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편 127. 돈키호테]
풍차에 덤빈 괴짜인 줄만 알았는데
꿈·철학·역사까지 품은 입체적 인물
작가도 군인·포로·죄수 등 파란만장
돈키호테가 전하는 진짜 메시지는?
편집자 주
후암동 미술관은 무한한 디지털 공간에 걸맞은 방대한 내용과 자료의 초장편 미술 스토리텔링 연재물 '원조 맛집'입니다. 2년 7개월 넘게 매주 토요일 발행하는 이 기사들은 이후 여러 매체가 비슷한 포맷의 연재물을 연달아 내놓을 만큼 업계에 새로운 가능성을 열었습니다. 가상의 시설 후암동 미술관을 세계관으로 두는 이 칼럼은 ▷이론편 ▷인물편 ▷현장편 등 기획을 선보이며 앞장서 도전과 실험을 선도하고 있습니다. 기자 구독을 누르시면 매 주말 풍성한 미술 이야기를 즐기실 수 있습니다.
혼미한 방랑 기사의 탄생
※이 기사에는 미겔 데 세르반테스의 소설 〈돈키호테〉에 대한 일부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나를 기사 돈키호테 데 라만차라고 부르라.
앙상한 몸과 얼굴의 시골 귀족인 알론소 키하노가 방 한편에서 이렇게 말한다. 출정식에 선 양 결연한 모습이지만, 이 선언을 들어주는 건 쥐와 거미밖에 없다. 알론소, 그러니까 돈키호테가 된 그는 기행(奇行)을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진짜 방랑 기사가 돼 모험 길에 오른다. 기사 문학에 흠뻑 취한 그의 머릿속에는 동료와 공주, 용과 예언자, 마법의 숲과 전설의 무기만이 가득하다. 비루한 현실 따위 신경 쓸 가치도, 겨를도 없다. 이 쉰 살 먹은 방구석 촌뜨기는 로시난테라는 이름의 말도 타고 다닌다. 다만, 녀석은 근육질의 명마가 아닌 곧 쓰러질 듯 늙고 말랐다. 그의 뒤에는 종자까지 따라붙는다. 그는 농부 출신의 순진한 산초 판사(Panza). 하지만, 산초 또한 유명 기사가 되면 총독으로 만들어주겠다는 돈키호테의 제안에 솔깃한 마음이 크다.」
탁.
미겔 데 세르반테스가 펜을 내려놓았다. 음…. 이까지는 좋아. 그는 메모를 멈춘 후 혼잣말을 이어갔다. 그리고…. 돈키호테 필생의 꿈은 분명하게 할까? 정의를 이룩하는 영웅에 오르는 것. 그래. 그게 좋겠어. 물론, 남들은 볼품없는 이들 모습을 바보들의 행진으로만 보게끔 하자. 또 가장 중요한 것. 돈키호테는 무슨 일을 겪든 꿈을 향해 나아가게 할 거야. 그래. 우리네 인생과는 다르게 말이야. 세르반테스는 이 중얼거림을 끝으로 잠시 소설 구상을 멈췄다. 구부정했던 허리를 폈다. 젊은 시절 총을 맞은 가슴이 쑤셨다. 마비된 왼팔은 늘 그랬듯 눈치 없이 덜렁거렸다. 배가 고팠다. 저녁 시간이었다. 곧 음식이 들어올 터였다. 그래봤자 마른 찌꺼기같은 들어오겠지만, 여기서는 이조차도 소중했다.
1597년. 세르반테스는 스페인 세비야 인근의 감옥에 있었다.
그의 직전 직업은 세금 징수원이었다. 어느 날 뜬금없이 나랏돈을 빼돌려 썼다는 누명을 썼다. 그 결과가 지금 모습이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세르반테스가 이곳에서 할 수 있는 건 많지 않았다.
