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럴드경제=정진영 기자] 펑크(Punk)는 태생부터 내부 고발자 정신으로 충만했던 록 음악의 한 장르다. 70년대 말 영국의 밴드 섹스 피스톨즈(Sex Pistols)로 대표되는 펑크는 그 이전에 록 음악에 정립된 고도의 양식미를 일거에 쓸어 벌이며 록의 근본을 되물었다. 90년대에 헤비메탈을 전복시킨 너바나(Nirvana)의 얼터너티브 록도 펑크와 끈이 닿아있었다. 돌이켜보면 펑크는 변방에 잠복해 있다가 어느 순간 튀어나와 모든 것을 뒤엎은 뒤 아무렇지도 않은 듯 도로 변방으로 돌아가는 일종의 문화운동에 가까웠다.
록밴드들이 오디션 프로그램에 얼굴을 들이밀 수밖에 없게 된 현실을 통렬하게 고발하는 펑크록 밴드 옐로우 몬스터즈의 정규 3집 ‘레드 플래그(Red Flag)’ 역시 펑크의 문화운동적 성격을 계승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이 앨범은 고발에서 그치지 않고 탄탄한 음악으로 무장했다는 점에서 더욱 설득력을 가진다. 밴드의 멤버 이용원(기타ㆍ보컬)ㆍ한진영(베이스)ㆍ최재혁(드럼)을 서울 서교동 연습실에서 만나 앨범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이용원은 “앨범 타이틀이 의미하는 ‘붉은 깃발’은 대한민국의 사회ㆍ문화ㆍ정치 등에서 불거지는 부조리에 대한 경고의 의미를 담고 있다”며 “특히 우후죽순 등장한 오디션 프로그램들이 한국 록의 자생력을 거세시키고 있다”고 주장했다.
앨범에 담긴 메시지는 격하다. ‘썩은 막걸리’의 “밴드들도 PD에게 몸 팔아. PR을 잘 해야만 넌 톱밴드(Top Band)” 같은 가사와 ‘아이 돈트 워너 비 위드 유(I Don’t Wanna Be With You)’의 “개처럼 살아도 늑대 행세를 해. 허세에 취한 너 오디션 스타. 하루살인 걸” 같은 가사에 담긴 독설의 강도는 최근 ‘디스전’으로 화제를 모았던 래퍼들의 랩 이상이다.
한진영은 “지금까지 방송된 모든 오디션 프로그램으로부터 섭외를 받았고 심지어 ‘나는 가수다’의 섭외도 있었지만 거절했다”며 “자신의 곡이 아닌 다른 아티스트의 곡을 연주하는 것은 밴드에게 수치스러운 일이고, 또 심사위원들 앞에서 떨며 평가를 받고 싶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용원은 “오디션 프로그램에 출연하는 특정 밴드를 향한 독설이 아니라 밴드들이 그런 프로그램에 나설 수밖에 내모는 획일적인 음악 시장을 향한 독설”이라며 “밴드 음악이 오디션 프로그램 덕분에 활성화됐는지도 의문”이라고 덧붙였다.
데뷔 4년차 ‘신인’ 밴드의 독설이지만 무게감을 가지는 이유는 멤버 개개인의 이력 때문이다. 이용원은 밴드 검엑스, 한진영은 마이앤트메리, 최재혁은 델리스파이스 출신으로 이미 90년대부터 한국 록의 밑바닥을 지켜온 터줏대감들이다. 또한 옐로우 몬스터즈는 지난 2010년 데뷔 이래 발매한 모든 앨범(정규앨범 2장ㆍ미니앨범 1장)을 한국대중음악상 후보에 올려놓으며 음악적인 역량을 과시한 바 있다.
