마제국 곳곳에 스며든 게르만족은 끝내 연맹을 넘어 각자의 왕국을 세우기 시작한다. 서서히 힘을 빼앗긴 서로마제국은 476년에 무기력하게 시대를 마감했다. 영화보다 더 영화처럼 세상을 풍미한 제국과 영웅, 민족과 전사 모두 그 끝은 붕괴와 죽음이었다. 그 어느 때보다 격동이 일었던 한 시대는 그렇게 막을 내렸다.
라파엘로 산치오(Raffaello Sanzio·1483~1520)레오나르도 다 빈치,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와 함께 르네상스 3대 거장으로 칭해지는 인물. 이탈리아 출신의 그는 레오나르도와 미켈란젤로의 장점만을 흡수해 자기 것으로 재창조할 만큼 천재적 재능을 갖고 있었다. 특히 부드러운 선과 색채 구사, 조화로운 인물과 사물 배치 등에 독보적 실력이 있었다. 우아한 기품의 성모 마리아를 탁월하게 그려 '성모의 화가'라는 별칭도 따라붙었다. 대표작은 〈아테네 학당〉, 〈그리스도의 변용〉 등. 그는 아쉽게도 서른일곱 살 나이로 요절했다. 그의 장례는 국가장으로 치러졌다.
프란체스코 솔리메나(Francesco Solimena·1657~1747)이탈리아 태생의 화가로 주로 바로크 양식에 맞춘 그림을 그렸다. 빛과 어둠의 극적 대비에 탁월했으며, 아울러 피사체의 움직임을 생생하게 구현하는 데도 남다른 감각을 보였다. 주 활동 영역은 종교화와 신화화. 그는 후진양성(後進養成)에도 힘 쏟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직접 대형 작업실을 갖춘 후 그곳에서 수많은 제자를 거느렸다. 프란체스코 데 무라, 지우세페 보니토 등이 가르침을 받았다. 대표작은 〈성 요셉의 환영〉, 〈레베카의 출발〉 등.
〈참고 자료〉
교황의 역사, 호르스트 푸어만, 길
이주하는 인류, 샘 밀러, 미래의창
〈후암동 미술관 역사편 읽는 순서〉
①“아빠! 저게 뭐야?”…8세 딸 ‘매의 눈’ 학계 난리났다, 믿기 힘든 광경 포착 - 알타미라 동굴 벽화 (24. 8. 17.)
②“볼거리·노리갯감 전락 지긋지긋”…근육男들 격분에 모두 벌벌 떨었다, 무슨 일 - 스파르타쿠스 (24. 9. 14.)
③난잡한 파티 현장? 다들 뭘 뚫어지게 보는가했더니…끔찍하고 잔혹한 광경 - 네로 (24. 10. 19.)
④“죽든지, 우리 노예로 살든지” 악몽이었는데…생각도 못한 놀라운 일 벌어졌다 - 레오 1세 (24. 10. 26.)
⑤“18세 소녀가 軍지휘관이라니!” 역사상 가장 미스터리했던 그녀 행보…어땠길래 - 잔 다르크 (24. 9. 21.)
⑥“단두대 못 찾겠어요” 18살 소녀 사형수 울컥…눈 가린채 울음 삼킨 사연 - 제인 그레이 (24. 8. 10.)
⑦“제발 그만” 子아내 마구 때려 유산시킨 父…항의하는 아들에게도 똑같은 짓 - 이반 4세 (24. 8.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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