세르반테스는 지난 삶을 돌아봤다. 파란만장했던 시절이 스쳐 지나갔다. 그러고 보면 세상은 그를 한시도 가만히 두지 않았다. 날마다 고비였고, 매 순간이 위기였다. 그사이 꿈 많던 소년은 오십 줄에 닿은 기력 쇠한 중년이 돼버렸다. 삶은 매번 어긋날 수밖에 없는가. 이렇게 나이를 먹고도 그저 눈물겹고, 서글프고, 처연하고, 끝없이 아쉽기만 하다면 살아가는 이유는 무엇인가. 세르반테스는 생의 모순을 생각했다. 간절히 바랄수록 외려 멀어지는 세상살이의 비합리성을 고민했다. 그런데…. 만약 스스로를 부조리로 무장한 이가 인생의 부조리에 계속해 맞선다면 무슨 일이 생길까. 천착의 도착점이었다. 그가 답도 없는 고집불통 남자, 돈키호테를 상상하게 된 이유였다. 그나마 다행히도 옥 생활은 길지 않았다. 출소한 세르반테스가 가장 먼저 한 건 글쓰기였다. 간수에게 쪽지를 얻어 썼던 문장을 한데 모으는 일이었다. 그는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글을 엮고 다듬는 데만 몇 년을 쏟아부었다. 그리고 1605년, 이를 책으로 엮어 출판했다. 제목은 〈라만차의 기발한 신사 돈키호테(El ingenioso hidalgo don Quijote de la Mancha·돈키호테)〉였다. 이때 세르반테스의 나이는 쉰여덟이었다.
이 나뭇가지처럼 비쩍 마른 인간은 분명 보통은 아닌 것처럼 보인다.
그는 한껏 들뜬 얼굴로 책을 읽고 있다. 그것은 용사가 악당을 물리치고 공주를 구한다는 식의 기사 문학이다. 마구잡이로 널려있는 책 또한 그가 읽은, 혹은 곧 읽을 같은 종류일 것이다. 사실 그를 둘러싼 전사와 용, 공주와 도마뱀, 성직자와 정령 또한 글을 읽고 떠올린 상상일 터였다. 얼마나 많이 읽고, 얼마나 긴 세월 망상에 빠졌는지 온갖 드라마가 펼쳐져 있다. 그 꼴이 웃기고, 한심해보이는 한편 측은한 마음도 들게 한다. 이는 훗날 귀스타브 도레가 세르반테스의 이 책을 읽고 그린 삽화 중 한 점이다.
무려 이런 '기발한' 자가 기사의 꿈을 이루기 위해 길을 나선다.
범인(凡人)과 달리 예기치 못한 난관, 운명의 장난 같은 시련 따위 뻥뻥 걷어차고 전진할 게 분명하다. 그런데, 세르반테스가 그저 심심풀이로 만든 게 아닐까하는 생각까지 드는 이 괴짜는, 의외로 오랜 시간 사회에 진한 깨달음을 준다. 대체 어떻게…?
돈키호테 작가, 원래 군인이었다?
〈돈키호테〉 창시자인 세르반테스의 삶은 짐작할 수 있듯 쉽지 않았다.
눈앞에 신이 있다면 쫓아가 따져들고 싶을 만큼 여러 고초를 겪었다. 희망과 절망을 담은 컵으로 야바위를 할 때면 기가 막히게 절망만을 뽑아내는 행보를 거듭 보였다. 그래서였을까. 그는 장년쯤부터는 꿈을 흩트린 채 흘러가는 대로의 삶 위에서 살고 있었다.
세르반테스는 1547년 스페인 카스티야에서 출생했다.
아버지는 의사였다. 경제적 수완은 없는 자였다. 그는 빚을 감당하지 못했다. 결국 온 집안을 파산으로 몰았다. 세르반테스는 이 여파로 어릴 적부터 떠돌이처럼 살았다. 틈나는 대로 책은 읽었다. 하지만 세비야, 마드리드 등 유랑을 이어간 만큼 정규 교육은 받지 못했다.