한진영은 “가까운 일본뿐만 아니라 동남아만하더라도 밴드 음악이 존중을 받고 있는데 한국에선 연주자를 반주자로 낮게 여기는 경향이 크다”며 “한국이 밴드로 살아가기 어려운 음악시장이기도 하지만, 밴드들 역시 조금만 잘 나간다 싶으면 연예인을 흉내 낸다는 점에서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최재혁은 “누군가가 시키는 대로 연주하는 것은 록밴드의 자세가 아니다”라며 “다소 격한 가사는 우리는 결코 그 길을 걸어가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이기도 하다”고 강조했다.
총 12곡을 담은 이번 앨범은 소주제 4개에 3곡을 묶은 형태로 구성돼 있다. 일종의 콘셉트 앨범 형식을 취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번 앨범은 미국의 펑크록밴드 그린데이(Greenday)의 명반 ‘아메리칸 이디엇(American Idiot)’을 연상케 한다. 각각의 소주제에 최적화된 수록곡들은 앨범의 완급과 흐름을 조절하며 트랙을 제멋대로 오가는 일을 방지한다. 특히 앨범의 시작과 끝에서 6분 이상의 길이로 청자를 압도하는 ‘레드 플래그(Red Flag)’와 ‘앤드(AND)’의 수미상관은 펑크에선 좀처럼 보기 힘든 양식미를 이룬다. 여기에 옐로우 몬스터즈 특유의 유려한 멜로디 라인은 쉽게 강렬한 연주 속에서도 여전히 대중친화적이다. 또한 이들은 대부분의 연주를 아날로그 방식인 릴테이프로 녹음함으로써 연주의 자연스러운 질감을 살리는 데 주력했다. 여타 밴드들과는 달리 마스터링 작업을 국내 엔지니어와 함께 한 것도 이채롭다.
이용원은 “녹음 전부터 베이스와 드럼의 톤을 잡는데 신경을 많이 쓰는 등 양질의 사운드를 담아내기 위해 전작보다 심혈을 기울였다”며 “외국에 마스터링을 맡겨본 일이 있지만 소통이 쉽지 않아 애로 사항이 많았다. 가까이에서 소통할 수 있는 국내 엔지니어와 함께 마음을 열고 작업하는 것이 오히려 더 좋은 결과물을 가져올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소신을 드러냈다. 한진영은 “디지털 장비를 되도록 배제하고 드럼과 보컬 녹음을 모두 릴테이프로 받아내는 등 빈티지한 맛을 살리기 위해 노력했다”며 “이번 앨범은 좋은 오디오에서 CD로 듣는 것을 추천한다. MP3로 들을 때와 질감 면에서 많은 차이를 느낄 수 있을 것”이라고 조언했다.
옐로우 몬스터즈는 인디계에선 보기 드물게 독립 레이블(올드레코즈)를 설립해 활동 중이다. 또한 이들은 최근 타루와 로지피피 등 싱어송라이터들의 앨범들을 제작하며 본격적으로 제작에도 뛰어들었다. 다음달 8일엔 SM엔터테인먼트 소속으로 활동했던 밴드 배드보이서클 출신 보컬 일권의 앨범이 발매될 예정이다.
이용원 “독립 레이블로 활동하면 신경 쓸 것이 많아진다는 단점이 있지만, 원하는 대로 음악을 할 수 있다는 장점이 더 크다”며 “외부의 간섭 없이 음악을 하고 싶다면 가시밭길이겠지만 독립 레이블을 설립해 활동하는 것도 대안 중 하나”라고 말했다.
옐로우 몬스터즈는 27일 서울을 시작으로 대구ㆍ부산ㆍ광주ㆍ천안ㆍ전주를 도는 앨범 발매 기념 전국투어를 벌일 예정이다. 다음달 9ㆍ10일엔 EBS ‘스페이스 공감’, 22일엔 MBC ‘문화콘서트 난장’ 무대에도 선다.
옐로우 몬스터즈는 “늘 그래왔듯이 앞으로도 항상 무대 위에서 연주를 하고 있을 것”이라며 “기회가 된다면 일본의 ‘에어잼(Air Jam)’ 페스티벌 무대에 꼭 서보고 싶다”고 바람을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