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럴드경제=정진영 기자] 고요한 공간에 안개처럼 깔린 신시사이저 사운드를 가르고 거문고가 울린다. 이어 피리와 해금 소리가 뒤따르며 고요한 공간을 깨운다. 그 위로 슬며시 베이스와 드럼의 리듬 연주가 포개지고 강렬한 기타 리프가 뒤섞인다. 4분에 걸쳐 서로 다른 세계의 악기들은 서로 다른 울림으로 상호보완하며 새로운 울림을 만들어냈다. 고요와 신명이 서로 교통하는 순간이다.
밴드 산울림이 지난 1978년에 발표한 2집의 수록곡 ‘내 마음에 주단을 깔고’는 3분여 파격적인 전주와 사이키델릭 사운드로 실험적인 자세의 극치를 보여줬던 한국 록 음악사의 명곡이다. 시나위, 강산에, 자우림, 톡식 등 내로라하는 후배 뮤지션들이 앞 다퉈 이 곡을 자신 만의 방식으로 재해석해 선보였던 이유다.
산울림의 음악적 중심이었던 김창완이 결성한 김창완밴드가 정규 3집 ‘용서’를 발표했다. 김창완밴드는 앨범의 첫 트랙에 국악기를 바탕으로 만들어 낸 실험적인 음악으로 월드뮤직계에서 각광받고 있는 후배 잠비나이와 함께 ‘내 마음에 주단을 깔고’를 다시 한 번 연주했다. 세상에 나올 때부터 가장 실험적이었던 음악은 더욱 실험적인 음악으로 변모했다. 지난 5일 오후 서울 서교동 KT&G상상마당에서 앨범 쇼케이스를 가진 김창완밴드는 “산울림으로 활동했던 시절에도 아리랑 선율을 도입하는 등 다양한 시도를 했지만 한국 록의 전범을 보이는데 미흡했다”며 “이번 앨범은 새로운 시도를 통해 한국 록의 정체성에 대한 답을 조금이나마 찾은 작품이라고 생각한다”고 자신감을 드러냈다.
김창완은 산울림으로 함께 했던 3형제 중 막내 김창익이 지난 2008년에 세상을 떠난 뒤 김창완밴드를 결성해 음악활동을 이어왔다. 그러나 김창완밴드가 지난 2012년에 산울림의 대표곡들을 리메이크해 발표한 앨범 ‘분홍굴착기’에서도 느낄 수 있듯이, 산울림의 그림자는 쉽게 지워지지 않았다. 김창완은 산울림의 그림자를 정면돌파함과 동시에 창조적으로 계승하고, 이와 더불어 김창완밴드만의 색깔을 만드는 방식을 택했다. 앨범 첫 트랙에 배치된 ‘내 마음에 주단을 깔고’는 이 같은 김창완의 의도를 가늠하게 만든다. 김창완은 “이번 앨범은 확실한 김창완밴드의 앨범”이라는 말로 앨범의 성격을 요약했다.
한국 록의 정체성에 대한 정의를 묻는 기자의 질문에 김창완은 “이번 앨범을 통해 시도한 국악과 록의 결합은 한국 록의 정체성에 대한 강박의 결과물이 아니다”며 “한국인이 연주하는 록이 바로 한국 록”이라고 단언했다.
이번 앨범에는 타이틀곡 ‘중2’를 비롯해 지난해 디지털 싱글로 발표된 ‘E메이져를 치면’과 ‘괴로워’, ‘노란리본’, ‘아직은’, ‘용서’, ‘무덤나비’ ‘아리랑’ 등 9곡이 수록돼 있다. 이번 앨범은 원테이크(한 번에 끊임없이 녹음하는 방식)로 녹음을 진행해 자연스러움을 강조한 것이 특징이다. 영국 메트로폴리스 스튜디오의 하우스 엔지니어 출신 아드리안 홀(Adrian Hall)이 녹음에 참여해 사운드의 완성도를 높였다.
김창완은 “원테이크로 녹음을 진행한 이유는 음악적인 호소력을 갖기 위해 자연스러운 순간을 포착하길 원했기 때문”이라며 “엔지니어와 언어로 소통하는 일은 어려웠지만 음악만으로도 모든 소통이 가능해 놀라웠고, 국악기와 밴드의 소리가 조화하는 지점을 정확하게 인식해 소리로 뽑아내는 엔지니어의 역량에 감탄했다”고 회상했다.
수록곡들의 제목에서도 감지할 수 있듯이, 이번 앨범에는 음악적 실험 외에도 중학교 2학년 또래 사춘기 청소년들이 흔히 겪는 유아독존적인 심리를 빗댄 신조어 ‘중2병’을 통해 소통의 어려움과 화해의 자세를 노래한 ‘중2’, 세월호 참사로 희생된 학생들에 대한 안타까움을 담담한 어쿠스틱 사운드로 담아낸 ‘노란리본’ 등 한국 사회를 향한 비판적 시선이 공존한다.
김창완은 “가사를 쓰고 중학교 2학년 학생에게 보여주니 ‘중2는 이렇지 않다’고 말해 놀랐다”며 “고민 끝에 가사를 바꿀까 했는데 어른들의 오해를 그대로 전달하기로 했다. ‘정말 모르겠다’고 솔직하게 고백하는 것도 또 다른 소통의 방식이 아닐까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전했다.
나이 든 남자의 목소리를 닮은 배선용의 트럼펫 선율 위에 실린 ‘용서’의 “힘이 들면 말을 하지 왜 그랬어”와 같은 가사와, 김창완이 ‘무덤나비’에서 읊조리는 내레이션 “수천 년이 걸려도 수만 년이 걸려도 하나의 묘도 거르지 않고 이세상 모든 묘를 찾아갈 거예요”은 애이불비(哀而不悲)의 정서처럼 처연하다. 단순하고도 질박한 코드 진행을 따라 이별의 후유증을 토로하는 ‘E메이져를 치면’은 담담해서 더욱 절박하게 느껴지고, 내레이션과 몽환적인 연주만으로 이뤄진 독특한 구성에선 굳어진 틀에 안주하지 않으려는 김창완밴드의 자세를 엿볼 수 있다.
김창완은 “나이에 관계없이 지금까지 음악을 해오면서 앨범을 낼 때마다 소구점은 늘 ‘청춘’이었는데, 이번 앨범에는 내 나이에 맞는 옷을 입어야겠다는 자세로 만든 첫 작품”이라며 “‘무엇을 부르나’보다 ‘왜 부르나’를 생각하며 추억에 머물지 않고 현재진행형의 밴드이고 싶다”고 바람을 드러냈다.
한편, 김창완밴드는 오는 12~14일에는 서울 대학로 DCF대명문화공장, 3월 21일과 28일 서울 홍대와 춘천 KT&G 상상마당에서 콘서트를 벌일 계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