이런 와중에도 세르반테스 그 나름대로는 삶을 개척하고자 고군분투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운명의 여신은 그가 그럴 때마다 꼴을 봐줄 수 없다는 양 가혹하게 굴었다. 결정적 순간마다 매번 고꾸라지게 만들었다.
세르반테스가 스스로 군복을 입었을 때도 그랬다.
세르반테스는 애국심, 그리고 부와 명예를 향한 열망을 안고 레판토 해전에도 직접 참전했다. 이는 1571년, 스페인과 베네치아 공화국 중심의 신성 동맹(기독교 동맹)이 오스만 제국 주축의 이슬람 세력을 격파한 전투였다. 지중해의 영향력을 걸고 붙은 만큼, 규모와 의의 모두 큰 혈전이었다. 동시대 유명 화가 파올로 베로네세가 신성 동맹의 승리에 〈레판토 해전의 알레고리〉와 같은 대작을 그릴 정도였다. 구름 위 기독교 천사와 성인(聖人)들은 치열한 교전 속 오직 신성 동맹 측에만 축복을 내릴 것처럼 보인다. 레판토 해전을 마치 위대한 성전처럼 표현한 것이다. 세르반테스는 이러한 대전에서 목숨 걸고 싸웠다. 나름 공도 세웠다. 그런 그는 전장을 뛰어다니는 동안 가슴에 총을 맞았다. 더 치명적인 건 왼손에 깊이 박힌 총알이었다. 가슴 상처는 치료할 수 있었다. 너덜너덜해진 왼손은 그러지 못했다. 평생 한쪽 손을 쓸 수 없는 처지에 놓였다. 전쟁 영웅이 되고자 한 꿈이 산산이 부서지는 순간이었다. 그는 후유증만 안고 퇴역했다. 이때가 1575년, 스물여덟 살 때였다.
군복을 벗은 삶도 쉽지 않았다.
민간인이 된 세르반테스는 고향으로 향하는 배에 올랐다. 아직 젊었다. 뭘 배우든, 새롭게 일을 벌이든 있는 힘껏 나설 생각이었다. 그가 탄 배는 엿새 만에 해적선의 습격을 받았다. 졸지에 포로로 붙잡혔다. 그렇게 알제리까지 와버렸다. 놈들은 세르반테스의 몸값을 비싸게 매겼다. 그의 가족은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세르반테스는 네 차례 탈출을 시도했다. 번번이 막혔다. 이를 딱하게 본 동포들이 돈을 대신 내주고서야 겨우 벗어날 수 있었다. 그사이 또 5년이 흘러가있었다. 더는 마냥 젊다고 할 수 없었다.
다시 조국 땅을 밟은 세르반테스가 잡은 업이 세금 징수원이었다.
그사이 소설 등 몇 권의 책을 썼다. 큰 반향을 일으키지는 못했다. 그래서 그는 이 무렵부터 단조로운 삶을 택한 것이었다. 일어설 때마다 어퍼컷을 맞은 탓인지, 아예 일어서는 법 자체를 잊은 채 살게 된 것이었다. 그런데 또 억울하게 징역형이라니…. 그는 생의 부조리에 서러움이 차오를 땐 감옥 창살을 잡은 채 짐승처럼 울었다. 이쯤부터 세르반테스는 갖은 곤경에 꿈을 꺾은 그 대신, 어떤 불가해의 사건에도 꿈만큼은 부여잡는 초인을 상상하기 시작했다. 돈키호테는, 알고보면 이처럼 깊고 깊은 수렁에서 퍼올려진 존재였다.
‘대박’ 베스트셀러가 되다
"쯧쯧. 저 사람 말일세. 미쳤거나, 그게 아니면 〈돈키호테〉를 읽는 모양이야."
당시 스페인 왕이었던 펠리페 3세는 시찰 중 길에서 실성한 듯 웃어대는 사내를 보고 이렇게 말했다.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는 이처럼 국가 수장이 알 만큼 흥행했다.
책은 무엇보다도 재미있었다.
