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카 이, 리움미술관서 아시아 첫 개인전
인간·미생물 관계 고찰…실험실 같은 전시장
[헤럴드경제=이정아 기자] 우리 몸속에는 눈으로 볼 수 없을 정도로 작은 미생물이 수조 개나 존재한다. 대부분은 장 속에 산다. 음식을 소화하고, 면역 시스템을 강화하고, 심지어 비타민을 생성하는 데 도움을 준다. 우리가 미처 인지하지 못하고 있을 뿐, 미생물은 반드시 필요한 일을 지금 이 순간에도 묵묵히 해내고 있다.
인간과 이런 작은 미생물과의 관계에 주목해 인간 중심주의를 무너뜨리는 작가가 있다. 바로 한국계 미국인 아니카 이(53)다. 그는 작품마다 집요하게 질문한다. 인간과 비인간인 생명체와의 경계는 과연 어디까지인가. 부패도 예술이 될 수 있는가. 진화는 어디로 향하는가. 예술은 작가가 죽은 후에도 계속될 수 있는가. 이러한 아니카의 작품 세계는 우리 인간이 넓은 생태계의 일부라는 사실을 인식하게 하는 데 목표를 둔 것처럼 보인다.
작가의 철학적 고뇌가 담긴 작품을 만날 수 있는 전시가 서울 용산구 리움미술관에서 열렸다. 아니카의 아시아 첫 개인전이다. 냄새, 박테리아, 튀긴 꽃과 같은 재료를 사용한 작업으로 이름을 알린 그는 최근 들어 기계, 균류, 해조류 등 이른바 비인간으로 분류되는 개체를 탐구해 작품에 결합하고 있다. 인간이 그 자체로 독립된 생명체가 아니라 미생물, 기계, 환경 등과 상호 의존하는 존재라고 본 것이다.
이는 그가 작업에 대해 “인간은 미생물의 공동 주택”이라거나 “미생물은 우리 안의 숨겨진 동반자”라고 표현하는 이유와 맞닿아 있다. 전시장에서 만난 그는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는 그야말로 알 수 없고 불명확한 것들로 가득 차 있다”고 말했다.
전시장은 흡사 생명과학 실험실과 닮았다. 거울 형태의 원통에서는 유전자 조작으로 해파리나 산호와 같은 형광 단백질을 발현하는 미생물이 자란다. 폴리염화비닐(PVC)로 만든 돔 구조물 내부에서는 효모, 곰팡이, 박테리아가 발효된다. 그렇게 관객은 미생물과 같은 살아있는 생명체가 시간이 흐르면서 작품의 일부로 작동하는 광경을 마주하게 된다. 아니카는 “작품이 단순한 시각적 아름다움을 넘어서서, 살아있고 변화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창조의 주체가 인간이 아닌 AI(인공지능)가 되기도 한다. 작가는 자신의 창작 프로세스를 AI가 이어갈 수 있도록 시스템을 만들었다. 그가 ‘디지털 쌍둥이’라고 부르는 개념이다. 이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작품이 신작 ‘산호 가지는 달빛을 길어 올린다’(2024)다.
작가는 자신이 죽은 뒤에도 그의 예술이 살아 숨 쉬며 계속될 수 있을지 실험하고자 했다. AI는 아니카의 축적된 작업 데이터를 기반으로 알고리즘을 훈련받았다. 이 알고리즘은 아니카의 스타일, 주제, 미학 등을 학습한 뒤 새로운 예술 작품을 만들어낸다. 예술이 인간의 개입 없이도 자율적으로 발전할 수 있는지 탐구하는 과정이다. 작품 제목에서 언급된 ‘산호’는 자연적 요소를, ‘달빛’은 신비로운 에너지를 상징한다. 이 둘이 결합은 자연과 기술의 융합을 의미하며, 이는 아니카의 대규모 프로젝트 ‘공(空)’에 포함된 첫 작품이다. 아니카는 “창조성을 야기할 수 있는 다양한 도구를 융합하는 것이 제 목표”라고 말했다.
아니카는 “기술도 자연 밖에서 존재하지 않는다. 같은 맥락에서 AI도 이 세계 밖에 있는 것이 아니다”며 “궁극적으로는 이 모든 것들이 한데 어우러진 체계 속에서 우리가 살아가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구겐하임 미술관 휴고보스상(2016년)을 수상한 그는 베니스 비엔날레(2019년) 본전시 작가로 선정된 바 있다. 현대 커미션 작가로 선정돼 테이트모던 터바인홀에서 대규모 신작(2021년)을 선보이기도 했다.
전시는 12월 29일까지. 관람료는 성인 기준 1만2000원.