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대 한지 장인 모셔와 서운암에서 작업
작품 담아 남기면 100년 후 사람과 소통
예술가가 경지에 이르는 길에는 타협이란 없다. 실용을 위한 것이 아니기에 모든 과정은 ‘적당히’라는 말과 도통 어울리지 않는다.
금니사경(金泥寫經·금가루로 불교 경전을 옮겨 적은 작품)을 대하는 성파스님의 자세는 유비가 제갈공명을 모시는 것처럼 진지하다. 이번 ‘성파 선예(禪藝) 특별전-COSMOS(코스모스)’에 전시된 금니사경 작품은 먹을 먹인 한지이지만, 전시되지 않은 그의 다른 금니사경은 고려감지 위에 올려졌다.
스님은 “처음엔 먹지에 사경을 했는데 고려감지가 있다는 말을 들었다. 알아보니 쪽물을 들인 것이라고 하더라”며 “감지를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해 쪽물을 백방으로 찾아서 염색하는 데에는 성공했다. 그런데 종이가 쳐지는 문제가 생기더라”고 회고했다.
시중에 나와있는 고급 종이란 종이는 모두 사다 시도해봤지만 문제는 여전했다. 그래서 스님은 직접 한지를 만들기로 했다. 이에 지금으로부터 30년 전인 50대의 스님은 전국 팔도를 돌아다니며 종이 명인을 찾아 헤맸다. 그러다 당시 70세가 넘는 노장을 만났다.
“그분한테 옛날 종이를 만들 수 있느냐고 물으니까, ‘알긴 아는데 뜰 기운이 없다’고 하더라. 그래서 그분을 초청해서 함께 통도사 서운암에서 3년간 한지를 떴다. 그렇게 해서 옛날 종이를 뜨는 방법을 익혔다.”
이 정도면 ‘비공식’ 한지 제조 인간문화재로 불려도 손색이 없을 정도다. 심지어 한지를 향한 스님의 열정은 현재진행형이다. 그는 “앞으로도 한지 작업을 더 해볼 생각이다. 닥나무밭도 많이 만들어놨다. 올해에만 9000평 되는 닥밭을 조성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더 많은 한지 장인의 명맥이 이어지지 않는 데 대해 안타까움을 드러냈다. 한지 제조에 인건비와 제작비가 너무 많이 들어 새롭게 진입하려는 사람이 뚝 끊겼기 때문이다. 비싸게 팔 수 있다면 모르겠지만, 수요가 그만큼 받쳐주질 못해 높은 가격을 유지하기도 어렵다.
스님이 예술에 혼을 담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는 어떤 글과 책보다도 그림 예술을 더 소중히 여긴다. “그림 예술은 세계 공통어라고 얘기한다. 말이 다른 민족도 그림은 ‘본다’기보다도 독화(讀畵), 즉 그림을 ‘읽는’다. 독화 방법을 알면 서로 말이 다 통하게 돼 있다. 내가 이 시대의 많은 이야기를 이런 작품에 담아서 남기면 나를 못 만나 본 사람도, 100~200년 후의 사람과도 대화가 될 수 있다. 나 역시 옛 성현들과 부처님·예수님,·공자님 말씀을 (그림으로 대화하는 것처럼) 만나는 것처럼 말이다.”
스님은 K-미술의 세계화에도 관심을 보였다. 스님은 “세계에서 우리나라 문화가 여러 방면으로 앞서나가고 있는데 미술계의 한류는 조금 부족한 것 같다”며 “주제넘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나도 미술 한류를 만들어가는데 앞장서야겠다는 결심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이민경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