책에서는 돈키호테의 다소 어이없는 영웅담이 이어졌다. 가령 돈키호테는 갑자기 서른 명 넘는 거인이 보인다며 전투태세를 갖춘다. "산초야. 나는 저 악의 씨를 뽑아 없애버릴 것이다." 비장한 표정으로 그가 보고 있는 건… 빙글빙글 돌아가는 풍차였다. 돈키호테는 기어이 풍차로 돌진한다. 날갯죽지에 걷어차여 내동댕이쳐진 그는 크게 다친다. 그런가 하면, 또 정신을 못 차리고 이번에는 양 떼를 향해 적의 군대라며 달려든다. 양치기가 던진 돌에 어금니와 손가락, 갈비뼈까지 날아간 채 사실상 대(大)자로 뻗는다. "아이고, 주인님! 제가 뭐랬습니까!" 산초가 토로한다.
사람들은 이런 대목에서 요한 바티스트 츠베커의 〈돈키호테〉 같은 장면을 떠올렸다. 사명감에 찬 돈키호테와 만류하는 산초, 난데없는 습격에 돌팔매질하는 양치기와 봉변 맞은 양들…. "얼 빠진 기사의 기가 막힌 행보구먼!" 모두가 배를 잡고 킬킬거렸다.
그러나 책의 쓸모는 웃긴 소설에서 그치지 않았다. 독자들은 읽을수록 씁쓸한 뒷맛을 느낄 수 있었다. 돈키호테는 확실히 미친 사람이었다. 하지만 죽을 만큼 두들겨 맞고도, 조롱이란 조롱은 다 당하고도 꿈만큼은 포기하지 않았다. 가령 풍차에 걷어차인 돈키호테가 "마법사 놈이 거인을 풍차로 둔갑시킨 게 맞다!"며 꺾이지 않는 모습, 양치기의 돌팔매에 얻어맞은 그가 "내 영광을 시샘한 마법사가 또 적의 군대를 양 떼로 변장시킨 게 확실해!"라며 끝내 무너지지 않는 장면에는 유머 이상의 여운이 있었다. 사람들은 이 대목에서 자기 생을 곱씹었다. 언젠가부터 결기를 잊은, 잠깐의 큰 충격에 세상과 타협한 지난날을 비춰볼 수 있었다.
때마침 침울한 시대였다.
〈돈키호테〉가 한창 쓰이고 있을 무렵, 스페인은 '황금시대'로 불린 전성기를 거쳐 조금씩 기울고 있었다. 결정적 계기는 1588년에 발발한 칼레 해전이었다. 펠리페 3세의 아버지 펠리페 2세의 스페인, '해적 여왕' 엘리자베스 1세의 잉글랜드 사이 벌어진 결전이었다. 해양 패권을 꽉 잡았던 스페인의 '무적함대(Armada Invencible)'가 허망하게 무너진 사건이었다. 스페인 국민은 예상하지 못한 비보에 충격을 받았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경제도 계속 불안정해졌다. 펠리페 2세 치세에만 4차례에 걸쳐 국가 파산 선고가 있었을 정도였다. 여기에 세기말 시기 특유의 칙칙한 감성도 더해졌다. 그동안 왕은 바뀌었지만, 시간이 더 흐른들 옛 영광은 찾아오지 않을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모두가 한숨만 내쉬고 있었다. 얻어터질지언정 물러서지 않는 돈키호테의 천방지축 모험담은 그런 이들에게 신선한 자극이 될 만했다. 매일 나가떨어지면서도 "낫지 않는 상처는 없다"고 하고, 산초에게는 "쉽게 임금이 되면 값어치가 없는 법이다"라고 다독이는 데서 사람들은 뜻밖의 위로도 받았다.
"(가문은)중요하지 않다. (어떤 가문이든)기사가 될 수 있다. 사람은 자기 노력으로 자기 혈통을 만드는 법이야."
질곡의 삶을 산 세르반테스는 돈키호테를 통해 이런 말도 했다. 이것은 그 시절 잠언 같은 문장이었다. 이처럼 재미있고, 여운 남고, 위로와 생각할 거리도 함께 건네는 책. 팔리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세르반테스의 삶도 이 덕에 비로소 꽃필 수 있는가 했지만….
가짜 속편까지 등장
세르반테스는 유명해졌지만, 그의 인생은 여전히 쉽지 않았다.
세르반테스는 〈돈키호테〉를 쓸 당시 여러 곳에 빚을 지고 있었다. 그는 급한 불부터 끄기 위해 〈돈키호테〉의 저작권을 출판사에 일찌감치 넘겼다. 이렇게나 흥행할 줄 모르고 내린 결정이었다. 〈돈키호테〉는 당시 인쇄술로는 감당하지 못할 만큼 빠른 속도로 팔렸다. 1605년 출간 후 얼마 안 돼 팔린 양만 3만부였다고 한다. 하지만 세르반테스는 여전히 곤궁했다. 계약은 계약이었다. 그 어떤 후광도 제대로 누릴 수 없었다. 외려 출판 직후에는 그와 가족 모두 웬 살인 사건에 휘말려 또 체포나 된 기록만 있다. 이쯤 되면 고난도 경이로운 수준이다. 이런 불운의 굴레 속 말년의 세르반테스를 가장 열받게 만든 일은 따로 있었다. 가짜 작가의 등장이었다. 〈돈키호테〉가 세상 빛을 보고 몇 년 후, 세르반테스에게 한 친구가 찾아왔다. 세르반테스는 그가 건넨 책을 보고 분노했다. 그것은 그가 쓴 적도 없는 〈돈키호테 2부〉였다. 자기도 모르는 새 속편이 나와 팔리고 있는 것이었다.
세르반테스는 남은 생을 진짜 〈돈키호테 2부〉를 쓰는 데 쏟기로 마음먹었다.
그만의 사유, 그만이 쓸 수 있는 문장은 그사이 또 겪은 여러 불행 덕에 더욱 농익어 있었다. 1615년, 세르반테스는 〈돈키호테 2부〉에서 또 한 번 꿈 이야기를 했다. 돈키호테는 여전히 무모하게, 늘 그랬듯 우스꽝스럽게 모험을 이어간다. 그런 돈키호테를 보다 못한 고향 마을의 학자 삼손 카라스코가 그를 데려가려고 한다. 삼손은 '백월(은빛 달)의 기사'로 위장해 돈키호테와 맞붙는다. 자기가 이기면 군말 없이 고향에 돌아가라고 명령한다. 깨뜨릴 수 없는 맹세를 건 기사들 사이 결투 문화를 이용한 것이다. 삼손은 우여곡절 끝에 돈키호테를 이긴다. 돈키호테는 어쩔 수 없이 고향으로 돌아간다. 그런데, 이 대목부터 놀라운 일이 벌어진다. "패배한 돈키호테는 모든 사물을 더 이성적으로 바라보곤 했다"는 책 속 문장처럼, 돈키호테는 순식간에 평범한 모습을 되찾는다. 그는 "나는 돈키호테가 아니라 예전 '선한 자'로 불린 알론소 키하노"라고 말하는가 하면, 심지어 "한때는 광인이었지만, 이제 제정신을 찾았다"는 선언까지 한다. 그리고… 돈키호테, 다시 알론소가 된 그는 곧 죽는다. "다시 모험을 떠나자"는 산초의 호소를 뒤로한 채 시름시름 앓다 생을 마감한다.
돈키호테는 로버트 스머크의 그림 〈두 번째 출격을 끝낸 후 집에 있는 돈키호테〉 같은 모습이었을 것이다. 화폭 속 묘사처럼 장비 따위 바닥에 내려놓은 채 바람 빠진 풍선처럼 있었을 터였다. 오노레 도미에의 〈돈키호테의 철야〉 속 자태 같은, 그런 꼿꼿한 자세의 돈키호테는 더는 볼 수 없었으리라.
세르반테스는 꿈만 좇던 혼미한 미치광이의 응당한 최후를 그린 걸까. 사실은 정반대였다.
돈키호테는 꿈을 버리자마자 생기를 잃는다. 그렇게 걷어차이고도 팔팔했던 몸과 마음 모두 급격하게 약해진다. 이상을 향해 나아갈 땐 불사신 같던 그가 허무하리만큼 쉽게 세상을 등진다. 그리고 결정적 대목도 있었다. 정확히는, 돈키호테는 죽지 않았다. 죽은 건 현실로 돌아온 알론소일 뿐이었다. 즉 부조리와 마주하고도 꿈을 꾸는 자는 죽지 않고, 부조리에 굴복해 꿈을 버린 자는 죽는다는 식의 결말이었다. 세르반테스는 이 책을 읽는 모든 이가 계속 꿈을 품기를 바랐다. 당장 자기 삶도 그랬듯 위기는 늘 찾아오지만, 그럼에도 당신들은 이상을 버리지 않기를 기원했다. 이는 정신 차려보니 죽을 날만 기다리게 된 예순여덟 살 작가의 깨우침이기도 했다. 〈돈키호테 2부〉는 전작 이상의 호평을 받았다. 철학과 작품성 등 모든 면에서 위작을 압살했다.
파란만장한 역사를 두른 세르반테스는 마드리드의 수도원에서 남은 생을 보냈다.
수도사가 돼 신앙생활에 힘 쏟았다고 한다. 결혼은 했지만 아내 사이에 자녀는 없었다. 혼전에 유부녀와의 관계에서 얻은 딸이 유일한 혈육으로 알려져 있다. 세르반테스는 〈돈키호테 2부〉를 펴낸 다음 해인 1616년, 지병 악화로 숨을 거두었다. 예순아홉 살 나이였다. "나는 야망과 위선, 선물 받은 삶으로부터 도망치고 있소. 가장 좁고 어려운 길로 나만의 영광을 찾고 있소. 이게 어리석고 바보 같은가?" 세르반테스는 돈키호테의 입을 빌려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우리는 여기에 대고 대답할 수 있을 것이다. 아니라고. 그것은 실로 위대한 일이라고.
귀스타브 도레(Gustave Dore·1832~1883)동시대 가장 유명했던 프랑스의 천재 삽화가. 고작 열다섯 살 때 그린 삽화가 책에 찍혀 정식으로 출간될 정도였다. 열여섯 살에는 이미 프랑스에서 가장 돈을 많이 버는 삽화가가 돼 있었다. 미술 교육을 전혀 받지 않은 도레는 외려 자기만의 개성을 살려 독보적인 입지를 다졌다. 덕분에 미겔 데 세르반테스 말고도 단테 알리기에리, 존 밀턴, 오노레 드 발자크, 에드거 앨런 포 등의 유명 작품에 삽화 작업을 할 수 있었다. 전성기 무렵 그의 작품이 들어간 책이 여드레마다 한 권씩 나왔다고 한다.
파올로 베로네세(Paolo Veronese·1528~1588)티치아노, 틴토레토와 함께 후기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화가. 이탈리아 베로나에서 출생해 베네치아에서 죽은 그는 지금도 이른바 '위대한 베네치아 화가'로 칭해진다. 그는 웅장하고 현란한 분위기 속 광경을 딱 과하지 않을 만큼의 선을 지키며 표현할 수 있는 거장이었다. 극단적인 원근법 등 감상자의 몰입도를 높일 방법도 알고 있었다. 안니발레 카라치, 페테르 파울 루벤스, 안토니 반 다이크 등이 영향을 받았다. 대표작은 〈가나의 결혼식〉 등.
〈참고 자료〉
돈키호테, 미겔 데 세르반테스, 시공사
돈키호테, 미겔 데 세르반테스, 열린책들
돈키호테의 말, 안영옥, 열린책들
돈키호테를 읽다, 안영옥, 열린책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